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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스님
은사 용성스님 모시고 독립운동 “신발 숨기고, 신고해라”
일화도
“내가 도(道)를 닦으려고 왔는데, 밤낮 없이 은사스님 독립운동 하는 것을 심부름만 해야 되니 내 신세도 참
기구하구나.”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용성(龍城)스님의 수법제자(首法弟子)인 동헌(東軒)스님의 ‘한탄’이다. 동헌스님은 출가 이전에 집안의
삼촌이 독립운동 진영에 자금을 대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삼촌과 교류가 깊었던 용성스님의 문하(門下)로 들어왔는데,
출가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을 밝힌 대목이다.
동헌스님은 1917년 스물두살의 나이로 용성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당시 용성스님은 백양사 운문선원에서 조실로 있었다. 동헌스님은 용성스님이 3·1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인 1924년 3월3일 지리산
칠불암에서 춘명(春茗)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용성스님을 시봉하게 된 동헌스님은 매일 같이 찾아오는 독립지사들을 만나게
된다. 용성스님 상좌인 도문스님(대성사 조실)은 “당시 만해 한용운 스님을 비롯해, 오세창, 손병희 선생 등이 찾아와 항일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면서 “용성조사의 지인들이 산을 오르며 큰스님을 찾던 적이 많았다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사진설명: 1980년 2월24일(음력) 동헌스님(가운데)은 상좌인
도문스님(오른쪽), 손상좌인 보광스님(왼쪽, 현재 동국대 교수) 그리고 신도회 간부들인 정규자, 김금화, 최정순(뒷줄 왼쪽부터) 불자와 함께
임진각에 다녀온 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도문스님.
도문스님이 전하는 동헌스님의 육성이다. “내 무슨 운명이
집에서는 밤을 새워 돈(독립자금)을 전하는 일을 하고, 그것이 싫어 절로 도망 와서 스님이 되니 밤낮으로 독립운동 하는 어른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니, 참 기구하구나……. 지금도 만해스님과 오세창 선생, 길선주 목사, 이승훈 선생 등이 용성스님을 만나기 위해 절에 와서는 ‘완규야’라고
찾던 목소리가 지금도 선하구나.”
동헌스님은 은사 용성스님을 평생 수발하면서 스승의 뜻을 따르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용성스님이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까닭으로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줄곧 은사스님을 모셨다. 출가 동기에 대해
동헌스님의 상좌 도문(道文)스님의 기억을 따라가 보자. “우리 스님은 당신이 한학을 공부한 후 과거를 보아야 하는데 망국(亡國)이 되는 바람에
꿈을 접고, 삼촌과 교류가 깊었던 용성조사에게 출가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헌스님은 1896년 6월14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판교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충남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가 고향이었으나, 조부때 부여로 이사했다. 세속 이름은 완규(完圭)이고 성은 용인
이씨이다. 법명도 세속이름과 같다, 동헌은 법호이다. 당시 스님의 집안은 충남 일대에서 알아주는 부호로 조부는 전남 장성 부사를 지냈다. 조부
슬하에서 <천자문>을 익히고, 한문사숙에서〈동몽선습〉〈소학〉〈대학〉 등을 배웠다. 1910년에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노장립 사립
광동학교를 마쳤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날. 용성스님이 상좌인 동헌스님을 불렀다. “동헌아. 잘 듣거라.”
