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전대와 중동부 전선 이야기(5)
중동부 전선의 주요 전투는 주로 51년 말에서 부터 시작하여 금성천 부근은 52년도 춘계에는 575고지, 크리스마스고지, 66고2지에서 그리고 하계부터는이미 언급한 수도사단의 수도고지 지형능선 결전이 불꽃을 이루고 북한강 소양강 지역에서도 혼전이 계속 된다.
그당시 중동부 전선에서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우리국군이 방어하는 곳을 선정하여 주로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먼저 금성천 지역은
칠성전망대에 오라 서면 직전방에 별우고지가 보이고 저 멀리 금성천이 회돌아 흐르는 곳의 우측 높은 산이 교암산이다. 그 우측으로 지형능선이 있고 그우측으로 수도고지가 있고 그 우측으로 북한강이 흐르는데 전망대에서는 교암산 바로 밑의 585고지와 교암산은 쉽게 식별이 된다. 나는 년에 최소한 4번정도는 이곳에 올라 북한지역을 바라본다.
이유는 몇해전 운명하신 수도사단 1연대 1대대장인 이종록(예, 중령)님이 생전에 그곳에서 575고지 전투를 하고 교암산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모두가 적의 침투부대가 사전에 들어와 통로를 틀어막고 깨스탄을 쏘고 수류탄을 집어넣고 해서 안에 들어있던 인원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매몰되어 대량으로 있다한다.
본인은 기회가 없겠지만 살아있으면 나보고 꼭 좀 올라가 소주 한잔이라도 대신 부어달라 하셨다.
수시로 책임지역은 전투지경선의 변경으로 방어하는 부대가 바뀌곤 한다고 한다.
아무 말없이 흐르는 금성천, 그리고 북한강을 보며 나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강물아 너는 알고 있겠지. 그 한 말끔히 씻기우고 우리 용사님 편한하게 잠들게 해 줘"
그러면 답이 오곤 한다, "용석아 알았어. 기억할께!"
1)575고지 전투
575고지는 돌출된 고지로써 율사리-쌍령등 일대를 감제하는 고지로써 적의 활동을 적시에 파악하는 고지이나보니 중공군 입장에서는 가시같은 곳이였다.
51년10월에 국군 6사단 미25사 국군2사단이 폴라선 진출전을 통하여 점령한 이후 최전방 전초가 설치되어 계속적으로 적과 대치하게 된다.
미25사와 교대된 미 40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한 6사단은 이곳에 위력 수색을 실시하며 백인엽 장군은 독전대까지 붙여 중공군 31사의 침투를 사전에 제압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중공군 31사단은 계속적으로 이곳에 기습공격을 가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게 되며 이때마다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다 수도사단이 6사단 우측으로 들어 오면서 일시적으로 수도사단에서 방어를 하다 결국 52.10월 8일에 피탈되면서 다시 6사단,8사단에서 인수받아 탈취해야 하는 최전방 전초기지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일부는 차량으로 빼냈지만 대다수가 현장에 방치 되었다.
박상남 참전용사님(89세)은 48년도 4월에 입대하여 공병학교에서 근무하다 전쟁이 발발 하면서 6사단 공병으로 전출 되어 별별 전투를 다 경험했다.
하지만 가장 치열한 전투가 중공군의 최후공세인 53년 7월13일부터 15일까지벌어지는데 이미 6월부터 계속적으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용사님은 이곳에서 철조망을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토치카 속에서 생활하는데 전쟁 막바지에는 얼마나 중공군이 밀려오는지 아무리 죽여도 끝도 없어 결국 피탈되고 만다.
"지뢰가 터져 철조망 위로 시체가 걸리는데 그 위로 기어 올라와요."
"혹시 조심스런 질문이지만 경계근무가 허술해서 침투 당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생각해 봐요, 3~4개월을 버티고 앉아 경계근무를 하니 오죽하겠어요. 그날은 특히 새벽에 안개가 자욱해서 앞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럼 노무자들은 어떻게 전사자를 후송하게 되는지 혹시 보셨나요?"
