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 9.28(토)
구간 : 광화문광장 ~ 종침교터(용비어천가) ~ 서울지방경찰청 ~ 금천교(금천시장) ~ 김가진집터 ~ 세종대왕탄생지 ~ 통인시장 ~ 자수교터 ~ 이완용집터 ~ 아름다운재단(김재규집터) ~ 정철생가터(선희궁터) ~ 백운동천(청계천 발원지)
소요시간 : 6시간(09시 ~ 15시, 점심식사시간 포함)
청계광장에 모여 청계천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
청계천(淸溪川)
총 길이 10.84km, 유역면적 59.83㎢이다
(길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한성(서울)내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현 한양대 서울캠퍼스 인근)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발원지는 인왕산 수성동계곡(70년대 초창기 시범아파트 라고 알려진 옥인아파트가 있던 곳)을 지나는 옥류동천이라는 설과 자하문 부근 백운동천 이라는 설이 있는데, 청계천에서의 거리로 보면 백운동천 쪽이 조금 더 멀기 때문에 백운동천 쪽이 맞는 것 같다
옥류동천 수성동계곡 안내판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시를 하고있지만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옥류동천은 70년대에는 항시 물이 흘렀으며 90년대 까지도 갈수기 외엔 물이 흘렀지만 2019년 현재 발원지 추정 두 개울은 모두 건천으로, 장마 때만 잠시 물이 흐른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開川은 도랑 또는 내를 파내는 공사를 말한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태종이 박자청에게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맡겨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태종 때 '내를 파내는 공사(開川 또는 開渠)'가 완료 된 이후에도 공사명이었던 '개천'이라는 말을 그대로 하천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조선하천령』이 제정되면서 상류의 '청풍계천'을 줄여서 '청계천'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조선하천령』은 1927년 제정되었고, 청계천 명칭의 사용은 1906년부터 나타나는 것을 보아 사실과 다르다
영조가『어제준천명병소서』에서 '청계천'이라고 표현하였다는 견해도 있어, 유래와 정확한 시기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발원지 백운계곡부터 송기교까지를 백운동천이라고 하고, 송기교부터 중랑천 합류지점까지를 개천(청계천)이라고 한다
청계천 발원지인 백운동천을 찾아간다
♤ 백운동천(白雲洞川)
백운동천(白雲洞川)은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청계천의 도성 내 지류 중 가장 길어 청계천의 본류로 간주된다
《준천사실》에는 백운동래자(白雲洞來者)로, 《한경지략》에는 백운동천수(白雲洞川水)로, 《동국여지비고》에는 원출인왕산백운동(源出仁王山白雲洞)으로 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지역명을 따 청운천(淸雲川) 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계곡수가 유입되는 상류의 일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복개되어 자하문로 등으로 쓰이고 있다
서울시는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 계획’을 발표하였 는데, 이에 따르면 2030년까지 백운동천의 계곡수를 청계천으로 유입시킬 예정이다
♤ 중구, 종로구 경계점
청계천을 중심으로 중구와 종로구가 나뉜다
동아일보(東亞日報) 옛 사옥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139-8)
경성의 중심지인 황토현(黃土峴, 광화문사거리)에 있던 불타 없어진 명월관(明月館)과 그 부근 땅을 구입(구입 당시 명월관은 회색의 2층 양옥이었다) 하여 1925년 9월 27일 착공되어 1926년 12월 10일 준공(지하 1층, 지상 3층)되었다
철근콘크리트구조, 벽돌조 벽체에 석조와 화장 타일 마감하였으며, 일부 테라코타(terracotta, 속이 빈 대형의 점토 제품) 마감하였다
동아일보 창간사옥은 1920년 현 '정독도서관' 앞의 종로구 화동 138-33 한옥건물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제호 디자인을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 -1965)에게 맡긴다
고희동은 고민 끝에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에서 착안하여, 하늘을 나는 두 선인(仙人)이 동아일보 제호를 떠받드는 형상을 구상해낸다
문제는 그 제호를 누가 쓰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최고 서예가로 인정받고 있던 김돈희에게 부탁한다
김돈희는 반듯한 예서(隸書)체 한자로 '동아일보 창간호'라 제한다
가슴을 드러내고 하늘을 나는 선인들의 다소 파격적인 역동적 몸동작과 단정하고 힘 있는 김돈희의 글씨는 조화를 잘 이루었다
한국적인 소재를 서구적 디자인으로 소화한 고희동의 디자인과 동양적 지성을 상징하는 서예가 만나 멋진 혼성을 이루어낸 훌륭한 구성이라 할 만하다
동아일보는 사세가 확장되어, 1939년 수직적으로 (위로)는 2층을 더 올렸으며, 수평적으로(옆으로)는 을지로 쪽으로 2칸이 확장되었다
1963년에 동아방송이 개국되면서, 방송국용으로 6층을 증축 하였다
1992년까지 동아일보의 사옥으로 쓰이다가, 용도변경계획에 따라 2001년 초 개보수를 착공하여 2002년에 일민미술관(一民美術館)으로 개관 하였다
동아일보 이전에는 명월관이었던 곳이다
♤ 명월관(明月館)
1909년경 한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에 개점한 요릿집이다
1909년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자 당시 어전 (御前)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 기녀들이 모여들어 영업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건물은 2층 양옥으로 1층은 일반석, 2층은 귀빈석이었으며, 매실이라는 특실도 있었다
주로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하였다
