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6:1-5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우리 속담에 '불 난데 부채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자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이야기에도 곧잘 성을 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고도, 남을 조롱하는 말은 말 그대로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이건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성실히 대하기란 쉽지 않지만 특히 불행에 처한 사람을 대할 때에는 각별한 배려가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본문은 세 친구와 욥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스한 안위의 말보다는 냉혹하고 헛된 이론에 치우친 친구들의 정죄함을 처음 접했을 때 욥은 격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비난과 독설이 점점 심해지자, 욥은 아예 그들과 상대하기 조차 괴로워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호소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도우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시121:1)욥이 듣기에는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번뇌케하고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본문 4,5절에서 말하기를 < 내가 너희와 같은 처지이면 나도 너희와 같이 책망이나 권면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참된 위로는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심정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하려 하지 않고 전통적인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욥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한 형제, 자매를 대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기로 합시다.
##### 1.강한 용기를 북돋우어 주어야 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어처구니없는 공박을 퍼붓고 있는 세 친구들에게 그들의 경박성을 지탄하였습니다. 세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던 원래의 목적은 극심한 재난을 당하고 있는 욥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기의 신앙적 단견과 편견들을 가지고 욥을 가차없이 정죄하여 도리어 설상가상 격으로 욥에게 더욱 잔인한 고통을 끼쳐 주고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재의 재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규명하려 드는 그럴싸한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의 격려입니다. 죄를 묻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죄를 묻기 전에 그가 이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이에서도 정반대의 폐단이 간단없이 빚어지고 있다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비교적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조차도 남의 재난을 보면서 하나님께 벌받고 있다는 말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특별한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재난을 당한 사람보다 의롭거나 잘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재난 가운데로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바르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다 깊은 섭리 안에서 욥처럼 영문 모를 재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은 주님을 닮아 가는 출발입니다.
##### 2.상처를 감싸 주어야 합니다
욥은 만약 입장이 서로 바꾸어졌다면 '나는 입술의 위로를, 너희의 근심을 풀어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위로의 말로 재난당하고 있는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세 친구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허망한 말을 가지고 번뇌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벌써 큰 상처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이점을 깊이 통찰한다면 상처받은 부위를 헤집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말이 정당하고 훌륭한 것이더라도 상대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부작용만 일으킵니다. 뛰어난 양약이더라도 병에 맞지 않으면 몸에 해만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상처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따뜻하게 싸매어 주고 보살펴 주는 일 밖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 등을 막론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위로자가 별로 없고 서로 남의 탓으로만 돌려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라고 찬탄하였고 이런 위로가 고난을 견디도록 만든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3.6) 위로는 상처받은 사람 뿐만아니라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갈급함입니다. 세상에는 위로받고 싶어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 평안을 위하여 위로의 사역자로 살아 가는 축복을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사이에 재난을 당하는 자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에는 우리가 그런 자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이 자비 깊은 섭리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용기를 북돋워 주고 위로로써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불리 그를 향하여 죄를 회개하라는 식의 경망한 충고는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 절대로 정죄가 아닌 것입니다.
욥16:6-22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사탄을 통해 사랑하는 욥에게 주신 고통
1)마음의 근심이 계속됨 (6절)
2)식구들이 흩어짐 (7절)
자식은 죽음, 아내는 등을 돌림
3)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함 (8절...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4)악한 자들이 대적함(10절)
5)죽음의 그늘이 옴(16절)
그런 가운데에서도 욥의 자세를 보라.
본문 17절-22절.....
<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했다.
##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신다고 했다.
##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한다고 했다. 이것이 욥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통을 주신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때린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통을 받는가?
욥과 같은 믿음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자.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