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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친인척에 대한 호칭얘기를 계속하다보니 향우님들께서 식상해 하실 것 같아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후일 ‘그때 그 시절’ 얘기 밑천이 떨어지면 다시 계속하기로 하고, 이번 파일에서부터는 지난 1940-50년대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
예로부터 '막 거른 술'이라 해서 이름 붙였다는 가난한 서민(庶民)들의 술 '막걸리',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고스란히 담으며 오랜 세월을 거슬러 내려온 우리나라 술 '막걸리'는 우리나라에서 빚는 여러 가지 술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이다. 또한 막걸리는 그 깊은 역사와 얽힌 사연만큼이나 그 이름도 수없이 많다.
‘막걸리’, ‘탁배기’란 순수한 한글 이름에서부터, 배꽃 피는 철에 담근다 하여 ‘이화주(梨花酒’), 술 빛이 흐리다 하여 ‘탁주(濁酒)’, 농민들의 갈증과 배고픔을 달래준다 하여 ‘농주(農酒)’, 집에서 담근다 하여 ‘가주(家酒)’, 색깔이 희다 하여 ‘백주(白酒)’라 부르는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 ‘회주(灰酒)’, ‘재주(滓酒)’, ‘합주(合酒)’, ‘부의주(浮蟻酒’) 등으로도 불린다.
막걸리
이 뿐이 아니다. 쌀 ‘막걸리’에 고소한 잣 맛을 첨가한 ‘잣막걸리’, 예부터 귀한 오삼(五蔘)으로 꼽힌 더덕으로 만든 ‘더덕막걸리’, 그리고 인삼(人蔘)으로 만든 ‘인삼막걸리’가 있다. 이뿐이 아니다. 솥바닥에 눌어붙은 찹쌀밥을 이용한 ‘찹쌀누룽지 막걸리’와, 오곡(五穀)에 속하는 좁쌀로 빚은 ‘좁쌀막걸리’, 여러가지 한방약재(韓方藥製)를 달여 넣은 ‘한방막걸리’, 건강에 좋다는 ‘신선초막걸리’ 등 종류별, 지역별, 제조회사별로 한 때는 약 900여 가지의 ‘막걸리’가 생산되고 있었다.
아마도 지구촌(地球村) 사람들이 지금까지 빚어낸 여러 가지 술중에서 ‘막걸리’만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술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술 ‘막걸리’가 긴 세월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과 애증(愛憎)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도 곁들이고 있다. 여기에서 ‘술 익는 마을’을 노래한 박목월의 ‘나그네’를 감상하고 넘어간다.
나 그 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이 시는 지난 1942년 경주인근 고향마을에 은거하던 시인 박목월을
초면의 시인 조지훈이 불쑥찾아와 사귄뒤, 서로 주고받으며 지은 시
다. 먼저 조지훈이 지어보낸 완화삼(玩花衫)에 대하여 박목월이 답시
로 적어 보낸 것이 '나그네'다. 두 사람의 시에 모두 '술익는 마을'이
쓰여져 한적하면서도 풋풋한 우리들 고향 시골의 정취를 그리고 있다.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은 이 파일 제일 뒤쪽에 게재 소개한다.
익어가는 막걸리
‘막걸리’는 ‘고두밥(술밥)’에 ‘누룩’을 섞어 ‘단지(독)’에 담아 따뜻한 곳에서 발효(醱酵)를 시켜 빚어내는 술이다. 그러므로 잘 빚은 좋은 ‘막걸리’는 다섯 가지 맛이 나면서 적당한 감칠맛과 청량감(淸凉感)이 배합되어 있다.
즉, 단맛(감,甘)과 신맛(산, 酸), 쓴맛(고, 苦), 매운맛(신, 辛), 떫은맛(삽미, 澁味)이 잘 어울리면서 알콜 도수(度數) 또한 6%일 때가 가장 맛이 좋은 ‘막걸리’가 된다.
필자가 어릴 때 살았던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이 끼니를 거를 때마다 '탁주 반 되는 밥 한 그릇'이라며, 커다란 대접에 허연 ‘막걸리’를 철철 넘치도록 부어 꿀꺽꿀꺽 마신 뒤 김치 한쪽 쭈욱 찢어 입에 넣곤 곧장 논으로 나가곤 했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어르신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은 그저 기분 좋게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그 자체가 ‘끼니’였던 것이다.
