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용 교수님께
저는 해주최씨 대종회 부회장 최운선*입니다.
농민신문에 실린 교수님의 글 ‘한글창제정신 이어받아 미래를 열자’라는 교수님의 미래 가치 지향적 신념이 담긴 훌륭한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어가면서 저의 선조이신 청백리 최만리 부제학공에 관한 내용에 대해 몇가지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어 다음과 같은 저의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최만리 선조께서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훈민정음 박사 1호이신 김슬옹 교수님의 견해입니다.
흔히 최만리가 한글(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다고 알고 있는데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추진했으므로 누군가가 반대했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당대 시대 흐름으로 본다면 새로운 문자를 꿈꾸고 실천한 세종이 아주 특이한 사람이지 한자를 절대시하는 양반 계층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글 반포 뒤에도 양반들은 학문과 행정 도구로서는 한글을 사용하지 않았다.(김슬옹, 2012,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최만리와 다른 모든 양반들의 한글에 대한 기본 입장은 같은 것이므로 마치 최만리만이 한글을 반대한 것처럼 호도하면 안 된다.
그리고 실제 한글을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백성들한테 공식적으로 알린 것은 1446년 9월이다. 결국 갑자상소는 창제 후, 반포 전에 올린 상소문이므로 ‘훈민정음 반포 반대 상소’ 또는 폭넓게 ‘훈민정음 반대 상소’라고 해야 한다.
상소문은 분명 훈민정음이 대단히 뛰어난 문자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상소문 앞부분에서도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극찬하였는데 문제는 새 문자가 한자를 대체할 경우 생기는 정치적 문제,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정치적 학문론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사대부들의 보편적 입장을 대변한 것뿐이므로 현대의 시각으로 반대 상소에 대한 정치적 재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인 박지원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18, 19세기 정약용 박지원과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조차 한글 사용을 아예 하지 않는 상황이고 보면 15세기 훈민정음 반포 전의 반대 상소는 극히 미미한 문제 제기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만리 공께서는 비록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했지만 그의 반대 상소 덕에 창제 배경과 과정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고 세종과 세종을 지지한 정음학자들은 이 상소 덕에 반대 쪽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새 문자 해설서를 더욱 잘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토론 내용이 실록에 고스란히 남게 되어 새 문자 창제 동기와 과정 등을 후손들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최만리 공께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면서 청백리였음에도 상소문만으로 오늘날의 마녀사냥과 같은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갑자상소문이 국어학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소창진평(小倉進平, 오구라 신페이)의 ‘조선어학사(朝鮮語學史)’(1920)에서 문자 발달사를 상론하고 훈민정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갑자 상소문 전체를 일문(日文)으로 소개한바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창진평도 갑자상소문에 대한 가치 평가는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김윤경(1938, 86)은 ‘훈민정음’의 기원, 창제 과정을 논한 부분에서 최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세종과 같은 가장 위대한 명군이 출현한 한편에는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현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慕華丸)’에 중독된 ‘가명인(假明人)’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마는,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병증은 이제도 오히려 유전됨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평가는 세종과 대비시켜 최만리를 부끄러운 사대주의자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라고 한 표현은 감정적 평가로 볼 수 있습니다. ‘고루하다’는 것은 사대주의자이기에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당대 제일의 청백리이자 최고의 학술원인 집현전의 책임자 최만리를 ‘부패한 저능아’로 표현한 것은 지극히 과도한 감정적인 평가인 것입니다. 이 점은 분명 시정되어야 합니다.
김윤경(1894-1969)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8세 때인 1911년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부설된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한후 스승 주시경을 만나 한글 연구를 하면서 문자학에 관심을 두어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라는 책을 통해 최만리를 비판 한 것이 지금까지 후대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자 한글학자인 최현배(1894-1970)선생께서는 ‘한글갈’(1940, 1976: 41-49)에서 최만리 반대 상소문을 소개하지만 김윤경과 같은 감정적 평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후 국어학사에서 최만리 공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균형을 찾게 된 것은 이숭녕(1964, 1976, 1981)박사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숭녕박사는 갑자 상소문을 분석하고 최만리에 대한 폄하가 시작된 첫째 원인을 1920년대 일제하 민족주의 분위기로 보고, 둘째 원인을 국어학계의 자료 빈곤에 따른 갑자 상소문의 감정적 과대평가 탓으로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이숭녕 박사는 갑자 상소문과 최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습니다.
