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가람옷' ‘마카오 사지’에 얽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마카오 사지’라는 ‘가람옷’이 있었다. ‘마카오 사지’란 마카오에서 수입한 양복지(洋服地 ; 양복을 지을 옷감)로 지은 양복을 말한다.
당시의 시골에서는 용어의 정의를 제대로 몰라 ‘마카오사지’라는 또 다른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가람옷’이란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로 ‘외출복(外出服)’이라는 뜻이다.
마카오 사지 입은 서광범
![](https://t1.daumcdn.net/cfile/cafe/111A31464FEBBC6804)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마카오사지’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카오 양복지로 만든 바지’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지’란 모직으로 된 미군(美軍)의 군복바지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사지주봉’이라고 하여 미군의 동정복(冬正服) 바지를 염색한 바지가 크게 유행했었다.
“사지주봉을 곤색으로 물디래가 내지끼 세우고 입고 댕기머 멋재이라캤다”라는 용례가 있다. “군복바지를 감색으로 물들여서 줄을 세우고 입고 다니면 멋쟁이라 했다”라는 뜻이다.
미군 사지 주봉
![](https://t1.daumcdn.net/cfile/cafe/15232A484FEDA4E704)
여기에서 말하는 ‘주봉’은 일본에서 들어온 즈봉(ズボン) 또는 쓰봉(ツボン)이라는 말이 변형된 것으로 ‘바지’를 일컫는 일본말이자 경상도사투리라고 오도되어 있는 말이다.
‘즈봉(ズボン)’을 경상도 사투리로 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어사전(國語辭典)에 없는 말이나, 잘 모르는 말은 무조건 경상도사투리라고 단정하는 풍토 때문이다.
‘즈봉(ズボン)’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强占期)때 양복이 들어오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양복을 저고리와 바지로 나눌 때 저고리는 우와기(うわぎ-上着~上衣) 또는 ‘세비로(せびろ ; 背広)’라고 했었다. 그리고 바지는 ‘시다기(したぎ-下着)’ 또는 ‘즈봉(ズボン)’이라 했었다.
그 시절 즈봉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2D6504FEEB26B33)
필자도 일제(日帝) 때 만든 ‘즈봉(ズボン)’을 입어 본 일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51년도였는데, 일제 때 만든 재고품(在庫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옅은 감색천으로 만들었는데, 하의는 ‘반즈봉’, 즉 반바지였다.
한 학급에 두 벌이 배정(配定)되었는데, 제비뽑기로 필자가 당첨(當籤)되었고, 어머니를 졸라 사 입었던 기억이 있다. 체형(體型)이 커지자 동생에게 넘겨 주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 일제(日帝)는 학교에서 한복을 벋고, 정부(조선총독부)에서 만든 학생복(學生服)을 입으라고 강요했으나, 농촌지역의 경우 경제적(經濟的)인 뒷받침이 어려워 거의 모든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학생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536924D4FEDA53523)
도시지역의 경우 학생복(學生服)을 입은 아이들은 집안 형편이 여유 있는 집 아이들로 위세(威勢)가 당당했으며, 한복을 입은 아이들은 촌뜨기라고 놀림감이 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좋은 가정에서도 학생복(學生服)을 지급 받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차대전 중인 일제말엽(日帝末葉)에는 모든 물자가 귀해 배급제(配給制)였는데, 학생복이나 운동화도 학교에서 배급을 받아야 했었다.
제비뽑아 운이 좋아야 학생복(學生服) 한 벌을 배급받는데, 그때는 물자절약 관계로 동하(冬夏)복 구별 없이 바지는 모두가 한즈봉(はんズボン 또는 半ズボン)인 반바지였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니느라 그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한즈봉(はんズボン)과 당꼬즈봉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0954E4FEDA57B2E)
아버지가 입은 바지가 당꼬즈봉이고, 아이가 입은 바지가 한즈봉(はんズボン)
그 시절에는 또 ‘즈봉’이란 발음(發音)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원래 일본발음은 탁음 발음으로 즈봉(ズボン)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된 발음인 쓰봉(ツボン)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중간발음인 스봉(スボン)으로 발음하는 이도 있어 혼란스러웠었다. 여기에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주봉’이라고 했다.
당꼬 즈봉(ズボン)과 배급 학생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06B4F4FEDA6270F)
그러나 ‘즈봉’이란 말도 본래 일본말이 아니었다. 프랑스어의 ‘쥬폰(jupon)’에서 따온 말로 일본이 자기나라의 순화어(純化語)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두 다리를 거쳐 들어온 이 바지를 일본말인 즈봉(ズボン)으로 받아들였기에 지금까지 일본말로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즈봉’이란 말이 점차 사라지고 본디의 우리말인 ‘바지’로 통용(通用)되고 있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아이들의 복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205BAE4D4FEDA6E708)
-------------------------------------------------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당꼬즈봉(たんこうズボン)’이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왜놈들은 물론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이 즐겨 입었다.
어쩌다 본뜻이 왜곡(歪曲)되어 왜놈 앞잡이들이 권력의 상징으로 입고 다녔지만, 본래의 뜻은 북해도(北海道)나 일본(日本)의 산악지방에 위치한 광산 또는 해외 식민지 탄광에 끌려가 징용(徵用)이란 이름으로 혹사당한 징용광부들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입은 옷에서 유래된 말이다.