우유 빛 막걸리
당시의 시골 어른들치고 안 그런 분이 없었지만, 필자의 아버지께서도 ‘막걸리’를 참으로 좋아하셨다. 때문에 필자형제들은 학교(學校)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어머니께서 담아주시는 ‘막걸리’주전자를 들고 하루 종일 논에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일을 하시는 아버지께 갖다드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버지께서 중참으로 드시는 그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가다가 달착지근한 ‘막걸리’의 유혹(誘惑)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과 교대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번씩 쫄쫄 빨아먹고 아버지께 갖다 드린다. 거의 3분의 1이나 빨아먹고 나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막걸리 새참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대접에 따라 붓던 아버지께서 대뜸 “오늘따라 ‘막걸리’가 와 이래 적노, 오다가 엎어졌나?”라고 하시면서 자꾸만 고개를 돌리는 필자들의 얼굴을 뜯어보신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릴 수도 없었다. 그저 논두렁에서 투둑 투둑 튀고 있는 메뚜기를 잡는 시늉을 하며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쭈욱 들이키신 아버지께서 못내 아쉬운 듯 “내리부터는 강우(셋째 동생) 보고 가 오라캐라. 니거들은 소꼴 한 ‘망태기’썩 비고, 알았제”라고 하셨다.
막걸리 마시기
필자들이 ‘막걸리’를 빨아먹은 것을 눈치는 챘으나, 확실한 증거(證據)가 없으니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셋째 동생과 임무교대(任務交代)를 시키신 것이다. 중참 때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마시는 그 재미로 고된 농사일을 묵묵히 하시던 아버지께서 오죽 아쉬웠으면 그랬을까를 생각했을 때 여간 죄스럽지가 않았다. 후일 그 일로 혼찌검이 나기도 했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 필자와 바로 밑 동생은 벼베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일을 가끔 거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목이 탈 때는 ‘막걸리’가 최곤기라”하시며, 필자들에게도 쬐끔 부어주시곤 했는데, 그때의 ‘막걸리’ 맛은 정말 꿀맛보다 훨씬 더 좋았다.
삼복 여름철, 뙤약볕에서 농사일을 할 때 갈증을 푸는 데는 ‘막걸리’만한 것도 없다.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지만, 사이다나 콜라를 마시면 당장은 시원하고 좋지만, 돌아서면 금세 목이 탄다. 그러나 ‘막걸리’는 한참 동안 갈증(渴症)을 풀어준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배가 출출할 때도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나면 배가 든든해진다. 안주도 김치조각이나 풋고추에 된장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막걸리’는 얘나 지금이나 ‘술’이 아니고, ‘음식(飮食)’이라고 한다.
필자의 경우 지금은 신앙(信仰) 상의 이유로 술은 포도주나 삼패인도 입에 대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거의 ‘모주꾼’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필자가 ‘막걸리’를 본격적(本格的)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외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농투산이’의 수업(授業)에 들어갈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주로 어머니께서 빚은 가주(家酒)를 마셨지만, 가끔씩 지금의 경주중고등학교 설립자 고 '이규인'선생을 기념하는 '수봉정'(필자가 향리에 살때는 '이좌수네 집'이라고 했다)앞 공터에 있던 ‘점방’이나,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 뒤쪽 술집에서 외상빼기 술을 마시기도 했다. 45도나 되는 안동소주(安東燒酒)를 마실 때는 폭음으로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었다.
겨울을 지낸 깨끗한 솔잎을 솎아 분쇄기에 갈아 솔잎막걸리를 만들어 새참으로 시원하게 한잔했답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막걸리 ‘점방’에서 주인 ‘아지메’에게 ‘막걸리’를 시키면 이내 커다란 뚝배기에 철철 넘치도록 담긴 ‘막걸리’ 한 통이 두레상에 올려졌고, 젖빛 막걸리에서 달착지근한 ‘누룩’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어떤 때는 텃밭에서 호미로 고구마를 캘 때 물씬물씬 풍기던 흙 내음이 풍기기도 했다.
‘막걸리’ 안주로는 ‘열무김치’와 말린 ‘산나물무침’, ‘미나리무침’, ‘풋고추’, ‘된장’ 등이 잇따라 나온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얀 접시에 깔끔하게 담겨져 나오는 안주가 모두 나물투성이였지만, 도수(度數)가 낮은 막걸리에는 안성맞춤인 안주감이었다.
80년대 막걸리 광고
어린 시절, 논두렁에 앉은 아버지께서 순식간에 쭈욱 들이키시던 그 ‘막걸리’를 떠올리며 한 사발 쭈욱 들이키면, 달착지근하면서도 약간 쌉싸래한 맛이 금세 입 속을 거쳐 가슴 저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해줬다.