첫째, 최만리는 집현전 책임자로 한글 제정의 협력자다. 정음 제작을 반대한다면 정음 제정 이전부터 반대했을 것이나 정음 게시할 때까지 반대하지 않았다.
둘째, 세종의 은밀한 한자음 개혁 추진의 부당성을 지적함이 정음 반포 반대의 근본 원인이다. 인위적 한자 개혁음 표기 사전인 ‘동국정운’이 간경도감의 불경언해서에는 적용되지만 40여년 후인 ‘두시언해’ 시기부터는 사라져 그 실패를 보여 주며 이 실패는 최만리 등 7인의 상소가 정당함을 보여 준다.
셋째, 한글을 사용하지 말라거나 없애라는 적극적인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넷째, 최만리가 대표 상소자이지만 최만리의 다른 상소문과 비교해 문체나 논리가 그다지 엄정하지 않아 상소문은 최만리의 글로 보기도 어렵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 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최만리 외 6인은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습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자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 예로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현식 서울대 교수는
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으나 중국에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 《고금운회거요》 번역 사업의 반대 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만리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자 상소문은 국어 정책적 쟁점인 국가 이념과 국어 정책의 상관성에 따른 쟁점과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대 노선의 국가 이념에 따라 국어 정책을 수행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고민을 반영한 치열한 담론이기도 합니다. 국가주의를 우선하는 최만리 등 원로 신하들의 ‘애국’(우국) 사상과, 사법제도 운영에서 나타나는 언문불일치 및 백성의 문맹이 빚을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 세종대왕의 극진한 ‘애민’사상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담론으로서, 여기서 짚어 볼 것은 애국(우국)과 애민이 별개가 아니듯이 이러한 일시적 충돌은 상합상생의 관점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한 갑자 상소문은 보수와 개혁의 담론 구조로서 한문 문화 및 사대 노선을 고수하는 사대파와 백성의 언어생활 편리를 도모하려는 개혁파의 갈등 담론이자, 신구학문의 갈등을 반영하는 담론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대 외교의 당대적 이해를 바탕으로 세종의 한자음 개혁의 무리함을 이해하고, 조정(朝廷)에서 신하들과의 공론 절차 없이 은밀히 추진한 문자 창제 과정의 문제점에 대한 원로들의 우려를 종합 고려한 것이기에 단순히 피상적으로 상소문의 내용만을 제시하고 상소문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최만리에 대한 역사 왜곡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최만리공은 집현적 책임자로서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이라기보다 무리한 한자음 개혁을 반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저희는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만리 공께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이듬해에 작고하실 때까지 시종은 최만리를 불러들이려고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기다린 데서도 두 분의 신의는 불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음이 변함은 자연 이치인데 이를 중국어 원음에 가깝게 개혁함은 잘못된 것으로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세종은 한자음 개혁 의지가 강하여 상소자들을 파직, 하옥하였지만 이튿날 풀어주고 최만리는 복직시켜 기다릴 정도로 아꼈다는 정황은 따지지 않고 오직 최만리공을 한글창제를 반대한 사대주의자로만 보는 교육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음은 잘못되었기에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배용 교수님!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과 어문 소통기능의 불합리로 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만약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입니다.
이배용 교수님!
끝으로 교수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윤경이라는 분의 감정적인 최만리공에 대한 평가가 지금까지 후대에 악영향을 끼쳐 최만리공을 한글창제 반대자로 오인하게 한 내용을 다시 바로 잡아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저의 심정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수님의 미래지향적 정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미래지향정신은 모든 국민이 실천해야한다는 의지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 11. 9
해주최씨 36세 손 운선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