때문에 일본어(日本語) 사전에도 ‘당꼬즈봉(たんこうズボン)’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에서 징용(徵用)으로 끌려간 그 시절 식민지 출신 광부들이 입던 당꼬즈봉이 어떤 즈봉(바지)이며, 무슨 사연을 담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그 시절 징용으로 끌려간 광산 노동자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658494FEEB2EE28)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일본인(日本人)들이 ‘즈봉(ズボン)’이라고 일컫는 말도 원래는 일본어(日本語)가 아닌 프랑스어 ‘쥬폰(jupon)’에서 따온 말이다. 그러면 그 앞에 붙은 ‘당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일본(日本)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페디아(Wikipedia) 자료에서 여자의 즈봉(ズボン)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20세기 후반까지 여성들은 바지를 입지 않다가 100여 년 전부터 집밖에서 일할 때 남자들의 옷을 몸에 맞게 고쳐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절 광부로 끌려간 아이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3CE74B4FEEBB1539)
그리고 이 시절 일본(日本)이 침공하여 식민지지로 만든 필리핀의 이로코스주(州) ‘비간’에 있던 탄광(炭鑛)에서 일하던 여성근로자들(여성 징용자들)이 작업의 편리를 위해 남자들의 바지 종아리를 좁게 줄여 입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여성들까지 징용(徵用)으로 동원하여 정신대원으로 보내거나, 탄광에서 석탄을 캐도록 하여 침략전쟁을 위한 연료조달(燃料調達)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다.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의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
![](https://t1.daumcdn.net/cfile/cafe/113A864D4FEEB38719)
(일제가 정신대와 징용노동자로 강제로 끌어가 광산 지하갱(地下坑)에서
강제노역을 시키는 우리 동포들인데, 남자는 ‘훈도시’ 만 입혔고, 여성도
짧은 바지 하나만 입혀 상하반신이 모두 노출되어 있다. 개같은 왜놈들)
그리고 이 시기는 또 영국의 빅토리아조(朝)에 해당하는 기간인데, 이때의 영국은 산업혁명(産業革命)으로 경제발전이 성숙하던 시절로 산업전선에 나선 여성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었다.
탄광업(炭鑛業)이 주산업인 약삭빠른 일본(日本)이 이런 변화와 현상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탄광(炭鑛)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바지 가랑이 끝을 좁게 만들어 보급하면서 ‘당꼬즈봉(たんこうズボン)’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 시절 탄광(炭鑛)에서 혹사당하던 조선인 징용광부들이 지은 이름으로 일본어(日本語)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일본어로 ‘당꼬(たんこう)’는 탄광을 이르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탄광에서 입는 바지라 해서 ‘당꼬즈봉(たんこうズボン)’이라고 한 것이다.
혹사당하는 조선인 광부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5704E4FEEB3F00A)
----------------------------------------------
다음은 우리나라에서의 신사복의 발전사(發展史)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양복착용은 개화파의 선각자(先覺者)들에 의해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맨 처음 양복을 입은 사람은 구한말(舊韓末)의 개화파 정치가인 서광범(徐光範 : 1859-1897)으로 알려지고 있다.
1882년 박영효(朴泳孝)를 부사로 하는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훗날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권유로 요꼬하마의 한 양복점(洋服店)에서 당시 돈으로 30여 달러짜리 양복을 사 입었다.
당시의 세비로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75C4C4FEDA0931E)
일본 체류 중 촬영한 사진(뒷줄 왼쪽이 서광범, 맨 왼쪽은
박영효, 우측 두 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1883년)
그때 그가 사 입었던 옷은 깃의 끝이 턱밑까지 바싹 다가붙어 있어 흔히 ‘하이칼라(High Collar)’라고도 불리던 검은 색의 ‘쌕 코트(Sack Coat)’였다. 일본인(日本人)들이 말하던 ‘세비로(せびろ : 背広)’를 말한다.
몸에 꼭 끼이는 연미복(燕尾服) 등이 예장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쌕 코트’는 말 그대로 자루처럼 풍성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영국(英國)에서는 ‘라운지 자켓(Lounge Jacket)’, 일본(日本)에서는 ‘세비로’라 불리며 널리 애용되고 있었다.
쌕 코트(Sack Coat)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354474FEC4E1E15)
서광범(徐光範)은 이 옷을 입고 일본 각지를 시찰한 후 그해 11월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한복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서양인(西洋人)을 오랑캐로 여기는 것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一般的)인 통념이었던 시절이라 양복을 입은 채 돌아온다는 것은 아마 대단한 모험이었던 듯싶다.
하지만 이 모험은 그 이듬해 미국에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갔던 민영익과 그를 수행한 홍영식(洪英植), 서광범, 유길준(兪吉濬) 일행에 의해 다시 시도(試圖)되었다.
유길준과 세비로
![](https://t1.daumcdn.net/cfile/cafe/180999494FEDA7B505)
구미제국(歐美諸國)의 현란한 문물에 깊은 충격을 받고 개화(開化)의 신념을 새삼 확고하게 다진 젊은 그들은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복(洋服)차림으로 귀국하여, ‘우리나라 땅에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들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의복은 물론 사회 전체의 제도에 걸친 개혁(改革)을 시도했었다.