가을철 ‘막걸리’의 달착지근한 맛은 벼를 낫으로 싹뚝싹둑 벨 때 코끝에 희미하게 맴돌던 달콤한 내음 같기도 했고, 약간 쌉싸래한 맛은 벼를 벤 논에서 잡은 ‘논고동’을 삶아 탱자가시로 빼먹을 때 혀끝에 감돌던 쌉싸래한 그 맛이었다.
언제부턴가 ‘얼음막걸리’가 나오고부터는 가끔씩 ‘얼음막걸리 집’을 찾기도 했다. 입안이 얼얼하도록 시원한 ‘막걸리’ 속에 든 얼음 맛은 어릴 때 냇가에 달린 고드름을 따다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오도독오도독 씹을 때 느껴지는 그런 맛 같기도 했다.
머리속까지 시원해지는 그 느낌 또한 땡겨울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 ‘수겟또’를 타다가 꽈당 하고 뒤로 넘어졌을 때 머리칼 깊숙이 파고들던 그 차갑고도 시린 느낌이었다.
‘얼음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꽃게된장찌개’의 시원한 국물맛과 막 된장에 푸욱 찍어먹는 맵싸한 풋고추의 맛도 그만이었다. 틈틈이 집어먹는 잘 익은 열무김치의 깊은 맛과 입속을 향긋하게 파고드는 말린 산나물의 깔끔한 맛도 일품이었다.
술꾼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구구각색(九九各色)이다. 기분 좋다고 한잔, 기분 나쁘다고 한잔, 월급(月給) 탔다고 한잔, 월급 못 탔다고 한잔, 친구 만났다고 한잔, 친구와 헤어지면서 한잔, 축하(祝賀)한다고 한잔, 일 끝냈다고 한잔, 심지어는 술 끊은 기념(記念)으로 한잔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농촌(農村)에는 술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옛적에는 거의가 ‘막걸리’ 한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막걸리’는 농부(農夫)들이 힘겨운 농사일을 잠시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이기 때문에, 술이면서도 술이 아니었고, 술이 아니면서도 술이었다.
지난날 시골집 안방이나 마룻방 벽에는 볏짚으로 엮어 매단 ‘누룩’이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누룩’이란 밀을 굵게 갈아 반죽을 해서 띄운 것으로 술을 빚을 때에 발효제(醱酵製)로 쓰기 때문에 필수품(必需品) 중의 하나였다.
누룩
맷돌에서 밀이 거칠게 갈아지면 그걸 물로 반죽해서 멜론 크기만큼 둥글게 손으로 뭉치거나, ‘도배기’나 사각형 나무틀 또는 탬버린처럼 생긴 둥근 틀 안에다 삼베보자기를 깔고 반죽을 꼭꼭 눌러 담은 후 다시 삼베보자기를 덮어 그 위에 올라가서 발로 자근자근 밟아 찍어낸다. 필자도 어릴 때는 자주 ‘누룩’ 밟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 시절 아이들은 술 담그는 날을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른바 ‘술밥’이라고 하는 ‘고두밥’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아이들한테는 그 ‘술밥’이 요즘 아이들의 피자나 햄버거보다도 더 입맛을 돋우는 별미(別味) 중의 별미였기 때문이다.
술 밥
커다란 가마솥에 시루를 안쳐서 ‘술밥’을 쪄내면, 술을 담그기 위한 절차상, 그 ‘고두밥’을 일단 식히게 된다. 마당에 맷방석을 깔고 눈 같이 흰 쌀 ‘고두밥’이 펴지면, 큰아이라고 한 입, 작은아이라고 한 입, 막둥이라고 한 입, 동네방네 꼬마 친구들까지 쪼르르 달려 들어와서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한입 두입 집어먹게 된다.
그 꼬들꼬들한 술밥! 그 시절에는 그 맛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꽁보리밥에 길들여진 입에 쌀 ‘고두밥’이 들어갔으니 혀가 얼마나 놀라고 감격(感激)했겠는가. 이제 ‘막걸리’ 담그기를 시연해 본다.
먼저 깨끗이 씻어 낸 오지항아리에다 ‘술밥’을 한 층 담고 그 위에 ‘누룩’ 가루를 한 층 덮고 나서 물을 뿌린다. 이렇게 ‘술밥’과 ‘누룩’ 가루를 켜켜이 담아가면서 물을 뿌려주면 ‘막걸리’ 담기는 끝이다.
