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①
흔히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지난 우리고장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며 예측하기 위해 선현들이 남겨주신 향토사는 소중한 우리들의 자산이다.
이제 어렵게 이어오고 있는 우리 선현들의 기록에 더 채울 부분이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채우고, 다듬고 그리고 바로 써서 선현들이 물려주신 소중한 기록들과 함께 우리고장 법성의 정사로 후세에 남기는 전통을 우리 모두 이어 가자.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화와 앞선 과학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갑오경장(1894년) 전후를 우리나라가 개화하기 시작하는 개화기로 보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새로운 교육제도가 수립되고 상당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광군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고장 영광군에서는 갑오개혁기의 소학교령에 의해서는 학교가 설립된 바 없고, 통감시대에 이르러서야 영광과 법성포 두 곳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영광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광흥학교가 1907년 5월5일, 법성포초등학교의 전신인 법성사립보통학교가 1908년 7월4일에 설립되었고 이 두 학교가 영광군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제2장 근대 교육 제1절 개화기 교육)"라고 1971년도에 발간된 전남교육사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법성사립보통학교 초기에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1901∼1985)선생의 미발간 유고집인 <법포견문기>와 김영남 선생이 집필한 법성향지편찬위원회의 <법성향지>에는 1906년도에 법성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고 기록돼 있고, 1925년 2월28일자 '학부형회 발기' 제하의 동아일보에는 개교한지 18년이 됐다고 했으니 1907년에 설립된 학교로 소개돼 있다.
멀지 않아 100년이 된다는 법성포초등학교의 학교사(學校史)는 이 같이 이 학교의 개교 100년이 되는 해가 <법성향지>의 기록대로라면 내년인 2006년이 되고, <영광군지>의 기록대로라면 앞으로 3년 후인 2008년이 되며 동아일보의 기사대로라면 2007년이 된다.
이 학교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교육대관>의 기록대로 학교 당국의 홈페이지에 '1916년 10월13일에 개교되었다'라고 기록돼 있었고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한 학교이며, 1992년도 개정판인 <법성향지>의 지적대로 졸업생들의 졸업기수가 사실과 다른 학교이다.
그래서 지역의 뜻이 있는 동문들과 재경 향우회 그리고 학교 당국(당시 교장 임종식 선생님)에서 2003년 10월4일 법성포초등학교 총동문회 날에 맞춰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설립연도를 정정해 지금은 이 학교 홈페이지에 '1908년 7월4일 사립보통학교 개교'로 기록돼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 학교가 두 차례나 큰불이 나 1945년 8·15 광복 이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수집된 일제 강점기의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에 대한 문헌은 <법성향지>나 <영광군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1930년 발간한 조선총독부의 <조선교육대관>과 1971년 발간된 <전남교육사> 그리고 동아일보 등 당시의 일간지 기록과 당시에 사셨던 신명희 선생의 <법포견문기>가 전부이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학교사 모두가 구전(口傳)이나 옛 어른들의 증언이 상당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법성사립보통학교 시대 - 4년간의 동조루시대
우선 1988년 초판 발간된 <법성향지>(편찬위원장 임선혁, 집필자 김영남)와 1992년 발간된 개정판 <법성향지>(편찬위원장 홍성수, 집필자 김영남) 그리고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법성중학교 전신인 법성수산중학교 초대 교장 역임)의 육필 원고인 <법포견문기>(1985년 추정)를 살펴보면 "1906년 사립법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동조루(董漕樓)를 교사로 정한 후…이택섭(李澤燮) 등 여러 사람이 발기(發起)… 서울에서 최한주(崔漢柱) 교사를 초빙하고…(후략)"라고 기록돼 있다. 1906년 학교가 설립됐다면 법성사립보통학교는 영광군 최초의 신식학교가 된다.