고종황제의 양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21B87464FEBBCF005)
그러나 갑신정변은 결국 ‘3일천하’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역사의 격동(激動)은 다시 갑오경장(甲午更張)의 개혁을 낳았고, 그 2년 후인 1896년에는 태양력 사용칙령과 단발령(斷髮令), 양복 착용령이 시행되기에 이른다.
‘짐이 머리를 잘라 백성에게 솔선수범 하는 것이니 모두들 나의 뜻을 알아서 국제적으로 보조를 맞추어 가게 하라’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칙령이 그 스스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차림새의 사진과 함께 발표되면서 시작된 이 근대화작업(近代化作業)은 그러나 모진 반발에 부딪치고 만다.
유림(儒林)들의 반대가 들끓어 대학자 최익현(崔益鉉) 같은 이들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此髮不可斷)’고 완강하게 저항했고, 이를 효시로 결국 왜세(倭勢)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으로 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마카오 양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93EA44D4FEEBA6633)
그리고 급기야는 그 두 달 후인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개혁내각의 수뇌 김홍집(金弘集)이 성난 백성들에 의해 피살되고, 개혁의 중추였던 유길준(兪吉濬)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대세에 따라 양복은 차차 정착의 터전을 잡아간다. 1896년 5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특명 전권대사로 참석한 민영환(閔泳煥), 윤치호 일행이 양복의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갔던 것처럼, 특히 외교관(外交官)에게 있어서 양복의 착용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896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의 대례복 차림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13E504FEDAAE21D)
또한 훗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비보를 멀리 런던에서 전해 듣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자결 순직한 영국 공사서리 이한응(李漢應)은 그 단아한 양복차림과 바른 예의로 런던에서도 ‘최고의 신사’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었다.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양복은 차차 민간인의 생활 속에도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1913년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된 조일제의 소설 ‘장한몽(長恨夢)’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중배’가 ‘프록코트에 단장을 짚고 금테안경에 금강석(金剛石) 반지, 실크 햇, 순록 가죽장갑, 에나멜 구두를 착용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주영 공사서리 이한응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E0B484FEDAB381E)
완숙한 외교솜씨로 런던 외교가의 명성을 모았던 이한응은 바른 예의와
옷차림으로 외국정부와 조선왕실에서 처음으로 ‘신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것은 당시의 일류신사(一流紳士) 복장의 전형이었으며, 신식교육의 발전과 일본을 경유한 서구 유행의 유입으로 양복은 급속도(急速度)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복(生活服)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나라 신사들의 옷차림은 또 한 차례의 변화를 겪게 된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막바지에 이르러 입기를 강요당했던 일제의 군복이나 국민복(國民服)에 염증을 느낀 그때의 신사(紳士)들은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의 신사복을 꺼내 입게 되었다.
미군(美軍)이 진주하여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잠시 헐렁한 모양의 볼드 룩(Bold Look)이 사랑을 받다가, 신사복(紳士服)의 경향은 곧 ‘아메리칸 스타일’ 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 시절 양복점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8354F4FEEFB4E0A)
이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것은 어깨에 덧대는 덧심이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허리도 들어가지 않고 헐렁한 모양을 하여 보통 ‘내추럴(Natural)형’이라 불리던 것이었다.
이런 경향과 더불어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수입되기 시작한 고급 외제복지(外製服地)가 부유층에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마카오 신사’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내추럴 스타일’과 ‘마카오 바람’은 당시의 멋쟁이들에게 계속 번져만 갔다. 당시의 마카오에서 수입된 양복지는 영국(英國)에서 생산된 양복지였다.
마카오 신사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88D404FEBBD3D05)
“핫바지 벗어 떤지고 양복으로 빼 입어 노이 마카오 신사잉기라”라는 용례가 있다. “핫바지 벗어 던지고 양복(洋服)을 빼 입어놓으니 멋쟁이 신사인 것이라”라는 뜻이다.
해방 이후 서울 등 대도시(大都市)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가끔 등장하지만, 짧게 깎은 ‘상고머리’에 ‘마카오’ 양복(洋服)을 차려입은 건달들의 모습이 모든 도시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조폭(組暴)들이 검은 양복을 입게 된 것은 1960∼70년대 ‘신상사파’가 당시 유행하던 ‘마카오’ 신사복장을 과시용(誇示用)으로 입었던 데서 퍼진 것이라고 한다.
신상사파 두목 신상현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69F474FEC5A4F0A)
‘마카오 신사’는 전후(戰後)에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밀수해온 양복지(洋服地)로 만든 옷을 입었던 탓에 나온 말로 당시 최신 유행을 가리키는 말로 통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上京)했던 조폭(組暴)들이 ‘서울 조폭’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마카오 양복은 전국적(全國的)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해방(解放)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은 모든 질서를 무너뜨렸다. 의복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군복이나 담요를 염색(染色)하여 지은 옷을 입는 것을 예사로 하였고, 휴전(休戰)이 된 한참 뒤까지도 염색한 군복을 개조한 신사복(紳士服)을 입고 다니는 것이 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염색한 군복(야전잠바)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8494E4FEDABE309)
그리고 이때는 염색(染色)한 미군 ‘야전잠바’를 ‘가람옷’으로 입고 다니기도 했고, 고급의상(高級衣裳)으로 취급되어지기도 했었다. 애인과의 약속으로 약속장소에 나갈 때도 이 ‘야전잠바’를 입고 나갔고, 가난한 대학생(大學生)들의 경우 4년 동안 이 잠바 하나로 버티기도 했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에 유행했던 ‘야전잠바’에 얽힌 사연(事緣)들을 잠시 살펴본다. 당시의 염색(染色)한 ‘야전잠바’는 만능의상(萬能衣裳)이었다.
