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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적인 ‘위기’의 지구촌, 동방에 ‘등불’ 하나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미륵(彌勒)"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What is our relationship 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yourself and myself, between yourself and another--which is society--what is it based on? Surely not on love, though we talk about it. It is not based on love, because if there were love there would be order, there would be peace, happiness between you and me. But in that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 there is a great deal of ill will which assumes the form of respect.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바탕에 있는 게 뭡니까? 여러분과 나와의 관계라든가, 여러분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그게 사회라는 겁니다만--그 바탕에 깔린 게 뭐에요? 분명히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 얘기는 많이들 하지만, 세상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게 아니지요, 왜냐하면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 사이에는 질서가 있을 것이고 평화와 행복이 고여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나 사이에는 존경을 가장한 악의가 넘치고 있거든요.
-- Jiddu Krishnamurti, The First and Last Freedom, Chapte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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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세상에 대하여, “니가 책임져라!”
진짜배기 미륵(彌勒)!! 인류사 새로운 성인께마저, 저렇게 ‘존경을 가장한 악의’가 판을 친다 해도..
기껏, “인간의 굴레”라고나 할 세상! 결국은 인간들 각자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익어가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여튼, 이다지 저다지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세상.. 정치도 교육도 심지어 종교마저 더이상 ‘볼 게’ 없는 꼴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마나, “기후재앙”에 “대멸종” 운운하는데도, 저렇게 “전쟁”하자고.. 이미 치루고 있고 말씀입니다. 그것도 무려 “핵”전쟁을 입에 담다니요.
참으로, 그야말로, 그저 ‘막되먹은 세상’ 아닙니까? 거기서 “경제”며 “한류”며 심지어 “방산”으로 좀 잘나간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천만부당, 이게 어찌, ‘그게 어디야!’ 하고나 말 일이겠습니까? 여기 삼천리금수강산은, 보다 거룩한 “가치”와 “저력”이 있는 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나온 소리입니다만, 여기 이 땅을 두고, 지구촌 “선도국”이라고.. 그것도 펜데믹이라는 인류재앙 때문에 거의 공짜로 듣게 된 소리지만요.
실속 있게, 마땅히 그쪽으로 ‘마음’들이 쏠려야 하겠지요. 아니, 쏠리게 되겠지요. 저 쪽, 아예, ‘마음자리’ 없는 인간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어쨌거나 간에, “세상에 대하여, 니가 책임을 져라!” 하시던 그 야속한 말씀, 그게 또 생각납니다. ‘아몰랑’ 하면 그뿐이지만요.
이래저래,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끄트머리 어디 쯤.. “널리 인간들 이롭게 하자”는 고운 마음씨가 퍼져가야만 하겠습니다.
인간이라고 생겨난 지 수백만 년.. 인류사적인 ‘위기’의 지구촌에 ‘등불’ 하나, 기어이 끄트리지나 말아야지요.
그만한 귀한 가치들 없었어도, 뭐라도, 어째도, 해봐야지요. 그 옛날부터 “성인”께서 다스라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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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존경을 가장한 악의”
‘호의를 베푸는 척하는 속임수,’ 더는 “사람 좋은 척하는 사기꾼,” “뼈속에 녹아든 갑질”도 해당 되겠습니까? 그런 ‘나쁜 놈’들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하는 사회!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가을장마’라고 하니까, 계절이 바뀌기는 한 모양입니다. 확실히 찌는 듯한 더위는 간 거 같지만, 그게 언제 사라졌는지 가늠이 안 되는군요.
“사회라는 것의 바탕은 사랑이 아니다.” 은근히, ‘그런저런 얘기는 우째, 하나 마나 아닌가?’ 그런 생각부터 드는 게요. 훌쩍 뛰어, 그렇다면 해석이랍시고 끄적거리는 이 따위 하나 마나 행위들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반성은 오래 됐습니다만. 세상 살면서, 도대체 ‘할 짓’이 없다는 핑계로다가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위도식”이 답이지만, “무위”라는 게 ‘문명’에서 보는 시각일진대, “인간”으로서 본래 생명체의 그 어떤 ‘에너지 흐름’은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그 “무위”라는 게 저 “사랑”과 이어지는 거 아닐까 합니다. 하기사, 그 “생명체 에너지” 방출도 제대로 갈무리 못 하는 일상이고요. ‘변명’이지만, 그만큼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하기에, 저 ‘존경을 가장한 악의’는 더 가까이 날뛰려고나 하겠지요. 이미, ‘사람 만나는 게’ 무서운 지도 제법 됐습니다.