“예, 스님” “서른 세명이 다 들어가면, 신발을 숨기거라.” 은사의 뜻은 무엇일까. 용성스님의 당부가 이어졌다. “그리고는 경찰서에 ‘여기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한다고 전화를 해라.’ 알겠지.” 이게 무슨 일인가. 만세시위를 한다고 대표들이 모였는데, 신발을 숨기고, 경찰서에
신고까지 하라니 그때 동헌스님은 “내가 애국자인가, 아니면 반동인가.”라고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헌스님은 은사를 믿고 지시대로
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용성스님이 동헌스님에게 당시 왜 그렇게 했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동헌스님에게 연유를 들은 도문스님의
말이다. “우리 스님은 그때 용성조사께서 대표라고 모인 사람들이 선언서만 낭독하고 헤어지면 독립운동에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셨다고 합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경찰서로 연행되어 ‘확실하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그리고 민족대표가 모여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것이
보탬이 된다고 여기셨다는 겁니다.” 만해스님도 이후에 “용성이 애국자를 만들었구나.”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목숨 다
바쳐 은사시봉” 형무소 앞에서 염송정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민족의 명운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선각자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역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의 총칼이
조선의 강토(疆土)를 유린하던 20세기 초 분연히 일어서 맞선 용성(龍城)스님과 스승을 시봉하면서 함께 고난의 길을 걸은 동헌(東軒)스님의
하루하루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헌스님은 은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으로 외호하는 역할을 묵묵히 감당했다. 때문에
동헌스님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은사를 면회하기 위해 동헌스님은 종로3가
대각사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걸어서 왔다. 하지만 일경(日警)들의 ‘면회금지’로 은사를 만나지 못하자, 동헌스님은 면회소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님, 제가 면회를 못하고 돌아가야 합니다.”라며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리고는 평소 은사가 일러준 대로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이를 수상히 여긴 일경들이 동헌스님을 문초하고, 닦달하기에 이르렀다. 염송하는 것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암호를 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들은 대각사까지 쫓아와 “그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 용성에게 무슨 뜻을 전하려는
것이냐.”며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이 같은 일은 당시 일제가 용성스님과 동헌스님, 그리고 대각사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사진설명: 1976년 7월 대각사에서 동헌스님(오른쪽)이 용성 조사
유훈을 실천하는데 공헌한 불자에게 줄 공로패를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는 이는 도문스님 (사진제공 도문스님)
조선총독부는 용성스님 상좌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대각사를 강제로 매각시키기에 이른다. 도문스님(대성사 조실)은
“용성조사의 활동근거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대각사를 강제로 팔아넘기게 했다.”면서 “이 같은 만행은 용성조사가 석방되기 3개월 전에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동헌스님은 당시 대각사 신도로 가회동에 살고 있던 강근수씨의 사랑채에 석방되어 나오는 은사 용성스님을 모시게
된다.
1921년 4월. 용성스님이 석방되는 날이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은사를 맞이한 동헌스님은 용성스님에게 “스님, 이제
가회동으로 가야 됩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내 절 대각사를 두고 왜 가회동으로 간단 말이냐.” 동헌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각사가 강제로 매각된 사실을 은사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웠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만이 흐르고, 용성스님을 가회동
강근수씨 사랑채로 모시고 갔다. “스님, 여기서 쉬시면서 몸부터 추스르세요.” “동헌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말을 좀 해보아라.” “스님,
나중에 다 아시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동헌스님은 용성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 아닌가.
동헌스님의
상좌인 도문스님이 은사에게 들은 당시 이야기를 전한다. “그때 대각사가 없어졌다는 말씀은 들은 용성조사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고 합니다. 상좌의 말을 다 듣고, 상황을 알게 된 용성조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을 내 쉬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도문스님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당시 우리 은사스님은 용성조사의 애통해 하고 비통해 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내 죽을 때까지 스님을
받들어 모셔야 겠다. 내 목숨이 다할지라도 스님의 명을 따라야 겠다.’는 다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용성스님과 동헌스님의 당시 일화를 말하는
도문스님도 눈에 이슬이 비치었다.