"말 그대로 들것에 나르기도 하고 부상자는 어깨에 걸어 같이 가기도 하지. 하지만 포탄이 터지고 여기저기 매복병이 총질을 하는데 무슨 수로 온전히 운반 하겠소. 끌고 가다시피 가다가 여차하면 그대로 놓고 도망가기 바쁘지~"
현재 그당시 교통호속에는 쌍방의 시신이 뒤엉켜 잠들어 가고 70여 년이 흘러가고 있다
6사단은 이곳으로 53년 3월 23일에 진출한 후 중공군 전초인 금성 동쪽 2.5km A , B를 탈취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게 된다. 이고지의 바로 좌측에는 돌고지가 있어 계속적인 기습 공격에도 휴전 직전까지는 우리가 확보하고 있었다.
2)662고지 전투
제 3사단은 사실 현리지구 전투(51.5.16~22)이후 별다른 전투 없이 국군 제 1군단 예비로 후방지여 경게임무를 주로 하다 10월19일 미 제 10군단으로 배속 전환 되어 가칠봉 전투지역에 들어가 국군 제 5사단 지역을 인수받아 10월말까지 전투를 한다.
다시 양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한 후에 52년 1월12일 국군 6사단으로부터 북한강 동안지역을 인수, 미9군단의 우익으로서 게리 선상의 949고지를 중심으로 북한강으로부터 석장리간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적은 중공군 제203사단이었다.
당시는 휴전협상이 진행 되고 있으므로 대규모 전투는 없고 포로를 획득하기 위한 침묵 작전(Clam UP)계념에 따라 적을 유인하여 생포하는 위장전술이 진행 되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피의고지인 748고지 전방에 수색중대가 방어하고 있는 662고지에 적의 대대 병력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오히려 "침묵작전" 기간에 전초기지가 피탈되어 즉시 역습으로 다시 회복하는데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따라서 연대는 1개 공병중대의 지원을 받아 3중의 철조망과 500여 개의 지뢰를 매설하여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3)독수리고지 및 피의 고지 전투
수도사단의 우익 제 3사단은 52년 9월에 북한강 동안의 949고지를 포함하여 973-780고지로 연하는 주저항선을 방어 하면서 중공군 203사단의 조기 접근을 경고하기 위해 어운리 572고지(독수리 고지)와 949고지 북쪽 748고지(피의고지)에 전초를 운용하였다.
한참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가 치열한 시기에 적이 분명 이 지역도 공격하리라 에상하는 가운데 드디어 중공군 203사단이 9월28일 공격을 개시 하였다.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572고지가 피탈 되고 역습 부대의 진출에 무차별적인 탄막사격으로 인명피해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유엔 공군기가 네이팜탄 사격으로 지원을 하는 과정에도 탈환하지 못해 결국 휴전시까지 그대로 가게 되고 949고지 전방의 748고지(피의고지)는 지키게 된다.
무려 5일간의 전투에 전사 109명 부상 384명 적 사살 664명이었다.
4)원래 949고지는 국군 6사단이 51년 11월 17일에 탈취헤게 된다.
51년 10월 중간선인 노매드선으로 진격작전을 펴든 국군 6사단이 백암산을 좌우로 연하는 선에서 방어중 이었다. 사단은 국군 2사를 좌 중앙에 미24사, 좌에 6사단으로 51년 10월에 교암산 일대까지 진출하는 미 제9군단의 일원으로 김화-금성진격 작전에 투입 되었다.
10월13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금성천을 도하 522-541-용호동 529고지로 이러지는 노매드선에 진출후 17일부터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교암산 송동리 용호동 529고지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폴라선에 21일 도달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교암산 바로 직 전방의 585고지를 공격하는 과정에 무려 대대 병력의 50%가 피해를 입는등 많은 손실도 있었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화염방사기가 보급되어 특화점 진지공격에 활용 되었다.