조선시대 법성포에는 전라도 지역의 최대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이다. 전라도 지역의 각 고을(군·현)에서 거둬들였던 세미(稅米)는 일정한 검사과정을 거쳐 수도 한양으로 운송됐는데, 각 고을에서 수납했던 그 세미를 검사했던 곳이 지금의 법성면 진내리 74번지 일대의 조대(租臺)마당에 위치했던 동조루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법성진성(옹성)의 축성 연대인 1514년(중종 9년)부터 1530년(중종 25년) 사이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되며 조창이 혁파(革罷)됐던 1895년(고종 32년) 이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목포에 사는 어느 재력가가 헐어 배로 실어갔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바로 이 동조루와 그 옆에 자리했던 관아의 객사건물이 개화기의 소위 신식학교라 불렀던 법성사립보통학교 자리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과 옛날 형방청(刑房廳)이 있었던 청년회관터 일대를 지금도 '핵고당'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고장 최초 신식학교 세운 광산이씨
<법성향지>와 <영광군지>에는 이 학교를 설립한 이가 '이장섭, 이택섭 두 형제분이다'라고 기록돼 있는 반면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의 <법호견문기>에는 '이택섭 등 수인(數人)이 발기하였다'라고 기록돼 있고 학교를 발기했던 여러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장섭, 이택섭 - 광산인(光山人) 상서공 순백의 후손 - 두 형제분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법성포초교 30회 이기방님의 할아버지이고, 법성포초교 35회 이충기, 법성 금성당 금은방 이기운, 법성초교 44회 이기욱님들이 모두 이 가문이다.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는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개교과정이 '처음에 이장섭, 이택섭 두 형제가 사재를 털어 '조대마당'에다 학교를 개설한 당시에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개설인가나 학제 따위가 분명치 않은 서당과 같은 형식으로 운영된 듯 싶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 학교의 개설 당시인 1906년은 조선교육령이 시행되기 전으로 관계당국의 개설인가나 학제 등이 분명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교육사의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대이다.
<영광군지>의 기록에서 영광읍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학교 보다 1년 뒤인 1907년 도동리 노인당 자리에 '한일학원'이 설립돼 약 6개월 정도 운영하다 문을 닫았고, 1908년에 향교의 명륜당에 '광흥학교'가 설립돼 2년간 운영되다가 폐교됐는데
당시 광흥학교의 학제가 1년간의 속성과정으로 35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사진에서 보듯 광흥학교는 제1회 졸업생들의 졸업 기념사진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음에 비추어 당시 법성포의 발전상으로 보아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졸업사진도 소장하고 있는 분이 있을 법한데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법성사립보통학교의 학제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②
흔히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지난 우리고장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며 예측하기 위해 선현들이 남겨주신 향토사는 소중한 우리들의 자산이다.
이제 어렵게 이어오고 있는 우리 선현들의 기록에 더 채울 부분이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채우고, 다듬고 그리고 바로 써서 선현들이 물려주신 소중한 기록들과 함께 우리고장 법성의 정사로 후세에 남기는 전통을 우리 모두 이어 가자.
이 글은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學校史) 뿐만 아니라 법성향토사 전체를 공론화하기 위해 보다 정확한 향토사를 기록하기 위한 On-Line 계획의 일환으로 시도된 글이다. 따라서 이 글에 미흡한 부분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 보완이 필요한 부분과 반론 등은 이 글을 읽는 이 누구나 개진하실 수 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학교사의 기록에 소중한 사료나 문헌이 있으신 분은 학교 또는 운영위원회(위원장 정명수)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 개교 100주년을 즈음해 학교 운영위원회에서는 법경헌에 자료를 의뢰, 기록을 정리해서 게재하게 됐다. / 편집자 주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개교 당시 교사진도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초대 교장으로는 서울에서 최한주를 모셔 왔는데 주로 이 분이 신학문분야인 지리, 역사, 이과(과학), 산학통론(수학), 창가 등을 담당했다. 체조(체육)교사로는 수군(水軍)의 훈련교관으로 있던 강치선(별명 강서울)이다.
수군진영이 혁파되기 전부터 서울에서 부임해 온 군관(장교)인지, 한말의 군대 해산령으로 인해 구식 군대가 일본군과 일대 반격전을 벌이고 흩어져 각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봉기에 가담했을 때 이 고장으로 내려왔는지는 분명치가 않으나 이 분은 진내리 청년회관 위쪽에서 살았고, 1935년경까지 살아 계셨다.
키는 컸으며 몸이 깡마르고, 두 눈이 횅하니 들어갔으나 광채가 났다. 그러나 매우 인자한 성품이어서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어린 눈에도 무척 생활이 곤궁한 눈치였다. 용덕리 신계동 출신 유학자 소남(小南) 이원백이 서화와 한문교사로 초빙됐는데 이 분의 후임으로 김학서당의 김봉재가 취임했었다.
위 글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학서당의 김봉재님과 전간제(田艮齊)(1841∼1922) 선생의 당시로서는 유명했다는 초달(楚撻)의 일화도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제자를 회초리로 내려친 전우 선생
『김봉재 - 김정환의 조부 : 전형적인 주자학의 신봉자였다. 국치 후 시류에 따라 일시 보통학교 한문선생으로 출강하고 있었는데, 이 때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부안에서 은거하던 간제 선생이 법성에 들려 제자 김봉재를 찾았으나 그가 출타 중이었다.