따뜻한 옷가지 하나 제대로 못 입던 시절, 미군부대(美軍部隊)에서 흘러나오는 짓 푸른색 야전잠바(Field Jacket)는 아무나 입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전쟁 중이라 민간인(民間人)이 입고 다니는 ‘야전잠바’에는 ‘염색’이라고 큰 글씨를 써 강제로 염색(染色)을 하게 했었다.
회원님들 중에도 그런 경험(經驗)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때 검정색으로 물들인 그 ‘야전잠바’를 입은 형님들이 얼마나 멋져 보이고, 입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 미군 야전잠바
![](https://t1.daumcdn.net/cfile/cafe/202229444FEBBD950E)
거기에 ‘워커’라는 미군의 군화(Army Boots)를 신고 다니면 더 멋져 보였다. ‘키위(Kiwi Shoe Polish)’라는 검정 구두약을 바르고 불로 태우면 빨간 가죽 속에 구두약이 스며들어 검은 색으로 변했다. 그 ‘워커’를 신고 광내고 다니는 형님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파란색 담배인 ‘셀렘(Salem)’, 빨간색 ‘팔 말(Pal Mall)’ 낙타그림의 ‘카멜(Camel)’이나 ‘럭키 스트라이크(Lucky Strike)’를 피워 문 그들은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팔 말(Pal Mall)
![](https://t1.daumcdn.net/cfile/cafe/136E26484FEEB44D30)
여기에다 지포 라이터 (Zippo Lighter)로 불을 붙이면 왜 그리 폼이 나던지 지금도 그 광경을 형용할 수가 없다. 옛적에는 염색(染色)한 미군 ‘야전잠바’가 얼마나 좋았던지 맞선보는 처녀를 만나러 나가면서도 당당하게 그걸 입고 나갔다.
필자의 경우도 그 시절 ‘여친’이 수도권(首都圈) 어느 양키시장에 가서 눈대중으로 구입하여 염색(染色)한 미군 ‘야전잠바’와 군복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 있어 대학생활(大學生活) 거의를 이 옷으로 버티기도 했었다.
그 시절 야전잠바(M1951 Field Jacket)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8A84F4FEDAC3532)
수선가게에서 줄이기는 했지만, 웬만한 자루만한 포켓트에 오징어 구운 것 두어 마리를 구겨 넣고, 다른 포켓트에 그녀의 손을 집어넣어 만지작거리면서 겨울 포도(鋪道)를 걷던 때가 몇 년 전의 일 같은데,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시절 그 ‘여친’도 이젠 천국(天國)에 먼저 가버리고 없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학생들은 춘하추동(春夏秋冬) 검은색으로 염색한 ‘야전잠바’ 한 벌로 개긴 학생들이 많았다. 등록금(登錄金) 마련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나면 변변한 옷 한 벌 마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키 시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1179B2494FEDAC8129)
봄‧여름에는 수선가게에서 체형(體型)에 맞추어 수선한 군복(軍服)만 입으면 됐고, 겨울에는 ‘야전잠바(야전점퍼)’를 걸치면 그런대로 견딜 만 했었다.
|
-----------------------------------------------
다음은 ‘마카오신사’의 태동사연(胎動事緣)을 잠시 살펴 본다. 1952년 임시수도(臨時首都)였던 부산의 남포동과 광복동(光復洞)을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걷던 ‘마카오 신사’가 누비고 다녔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의 남포동
![](https://t1.daumcdn.net/cfile/cafe/140753414FEBBDE911)
그것도 두 가지 부류(部類)의 ‘마카오 신사’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두 부류(部類)의 ‘마카오신사’ 중 하나의 부류는 마카오를 대상으로 무역(貿易)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또 다른 ‘마카오신사’는 마카오에서 수입(輸入)한 양복지(洋服地)로 지은 양복을 입은 신사를 말한다.
그 시절 광복동
![](https://t1.daumcdn.net/cfile/cafe/1531D8444FEBBE4206)
‘마카오 신사’란 말이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였다. 그 때의 정황을 살펴본다. 1947년 3월 17일 인천항(仁川港)에 ‘페리오드호’란 무역선(貿易船)이 입항했다. 이 배는 마카오에서 생고무와 양복지, 신문용지(新聞用紙) 2000t을 싣고 들어왔는데, 입항(入港) 후부터 ‘마카오무역’ ‘마카오신사’란 말이 생겨났다.
홍콩(香港)이나 ‘마카오’를 오가며 무역(貿易)하는 사람을 ‘마카오 신사’라고 하고, 이들이 하는 무역을 ‘마카오 무역’이라고 불렀을 때였다.