585고지 교암산에는 적의 강력한 유개호가 구축되어 특공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수류탄을 휴대하고 특화점을 공격해야 했고 고지 정상에서는 백병전을 수시로 감행하여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얼마가 피해를 입었는지 현황조차 찾을 길 없다.
그러다 10월말에 교암산 지역을 미 제24사단에 인계하고 북한강 서안으로 이동하여 11월 중순에 미 제10군단 좌익인 국군 8사단의 서측 연대(제21연대)를 배속 받아 만곡부의 동측에 우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949고지를 공격하여 점령 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용호동-949고지-973고지-석장동을 잇는 게리선을 확보하게 된다.
"전사자들의 모습은 흡사 개미떼가 죽어있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참전용사 김기헌님(88세)은 19연대 2대대 7중대 대원으로 공격작전에 투입되었다. 처음 북한강을 도하하여 산으로 오르는데 아니 나무 가지에 사람이 걸려 있다. 사람을 가죽을 베껴 오르는 길목에 걸쳐놓고 위압감을 주는 중공군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10월이면 벌써 추워요. 달빛이 그날따라 훤하게 비추는데 나무에 사람이야. 얼마나 놀라겠어!"
"아니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빨치산들이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 ."
"중공군도 팔로군들이 많아요. 일본군대와 싸우면서 배웠는지 지뢰 매설에 부비츄랩도 설치해요."
"나무가지 몇개 없는데 생각해봐요. 그나마 뭉개진 나무더미에는 두동강난 시체야!"
제7연대 소속인 최병창님(88세)은 교암산 진격과 949고지 진출간에 정말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며 그때는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가다보면 "옆에 전우가 욱 하고 쓰러지면 그런가 보다" 하고 앞에 보이는 적만 응징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가지에 살점이 걸려 있고 다리가 튕겨 올라가 한쪽만 앙상한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고 머리가 깨져 버려 반쪽만 남은 해골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전선의 모습에 지금 어떻게 싸웠는지 기막히다 하신다.
"교암산을 점령하는데 바로 앞의 585고지에 적의 토치카가 있어 한 10번을 공격해서 올라 갔어요."
"그럼 그때마다 전사한 병력 보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요?"
"그건 모르겠고 몇몇이 살아 있을때까지 공격하다 공격 부대가 바뀌어요.'
"하기야 그리고 내려가면 좀 휴식을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요. 밑으로 내려가면 여기저기 병력을 모아서 소대나 분대 편성을 다시해서 또 올라가!"
"그러니 공포에 질린 인원중에는 솔직히 자해사고 많았어. 발등에다 땡겨버려요!"
"누가 죽는지도 몰라. 나중에 인원점호에 얼굴을 본 사람은 몇 안되거든... ."
점령해야만 한다는 명령에 정말 용감하게 돌진한다. 중공군 204사단과 202사단이 방어중인데 그동안 통나무를 이용하여 유개호를 만들고 교통호를 연결하여 아군의 진출을 어렵게 했다. 정상에 올라서 진격하는데 얼마나 죽었는지 발로 디딜수가 없었다. 너무 큰 희생이었다.
그러니 19연대는 계속적으로 공격 선봉에 모든 부대들을 올려보내 결국 탈취는 했지만 너무 큰 손실이 났다. 전사에는 전사 103명 부상 382명이라 하고 중공군 884명을 사살 하고 포로 124명을 획득했다고 하는데 그 기록이... .
6사단은 53.1.9까지 이곳을 방어하다 국군 3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내려가 12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받고 다시 교암산 봉화산 지역으로 들어가 미 제40사단과 진지를 교대하며 좌측에 미 제9군단의 우익인 국군 수도사단 그리고 사단의 우측은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들어온 국군 8사단이었다.