이후 강근수씨 사랑채에서 마음을 다 잡은 용성스님은 3년 만에 다시 대각사를 마련한다. 종로
3가에 있는, 빼앗긴 대각사 옆의 가옥들을 매입하여 대각사 현판을 다시 건다. 일제 당국에 보란 듯이 도량을 다시 세운 것이다. 동헌스님은 기쁜
마음에 용성스님께 “계를 다시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용성스님 역시 쾌히 승낙한다. 이때가 1924년 3월3일로 동헌스님의 세상나이
29세였다. 하지만 일경의 서슬퍼런 눈 때문에 지리산 칠불암에서 사미계를 받은 것으로 서류는 정리했다.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지성화등 3대생활 주창
“내 신세와 용성조사의 신세가 같구나. 신하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제자들이 절을
팔아먹었구나.” 대각사로 가지 못하고 가회동 강근수씨 사랑채로 발길을 돌린 용성스님의 애타는 사연을 듣고는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인
윤비(尹妃)가 한탄 섞인 말을 했다. 불명이 대덕화(大德華)인 윤비는 불심이 돈독했으며 당신의 처지와 비슷했던 용성스님의 일을 돕는데
물심양면으로 적극 나섰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는 동안 용성스님은 ‘역경불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출옥한 이후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동헌스님 역시 은사의 뜻을 함께 했다. 용성스님과 동헌스님의 역경불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했다.
특히 조선 왕조의 마지막 상궁인 최상궁과 엄상궁이 정재(淨財)를 선뜻 내 놓았다. 이는 윤비가 뒤를 보아준 까닭도 있으며 두 상궁의 불심이
누구보다 깊었기 때문이다. 용성스님과 동헌스님은 1921년 4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고 본격적인 역경불사에 참여한다. 두 어른의 유지를
계승한 도문스님과 후학들이 지금도 그 뜻을 잇고 있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투쟁’을 벌였던 용성스님이 왜
역경불사를 하게 된 것일까. 동헌스님에게 밝혔던 역경불사의 필요성을 용성스님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내 서대문 형무소에 있으면서 살펴보니,
예수교는 성경을 우리 한글로 바꾸어 만들어 많이 펴냈더구나. 게다가 쉬운 우리말로 노래까지 지어 부르니 교세가 신장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이곳에서 석방되어 나가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경(佛經)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해 조선 땅에 널리 부처님 가르침을 펴야
겠다.”
동헌스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상좌인 도문스님(대성사 조실)은 “우리 스님은 파사현정을 구현하는 항마군(降魔軍)과
같은 대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계셨다.”면서 “온화한 스님의 상보다는 마치 투쟁자 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동헌스님의
사상은 용성조사와 일치한다. 은사의 뜻을 고스란히 계승한 동헌스님은 용성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시봉하는 가운데 생각마저 빈틈없이 닮았다. 두
어른이 강조한 말씀은 이렇다. “심처존불(心處存佛) 이사불공(理事佛供)”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그
일과 이치가 모두 불공이다.”
용성조사와 동헌스님의 이 가르침에 대해 도문스님이 이해를 돕는 설명을 했다. “두 어른들의 이 같은
말씀은 세상살이 하는 모든 일을 부처님을 공경하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불교입니다. 그리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손등과 손바닥처럼 한 뿌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곧 마음가짐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성스님 문하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31세 되던 해에 깨달음의 향기를 맛본다. 당시 스님의 오도송이다.
“무언지리산(無言智異山) / 무설역칠불(無說亦七佛) / 무문시심마(無問是甚磨) / 무심친백운(無心親白雲)” 우리말로는 이렇다. “지리산이 말이
없으니 칠불 또한 말이 없다. 이뭐꼬라는 물음이 없으니 무심은 흰구름과 가깝다.”
동헌스님은 “불교인들은 ‘3대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 불교의 지성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동헌스님 제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도문스님은 3대 생활을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의 대중화는 악을 끊고 선을 닦으라는 겁니다. 지악수선(止惡守善)의
생활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 살더라도 선을 닦는 일이 중요합니다. 불교의 생활화는 언제나 신불(信佛)해야 합니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해서는 신행활동을 꾸준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불교의 지성화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수행생활을 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미혹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미혹을 줄여서 깨달음을 얻는 생활 그것이 바로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동헌스님과 교류가 있던 스님들은 만해스님 상좌인 춘성스님을 비롯해 사제인 동산스님, 동암스님, 그리고 고암스님과
전강스님 등이 있다. 모두 수행자의 외길을 걸은 어른들로 한국불교의 주춧돌을 놓은 분들이다.
