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 성실'의 대명사 LG 박용택. 그는 '열심히 뛰고도 기록을 인정받지 못한 아픈 기억'이 있다 |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다른 종목도 기록을 중시한다. 기록 자체만으로 승패나 순위가 결정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말하기 어렵다. 팀 평균자책과 타율이 높아도 그것이 곧장 승패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야구를 ‘기록중심의 스포츠’라고 하는 건 다른 종목에 비해 기록이 방대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패만큼이나 팀과 개인 기록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박동희의 야구기록]은 성적이나 데이터에 집중하는 연재물은 아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래 올 시즌까지 30년 동안 야구장에서 벌어진 갖가지 야구기록 관련 사건, 사고들을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위원들이 어떻게 기록했는가를 살펴보는 장이다. ‘야구계의 사관(史官)’으로 불리는 KBO(한국야구위원회) 기록위원들이 어떻게 야구역사를 기록해왔는지 직접 확인하고, 학습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야구는 ‘역사’를 중시하는 스포츠입니다. 오늘과 내일 경기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성을 갖고 이어집니다. 그래서 야구가 기록을 중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우리는 ‘연속’이 갖는 위대함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롯데 이대호의 9경기 연속 홈런과 한화 류현진의 29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자책점 이하)가 그랬습니다. 두 기록 모두 세계 신기록이라, 의미가 무척 깊었습니다. 일전에 미국으로 취재하러 다녀온 바 있습니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이 무엇이냐’는 주제의 프로그램에 시선이 쏠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엇이 1위를 차지할까’ 궁금해서 끝까지 지켜봤는데요. 놀랍게도 조 다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가 ‘불멸의 대기록’ 1위로 꼽혔습니다. 이유는 “타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상대 투수와 수비수, 공식기록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기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잘한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임에도 그 꿈을 현실로 증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연속’에 관한 것입니다.
전(全) 타석 볼넷으로 출루해도 연속경기 안타는 이어진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보유한 '전설의 메이저리거' 조 디마지오(사진=MLB)
앞에서 조 디마지오를 언급했는데요. 1941년 뉴욕 양키스 소속의 디마지오가 기록한 56경기 연속 안타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미 메이저리그 최다 연속경기 안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프로야구에선 1979년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다카하시 요시히코(히로시마 카프)가 세운 33경기 연속안타가 최다 연속경기 안타 기록입니다. 한국은 잘 아시겠지만,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 박종호(현 LG코치)가 기록한 39경기 연속 안타가 지금껏 대기록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여러분께 한가지 묻겠습니다. ‘A’라는 타자가 있다고 치지요. 이 타자는 39경기 연속 안타를 치고 있었습니다. 대망의 40경기 연속 안타 도전에 들어갔는데요. 공교롭게 1번째부터 3번째 타석까지 볼넷으로 걸어나갔습니다. 9회 말 2사 1루에 다시 타석에 들어섰는데요.
여기서 안타를 치면 박종호의 대기록을 넘어서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록이 중단되기에 A는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다행히 상대 마무리가 자신에게 약했던 투수라, 자신감이 솟아났습니다. 하지만.
아니 이게 웬일인가요. 1루 주자가 갑자기 견제 아웃을 당하는 게 아닙니까. 순간 A는 타석에 주저앉고 맙니다. 40경기 연속 안타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A의 생각대로 그의 대기록 도전은 여기서 멈춘 것일까요?
결론만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야구규칙 10.24(b)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돼 있습니다.
‘연속경기 안타의 기록은 모든 타석이 4사구, 타격방해 또는 주루방해 및 희생번트로 기록될 경우, 이들 요소에 의하여 중단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 없이 희생플라이만 있을 때 그 기록은 중단된다. 선수 개인의 연속경기 안타는 팀의 경기수에 의하지 않고, 선수가 출전한 경기에 따라 결정한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그날 모든 타석에서 볼넷과 몸에 맞는 공, 타격방해 혹은 주루방해와 희생번트만을 기록했을 경우, 비록 안타를 치진 못했어도 연속안타 기록이 중단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연속 안타 기록을 작성 중이었던 타자가 몸이 아파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더라도, 그 경기는 연속 안타 기록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KBO 이종훈 기록위원은 “A가 4타석 모두 볼넷으로 출루할 경우, 연속안타 기록은 중단되지 않고, 그다음 경기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만약 다음 경기에서 안타를 친다면 그 경기가 ‘40경기째’ 연속 안타가 된다는 뜻입니다.