행선을 물으니 훈도가 되어 직장에 갔다하지 않는가? 이 때 김봉재는 일본사람들이 설립한 보통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간제 선생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봉재를 데려다 내 앞에 꿇리도록 하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윽고 봉재는 간제 선생 앞에 꿇어앉았다. '네 이놈! 봉재야! 네가 소위 글을 배운 선비의 몸으로 나라의 비운을 어찌 티끌만치도 생각지 못하느냐? 네가 지금 무슨 할 짓이 없어 왜놈의 녹으로 더럽게 창자를 채우고 있느냐?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하고 회초리를 한다발 꺾어 오라 하여 다 큰 어른의 종아리를 걷게 하고 호되게 매질을 하였다.』
담양전씨인 간제 전 우는 13세때 사서삼경을 읽고 20세 안에 초과, 중과 등 양과에 오른 수재였고. 만년에는 부안의 계화도에 은거하며, 많은 후진들을 길렀으며, 우리나라 500년 유문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한말에 성리학의 대가였던 분이다.
법성사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들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초창기 입학생으로는 항일 독립투쟁으로 일생을 바친 야인 고경진님을 필두로 나계형, 나질순(6·25 동란 때 법성면장 역임, 법성리 나연섭님의 할아버지), 법경 김장근(법성중의 전신인 법성실업중의 재단이었던 양영학원 이사장 역임,
재경향우회 김효진, 단오보존회 사무국장 김기진님의 할아버지), 김돈하·김규하(진내리 천일약국 김관중님의 아버지) 형제, 임응섭, 조덕연, 나상희, 김갑선, 배상진(인의당약국 배정백님의 작은 할아버지), 시은 신복섭(인천에서 신명약국을 운영하고 계시는 신의명, 법성초교 40회 신금수님의 할아버지), 이경섭
그리고 신명희(8·15 광복후 법성중의 전신인 법성수산중학교 초대 교장 역임) 등이었다고 하는데 학적이나 사진 등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할 자료는 없고 당시에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법성향지>에 수록된 기록이다.
이 학교는 후에 6∼7세 아동으로부터 청·장년까지 100여명에 달하여 갑 을 병 정 4개반으로 편성해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대 교장이셨던 최한주님이 약 2년여 동안 재임하시다가 서울로 가시고, 1908년 제2대 교장으로 평양의 대성학원 출신이신 계희선님을 야인 고경진 선생이 모셔 왔는데 당시에는 학비도 무료였고,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학생수는 늘어나고 학교의 재정수입은 열악하니 당시의 학교 운영이 아주 어려웠던 모양이다.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은 <법포견문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2년후 최 교장의 후임으로 평양에 계희선 교사가 부임하고, 갑(甲)반에 고경진,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등의 우수한 접장(接長)들이 있어 조교사역(助敎師役)을 하고 이사장도 장대호 면장(주 : 당시 법성면장 - 진내리 장기주님의 아버지)이
취임해 재정을 조달했으나 곤란이 수반되므로 계 선생도 가고, 고경진, 나계형 등이 전력으로 (학교를)유지했는데, 고경진은 불고가사(不顧家事)하고 학교에 전념하니, 가세는 점쇠하고 영락(零落)하여, 문자 그대로 가옥이 도괴(倒壞)됐다.'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③
법성사립보통학교가 개교한지 4년만인 1910년, 법성관립보통학교가 조선시대 형방청 건물이었던 진내리 123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청년회관 건물을 이용해 개교하게 되며 초대 교장으로 일본사람인 마쓰오까(松岡誠)가 취임하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법성에는 관립보통학교와 사립보통학교가 1910년부터 병존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법성관립보통학교는 옛 관서당을 통합하고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관립학교로의 전환을 집요하게 종용하기에 이르나 법성사립보통학교는 1920년까지 10여년 동안, 후에 공립학교가 된 관립학교와의 통합을 반대하고 빈약한 재정으로 학교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이 학교의 조교사역(助敎師役)을 했던 1회 졸업생 고경진 선생과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선생 등의 애국독립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법성사립보통학교가 법성공립보통학교로 흡수되고, 교사(校舍)였던 '동조루'도 목포의 어느 재력가에 팔려 헐리자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초기 졸업생들과 신명희 남궁현 선생이 1923년에 비교적 나이가 많은 성인을 대상으로 야학교를 개설해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며 형방청 시대를 이어가게 된다.
<법성향지>에서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신명희와 독립투쟁 활동으로 오랜 감옥살이를 하고 향리에 돌아온 남궁현이 힘을 모아 (중략) 몸소 사립학교(주 : 법성사립보통학교) 때의 동료들과 교단에 섰다. 주로 재정은 신명희가 담당했다.