마카오 신사
![](https://t1.daumcdn.net/cfile/cafe/2011F8494FEC5ACA20)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마카오 신사’는 초창기 이렇게 무역(貿易)과 관련지어 불렸지만, 1950년을 전후해서는 마카오나 홍콩 등지에서 밀수입해 온 양복지(洋服地)로 신사복을 지어 입은 사람을 흔히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고, 멋쟁이의 대명사(代名詞)가 되었다.
당시 ‘마카오 신사’는 여덟 가지의 수칙(守則) 비슷한 게 있기도 했었다. 먼저 영국제(英國製) 양복지로 맞춘 양복에 영국제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발에는 이탈리아제 ‘발리’ 구두를 신도록 되어 있었다.
그 시절 종로 양복점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5D5504FEEFC4D27)
그리고 손목에는 스위스제 ‘롤렉스’시계, 허리에는 이탈리아제 악어 가죽벨트, 손가방은 프랑스제 ‘크리스티앙디오르’ 또는 ‘루이뷔통’ 제품, 머리에는 ‘필그램’ 파나마 모자를 슬쩍 걸친 다음, ‘샘소나이트’ 여행용(旅行用) 트렁크를 끌어야 정통 ‘마카오 신사’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 ‘마카오 신사’는 대부분 영국제 양복지(洋服地)로 맞춘 양복에다 맥고모자나 파나마모자를 쓰고 스프링코트에 조끼, 재킷, 와이셔츠, 넥타이를 입고 맬 정도에 그쳤다.
파나마 모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196E7A504FEC5C7124)
그러나 당시의 ‘마카오 신사’가 치장한 물품들이 정상적(正常的)으로 들어온 수입물품(輸入物品)이면 다행이었지만, 대개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에서 선원들에 의해 밀수입(密輸入)된 명품이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이하에서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부류 중 또 다른 ‘마카오 신사’를 소개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시절 부산항(釜山港)은 군수물자를 실은 선박과 외국인(外國人)이 수시로 드나드는 이른바 ‘무역선의 고향’이자 우리나라의 현관이었다. 당연히 세관(稅關)이 있었고 수많은 세관 공무원들이 있었다.
염색한 군복바지(사지 주봉)
그리고 그 당시에는 어느 나라든 세관직원(稅關職員)은 그 복장이 좀 세련되고 국제신사다운 맛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없이 나라의 관문(關文)인 세관에 근무하는 세관원은 그 나라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다들 깔끔한 제복을 입히려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수립(政府樹立) 후부터 세관원(稅關員)의 복장은 미군(美軍)이 입었던 바지를 염색(染色)한 것이었다. 이른바 ‘사지주봉’차림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세관원이라도 제복(制服)다운 제복을 입혀야겠다는 뜻에서 홍콩에서 영국제 양복지(洋服地)를 수입하여 해군 장교복(將校服)과 같이 단추가 8개 달린 양복으로 맞춰 입혔다.
그러다 보니 이걸 입은 세관원(稅關員)들이 바로 ‘마카오 신사’가 돼버렸다. 어떤 직원은 업무에 임할 때뿐 아니라 아예 이걸 입고 출퇴근(出退勤)까지 했으니 정부가 공인한 ‘마카오 신사’가 부산항(釜山港) 주위를 활보하게 되었다.
당시의 세관원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 두 부류(部類)의 ‘마카오신사’, 즉 밀수를 주업으로 하는 ‘마카오신사’와 이들을 단속하는 세관원(稅關員)인 ‘마카오신사’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마카오신사’였지만, 밀수(密輸)의 경우 서로 쫓고 쫓기는 처지에 있어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밀수(密輸)란 것은 항상 사회가 불안하고 어려울 때 혼란(混亂)한 틈을 타 성행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지만, 1950년대 우리가 가장 암울(暗鬱)했던 시대에 가장 사치스러운 유행의 산물(産物)인 ‘마카오 신사’란 말이 세간에 등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카오 신사복 입은 이승만과 박용만
![](https://t1.daumcdn.net/cfile/cafe/134EC44E4FEDB27232)
----------------------------------------------
서울지방 얘기로 돌아간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신사복(紳士服)은 비로소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스스로의 터전을 다져나가게 된다. 해방(解放)이후 지속되어 오던 미국형(美國形) 일변도의 추세는 차차 수그러들었다.
대신 유럽형의 스타일이 조금씩 머리를 들게 되어 외교관(外交官)들이 입던 앰배서더형, 미국 대학생들의 옷차림을 본뜬 아이비형, 유럽식으로 몸의 곡선(曲線)을 유연하게 드러나 보이는 콘티넨탈형 등이 속속 쏟아져 나왔다.