북한강 - 소양강변 혼전은
미 제 10군단은 52년 여름 국군 제 7사단을 죄익으로 미 25사를 중앙에 그리고 국군 8사단을 우익으로 북한강 동안(통선골)으로부터 소양강 계곡까지 이미 여러차례 격전ㄴ을 치르며 1090고지-다ㅓㄴ장의 능선-812고지-854고지에 이르는 전선을 방어 중이었다.
52년 7월 18일 미 제 1군단으로부터 미 제 45사단(필리핀 대대 배속)을 배속 받아 양구에 예비로 대기하다 9월 25일 국군 8사단과 교대시켰다.
다시 미 제 45사단은 12월25일에 신편 국군 제 12사단과 교대하게 된다.
1)크리스머스고지(1090)부근 전투
계속되는 아군의 밀어올리기 작전으로 백석산 북방의 국군 제7사단은 어은산과 백석산을 연하는 종격실 능선상의 무명고지에 최북단 전초진지를 운용하였다.
51년 12월 25일 중공군 204사단이 공격을 가해와 크리스마스 전투라 이름이 붙여졌다.
중공군은 400여발의 포탄 사격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여 결국 28일 백병전으로 고지를 재탈환하게 되고 52년 2월11일에 다시 적의 공격(2차)을 받았으나 악전고투끝에 진지를 사수하여 휴전협상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차 전투에서는 적 172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전사 22명 부상 109명 실종 21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2차때는 9명전사에 9명이 부상하는 적은 피해를 입고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때 아군은 이른바 클램 업(Clam Up), 즉 침묵작전 개념으로 포로 획득에 최후선 목표를 두고 있었는데 포로 획득에는 실패한다.
국군 7사단 5연대 윤여민 참전용사님(87세)의 증언에 의하면 고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높이가 거의 1,000m정도로 비슷비슷하게 되어 고지 하나를 빼았기면 주변을 다 내 주어야 하기에 피아간에 죽기살기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 왔는데 사실 이 높은 고지에서 어떻게 유해가 처리 되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2)854-812고지 전투
국군 제 8사단은 호남지역 공비 토벌 작전을 4월에서 5월 어간에 마치고 5월 중순에 인제 원통으로 들어와 미 제 10군단의 후방 경계임무를 하게 된다.
그러다 7월 20일 서화계곡의 개머리고개 전투 지역부터 국군 5사단 지역을 인수받아 51년 8월 9일부터 9월 18일까지 3차에 걸친 노전평 전투를 실시하여 "J바늘 능선"의 좌측방에서 주로 격전을 치르게 된다. 이때 바로 대통령 고지인 1,031고지 전투와 벤플리트고지인 965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그 여세로 854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현제도 1031고지나 965고지 일대는 유해발굴이 진행중이며 엄청난 량의 탄피, 파편, 박격포탄, 철모등의 유품이 쏟아지고 있으며 2010년 7월에 최초로 "일병 유수열 용사님"을 발굴하게 된다. 그 후로도 3명의 용사님이 추가 발굴 되어 신원이 확인 되었다.
유수열 용사님은 인식표를 가슴에 차고 있었으며 원래 이곳은 미확인 지뢰지대 이지만 야전부대에 강력히 요청하여 지뢰식별 작업을 완료후 병력이 투입 되었다.
산 능선에는 모두 개인호가 있고 고지마다 유개호가 구축되어 있어 종격실 능선과 횡격실 능선으로 구분하여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소라지 계곡은 우리 국군이 북한군 1,2,3,13,1,45사단과 전투하여 전사한 곳이다.
특히 812고지와 854고지는 아군이 점령시 삼재령과 인북천을 끼고 고성에 이르는 보급로와 남강을 통제할 수 있어 북한군도 결사적으로 방어하여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가져오며 854고지는 점령했고 좌측의 812고지 바로 직전방의 1052고지는 탈환하지 못하고 812고지만 점령 하게 된다.