노동야학교 : 진내리 소재, 현 김장길 집(노동조합)(주 : 현 진내리 408번지)에 개설했다. 법성은 옛날부터 지역적 특성 때문에 노동조합의 세력이 대단했다. 배에서 수산물이나 화물의 상·하선, 육운의 상·하차 등으로 그 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합원 거의가 글을 배우지 못한 문맹이어서 이들에게 눈을 뜨게 하고자 무료로 야학을 시작했으니 (당시 조합장이었던)김돈하와 임응철이 주동이 돼 우리글을 깨우치고 채산학(산수)를 가르쳤다. 물론 학비는 무료이고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했다.
청년야학교 : 그 당시 공립보통학교(주 : 법성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지 10여년이나 지났지만 학비가 없어 학교에 못 다니는 사람의 수가 (학교를)다니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 전의 일은 모르지만 1930년 후반기의 한 달 월사금(한달 수업료)은 그때 돈으로 20전이었고, 둘이나 셋이 한 가정에서 다닐 때는 나머지 아이는 그 반액인 10전이었다.
그래서 둘이 다니면 30전, 셋이 다니면 40전이었다. 아마 지금(주 : <법성향지>의 집필 당시인 1987년)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그때의 10전은 지금의 천원 정도가 된 듯하니 한 사람 몫이 2천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너마 없이 무척 가난하게 살았었다. 수군진(水軍鎭)과 조창(漕倉)이 폐지된 후로 무엇이 남았겠는가? 빈 도가니였다. 농촌의 농민들도 대부분이 소작농이고 농토는 거의 일본사람들이 독점했으니 가난에 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버린 청·장년이 수두룩했다. 이들을 깨우치려 (청년)야학당을 열었는데 그곳이 진내리 옛예배당(주 : 형방청 옆, 현 진내리 201번지)이었다.
글을 가르치는 외에도 미신타파 등 구습타파와 은근히 애국 독립사상도 고취시키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궁현 신명희 배상진 최불남(일명 제면) 등이 교단에 섰고, 목포에서 김경애(여)를 초빙했었다.
지금(주 : <법성향지>의 집필 당시인 1987년) 80세 안팎의 노인들이 대개 여기서 공부를 했고, 후에 상업을 하는 데에도 이때 배운 지식을 실제로 활용하며 생활을 했다.
숙명여자학원 : 그 시대에 여자를 학교에 내 보내는 가정은 거의 없었다. (중략) 이 여 학원에서는 문맹퇴치 외에도 미신타파, 신생활운동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평양에서 김필례(여)를 초빙해 모셔왔다. 그 외의 교사는 앞에서 말한 남자 교사들이 세 학원을 교대로 돌아다니며 공부를 시켰다.
(중략)이 세 학당들은 4년후인 1927년 신명희가 음악활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게 되고, 남궁현도 다시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됨에 노동야학교는 김돈하 임응철이 계속 유지하고, 청년야학교는 예배당에서, 숙명여자학원은 김동주가 맡아 운영해 나가다가 재정난과 일제경찰의 방해로 얼마 안 가서 폐쇄하게 됐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경진 선생, 학교 문전에 내걸린 일장기 찢는 배일사상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④
당시 법성사립보통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은 <법포견문기>에서 '어느 날 밤에 학교를 갔더니 웬일인지 서편 방에 고경진,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외 여러 사람이 무언가 소곤거리더니 나중에는 고 선생이 책상을 치며 통곡을 했다.
나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슨 사유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만 생각하였다. 그후 몇일 후에 우연히 고경진 선생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학교(주 : 청년터에 위치했던 법성관립보통학교) 문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되어 서 있었다.
이것을 본 고 선생은 한동안 말을 못하더니, 일장기를 떼어들고 찢으려다가 잘 안 찢어지자 발로 딛고 찢어 내던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일본사람들은 아연실색하였고,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고 선생은 산으로 도주하였고, 일본사람들은 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깊은 의미를 몰랐다'라고 이 분들의 배일 활동상을 소개하셨다. <법성향지>의 기록으로는 고경진 선생의 나이 24세 되시던 1911년, 법성포에 도장관(도지사)의 시찰이 있을 때의 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 일로 고경진 선생은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타의에 의해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교단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교단을 떠나며 한편의 시를 남겼는데, 후에 이 시에 곡을 붙여 부르니 이것이 법성 사람들의 애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1절 : 슬프도다 우리민족은 4천만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福樂)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이 왠 말인가? (후렴)철사(鐵絲) 주사(蛛絲)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레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動)켔네. 일간초목(一竿草木)도 나의 것이오, 삼천리 강산도 내것이로다.