아이비형 양복
여기에서 잠시 6.25전쟁 당시 어두운 뒷골목 판자움집에서 눈물로 자고새는 피난민(避難民)들과는 달리 새파란 마후라에 ‘라이카’ 카메라를 메고, ‘쬬코렛’ 칠피구두에 마카오 양복을 걸친 ‘마카오신사’들이 주름잡던 부산(釜山)의 뒷골목을 그린 손인호의 ‘숨쉬는 거리’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숨 쉬는 거리
노래 : 손인호
작사 : 고명기 작곡 : 박시춘
새파란 마후라에 라이카 카메라 쬬코렛 칠피구두 마카오 양복 가벼운 휘파람에 모리스 양담배 그것만 이 거리의 모습이드냐 아~ 어두운 어두운 뒷골목에 판자움집은 눈물로서 자고새는 신세도 있네
째즈에 춤을 추는 오색 빛 나이트 드레스 앙가슴에 새빨간 장미 밤거리 제 멋대로 날뛰는 꽃이냐 이것만 이 거리에 꽃은 아니다 아~ 애국에 애국에 바친 기상 이 나라 땅의 들국화에 향기 높은 꽃들도 있네
노래냐 춤이드냐 술 냄새 풍기면 뒤엉킨 거짓말에 코티분 냄새 새파란 술잔에다 연지 빛 입술도 그것만은 이 거리에 밤은 아니다 아~ 일터에 일터에 지친 몸이 깊은 밤중에 조국강토 통일이면 님들도 있네
|
1960년 복장연구회(服裝硏究會)와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가 YWCA회관에서 공동 주최한 패션쇼와 1965년 4월 충무로(忠武路)에 있던 유명 양복점이 개최한 ‘남성복장발표회’는 양복문화(洋服文化) 부흥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울의 충무로, 광교 등에 큰 양복점(洋服店)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가히 ‘양복점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활발한 활동(活動)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한복장협회(大韓服裝協會), 대한복장기공조합연합회, 대한복장학원, 한국소모방협회 등의 대표들이 서울 태평로(太平路)의 건설회관에 모여, 무조건 외국의 유행을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 체형에 맞는 스타일을 확립하자는 취지의 규약(規約)인 ‘스타일 한국’을 제정하였다.
태평로 건설회관
그리고 매년 1월 13일을 복장의 날로 정하고부터는 신사복(紳士服)을 짓는데 있어서 ‘인체공학(人體工學)’이라는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우리나라의 경제(經濟)가 놀랄만한 발전의 궤도(軌道)에 올라서고, 국내시장(國內市場)의 규모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변화의 여건 속에서 신사복계(紳士服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선진국(先進國)에 수출만 해오던 대기업 신사복 메이커들이 국내시장(國內市場)의 팽창에 자극을 받아 하나씩 둘씩 자기 상표를 시장에 내놓게 된 것이다.
국산 양복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FBE504FEDB2C820)
그리고 그들의 상품은 소비자(消費者)들의 간편한 것에 대한 선호추세와 소비욕구(消費欲求) 팽창에 힘입어 만드는 대로 팔려나갔다. 이른바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말로 대표되는 기성복(旣成服) 시장의 전개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맞춤복은 점차 위축(萎縮)되어가는 반면, 국내 기성복(旣成服) 시장은 그 규모가 더욱 커졌고,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수많은 상표(商標)들로 하여 누구나 다양한 감성(感性)과 수준 높은 품질을 향유할 수 있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복집
![](https://t1.daumcdn.net/cfile/cafe/186C224B4FEC5D4D30)
--------------------------------------------
다음은 우리나라의 복장사에 이어 세계의 복장사(服裝史)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오늘날 우리가 입고 있는 신사복(紳士服)도 어느 한 순간에 우연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생겨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비롯됨은 멀게는 인류가 맨 처음 알몸을 가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한 선사시대(先史時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히 외부 기후조건(氣候條件)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거나, 알몸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실용성(實用性)을 뛰어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하는 의미로 변화해 왔다.
구석기시대의 옷
![](https://t1.daumcdn.net/cfile/cafe/183EEB494FF01D0301)
계급의 높낮이를 드러내는 상징의 개념, 외모(外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의 개념, 소속된 사회나 개별적(個別的) 인간의 문화를 표현하는 정신적 개념 등의 복합적인 기능과 의미가 혼합되어 시대에 따라 또는 지역에 다라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남자의 옷이-여자의 옷도 마찬가지지만-지역마다의 차이를 극복(克服)하고 오늘날처럼 전 세계인(世界人)들이 두루 같이 입는 형태의 ‘신사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기나긴 인류의 복식(服飾)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아주 짧은 시간 전-불과 200여 년 전-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사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E6A474FEDB3520A)
그것은 바로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영국(英國)에서 일어난 산업혁명(産業革命)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제국의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의복양식(衣服樣式)을 포함한 모든 문화의 향유를 과점하고 있었던 집단은 오로지 극소수(極少數)의 왕족과 세습 귀족들뿐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産業革命)은 그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자본가(資本家)와 시민계층의 형성을 낳았으며, 그들은 그전부터 동경해오던 귀족류(貴族類)의 생활이며 의복양식 등을 본받아 나름대로의 품위와 실용성(實用性)을 겸비한 복식문화(服飾文化)를 형성해나가게 되었다.
산업혁명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2BB484FEDB38019)
그리고 영국(英國)은 로마교황청과 각국의 왕실, 군주와 백성간의 심한 갈등이 결국은 혁명(革命)이나 전쟁으로 곪아 터져 정치적․문화적(文化的)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던 대부분의 유럽제국과는 달리, 이미 16세기의 헨리 8세 때부터 일찌감치 종교적(宗敎的)으로도 독립되어 있었다.
