![](https://t1.daumcdn.net/cfile/cafe/196A0A144C58B0022A)
광주 mbc에서 5월에 내놓는 기획다큐라오.
올해 37주년 기획은 발포명령자를 찾으려는 내용이었다오. 이미 동사방에 올라와 있소.
쇗은 연관동영상으로 뜬 작년 기획을 가지고 왔다오.
80년 광주를 알리려고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오.
그동안 518이라고 하면 80년의 그 열흘을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광주 밖에서 광주를 알리려 노력한 분들이 잊혀져 가고 있다는 걸
쇗도 잘 모르고 있었소.
그런 의미에서 이번 518 기념사에서 문대통령님이 짚어 말씀해 주신 게 더욱 소중하구려.
1.
76년 서강대에 입학하고 농촌활동가가 되겠다던 청년은
사람이 편해지면 점점 더 편해지고 싶어진다고
누나가 사준 양복도 입지 않았소.
누나가 마지막으로 동생을 본 건 80년 5월 17일 광주로 떠나는 길이었소.
광주항쟁을 알고 간 건 아니었소.
함평에서 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을 했던 것 3주기 기념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광주가 고립될테니 너는 나가서 이 상황을 알리라고 하자 청년은 빠져나갔다가
5월 26일에 산을 넘고 넘어 어렵게 돌아오오.
도청에 남을 것이냐. 이곳을 나가서 이 현장을 역사에 증언할 것이냐 선택을 해야 했지라.
후자를 선택한 청년은 다시 서울로 가오.
서울로 돌아온 청년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에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 했고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전단지도 인쇄하러 6층으로 올라가오.
그러고 있던 중 계엄군이 들이닥쳐 구석으로 몰리다 전단지를 뿌리며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demo.or.kr%2Fimages%2Fpatriot%2Ffile_1987061046202.jpg)
2.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지 않은 6월 9일 한 청년이 이화여대 앞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했소.
그 청년은 부산에서 태어났는데 가난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를 따라 미아리에 살다가
도시미관 정리계획이라는 빈민촌 철거 때문에 성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노동자로 살았던 사람이오.
청년은 기독교 신앙이 있었고 성남의 주민교회에 다니고 있었소.
야학을 하며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었지라.
518직후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청년은 믿을 수가 없었어서인지 당신들은 날조 선동을 하고 있다고 외쳤다 하오.
직접 가서 보라는 말에 정말로 광주로 내려간 청년은 그 참상을 목격하고 올라오오.
밤새워 전단지를 만들어서 종로서적같은데 뿌리고 다녔다는 청년은
그러다 신촌 사거리에서 뒤를 밟는 형사들을 눈치채고는
분신하게 되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읍니다.
라는 성명서를 남기셨소.
김종태 (1958년 6월 7일 ~ 1980년 6월 14일)
3.
518 일주기를 맞아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광주 진상규명을 위해
침묵시위가 진행중이었소.
그 순간 도서관 4층에서 누군가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세번 외치고 투신하오.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그 청년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오.
같은 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연락을 받은 직후
데모를 하다 잡혀갔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오만
구남매의 막내였던 청년은 그렇게 가버렸소.
그 누나는 서울지법 부장판사였고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을 맡았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알기 때문에 세월호 가족 편에 서고 싶었다고 하오.
사회의 벽을 느낄 때마다 동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보신다는구려.
김태훈 (1959년 4월 13일 ~ 1981년 5월 27일 )
4.
이듬해 5월 518 2주기를 맞아 서울대생 4명이 시국선언문을 쓰고 시위를 준비하오.
그렇지만 비밀이 어디서 샜는지 그들은 모두 붙잡혀 징역 1년, 1년 6개월을 선고받소
시위는 하지도 않았는데, 집시법으로도 잡아넣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리 된 거지라.
잡혀들어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4명 중 3명이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오.
사회학과 김학묵씨는 1년 6개월 복역하고 출소 해서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하다
1986년 결국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소.
우울증에 시달리던 국문과 차호정씨는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연수를 받던 도중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마오.
사회학과 고광재씨는 학묵씨의 죽음 후 충격을 받은 탓인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하는구려.
철학과 4학년이었던 안재훈씨만이 가까스로 연락이 되어 다큐에 나와 증언해 주시오.
광주는 말 그대로 학창시절을 지배한 운명이었다고요.
5.
한 젊은이는 회계사 1,2차 시험을 붙고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소.
예비군 프로그램에는 전두환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분을 삭이지 못했던 젊은이는 갑자기 일어나오.
전두환 사진액자를 내동댕이치고 짓밟으며광주시민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외치오.
헌병들에게 맞으며 끌려나간 젊은이는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피투성이가 되고 장기가 다 망가진 상태로
가족에게 넘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둔 후에도 강제로 화장당하고 마오.
누가 그를 때렸는지 고문했는지조차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수사기록조차도 없소.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소.
장이기 (1953년 1월 ~ 1986년 3월 16일)
6.
1985년 9월 한 학생이 경원대에서 학원악법 철폐하고 광주학살을 책임지라며 분신했소.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던 것은 군부가 학원안정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법원판결 없이도 검찰이 청구하기만 하면 정신병원에 넣을 수 있게 해서
학생들이 그 어떤 의사표현도 할 수 없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소.