야구규칙엔 ‘선수가 경기에 출장하였으나 타석이 돌아오기 전에 경기가 끝났거나 루상의 주자가 아웃돼 공수교체가 되는 바람에 타석엔 들어갔어도 타격을 완료하지 못하였을 때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중단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가령 A가 9회 말 2사 1루에 대타로 출전했는데, 갑자기 주자가 견제구로 아웃되거나 비바람이 몰아쳐 강우콜드게임이 선언됐다고 치지요. 그래도 타석에서 타격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속경기 안타 기록은 다음 경기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삼성 박종호가 37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을 때 전광판엔 '37'이라는 숫자가 떴다(사진=삼성) |
연속경기 안타 기록 보유자인 LG 박종호 코치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록을 세울 때는 몰랐다”고 하더군요. “무조건 경기에 나갈 때마다 안타를 쳐야만 연속경기 안타가 유지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대기록을 작성하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모든 타석에서 볼넷으로 출루해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중단되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멋쩍게 웃더군요.
연속경기 안타 대기록에 도전 중인 선수라면 3번째 타석까지 4사구나 타격방해, 주루방해, 희생번트로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을 시 굳이 마지막 타석에서 무리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볼넷으로 나가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은 이어지니까요.
이종훈 기록위원은 “연속경기 안타에 도전하는 타자 대부분이 첫 타석부터 안타를 뽑아내려고 적극적으로 타격한다”고 합니다. “다행히 박종호도 그랬다”고 하던데요.
어째서 ‘다행히’란 단어가 붙는지 물었습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연속경기 안타는 타자뿐만 아니라 기록위원들도 부담스러운 기록이다. 실책성 타구를 안타로 주면 ‘대기록을 의식한 퍼주기’란 비난이 날아오고, 안타성 타구를 실책으로 표기하면 ‘대기록을 깼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박종호는 연속경기 안타 기록행진 때 첫 번째나 두 번째 타석에서 시원한 안타를 뽑아냈다.”
연속경기 안타에 마음 졸이는 건 선수와 팬뿐만 아니라 기록위원도 매한가지입니다.
대주자는 연속경기 출전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한국프로야구의 '철인' 쌍방울 최태원(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자, 그렇다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깨기 어려운 대기록’ 2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시 ‘연속’이란 단어가 들어간 대기록이었습니다. 바로 칼 립켄 주니어의 2천632경기 연속 경기출전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 5월 31일부터 1998년 9월 20일까지 무려 16년 3개월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일본프로야구는 기누가사 사치오가 기록한 2천215경기가 최다 연속경기 출전기록입니다. 한국프로야구는 1995년 4월 16일부터 2002년 9월 8일까지 총 1천14경기 연속경기 출전기록을 세운 최태원(현 KIA코치)이 이 부문 기록 보유자입니다.
연속경기 출전은 연속경기 안타보다 규정이 다소 까다롭습니다. 야구규칙 10.24(c)항을 살펴보지요.
‘연속경기출전 기록은 한 이닝의 수비에 출전하거나 또는 타자로 나와 출루하거나, 아웃되는 등의 타격을 완료해야만 계속된다. 대주자로 출전한 것만으로는 기록이 계속되지 않는다. 이 규정에 의한 조건을 갖추기 전에 심판원이 퇴장시킨 선수는 연속경기 출전기록이 계속된다.’
자세히 풀이해드리면.
‘한 이닝의 수비에 출전한다’는 뜻은 아웃카운트 3개에 해당하는 1이닝을 모두 수비수로 나와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야수가 2사 후, 아웃카운트 1개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출전해 그 이닝이 끝나고, 다른 선수와 교체됐다고 치지요. 통계상으론 그 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계산되지만, 연속경기 출전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왜냐? 연속경기 출전기록을 인정받으려면 아웃카운트 1개가 아니라 3개인 기본 이닝을 끝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주자는 연속경기 출전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좋은 예가 있습니다.
