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별서(別墅) 정원 |
3-1. 순천관(順天館) 정원 |
도성의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 곧장 북으로 3리가면 경시사(京時司)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돌아 5리가량 가면 광화문(廣化門)에 이른다. 이 광화문에서 다시 서쪽으로 돌아 2리를 가면 매우 높은 산등성이 하나를 지나 좀 북쪽으로 향해 2리를 가면 곧 순천관에 이른다. 바깥문에는 방(榜)이 있고, 중문은 청수의용호군(靑繡衣龍虎軍)이 지키는데, 다만 상•중절이 말에 오르내리고 하는 곳으로 쓸 뿐이다. 정청은 9영(楹)인데 규모가 장대하고 건축이 임금의 거처를 능가한다. 외랑은 30간인데다른 물건은 두지 않고, 단지 官會 때에만 중•하절의 술마시는 자리를 거기에 늘어놓을 뿐이다. 뜰 가운데는 작은 정자 둘이 있고, 그 중간에 막집(幕屋) 3간을 만들었는데, 전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왕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정청 뒤에 지나다니는 길이 있고 그 가운데 낙빈정(樂賓亭)이 세워져 있는데 좌우 두자리를 정사와 부사의 거실로 하였다. 내랑(內廊)은 각각 12자리인데, 상절이 나누어 거처한다. 서쪽 자리의 남쪽이 관반관(館伴官)의 자리이고 그 북에다 조서를 봉안하였다. 양쪽 곁채에는 도관(道官)을 거처시킨다. 동쪽 자리에는 堂이 있는데 도활관과 제활관의 자리이고, 또 그 동쪽은 서장관(書狀官)의 자리이다. 역시 낭옥(廊屋)이 있는데 심히 넓어 중•하절이 차례에 따라 거처하고 뱃사공도 거기에 거처한다.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정사와 부사 이하에 각각 방자를 주어 심부름을 대비시켰다. 동쪽 자리의 남쪽 복판에는 청풍각(淸風閣)을 지었고, 서쪽 자리의 북쪽에는 산세에 기대어 향림정(香林亭)을 지었는데, 모든 창을 열면 산을 대하게 되고 맑은 물이 감돌며 높은 소나무와 이름 있는 화훼가 울긋불긋 서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시설물과 기명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게 없다. 앞서 고려 문종代 왕휘(王徽)가 이것을 세워 별궁으로 썼는데, 중국 宋 神宗代부터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곳이 없어 고쳐서 관사로 하고, 순천(順天)이라 명명하였다. |
3-2 문수원(文殊院) 정원 |
경운산 산기슭에 자리잡은 淸平寺를 중심으로 하여, 절 앞과 절 북쪽 골짜기에 조성된 정원이다. 청평사는 본래 文殊院이라 하였는데, 고려 광종 24년(973) 당나라에서 온 영현선사(永玄禪師)가 경운산에 백암선원(白巖禪院)을 창건하였고, 그 후 문종 22년(1068)에 강원도 감찰사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개칭하였다. 그 후 그 아들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29세에 상을 당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경운산에 들어가 산 이름을 청평산이라 고치고, 보현원도 문수원이라 하였으며, 10여채의 庵, 堂, 軒, 亭을 지었다. 문수원 정원은 편의상 북원, 중원, 남원으로 나뉜다. 거북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들어가면 구송폭포(九松瀑布)와 폭포의 북쪽에 있는 객사 터를 만나게 된다. 청평사의 서쪽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개천의 왼쪽으로 영지(影池)가 있는데, 이 못은 청평사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지(南池)라고도 한다. 넓이는 동서 길이는 남쪽 하단 부분은 8m, 북쪽 상단부분은 12m이고, 남북길이 17m로 윗쪽이 큰 사다리꼴 모양이다. 북쪽의 부용봉(芙蓉峯)의 바위를 잘 비추어 줄 수 있다고 보아 影池라 한다. 또 바위의 모습을 잘 비추기 위해서는 못의 수면이 조용하여야 하므로, 개천의 물을 물레방아간 뒤쪽 큰 바위 밑으로 도랑을 설치하여 끌어들이고, 영지 북쪽 돌무더기 언덕 사이로 스며들어, 못으로 흘러들게 하였다. 흘러든 물이 고요하도록 영지 북쪽에 수중보를 만들어 일단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수중보의 동쪽 모서리에 25cm 정도 터 놓은 곳으로 영지에 물이 흘러들어가데 하였다. 못의 물은 다시 동쪽 벽 네 곳에 만든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의 출수구로 흘러 나가고, 또 동남쪽 모서리에는 비가 많이 왔을 때를 대비하여, 못 바닥에서 75cm 높이에 폭 25cm의 도랑을 설치하였다. 도랑의 바닥 땅속에는 나무홈통(木桶)을 설치하였는데, 외호석축(外護石築) 사이로 흘러드는 물을 모아 배수하는 시설로 추정한다. 영지 안에는 세 개의 돌이 있어 삼신선산(三神仙山)을 표현한다고 하는데,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영지의 북쪽으로는 모정터(茅亭址)와 돌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영지의 서쪽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갈래로 갈라진 실개천 사이에 있는 남원(南苑)에 이른다. 이곳에는 좌선석(좌선석) 3기와 거북 모양의 돌, 복희암(福禧庵) 터가 있다. |
한편 중원(中苑)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청평사에 이르고, 청평사의 서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냇물을 따라 더 깊은 골짜기로 370여 미터 들어가면 북원(北苑)의 영역에 다다른다. 북원 영역은 이자현(李資玄)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라 한다. 이곳 냇물에는 세 번째의 폭포가 있고, 냇물 서쪽으로 석축단(石築壇)이 있다. 북쪽으로는 좌선석 5개의 돌들을 모아 둔 곳과 모정 터가 있다. 다음 이곳에서 더 북쪽으로 들어가면 네 번째의 자연폭포가 있고, 폭포의 동쪽으로는 석축단과 좌선석, 그리고 자연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들의 서쪽 냇가에는 돌들을 깔아 아래 인공폭포에 이른다. 인공폭포의 동쪽으로는 자연바위와 돌무더기들이 있고, 다시 이 돌무더기 서쪽으로 위의 인공폭포가있다. 인공폭포는 북쪽으로 높이 1.7미터, 폭 90센티미터의 큰 돌 3개를 중앙에 세우고, 그 위에 돌들을 첩첩이 쌓아 돌산(石山) 모양을 이루었다. 폭포의 높이는 2.3미터나 된다. 인공 폭포의 동북쪽으로는 거북이 모양의 돌무더기가 있고, 이곳에서 더 북쪽으로 들어가면 다섯 번째의 자연폭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