2절 :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 전에 꿈틀거리고, 작은 벌도 제 몸 다치면 반드시 한번은 쏘고 죽는다.(후렴)』
또한 신명희 선생의 <법포견문기>에는 고경진 선생의 일대기가 수록돼 있는데 그의 투철한 배일사상과 철저한 독립운동정신을 엿볼 수 있어 중복을 피하여 다음과 같이 옮겼다.
고송( 松) 고경진(高暻鎭)(덕진;德鎭)(1889∼1942) : 선생은 법성면 진내리 362번지에서 파총(把摠)(각 군영의 종4품 벼슬) 고시은의 아들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과묵하였으며, 개성이 투철하였다. 남다르게 글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경서를 읽어 군자의 도를 지키었다.
(중략)법성사립보통학교 최한주 교장의 인도로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학원에서 수학했다. 1913년 고향에 돌아와 법성사립보통학교 교단에 서게 되었다. 선생은 배일사상과 독립운동 정신교육에 철저하였고 민중운동의 궐기에 전력하였다.
1919년 기미 3·1운동이 발발하자 영광의 위계후 선생과 손을 잡고 법성 만세시위를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하자 그의 항일투쟁은 노골적으로 알려져 일본 경찰의 감시는 물론 투옥하는 등 심한 탄압을 받게 되어 (중략)1920년에 학교를 떠나 해삼위와 북만주를 중심으로 투쟁하다가 군자금 모금차 몇 차례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해삼위파, 북만주파, 북경파, 상해파 등으로 분열되는 것에 가슴을 치고 일시 귀국하였다.
선생은 "애국이란 나라와 동포를 위하여 자기를 버려야 하고, 돈보다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교육과 항일운동에 투신한 후부터 가사를 돌보지 않고 전 정력을 구국에 집중하였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극도의 빈곤에 빠지게 되었고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몸 부칠 곳조차 없게 되어 1936년경부터 불갑면 녹산리로 가족들을 집합하게 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출입이 어렵게되자 가족들은 그를 잊어야 했고, 그 역시 가사는 물론 처자까지 머리에서 지워버려야 할 아픔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선생이 지치고 지친 병든 몸으로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기 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가 되어 자기 집이 토담집인지, 자기 부인이 얼마나 늙었는지, 아들이 얼마나 장성하였는지 조차도 모른 채 1942년 5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의 호(號)는 고송( 松)이며 관(貫)은 고흥이다.』
고경진 선생의 호가 문적에는 야인(野人)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에는 고송으로 기록되어 있고, 얼마전 전영광문화원장을 역임하신 조남식 선생도 고경진 선생의 본관을 고흥으로 잘못 기고하셨는데 아마 신명희 선생의 <법호견문기>에서 잘못 인용하신 듯 하다. 고경진 선생의 본관은 고흥이 아니고 장흥임도 아울러 알려 드린다.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⑤
'관서당'을 병합하고 법성사립보통학교와 통합에 실패한 법성관립보통학교는 6년간의 진내리 형방청시대를 마감하고, '1916년 7월13일, 인의산 아래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면서 정식으로 법성공립보통학교로 승격되며 2대 교장으로 일본 사람인 하야시가 부임했다.<법성향지>'고 한다. 그리고 법성사립보통학교를 흡수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상황을 <법성향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0년 국치(國恥)의 비운을 맞게되고 학교(주 : 법성사립보통학교)도 일본의 법과 제도에서 예외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주 : 일본사람)이 강요하는 절차에 따라 새로이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야만 했다. 일단 인가를 얻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때부터 인가 관청으로부터 매사에 간섭을 받아야만 했다.
교과목으로부터 용모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제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생도의 두발문제였다. 입학의 선행조건이 단발이었으니 그 때문에 입학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에 '관서당(官書堂)'은 보통학교(주 : 관립학교)와 통합하게 됐다. 일제는 법성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법성보통학교(주 : 법성사립보통학교)를 자기들의 수중에 넣어야만 의도하는 대로 식민지교육을 시도할 수가 있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성사립보통학교의)공립학교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재정이 빈약하다는 취약성을 이용해 공립학교로의 전환을 집요하게 종용했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들은 경제적 난관임에도 그들의 유혹을 단호히 거역하였다. 그들은 도리없음을 깨닫고 편법을 취했다.