다음은 술을 담은 항아리를 안방 아랫목에다 푹 파묻어 놓고, 한 닷새쯤 지나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서 술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술이 익기 시작했다는 신호(信號)다. 이때가 되면 술 좋아하시는 집안 어른들은 입맛을 쩍쩍 다시기도 하신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평소(平素) 시어머니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던 며느리도 “어머님, 술 한 잔 걸러 드릴까요?”라면서 효부(孝婦) 흉내를 낸다. 시어머니에게 대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한잔 하고 싶다는 뜻이다. 물론 며느리가 술을 걸러 어른들처럼 사발에 담아 마시지는 않는다. 그러면 당시의 며느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한 잔’을 하는지 들여다보기로 한다.
술 거르기
지금은 시골에서도 보기가 어렵겠지만,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든 술을 거르는 전용(專用) ‘체’가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말총으로 촘촘하게 엮어 만든 ‘체’ 안에다 ‘막걸리’ 원액(原液)을 한 바가지 털어 붓고는 물을 쳐가면서 술을 거르기 시작하는데, 이때 술의 농도(濃度)를 입으로 맛보면서 가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거르는 과정에서 며느리는 홀짝홀짝 술맛을 보게 된다.
싱겁다고 홀짝, 되직하다고 또 홀짝, 이렇게 홀짝홀짝 맛을 보다보면 술을 다 거르기도 전에 얼큰해 진다. 당시의 며느리들은 이 과정을 통해 술을 배웠고, 이런 일을 하면서 ‘한 잔’을 할 수 있었다.
‘막걸리’를 거를 때는 ‘술지게미’라는 찌꺼기가 나온다. 이 ‘술지게미’에는 영양가(營養價)가 어느 정도 있다 보니까,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대개의 경우, 소나 돼지에게 먹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끼니를 때우기도 했었다.
술지개미
당장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살던 시절에는 부잣집에서 품을 팔고 품삯으로 ‘술지게미’를 받아오거나, ‘막걸리’ 공장인 양조장(釀造場)에서 ‘술지게미’를 얻어다가 집안 식구끼리 나눠먹고는 할아버지도 취하고, 아버지도 취하고, 아들도 취하고, 손자도 취하는 등 4대가 모두 취해서 벌렁 드러눕던 서글픈 사연(事緣)도 있었다.
양조장
“양복쟁이 떴다!” 농주(農酒)를 단속하기 위해 양복(洋服) 입은 세무서(稅務署) 직원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이름이 좋아 농주(農酒)였지, 가정에서 내 곡식 갖고 내가 담가 마시던 ‘막걸리’조차 ‘밀주(密酒)’로 몰아붙였다.
자기 집에서 자기가 만들어 조상제사(祖上祭祀) 때 제주(祭酒)로 사용하거나,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한잔씩 하려는 ‘음식’을 밀주(密酒)로 몰아세워 기둥뿌리가 뽑혀나갈 정도로 벌금(罰金)을 부과하던 무리들이 당시의 ‘양복쟁이’들이었다.
단속(團束)의 빌미는 법(法)도 공익(公益)도 아니었다. 민가(民家)에서 농주를 만들어 먹게 하면 유지(有志)들이 경영하는 양조장(釀造場) 술이 팔리지 않고, ‘술도가’의 술이 팔리지 않으면 양조장 사장들로부터 상납액(上納額)이 줄어든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당시의 단속법령은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친일분자들이 경영하는 양조사업을 도와주고, 상납을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만든 악법(惡法)을 계승한 것들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세무서(稅務署) 직원은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가혹한 벌금(罰金)에 기둥뿌리가 휘청하는 집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양복쟁이가 떴다”하면 저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했고, 온 동네에 비상이 걸리곤 했었다.
머리에는 술항아리를 이고, 양손에 누룩을 하나씩 들고, 마을 뒤 잔솔밭이나 콩밭고랑에 숨기다가 미끄러져 술독을 깨버린 아낙네들에다, 가족은 모두 일터에 나가고 혼자 집에 있던 할아버지가 장독대에 숨겨둔 술항아리를 숨긴다는 것이 술항아리는 그냥 두고 간장항아리를 대신 숨겼다가 들켜 수십배의 벌금(罰金)을 문 안타까운 사연들도 부지기수였다.
새참 나르는 아낙네들
(아이들도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엄마 뒤를 따르고 있다)
술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랬지만, 우리들의 전래 민속주(民俗酒)인 ‘막걸리’는 인정과 우정의 가교를 만드는 촉매제(觸媒劑)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닷새마다 서던 오일장에서 사돈끼리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술 한 잔 합시다” 하고 주막(酒幕)에 들어가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술이 ‘막걸리’였다. 주막에 있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통성명(通姓名)을 하고 나서 권커니 잣커니 하던 술 또한 ‘막걸리’였다.