아울러 섬나라라는 지리적(地理的) 여건 덕택에 대륙(大陸)에서 벌어지는 골치 아픈 정쟁(政爭)의 영향권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헨리8세
![](https://t1.daumcdn.net/cfile/cafe/202048494FEC5E3C19)
산업혁명(産業革命)으로 야기되는 계급사회의 재형성과정을 순리적(順理的)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영국사회는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민주정치시대(民主政治時代)를 피의 대가 없이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서 영국(英國)은 국가의 주인이 왕실에서 일반 시민계급으로 바뀐 것처럼 복식문화(服飾文化)의 주인도 소수왕족(小數王族)과 귀족에서 시민으로 바뀌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왕족의 복식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C15344FEF9BA80A)
그리고 영국의 국력이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을 통해 그야말로 사해(四海)에 떨치게 되면서 세계 사회의 질서를 가름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大英帝國)’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제도(政治制度), 사회규범, 문화양식 등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 옳든 그릇되든 오늘날 세계질서(世界秩序)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가운데 그들의 생활 속에서 싹튼 복식문화(服飾文化)도 세계 공통의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영국 신사
![](https://t1.daumcdn.net/cfile/cafe/141B2E4C4FEC5F6506)
다시 말해서 전제군주(專制君主) 시대의 영국 귀족의 복식문화가 민주시대 시민계급의 생활양식에 맞게 재정립(再定立)되는 문화의 수직적인 전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오늘날 신사복(紳士服) 문화의 뼈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복식문화(服飾文化)의 뼈대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복지(服地)를 수입하거나, 밀수입(密輸入)하여 남의 나라의 복식을 흉내 내어 만들어 입는 것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의 섬유(纖維)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오래 전에는 그렇지 못했었다. 설혹 좋은 옷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국민경제(國民經濟)로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시절 마카오 양복
![](https://t1.daumcdn.net/cfile/cafe/13337F504FEEB5282E)
더구나 외국여행(外國旅行)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외제 옷감을 구하려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다 보니 해외를 드나드는 특권층(特權層) 인사들은 고급 양복지(洋服地)를 걸쳐 입고 몹시 뻐기곤 했었다.
게다가 시골 군수(郡守)님이나 면장(面長)님들은 그런 양복을 입고 싶긴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밀수품이 횡행할 수밖에 없었고, 밀수 양복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것이 마카오 양복지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양복(洋服)을 잘 차려 입으면, ‘세비로 뽑아 입었다’고 부러워했는데, 그 때의 ‘세비로’는 고급 양복의 대명사(代名詞)였다. ‘세비로’에다 ‘라이방’이라도 하나 걸치면 최고의 멋쟁이였다.
라이방(선글라스) 신사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1294F4FEEB56E0F)
그러나 그 시절의 마카오 양복(洋服)은 너무나 값이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단벌’이었다. 두 벌 이상 구입할 경제적(經濟的) 사정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단벌신사’라는 말도 이때부터 생긴 말이다.
어쨌든 사정이 이렇다보니 거의 사계절(四季節)을 단벌로 버티기 일쑤였고, 당연히 양복의 수명도 짧을 수밖에 없었다. 사시사철 순모로 된 동복(冬服)을 입고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곳은 표시가 잘 안 나지만, 소매 끝에 실밥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뭐니뭐니해도 단벌을 계속 다림질하여 입다보니, 한낮에 거리로 나서면 반들반들하게 낡은 광택(光澤)을 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반들반들한 바지
그때 혜성(彗星)과 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우라카이(우라까이)’였다. 우라카이는 일본어(日本語)인 우라가에시(裏返,うらがえし)를 말하는 것으로 어원을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뒤 집는다’는 뜻으로 사용 된 것 같다.
당시에는 세탁소나 양복점(洋服店) 앞에 보면 ‘우라카이’ 또는 ‘우라까이’라는 안내글씨가 적혀있었는데, 양복을 뒤집어 고쳐 준다는 뜻이었다.
우라까이 한 진바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182974474FEEB5C835)
양복 모양은 원형(原型)을 그대로 보존한 채 양복 기지만 뒤집어 감쪽같이 새 양복을 만드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교묘(巧妙)한지 ‘우라카이’ 제대로 한 양복은 완전히 새것 같았다.
옛적에는 중고등학생(中高等學生)들의 교복도 가끔 ‘우라까이’를 해서 입었다. 오래 입어 색이 너무 바랬지만, 새 교복(校服) 살 형편이 못될 때, 형제끼리 물려 입을 때도 ‘우라까이’를 했었다.
‘우라까이’한 교복
이럴 경우 보통 왼쪽에 있는 윗옷 윗주머니가 오른쪽에 있게 되어 창피해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새 옷을 구입(購入)할 형편이 못될 때는 어쩔 수 없이 헌옷이나, 남의 옷을 ‘우라까이’해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구멍만 생겨도 옷을 버리거나, 유행이 지났다고 홀대(忽待)하는 요즘 세태(世態)로 보자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당시로서는 훌륭한 생활의 지혜(知慧)였다고 생각된다.
--------------------------------------------
다음은 우리나라에서의 모직산업(毛織産業)의 발달과정을 조금 보탠다. 모직, 즉 양복지(洋服地)를 만드는 모직산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에서도 성공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성공한 사업이었다.