1920년에 남궁치(南宮治)를 내세워 새로운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는 형식을 취하여 기존의 사립학교(주 : 법성사립보통학교)를 인수해 버린 것이다. 그들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교육대관>이라는 문헌에는 연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치(明治) 43년(주 : 1910년) 사립보통학교로 설립하였다가 대정(大正) 9년(주 : 1920년) 8월31일 법성공립보통학교의 인가를 얻어, 9월13일에 개교, 동 15년(주 : 1926년)도에 학년 연장의 인가를 취득, 학급 수는 6학급, 아동 수는 남 286, 여 48 계 334(중략) 졸업생 개요는 관·공립 3, 내지 3, 가사 종사자 141, 상점 13, 상급 학교 16, 사(死) 4, 교장 임정헌(林正憲)(일본인)(후략)」
그러나 -1929년 1월31일자 동아일보의- 동일(同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정(大正) 9년(주 : 1920년) 9월13일에 설립, 설립자는 남궁치(南宮治), 설립시 생도수 81명, 현재 생도수 325명, 교장 임재헌(林在憲)」이상 열거한 양 자료를 비교해 보면 명백해 진다.
일본사람들은 동조루(董漕樓) 가교사(假校舍)에서 운영되는 사립학교(주 : 법성사립보통학교)를 자기들의 수중에 넣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하여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법성리(주 : 인의산 충혼탑 아래 옛법성공립학교 터)에다 교사와 운동장 등 좋은 교육시설을 구비하여 1920년 새로운 공립학교로 개교하자 재정난에 빠져있던 사립학교(주:법성 사립 보통학교)는 자연히 공립학교(주 : 법성공립보통학교)에 흡수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법성향지>나 <영광군지> 그리고 <법포견문기> 모두 당시 법성사립보통학교가 제1차 조선교육령(1911년 8월 공포)에 의거, 관계당국으로부터 4년제 보통학교로의 설립인가를 취득한 후 법성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되었는지, 흡수 당시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법성공립보통학교에서 학력을 인정받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즉 <법성향지>의 성제동 대성학원(大成學院)편에서는 '4년 졸업생 전원이 1941년에 '법성포 동 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학되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법성사립보통학교는 '자연히 공립학교에 흡수당하고 만 것이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앞의 성제동 대성학원은 법성사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신 나상희(羅相熙)님과 장성 출신 성재원(成在元)님이 1915년에 설립하신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써 1941년에 법성 동 공립보통학교로 학생들을 편·입학시키고, 1948년에 법성포국민학교 분교로 흡수되었다가 1955년 폐교되기까지 4년제 졸업생 36기 약 1,110명을 배출했던 학교라고 한다.
그리고 법성공립보통학교가 화재로 동짓재 넘어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의 학교 상(象)과 주요연혁을 <법성향지>는 '학생들의 연령층은 20대 전후였고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1925년 4월1일에야 6학년제 6학급의 학교로 승격했다.
1938년에 교육령 개정으로 법성포 동 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는데 이 해에 화재로 일부 교사(校舍)가 소실되고 교사 전체가 퇴락하여 대덕리 527번지 현 부지에 야산을 깎아 현대식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1939년 9월1일에 이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⑥
당시 수학연한을 살펴보면 법성사립보통학교가 문을 연 1906년에는 앞의 영광 광흥학교의 예에서 보듯이 1년제 속성과정의 학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부터 1910년까지는 2년제로, 제1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된 1911년부터 1924년까지는 4년제 학제였고 1925년부터 비로소 지금과 같은 6년제 학교로 바뀌었다.
따라서 <법성향지>에서 인용한 조선총독부가 발행 <조선교육대관>에 '대정(大正) 15년(주 : 1926년)에 학년 연장의 인가를 취득'했다는 기록은 1925년 1월31일 같은 해 3월5일, 3월6일자 당시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와 설봉(雪峰) 신용상(申鏞庠·1919∼1989) -법성초교 30회 신의명, 40회 신금수, 45회 신광영,
47회 신경호님의 아버지-님의 사진에서와 같은 졸업증서 등으로 보아 1924년부터 관계당국에 진정하는 등 지역주민의 노력으로 1926년 관계당국의 학년연장 인가를 받았으나, 1925년 입학생부터 6년제 학제를 소급 적용해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알려져 있기로는 6·25 전쟁때 육군 소위(국방군)로 복무하다가 순국하시어 당시 뜻있는 이들이 추모비를 세워 이 분의 충용(忠勇)을 기리고 있는 백인기(白仁基) 지사 - 법성초교 38회 백미라님의 아버지 - 가 1925년에 법성공립보통학교 6년제 제1회 졸업생이었다고 한다.