그 학생은 동기들보다 나이많은 형님이었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 생활을 하고
주경아독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해 늦게 대학생이 됐기 때문이었소.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도 밖에서 싸워달라 했다는 그 학생은
치료도중 한달만에 숨지게 되오.
경찰은 그동안 병문안도 막았고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했소.
그의 죽음은 신문에 단 한줄로 나오고 잊혀져 갔소만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는 무산이 되었소.
송광영 (1958년 10월 3일 ~ 1985년 10월 21일)
막내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난 민주가 뭔지도 모른다요 동지가 다 뭐다요
우리 광영이가 죽으면 무슨 소용 있다요?
라고 하셨다 하오.
그렇지만 점점 생각이 바뀐 어머니는 유가협 회원으로
집회 현장에서 우리 아들 왜때리느냐고 전경, 백골단하고도 싸우시게 되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친하셨던
이오순 여사는 1994년 돌아가셔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막내아들 옆에 묻히셨소.
7.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고 항쟁에 참여했던 청년은 대학에 갔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적되고 결국 낮엔 공단에서 일을 하고 밤에 야학을 하며 1987년을 맞소.
87년 3월 미 국무장관 방한에 맞춰 미 대사관 앞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져라 외치며 자신을 불사르고 마오.
그의 흔적은 미대사관 앞에서도 찾기 어렵고
다녔던 학교인 호남대학교는 캠퍼스를 옮기고 난 후
추모비를 옮겨주지 않았소.
이 학교의 졸업생이 아니라는 이유였소.
어머니는 아들이 명예졸업장도 받지 못한 게 너무 억울하시다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4FFA4759258CB424)
표정두 (1963년 4월 1일 ~ 1987년 3월 8일)
8.
옛 부산상고 자리에서 1987년 5월 17일 광주학살 책임지라며 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소.
하지만 그곳엔 그를 기억하는 흔적도 없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소
부산 민주공원에 가야 그의 자료가 남아있지라.
교육을 길게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노동조합도 없는 회사의 노동자였기 때문에
배우지도 못하고 조직적 배경도 없던 그의 희생은 묻히게 된 것이오.
광주 사람들이 와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시는 아버지는
나이가 드셔서 이젠 아들의 기억을 말하기도 쉽지 않게 되셨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dli.nodong.net%2Ffile%2Fyolsa%2F%25ED%2599%25A9%25EB%25B3%25B4%25EC%2598%2581%25EA%25B5%25AD.jpg)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나만 이렇게 억울하게 당한 걸로 알고 세상에 발을 딛었잖아요.
이사람들 보면서,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이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말해서 518 진상 밝히라고 외치다 죽은 사람들이에요.
라고 말씀하시오.
10.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 518 추모 마라톤을 열려고 하고 있었소 .
그 때에 명동성당 옥상에서 한 청년이
“양심수 가둬 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북한과) 공동 올림픽 개최해 평화 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을 밝혀라!”
외친 후 배를 찌르고 투신했소.
이제 단지 광주를 알리는 것을 넘어
미국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고
통일을 향해 가야한다는 뜻으로 모아졌던 것이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atholicnews.co.kr%2Fnews%2Fphoto%2F201105%2F5287_13923_4324.jpg)
조성만 (1964년 12월 13일 ~ 1988년 5월 15일)
11.
1988년 6월 올림픽 전에 숭실대학교에서
광주는 살아있다라고 외치며 국문과 학생이 분신하고 투신하였소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형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소.
환청 환상에 시달리는 시간을 한참 보내다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며 달라지기 시작했지라
동생의 유서에는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해 싸워야 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동생 몫까지 싸우겠다고 형은 장례를 치르며 약속을 했소.
그 형은 인권운동가 박래군씨요.
박래전 (1963년 4월 17일 ~ 1988년 6월 6일)
12.
88년 올림픽이 끝나고 그 해 10월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광주 진상규명을 외치면서 몸을 던진 사람이 있었소.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였고 체력이 약해 끙끙 앓으면서도
빵, 우유를 사서 농성장을 찾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사람이었소.
광주에 살던 아버지가 걱정되어 80년에 내려왔다가 아주 격분했었고
87년에도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된 것이지라.
언론사와 정치권에 13대 대선, 총선이 무효라는 글을 보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자
그는 몸을 던질 결심을 한 것이오.
그렇지만 반신 불수의 몸으로 일년을 지내다 자택에서 스스로 떠나시고 마오.
하마터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도 못 받을 뻔 했소.
가족들은 신청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기념사업회나 추모사업회도 없었기 때문이지라.
우리는 그를 영영 잊어버릴 뻔 했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yolsa.org%2Fdata%2Ffile%2Ftbl_life%2Fthumb%2Fs_200_700_1981878942_usxS1iVw_EAB980EBB391EAB5AC.JPG)
김병구 ( 1956년 1월 ~ 1989년 9월 2일)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광주정신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오.
광주시민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말하지만
광주시민들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소.
첫댓글 중간까지만 읽고 내렸어.. 나를 버려서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이렇게 죽었다는게너무 참담하고.. 감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