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공백기’가 길어졌을 뿐” _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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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