1918년 5월 24일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안순환은 장춘관(長春館) 주인 이종구(李鍾九)에게 명월관 간판을 내주어 서울 돈의동 139번지(종로구 돈화문로5가길 1번지, 지금의 피카디리극장 자리)에 명월관 별관 간판을 걸게 하였다
♤ 안순환(安淳煥)
호는 죽농으로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의 21세손 (世孫)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버지 송석재(松石齋) 안순식(安舜植)과 숙인(淑人) 청주(淸州) 한씨(韓氏) 사이에 1871년 2월 8일에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9년에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전환국(典圜局) 건축 감독이 되어 궁중의 일을 처음으로 맡았다
그 뒤 전환국 기수(技手)를 거쳐 국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궁내부(宮內府) 전선사 장선(掌膳)과 주선과장(主膳課長)을 지냈는데, 점차 나인, 별감, 내시 등의 인원이 축소되었고, 1907년에는 궁내부마저 총감부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정3품의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에 올랐지만, 몇 달 뒤에 스스로 사퇴하였다
사퇴할 때 궁내부에 소속된 궁중의 남자 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를 모아, 1909년에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건너편(현 일민미술관)에 조선 궁중 요릿집인 명월관을 열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지금의 명동에 또 다른 조선 요릿집인 식도원(食道園)을 설립하였다
1930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 (鹿洞書院)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구로구에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웠다
1933년 유교 부흥을 위해서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려고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면서,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32년 안순환에서 안교환(安敎煥)으로 개명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선의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2년 일월시보사 사장으로 재임 중 10월 1일 사망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대령숙수이자 최고의 근대 주방장, 뛰어난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우포도청(右捕盜廳)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89-7)
혜정교(惠政橋) 남쪽 광화문우체국과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사이에 있었고, 서울의 서부와 북부지역과 경기우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경기우도는 지금의 고양, 파주, 양주, 가평 이북지역을 말한다
포도청은 1481년(성종 12)에 좌우로 나뉜다
경복궁에 머물고 있는 국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1894년 '경무청' 신설로 통폐합 되었고, 현재의 '경찰청'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1839년 기해박해 때 13살 나이의 유대철이 기록상 우포도청에서 순교, 1846년 병오박해 때 한이형, 우술임, 정철염 등 5명도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지키다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마지막 옥중서간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지고 기해일기를 펴낸 현석문도 우포도청에 수감되어 교우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지키도록 독려한 곳이다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1879년 드게트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투옥된 이들은 굶주림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이병교, 김덕빈, 이용현은 아사(餓死)로 순교하였다
또한 이곳(광화문우체국)은 봉춘관(奉春館)이라는 중국요리점이 있었으며, 1919년 4월 23일 전국 13도 대표 25명이 한성임시정부선포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 약법(約法)'을 제정한 장소이다 (한성정부 유적지에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광화문광장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68)
1952년 발표된 도시계획에서 세종대로 사거리는 서울의 21개 계획광장 가운데 하나였으며, 반지름 150m의 원형 계획광장 부지(2만 1,409평)로 예정되었다
이는 서울광장(8,485평) 보다 2.5배나 넓으며 조선일보 사옥, 동아일보 사옥, 광화광빌딩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1962년 정부는 계획광장 면적을 반지름 150n에서 102.87m로 축소하였다(본래 면적에서 약 53%가 줄어든 1만53평 이다)
그럼에도 동아일보 사옥은 여전히 계획광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동아일보사는 막 개발되기 시작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1급지로 이전하기로 하고 부지를 매입했다
(당시 매매가는 3,689평에 평당 5만 3,500원으로 2억원 채 안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여의도 부지를 매입한 뒤에도 동아일보사는 사옥을 이전하지 않았고, 1999년 광화문에 지하 5층 지상 21층의 신사옥을 완공하였다
(여의도에 신사옥 대신 별관을 지은 건물은 2003년 포스코에 1,370억원을 받고 매각하였다)