법성보통공립학교 학년연장과 관련된 1925년 1월31일, 동년 3월5일, 3월6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민대표 진정, 도지사 예방을 기회로… 영광 법성포에서는 10월26일(주 : 1924년) 오후 4시 반에 순시차 영광군을 방문한 장헌식 도지사에게 법성포 인민대표 남궁낙(南宮樂)외 두 사람이 아래와 같이 진정하였다고 한다. 1. 보통학교 학년을 연장하고 여자 반을 별도로 설치하여 여자 선생님을 증원 할 것(후략)」
「학년 연장 운동, 학부형회에서 구체안을 제출, 전남 영광군 법성공립보통학교에서 지난 1월에 학부형회 정기총회가 개최된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거니와 당일 70여명이 모여 상오 12시경에 나계형씨의 사회로 경과보고, 취지설명, 규약통과, 임원선거, 유지방침, 기타사항의 결의가 있은
다음 신명희씨의 축사로 폐회하였다는데, 당선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하며, 그 날 밤 8시경에 학부형회 임원들과 지역 유지 여러 사람들이 면사무소에서 모여 동교(주 : 법성공립보통학교) 학년연장문제를 토의하였는데 빠른 시일 내에 면민대회를 열어 면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군과 도 당국 등에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함.
(법성)학부형회 임원 명단 : 회장 장대호(진내리 장기주님의 아버지), 총무 신복섭(법성초교 30회, 신의명님의 할아버지), 재무 김정록, 서기 최연국, 대의원 윤형국 백남진 남궁홍 남궁저 이경섭 최제면 오형연 이강식 김종열 나질순(6·25 당시 법성면장 역임, 법성리 나연섭님의 할아버지)」
「4년을 6년에, 법성공보(공립보통학교의 약칭) 학부형의 운동, 이미 보도한바와 같이 영광군 법성 공립 보통학교가 4년제인 것을 6년제로 연장하며 신학기부터 보습료 설치 기성의 건으로 계속하여
지난 3월 2일 저녁 7시에 동교(법성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 주최로 학부형들과 지역 유지 40여명이 면 사무소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진행방책을 강구하였는데 교사(校舍) 건축비와 보습료 설치비는 오는 면민대회에 상정하기로 하고 군 및 도 당국과의 교섭은 면장 박종관과 남궁낙, 나계형 세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동 기성회 운동비는 지역유지 남궁홍씨가 미리 부담하였다고함.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⑦
법성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인의산 교정의 화재로 22년간의 인의산시대를 마감하고 1939년 9월1일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가 자리로 옮겨 대덕산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고 1941년 4월1일, 교육령 개정으로 학교의 이름이 보통학교에서 법성포 동공립국민학교로 바뀌게 된다. <법성향지>는 1940년대 당시의 학교 상황을 '1943년 졸업반까지 1학급 남녀 혼합학교였는데, 여학생 수가 10명도 안되었다.
그 다음해 졸업반부터 2학급이었는데, 남학생반 1학급과 여학생반 1학급이었지만 여학생 수가 한 학급에 부족하여 3분의 1정도의 비교적 어린 남학생들을 섞어서 한 학급을 편성하였다.
'1940년경까지 홍농, 전북 공음의 소학교가 4년제였고, 성제동 대성학교가 4년제, 용현부락의 간이학교가 2년제여서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이 모두 법성포 동공립보통학교(후에 심상소학교)의 해당 학년에 전학. 편입돼 여기에서 6학년 정식과정을 마쳤다.' '한달 월사금이 80전이었고, 한 집에서 둘 이상이 다니면 나머지 학생은 반액인 40전이었는데, 이 돈이 없어 못 다니는 학생이 다니는 수보다 훨씬 많았다.'
'교무실 앞 히말라야시다 거목(巨木)과 기타 정원수는 1939년 신축 당시에 광주에서 정원사들이 와서 심은 것이고, 운동장 주변의 벚꽃나무는 법성리 전(前) 교사(주 인의산 교정) 운동장 가에 있던 것을 옮겨 심은 것들이다.'
'부임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인의산에서 대덕리 신교사로 이전 직후까지 쓰쓰미다(堤田)라는 교장이 재직했었고, 1941년에 와다(화전(和田)교장으로 교체되었다. 쓰쓰미다 교장은 철저한 황국신민주의자로 학생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소위 '닝꾸단랭(忍苦鍛鍊의 일본말)'을 시킨답시고 서릿발이 내리는 겨울철에도 어린것들을 맨발로 등하교시켰다.
발이 시려 견딜 수가 없던 꼬마들이 선생님의 눈을 속여 고무신을 신고 학교 근처까지 와서는 민가에 고무신을 맡기고 등교를 했다가 하교(下校)때에 다시 찾아서 신고 돌아가기도 했다.