당시 16연대 3대대 정해윤 참전용사님(86세)의 증언에 의하면 51년도 9월에 854고지를 탈환하여 올라 섰는데 적의 기습으로 대부분 전사하게 되는데 180여 명의 중대원중 6명만 생존하였다 한다. 노무자들이 전사자를 처리하지만 계속 되는 적의 역습으로 시신을 운반하다 어쩔수 없이 놓고 나오기 일쑤였단다.
"선배님, 당시 소총병으로 실제 올라가신거지요?"
"무슨 소리여, 동해안에서 함포가 날아오지 비행기 폭격하지 쌍방간에 포탄사격은 쉴새없이 퍼붓지 도무지 올라서지 못해요. 올라서면 다 죽어."
"대공포판이 있어요, 이걸 거꾸로 메고 올라가다 오폭으로 다 죽기도 했어요"
"그러면 노무자들이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목격하셨나요?"
나는 오직 유해처리를 어떻게 했느냐가 관심사 였다.
대부분 답변은 "공격해 올라가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가 대부분인데 우리 판단으로는 당연히 예비대에 있으면서 전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물론 일부 용사님은 직접 목격했고 본인도 함께 동행한 적도 있고 시신을 운반해 나오다 적이 기습하면 그 자리에 놓고 피신한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올라서면 죽고 다시 병력을 밀어붙여 올라서면 죽고 몇번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고지를 점령했다.
이곳 전투에서 제 8사단은 전사 540명 부상 2464명 실종 124명이 발생하고 북한군 사살 4324명 포로 256명을 획득했다.
국군 8사단은 51년 9월22일 작전지역을 미 제 해병 1사단에게 인계하고 백석산으로 이동하여 국군 7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아 백석산 전투를 실시한후 1090고지까지 진출후 11월 20일에 다시 국군 제 7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호남지역으로 내려가 백야전 사령부에 배속 되어 공비토벌 작전을 실시한후 지금의 신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52년 2월 8일부터 3월 15일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후 다시 3월 18일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 해병 1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812-854고지 지역을 방어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시 52년 9월 22일에 미 제 4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게 되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북한군 45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여 일시적으로 피탈되었으나 동해안에서 함포지원과 전차 1개소대 그리고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재 탈환하여 적의 역습도 이겨내고 오늘의 휴전선을 유지하게 된다.
앞에서 가다 죽으면 뒤에서 다시 밀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도 인해전술이었다.
그때 참전용사인 16연대 이봉열 용사님과 이중우 용사님의 증언에 등 의하면 소라지계곡 좌측의 965고지와 1031고지같은 경우는 적이 밀려나지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동해안에서 함포사격과 폭격기에의한 네이팜탄 사격등이 이어졌고 몇번의 재 공격으로 탈환하였다.
노무자들이 시신을 옮기지만 높은 산에서 끌고 가다 계곡같은 곳에 유기하기도 한단다.
854고지 전투간에도 보전조 협동 공격까지 실시 되고 정말 풀 한포기 없도록 산이 초토화 되는데 올라가면 다 죽는다.
하지만 그 다음 소대가 대기하다 바로 다시 밀고 올라가는 우리도 인해전술로 싸우고 특공조를 조직하여 수류탄을 휴대하고 적의 특화점을 공격하여 파괴해야만 했단다.
그러니 제대로 유해를 운반하겠는가. 운반 하다가 노무자도 다 죽는 경우도 있고 나오다 그냥 놓고 도망치기도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단은 9월 25일 화천 사창리로 이동하여 2주간 부대정비와 교육훈련후 바로 국군 제 2군단으로 배속 되어 수도사단과 임무교대 하게 되었다.
3) 924-1026고지 전투
지금의 양구 펀치볼 제 4땅굴이 있는 곳으로 51년 8월31~9.3일까지 미 제 해병 1사단과 우리 해병 1연대가 대암산 -도솔산 전투에 이어 북한군 1사단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현재 을지 전망대가 있는 곳이 1026고지로 모택동 고지라 하며 바로 그 밑에 924고지를 해병은 김일성 고지라 명명하고 전의를 불태워 탈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