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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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선생님을 처음 본 것은 1960년 아니면 1961년이었습니다. 4.19 이후, 4.19에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는 시낭송회가 효자동 입구 진명여고 근처 ‘삼일당’에서 열렸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계셨습니다. 배가 좀 부른 듯했습니다.
그리고 1978년 제3시집 『눈을 뜨는 연습』을 발간했을 때 오셔서 모윤숙 선생님과 함께 축사를 하셨습니다.
내가 조금만 다가갔어도 선생님이 좋아하셨을 테지만, 나는 아무런 계산없이 바쁘게만 살았습니다. 그래도 자주 챙기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동해안 후포로, 백암온천으로 여행도 다녔고 애제자들만 모이는 모임과 선생님 댁에도 불려갔습니다.
선생님은 늘 연애 감정에 빠져서 살았고 만인의 연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에 있을 때는 내가 선생님을
초청하여 문학강연을 하시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강연비는 한 푼도 책정되지 않은 강연이었습니다. 그래도
즐겁게 오셨습니다. 그때 하도 죄송해서 강연료 대신 작고 예쁜 램프를 하나를 준비해 드렸던 것 같습니다.
고가의 것은 어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 중에서도 김진규라는 남자배우를 사랑했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김진규의 아내와 다투고 화해의
의미로 그의 아내가 선생님을 한남동 집으로 초대했는데 그때 여류시인 몇 명이 함께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신달자와 유안진이
청록파 같은 삼인 그룹을 결성할 때 셋 중 한 사람을 정하지 못해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 댈 때 김남조 선생님께서 이향아가
적절하다고 해서, 그 말을 받아들여 결성이 되었었습니다. 광주로 옮겨간 후에는 만나는 일이 뜸해졌고 가끔 서울에 오면 뵙기도 했지만 드물었습니다.
“이향아 선생, 수필도 참 좋던데 거기 남편 이야기나 애들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요. 그렇게 하면 독자가 떨어져 나가요.”라고 하신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무궁무진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선생님은 낙원에서 편히 쉬고 계실 것입니다.
위의 <편지>라는 시는 젊었을 적의 시보다 열정도 식고 간절함도 없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대는 나를 그만큼 외롭게 했습니다.다. 그를 생각할 때면 내가 울게 될 만큼 그는 내게 절대의 존재였습니다. 나는 아무런 꾸밈도 없이 그를 사랑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직하게 내보였습니다. 내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입니다. 그는 늘 내 곁에 있으므로 내가 쓰는 편지를 곁에서 읽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편지를 써도 그 편지를 부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대가 누구냐고 궁리하고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남조 선생님의 책은 많이 팔렸고 그는 인세로 부동산도 많이
구입했다고 합니다. 전혀 물질적인 애로는 모르고 사셨습니다.
말년에 김남조 선생님의 간섭과 상관이 문단의 폐해가 된다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그만하면 96세의 인생을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살아내셨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외웠던 선생님의 시는 <사랑한 이야기>와 <수선이 피는> 등인데 젊었을 때의 시라서 지금 보니 퍽 요설적이네요.
이 중에서 <사랑하던 이야기>를 옮겨 적겠습니다.
사랑한 이야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 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 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 없는 눈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 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야길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첫댓글 김남조 선생님이 교수님을 많이 아끼셨군요!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사랑한 이야기>도 참 좋습니다.
시가 내밀한 고백이라고 말한 이유를 이 시를 읽으면서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실제의 사랑 이야기는 정작에는 없지만 사랑 이야기를 말하라는 사실 만으로도
이렇게 설레고 기막힌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솔직한 감정을 독자가 알아 듣게 언어를 골라 쓰는 시인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좋은 시 많이 읽고 분발하겠습니다.
추운 날, 건강 조심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