1971년 지하철 1호선 설계 당시 동아일보사 건물의 일부를 철거해야 전동차가 시청역과 종각역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운행될 수 있었는데, 동아일보의 반대로 철로가 90도 가까운 직각 형태로 꺽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전동차가 이 구간을 지날 때면 운행속도를 급격히 줄여야 하며, 철로의 마모를 막기 위해 많은 양의 윤활유가 사용된다
♤ 신교(新橋)터
대한제국시기에 청계천을 건너는 신교(新橋)라는 다리가 놓여지는데, 신교의 위치는 개략 일민미술관 (옛 동아일보사) 앞쪽이라고 한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장례식을 기점으로 하여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 12일)와 함께 도시개조사업 일환으로 경운궁(현 덕수궁)과 경복궁, 육조거리를 연결하는 황토현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건설되었는데, 비로소 그동안 막혔있었던 세종대로 남측의 통행로가 만들어지게 된다
신교는 명칭이 당시 어느 다리와 같이 새로 놓은 다리라는 일반적인 명칭이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조명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으나 이 다리의 개설은 정치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통치의 중심이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동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경복궁, 육조거리와의 통행 수요가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신교터(광화문 네거리 - 추정)
♤ 황토현(黃土峴)
종로구 세종로동・태평로1가동・신문로1가동・종로 1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의 세종로네거리 일대가 황토가 많은 야트막한 고개로 되어 있어 황토마루라 하고, 이 고개 부근의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일제는 1912년 ‘황토현 언덕을 없에서 폭 100m, 길이 220m의 광장을 만든다’는 총독부 훈령을 내려 고개를 뭉개 버렸다
황토현을 없애고 나서 광장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태평로를 내서 경복궁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일본의 상징 축선을 만들었다
(황토현을 없애 버림으로써 육조거리를 파괴하고, 조선의 남북 상징 축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광화문(光化門)빌딩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신문로1가 150)
청계천쪽에서 바라본 모습
청계천을 기준으로 중구와 종로구가 나뉘며, 지도상 경계선은 청계천 지류를 복개해 만들어진 도로이다
1986년 도심재개발 이전에는 각 건물이 분리되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86년 신문로 도심 재개발사업 전까지는 물길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에 감리재단빌딩과 국제극장빌딩이 각각 있었다
두 건물은 중구 태평로(감리재단)와 종로구 세종로 (국제극장)에 주소지를 두어 행정구역이 서로 달라서 재개발 초기에 건축허가가 따로 났다
서울시와 건축위원회 등에서 작은 건물 두 개보다 큰 건물 한 채를 짓는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행정적 소속, 즉 새로지어진 건물을 어느 구청 관할로 할것인가가 문제였다
(자칫 어느 한쪽은 향후 막대한 세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지면적 기준으로 61%를 차지하는 종로구가 지하 5층부터 지상 12층을 , 나머지 13층부터 20층은 중구가 관할하는 수평분할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 국제극장(國際劇場)
1956년 ‘국제문화관’으로 문을 연 이 극장은 1959년 3월 ‘국제극장’ 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영화 개봉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영문명으로 International Theatre 이라는 명칭을 사용 하였으며, 개관작으로 안소니 만 감독의 <세레나데>(1956)를 상영하였다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이천승(李天承)의 설계로 1957년에 세워진 이 극장 은 장차의 도시계획을 감안하여 임시 가건물이라는 조건이 붙었다고는 하나, 구성면에 있어서 당시로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다
즉 스틸 말리온(steel mullion)을 사용한 전면 유리면의 근대성과 거기 대조된 측면의 중후한 처리 등이 그것이며, 내부좌석도 갤러리식이 아닌 스타디움 식으로는 처음의 시도였다고 한다
제작과 수입 그리고 상영까지 이렇듯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국제극장은 당시 법적으로는 임시 가건물로 지어진 건축이라 후일 광화문 도심재개발 정책에 따라 1985년 4월 14일 폐관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으로 내걸린 <사막의 라이온>의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은 서울시민들과 울고웃던 화려한 시대를 마감짓고 쓸쓸히 돌아서는 국제극장의 뒷모습 을 보여주는듯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맘이 들게 한다
♤ 광화문 지하보도(地下步道)
광화문사거리에 설치된 지하보도이다
해방 이후 우리 기술진에 의해 처음으로 건설된 이 지하보도는 1966년 10월 3일 준공되었다
구체의 폭은 8~17m, 연장 198m이며, 출입구는 4개, 그 폭은 8.2m,연장은 68m이다
공사비는 1억 6,388만원이 투입되었다
광화문지하보도의 건설로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보행자의 횡단로를 지하화 함으로써 안전하게 건널 수 있고 신호 대기시간을 단축하게 되었다
첫댓글 2024년 첫 연재로 청계천이군요. 청계천 발원지는 인왕산자락길에서 만났었지요. 추억의 사진들이 시선을 붙잡네요. 그 당시 꽤 괜찮았던 국제극장 옛모습도 보이네요. 기대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