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 큰스님의 제자 중 책벌레인 남자가 있었다. 이 젊은이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석· 박사를 밟은 유능한 인재였다. 그가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여느 때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제자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큰스님께서 서 계셨다.
"향수병에 걸렸어, 아주 심하게 ……."
제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씀하시는 큰스님의 둥그런 얼굴에는 자비심이 가득하였다.
제자는 큰스님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사실, 갑자기 나타난 스님보다는 향수병이라는 이 말에 더 놀랐다.
"집이나 가족이 그리운 것은 아니에요."
제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내가 향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실까?'
이렇게 생각하는 제자에게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근본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지."
큰스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을 이미 감지하셨다는 사실에 제자는 조용히 절을 올렸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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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통해서든, 정말 지금 무엇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하나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개를 이것이다 하고 내세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정말 이 하나, 하나가 단지 이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다시 말하면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자기 주머니에 보석이 있는 줄 모르니까 거지처럼 살고 있는 것처럼, 딱 그런 모양입니다. 이렇게 책을 읽는 것도 사실 누가 읽습니까? 내용은 상관이 없어요. 책 내용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을 읽고 반응하는 자신이지요. 반응하는 것은 뭡니까? 감정이지요. 그런 감정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에서, 가치기준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 이 '나'라는 관념에서 나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 '나'라는 게 없으면 살아있지 못해요. 이 미세먼지에도 전혀 상관없이, 정말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할 수가 없어요. 뭐가 있어서 상관합니까? 빨갛고 얼마나 예쁘고 선명합니까? 남천의 열매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에 따로 있어서 핍니까? 아니죠. 지금 여기에 활짝 피어있어요. 그런데 책 속의 글만 읽는다면 항상 남천은 자신과 다르게 저 멀리 피고 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그렇게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사실 이 육체는 혼자 살 수 없지요.
우리가 꼭 필요한 음식, 안 먹으면 죽습니다. 이게 우리가 믿고 있는 실체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런 진리를 거부합니다. 어떤 특별하고 정말 영생, 불생하는 어떤 것을 추구합니다. 그야말로 이솝이야기입니다. 육체를 '나'라고 믿고 있는 동안은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그런 유기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물을 끊어서 결국 없는 것으로 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원래 이 육체가 자신이라고 믿는 그런 관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단순하고 쉽습니다. 단도직입입니다. 마치 거대한 흉물스러운 거인이 매일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용기를 가진 사람이 단도로 찌르고 보니, 펑~ 풍선인 것입니다. 정말 그처럼 스스로의 관념 속에서 하나의 풍선 거인을 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는 달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쥐가 고양이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는 똑같은 고양인데 왜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오면 방울 소리가 나기 때문에 도망을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금방 태어난 쥐는 방울 소리만 들으면 도망을 갑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든 쥐들이 소리만 나면 도망가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지요. '나'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스스로 진지하게 들어가 보십시오. 그게 뭐라든, 예를 들면 하나의 감정도 괜찮습니다. 이 감정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 속으로 들어가면 금방 없어져 버립니다. 왜 진실한 것이 아니거든요.
조건화 시켰을 경우에만 일어납니다. 누가? 자신이 그렇게 하잖아요. 자신이 만든 관념의 기준에서, 그런 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게 없으면, '나'라는 게 없으면 그냥 감정만이 있을 뿐이고 금방 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참 신기합니다. 감정은 있는데 동요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전혀 연습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수행해서 되는,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저는 작년에 요리를 하고 설거지하면서 식칼에 엄지손가락을 베였는데, 여섯 바늘 정도 꿰맬 만큼 상처가 깊고 길었지요. 그다음부터는 유리와 칼은 물에 담그지 않고 바로 씻어 제자리에 둡니다. 어느 바보가 또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것처럼 두 번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행동들이 쓸데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손을 저절로 떼게 돼 있습니다. 그래야 좀 더 자유로워지고, 결국 공부는 스스로의 관념이 옅어지고 결국 없어지는 것이고,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또 생각으로 들으면 아, 그러면 생각이 없어지는구나! 또 이렇게 합니다. 결국 이 생각을 없애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바로 생각인 것입니다. 처음 이 공부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보는 것보다는 설법을 듣는 게 더 좋습니다. 왜냐면 책을 보면 자꾸 관념적으로 가게 돼 있거든요. 저는 책 보는 것 좋아합니다. 체험하고 나중에 책을 보든 안 보든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결국 문제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설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나'라는 것의 실체를, 실상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두려워할 마음도 없고 맘껏 사랑을 하되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 밭에 수많은 식물을 키웠지만 어느 한 것도 다른 곳에서 나지 않는 것처럼, 오직 이 하나, 이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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