헤방 직후 서울 장안의 내노라하는 신사는 모두 마카오에서 밀수입(密輸入)한 영국산모직(英國産毛織)으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이른바 ‘마카오 신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들여온 영국산(英國産) 복지는 양복 한 벌 값이 당시 회사원(會社員)의 3개월치 봉급에 이르는 6만 환(圜)이나 되었다. 회사원의 한 달 월급이 2만환이었다는 얘기다. 불변가격으로 말하면 지금은 2천원이다.
그 시절 화폐
![](https://t1.daumcdn.net/cfile/cafe/141D804A4FEEB6321A)
작고한 삼성그룹의 회장이자 제일모직(第一毛織)의 사장이었던 이병철도 마카오산 순모로 양복을 맞춰 입고 다녔다. 일본으로 출장 갈 때도 순모(純毛) 마카오양복을 입고 다녔다.
때문에 그 시절 카페의 여급(女給)들은 그를 ‘순모선생’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이병철은 이 땅에서 일찍이 순모로 지은 양복을 입을 줄 알았던 선구자(先驅者)였다는 것이다.
이후 이병철은 미국(美國)에서도 성공하고, 일본(日本)에서도 잘 팔리는 모직을 국산화(國産化)하면 틀림없이 잘 팔릴 것으로 내다봤고, 모직 생산에 뛰어들었다. 제일모직(第一毛織)을 창건한 것이다.
제일 모직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6E1474FEEB69429)
제일모직(第一毛織)은 1956년부터 제품이 생산되었는데, 한 해 약 50만 벌의 양복지(洋服地)를 생산했고, ‘골덴텍스’의 양복 한 벌 값은 1만 환 안팎이었다.
당시 마카오 양복지(洋服地) 한 벌 값 6만 환에 비하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다. 골덴텍스의 품질도 결코 마카오 양복지(洋服地)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골덴 택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0BC84A4FEEB6D425)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신사들은 여전히 양복지(洋服地) 하면 마카오 복지라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支配的)이었다. 그들은 모두 국산의 품질이 외제(外製)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판매(販賣)가 부진하자 이병철이 직접 어이디어를 내기도 했었다. 국내 최고급양복지(最高級洋服地) 골덴텍스가 외래품을 능가한다는 문구를 광고문안(廣告文案)에 넣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이병철은 마카오양복을 벗고, 자신이 만든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만 입고 다녔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정부의 고급 관리들이나 재계인사(財界人事)들은 그가 여전히 영국제(英國製) 순모로 만든 양복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만든 ‘골덴택스’의 품질이 우수했다는 반증(反證)이기도 했다.
제일모직 공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130E61484FEEB73918)
어쨌든 제일모직(第一毛織)으로 출발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纖維産業)은 나날이 발전해 1960년의 생산량(生産量)이 149억 원어치이던 것이 1970년에는 1,975억 원으로 열세 배나 성장했었다.
그리고 종업원(從業員) 수도 20만 7,191명으로 전체 제조업(製造業) 종사자의 24%를 차지하는 고용효과(雇傭效果)를 창출했다.
그 후 30년이 지난 1991년에 들어서서는 총생산량(總生産量)이 14조 5,355억 원으로 초창기 1960년에 비해 무려 1,000배로 성장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로서 제일모직(第一毛織)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외제양복지(外製洋服地)를 몰아내고, 국민 의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外貨)를 절약하게 되었다.
배경음악으로 그 시절 ‘마카오’와 홍콩을 넘나들며, ‘마카오복지’를 실어 나르던 무역선(貿易船)의 선장 마도로스를 노래한 백년설(百年雪)의 ‘마도로스 박’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오늘은 고대원의 목소리로 듣는다.
마도로스 박
백년설
망각의 항구에 무르녹은 수박등
달빛 젖은 돛대에 마도로스 박이다
저 섬을 돌아가면 수평천리 몇 굽이
기타를 퉁겨가며 아- 휘파람 분다
별 뜨는 항구에 찰랑대는 꽃 물결
순정으로 가득찬 마도로스 박이다
저 별을 바라보면 고향산천 그리워
향수를 달래면서 아- 휘파람 분다
닻줄을 감으며 흘러가는 항구냐
순정으로 가득찬 마도로스 박이다
파도를 넘어서면 수평선이 몇이냐
햇빛을 치받으며 아- 휘파람 분다
|
|
첫댓글 오랜만에 들렸다가....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 딱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향우중에는 양복 전문가가 유독 많은거 같습니다. 그분들의 옛 얘기 꺼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도 군복 사지 바지 물들여서 아껴가며 가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야전잠바 입고 다녔으면 멋쟁이셨습니다. 그런 추억을 같이 누려야될낀데...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작 뵙지를 못했네요 조금씩 집안일을 하다보니
읽을 여가를 얻지 못해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대하고 나면 늘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워낙 보기 드문 자료에다 세세한 풀이를 주셨어
참 많이 감명 깊게 새겨 넣습니다
그렇게도 입고 싶었던 마카오 사지즈봉
이수일과 심순애 로맨스가( 김중배가 입은 옷은 마카오 사지즈봉 나의 옷은 삼베 석세 옷이지만 잡으면 찢어진다)
아직도 생생하여 그 당시 노래도 부를수가 있을 것 같네요
언제 선배님을 뵈옵고 못다한 회포를 풀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길어지는 성하 늘 건강하신 가운데
보람있는 나날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