우리들의 술 ‘막걸리’에는 또 독특한 주법(酒法)이 있다. 영국(英國)의 위스키, 프랑스의 와인, 러시아의 보드카, 멕시코의 데킬라, 중국(中國)의 고량주, 일본(日本)의 정종 등 세계의 명주(名酒)들도 나름대로의 마시는 주법이 있듯이 ‘막걸리’에도 우리 고유(固有)의 독특한 주법이 있는 것이다.
‘막걸리’는 우선 사기 사발에 따라놓은 술을 새끼손가락을 이용해서 휘휘 저어서 마시는 것이 첫번째 주법이다. 다음으로 술을 쭉 들이킨 후에는 반드시 손등이나 소매를 이용해서 입술 언저리를 쓱 문질러 닦아야 한다. 셋째는 안주로 깍두기 한 점을 집어먹은 후에는 “크어~ 그 술맛 한번 좋다”하고 그 술을 빚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다.
지구(地球) 상에 수많은 술과 술꾼이 있지만, 그 술을 빚은 사람에게 이처럼 감사(感謝)를 표시하는 술과 술판은 우리 ‘막걸리’와 ‘막걸리판’ 말고는 아무데도 없다. 필자는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지만, 향우님들께서 혹시 ‘막걸리’를 드실 기회가 있으면 이 주법(酒法)을 따라 해보시기 바란다. 막걸리 맛이 훨씬 더 할 것이다.
아무튼 그 시절 그토록 갈증(渴症)을 풀어주고, 피로(疲勞)를 씻어 주던 술, 어깨춤이 절로 나도록 신명을 더해 줬던 술, 그러면서도 우리네의 훈훈한 인정(人情)까지 나누게 했던 술, 그게 바로 우리의 ‘막걸리’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막걸리’는 또 사람만 먹는 것이 아니고, 식물의 영양식(營養食)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에서는 남산(南山)의 소나무에 막걸리로 영양보충(營養補充)을 시켜준 일이 있다. 남산 공원 북쪽 소나무 숲에서 소나무가 겨울을 잘 나기를 기원하는 '2007 소나무 숲 가꾸기 작업'을 열고 소나무에 ‘막걸리’와 비료(肥料)를 뿌려 준 것이다.
예로부터 ‘막걸리’는 오래된 소나무에 기력(氣力)을 회복시켜주는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막걸리’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단백질, 아미노산, 유기산 및 각종 미네랄이 소나무의 생육(生育)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경북 예천(禮川)의 천연 기념물 249호 석송령 소나무에는 동네 주민들이 매년 제사(祭祀)를 지낸 뒤에 ‘막걸리’를 뿌려주고 있고, 전국적으로도 몇 곳에서 기념물(記念物)로 지정된 소나무에도 해마다 ‘막걸리’를 부어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묘(省墓)나 묘제(墓祭)를 지내고 ‘막걸리’ 퇴주잔(退酒盞)을 무덤의 잔디에 골고루 뿌리는 것도 사자(死者)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자의 옷이나 이불에 해당하는 잔디에 영양식(營養食)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소주(燒酒)나 양주 등 독주(毒酒)를 뿌리면 오히려 잔디를 죽이게 될 것이다.
막걸리 새참
꾸물꾸물한 날씨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둘 치고 ‘차르르’ 소리와 함께 부쳐지는 ‘부침개’로 한 잔 쭈욱 들이키면 우중충한 날씨로 축 늘어진 기분도 금세 활기(活氣)를 돌게 하는 것이 ‘막걸리’다.
그뿐인가.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농사일을 접어두고 흙 묻은 손 그대로 쭉 찢은 김치 한쪽과 주전자 채로 벌컥벌컥 마시는 ‘막걸리’는 농부들의 땀과 노고(勞苦)를 씻어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피로회복제(疲勞回復製)가 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대학교(大學校) 앞 허름한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과 두부 한 모를 앞에 두고 열띤 토론(討論)을 벌여가며 저녁 한 끼를 때우기도 했고, 힘든 산행(山行)을 끝내고 산기슭을 내려오면서 된장을 푹 찍은 고추와 걸걸한 ‘막걸리’ 한 잔 마시면 그 것이 곧 추억이 되기도 했다.
막걸리는 이렇듯, 우리민족의 정서(情緖)와 나름대로의 풍류(風流)를 대변하는 술이다. 술도 못마시는(안마시는) 주제에 술 얘기를 너무 길게 하는 것도 결례가 될 듯하여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을 감상하며 파일을 접는다.
완화삼(玩花衫)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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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펌 해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