용성(龍城) 조사의 법맥을 이어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동헌스님은 평생 간화선 수행을 통해 용맹정진하며 후학들을 양성했다. 스님의 많은 제자들이 선방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도량에서 ‘포교불사’의 전면에 나서 활동을 폈다. 특히 화엄사를 호남을 대표하는 도량으로,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순례하는 화엄도량으로
장엄한 도광(導光)스님을 비롯해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우면산에 대성사를 세우는 등 불교성지에 도량을 세우는 불사로 불법을 펴고 있는
도문(道文) 스님 등 30여명의 제자들이 동헌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동헌스님은 항시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후학들을
맞이하고 불법으로 인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도문스님은 “은사스님이 직접 설법을 하셔도 되는 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법문을 하도록
하셨다.”면서 “지금도 은사스님이 법당마루에 앉아 다른 대중과 함께 설법을 들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스님은
후학들이 정각(正覺)을 이루기 위해 밤을 낮 삼아 용맹정진할때면 “수행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자칫 제자가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고 한다. 도문스님이 방을 폐문(閉門)하고,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는 정진을 7일째 계속하던 날이다. “도문 법사, 쥐가 파먹네. 어서
문열어” 두문불출하고 정진하는 상좌에게 그렇게 오래 동안 좌선을 하면 쥐가 죽은 줄 알고 파먹는다며 그만 문을 열라는 동헌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일화이다. 법체(法體)가 강건해야만 수행 정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스승의 각별한 성심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사진설명: 1976년 7월 우면산 대성사에서 대중들과 함께한 동헌스님.
앞줄 가운데가 동헌스님이다. 사진제공 도문스님.
물론 동헌스님도 참선수행의 수승함을 여러 차례 말했다. “선(禪)은
마음을 안락 자재한 경계에 소요(逍遙)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동헌스님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고
밝힌바 있다. 선을 유난히 강조했던 동헌스님의 육성이다. “선은 계율학, 선정학, 지혜학인 계·정·혜 삼학(三學) 가운데 으뜸 되는
정학(正學)입니다. 팔정도 가운데는 정정(正定)이, 육바라밀에서는 선정(禪定)이 으뜸입니다.”
대중과 함께 제자 설법
들어 열반송 “무슨 할말이 더 있는가”
마음 닦는 수행인 참선 공부에 대한 동헌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어보자.
스님이 생각한 선의 세계로 귀담아 들어야할 가르침이다. “마음을 닦는 수심법(修心法)입니다. 마음을 닦는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때문에 선은
마음으로 닦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경(究竟)에는 닦는 마음도 닦을 마음도 없는 것이 참다운 선입니다. 이러기에 선의 심오한 경지를 말로나
논리로나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의식(計較意識) 작용으로는 이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참 지혜로써 홀연히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동헌스님은 백양사 운문선원을 비롯해 상원사 청량선원, 양주 수종사, 송광사 등에서 모두 28 하안거를 성취했다.
수종사에서는 10년 동안 묵언정진으로 납자들의 귀감을 샀다. 스님은 1926년 4월8일 백양사에서 금해(錦海)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 했고, 1935년 5월 8일 용성스님에게 건당(建幢)을 했다. 용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이 다시 같은 스님에게 건당하는 의식을 치른
것은 “평생 스님을 은사로 불퇴전의 정진을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용성스님 역시 제자의 이 같은 뜻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스님은 은사 용성스님의 뜻을 받들어 1969년에는 대각회를 발족시켜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1971년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었고, 열반에 들 때까지 화엄사 조실로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한 어른이다. 도광·도원·도문·법전·도범·보우 스님 등 35명의
제자들이 은사의 뜻을 잇고 있다.
동헌스님은 1983년 9월9일 새벽3시 화엄사 염화실에서 세연(世緣)을 다하고 열반에 들었다.
유촉(遺囑)을 묻는 제자들에게 동헌스님은 이렇게 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부처님과 조사가 다 말했는데, 무엇을 더 할말이 있는가.” 이때
스님의 법납은 60세, 세수는 8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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