쓰쓰미다 교장은 그 후 전라남도 학무과 장학사로 승진되어 갔다가 해방되던 때까지 재직하고 있었다. 이전하기 전, 구 교사시대(주 인의산에 학교가 있을 때)의 한국인 훈도(주 선생님)는 범재진(范在鎭), 김형석(金炯錫), 정운경(鄭雲慶) 제씨였고 유일하게 여선생으로 영광 출신 노함풍(魯咸風)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지금 60세 이상 70세가 가까운 분들(주 <법성향지>가 집필된 1987년 기준)은 이 분들에게서 배웠다.
그 중 일본인 요시노(吉野)라는 훈도가 있었는데 일본말 교가를 지었다. "조선반도 남단에 세상에도 이름 높은 법성…"으로 시작되는 가사였다. 작곡은 아마도 범 선생(주 범재진)이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범 선생은 바이올린을 잘 켰는데, 으레 학예회 때는 전등불을 모두 끄고 바이올린 독주를 했었다. 교사(校舍) 이전(주 1938년 이전)에 범 선생은 곡성으로, 정 선생(주 정운경)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로, 김 선생(주 김형석)은 송정리 서소학교로 전근하고 남녀 일인 교사들이 판을 치게 되었는데 일제 말기에는 교사들이 군대에도 나가게 되고 학급 수가 늘어나서 교사가 부족하게 되니 중학교를 졸업한 이 고장 출신의 청년들도 여러 사람이 교사직에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덕과 진양 그리고 대성학원
이와 같이 법성사립보통학교나 법성공립보통학교의 초창기 학교사(學校史)는 1938년 그리고 1946년 두 차례나 학교가 불이나 학교에 소장되어 있어야 할 사료나 문헌보다는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던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법성포초등학교의 학교사(學校史)인 성제동의 대성학원이나 예전의 삼덕초등학교 학교사는 통폐합 과정도 명료하고, 화재 등 특별한 사고도 없었던 학교였기 때문에 오히려 법성사립보통학교나 법성공립보통학교보다는 더 많은 사료나 문헌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성향지>에서는 성제동에 있던 대성학원은 '1915년, 이 고장에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가 대덕리 성제동에 세워지면서 포교의 일환책으로 설립되었다. 4년제로, 설립자는 장성군 출신의 장로(長老) 성재원과 성제동 출신의 한학자요 (법성)사립보통학교 제1회 출신인 나상희였다. 초대 원장에 나명수, 부원장에 안동운이었다.
학생은 대부분 가정이 빈한하고 보통학교 적령기를 놓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학비는 무료이니 포내(浦內)(주 법성포내)는 물론 외촌(外村)(주 법성포외)의 많은 소년과 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기혼자도 있었다.
2대 원장에 영광출신 정헌영, 3대 원장에 전북 공음출신 류억석, 4대 원장에 전북 무장출신 손성태, 5대 원장은 일본 제국대학 출신 손진환, 6대 나상희, 7대 안동운이었다. 1930년에 성제동 김옥천 여사의 헌금으로 교사를 신축했다. 그때까지 교사는 예배당 마루바닥에 석유 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를 했었다.
1941년 4년 졸업생 전원이 법성초 동공립보통학교(주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학되었다. 그 후 1948년에 법성포초등학교 분교로 흡수되었다가 1955년에 폐교되고, 법성포국민학교로 병합(후략)'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삼덕초등학교는 '일정치하인 1936년 4월21일에 법성포 동공립국민학교 부설 용덕간이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동년 6월7일 개교하였다. 1944년 3월31일에는 6년제(종전에는 2년제)로 승격되면서 법성포 남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50년 6월5일에는 현재(주 <법성향지> 집필 당시인 1987년 현재)와 같이 삼덕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후략)'라고 기록돼 있다.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⑧
지금까지의 기록이 '법성 향토사'의 중요한 한 축인 1945년 이전까지의 법성포초등학교 발자취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적 사고에 의해 재구성할 수 있으나 사료나 문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 많이 포함되면 될수록 후세의 이해관계인들로부터 거친 비난을 받게되며 공정한 기록으로서 가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법성포초등학교의 학교사(學校史)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차례 화재로 1945년 이전의 학교사는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학교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개교 초기 학교사를 정립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설립연도의 설정은 지금까지 논란의 소지가 남아 있다.
이 글은 지난 10월2일 법성포초등학교 총동문회에 때 맞춰 1945년 이전 법성포초등학교의 새로운 학교사를 발굴하고 재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포견문기>와 <법성향지>, <영광군지> 등에 수록된 글을 가능한 원문을 인용해 종합 정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