2008년 4월 29일 LG 박용택은 사직 롯데전에서 8회 초 2사 1, 2루 때 볼넷으로 출루한 5번 타자 조인성 대신 1루 대주자로 출전했습니다. 그러다 이닝이 종료된 뒤 그대로 경기에서 물러났습니다. 당시 LG 코칭스태프는 박용택이 대주자로 나왔으니 연속경기 출전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뿔싸! 정반대였습니다. 2005년 4월부터 이어온 연속경기 출전기록이 404경기에서 멈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대주자 출전은 연속경기 출전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깜빡했던 것이지요. 박용택은 다음날 경기에 대타로 출전하긴 했지만, 전날 경기가 연속경기 출전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8월에 친 안타가 4월에 기록한 안타로 둔갑한 이유
뉴욕 양키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개인 통산 500호 홈런을 때리는 장면(사진=MLB) |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야구규칙이 있습니다. 10.24(d)항 ‘일시정지경기’입니다.
‘일시정지경기의 잔여분을 치르면서 발생한 모든 기록은 이 규칙의 목적에 맞도록 원래의 경기 일에 치러진 것으로 간주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요.
예를 들어 30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이어오던 A가 일시정지된 경기에서 안타를 치지 못하고, 일시정지경기의 다음 경기부터 다시 9경기 연속안타를 쳤다고 가정하지요. 나중에 일시정지된 경기를 재개했을 때 그 경기에서 A가 안타를 쳤다면 그건 40경기 연속 안타가 아니라 31경기 연속안타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07년 메이저리그에선 뉴욕 양키스 강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500호 홈런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500호 홈런 달성 시점을 언제로 봐야 하느냐’는 것이 격론의 주제였습니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499호 홈런을 기록한 이후 역사적인 500호 홈런을 앞두고 같은 해 6월 29일 우천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던 경기를 7월 28일 다시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속개 경기에서 로드리게스가 홈런을 쳤을 때 ‘이 홈런이 500호 홈런이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야구규칙상으론 500호 홈런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 야구규칙에는 ‘서스펜디드 게임 등으로 지연된 경기가 나중에 속개될 경우, 재개된 경기에서 나온 안타나 홈런 등의 기록은 원래 경기 일에서 이뤄진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드리게스가 속개 경기 일인 7월 28일에 홈런을 친다면 이 홈런은 전월 29일에 친 것으로 간주해 500호 홈런이 아니고 493번째 홈런으로 기록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7월 26일 때려낸 499호 홈런이 하나씩 뒤로 밀리며 순식간에 500호 홈런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게 축하받아야 할 500호 홈런이 갑자기 김빠진 샴페인 신세가 되는 것이었지요.
다행히 로드리게스는 속개 경기에서 홈런을 쳐내지 못했습니다. 8월 5일 경기에서 500호 홈런을 때렸지요. 덕분에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로드리게스가 ‘운명의 장난’을 잘 비켜나갔다면 배리 본즈는 ‘복잡한 야구규칙의 덫’에 걸린 선수였습니다. 자신의 프로 데뷔 첫 안타가 엉뚱한 날로 기록됐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배리 본즈. 프로 데뷔 첫 안타서부터 일이 꼬였던 선수다(사진=MLB) |
1986년 5월 30일(미국시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소속이었던 본즈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결과는 5타수 무안타. 그러나 31일 열린 다저스전에서 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대망의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시즌이 끝나고 보니까 본즈의 프로 첫 안타가 4월 20일로 표기된 게 아닙니까. 4월 20일이면 본즈는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때였습니다.
본즈의 유령이나 아바타가 그 대신 경기에 출전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서스펜디드 게임과 관련한 기록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본즈는 같은 해 8월 11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이 경기는 우천으로 서스펜디드 게임 판정을 받았던 4월 20일 경기의 속개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본즈는 연장 17회 대타로 나와 안타를 쳤는데요. 결국, 이 안타가 본즈의 프로 데뷔 첫 안타로 기록됐습니다.
어째서 이런 규정이 적용되는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요. 경기가 ‘일시정지’ 됐다는 건 경기가 끝까지 진행되면 그 선수에게 주어질 수도 있던 기회 역시 일시정지 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속개 경기를 통해 선수가 기회를 살렸다면 이는 정상적인 기록작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수 본위의 기록산정법인 것입니다.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