이런 데서도, 저 “안 해야 할 짓” 얘기가 나오는 거지요. ‘그딴 짓’만 안 하면 되는 거라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거 역시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늘상 해대는 짓 가운데, 사실상 “꼭 해야 할 짓”이 별로 없는 거 아닙니까. ‘밥벌이’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거지만, “인생은 고해”라는 눈으로 보면, 다른 대부분이 “안 해야 할 짓” 아니겠는가 합니다. 어딘가에 선을 긋기는 그어야 하겠지만, 그런 데서 나오는 말이, “풍요보다는 만족이 낫다.”는 걸까요? 어쨌거나 막상, 그렇게 사는 삶도 쉬운 게 아니지요? 수천 년 수만 년, 아득바득 꼭 ‘뭔가를 해야 하도록 진화’해 온 거니까요.
거기 어디쯤에서 “인생”을 “일과 놀이”로 나누는 사람도 있던데요. 그 역시, 저 ‘근원적인 천착’은 빠져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으로 어찌 ‘나,’ “자아”를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나”로 하여, ‘인간’들이 저 “유위”를 극도로 추구해온 결과, 우째도 “인생은 고해”며, 오늘날에는 지구 생태계가 완전히 망하게 생겼다는 거 아닙니까. 분명히 그 길로는 더 이상 못 갈 막다른 길임에도, 그런 ‘반성’은 아예 꿈에도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꼴이지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관계”라는 것도 더 확장하면, ‘인간’과 “지구” 생태계 사이의 문제로 되겠습니다. 그게 ‘올바르지’ 못 했으니, 생태계가 나서서 “지구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자고 하는 거니까요. “관계”가 건강했다면, 이렇게 다 망하게야 되었겠습니까?
구태여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들이밀지 않아도,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이고, 그 “인류” 구성원으로 ‘나 자신’입니다. 그 사실에서 도망친다면 문제는 끝내 안 풀리는 거지요. 그러니 ‘나’ 스스로 “책임”을 져야지요. 실제로 “세상에 대하여 니가 책임을 져라!” 그렇게 말씀하시거든요. 그때 속으로 ‘예, 무슨 말씀? 제가 왜요?’ 그런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지만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국, 저런 “관계”를, 그 ‘잘못된 만남’을 ‘내가 먼저’ 그만 두지 않으면, 누가 나서서 그만 두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인생은 고해”라는 체념과 그 실상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은 ‘인간 구실’ 못 하게 생긴 꼴 아닙니까? 아무도 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이 길로 지구촌 다 망하고 새로 시작하게 되겠지요. 다들, 대부분 인간들이 그걸 피부로 못 느끼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고해”에 “대멸종”에 그런 얘기입니다. 식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멸종”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크리슈나무르티” 출현은, 그 시기상으로도 참 절묘한 구석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인간들 완전 멸종하지는 말라고, 인류 자체가 ‘다 망하게’ 하지는 않으려고 오신 거 아닐까, 그런 말씀이지요. 그것도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오래전부터 아주 시건방진 인류에게 ‘과연, 그 무슨 희망이 남아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앞서지만 말씀입니다. 저로서는 앞으로 100년을 더 산다고 해도, ‘꼭 같은 짓’일 뿐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 소개라도 좀 해놓고 죽자,’ 그거거든요. 그러니 ‘같은 말’ 되풀이일 수밖에 없을 터입니다. 그점저점, 더 이상 끄적거리지 않는 날도 오겠지요.
물론 ‘소개’가 아니라, ‘그 가르침 그대로 사는 것’이 우선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저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처럼 산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만. 인간은 ‘한 생명’ 받아 제대로 피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말씀입니다. 들꽃에게는 적절하게 그대로 ‘자연환경’이라면, 인간에게는 이미 “깊이 병든 사회”라는 거 아닙니까! 그 때문에 인간 고유 “지성” 발현부터가 ‘차단’되어 있는 거라서 말씀이지요. 그러니 저렇게 “관계” 말씀을 안 하실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도 삼천리 방방곡곡 듣는 이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겠지요?
“존경으로 가장한 악의,”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세상” 바탕이, “아주 속속들이 병들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한국사회는 가면 갈수록, ‘정치가’는 말할 수도 없겠거니와, 그저 ‘동네사람’도 못 믿고, 바로 ‘이웃사촌’도 못 믿지요? 세상 어딘들 전부 다 “인생은 고해”다 하는 판에, “깊이 병든 사회” 아닐 수가 없는 거지만, 그게 유난히, 거꾸로 세계1등 많은 여기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더 심하다는 거지요. 자살률 역시 독보적 세계1등, 선진국 평균치 2배도 넘는다지요?
“존경을 가장한 악의”보다, 여기서는 “인류사 새로운 성인(聖人)의 시대” 그 흐름을 막아보겠다는 저 ‘조직종교’와, 거기 결탁·야합한 ‘대학’ 따위들의 “포위망”에 그 ‘부스러기’들, ‘끄나풀’들의 “악행”이 더 문제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부터 좀 멀찌기 떨쳐질랑가 해서 여기 거제로 피해온 것입니다만. 여전히 피차 그꼴저꼴을 못 면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인간으로서 “세상”과의 “관계”를 최대한 유지한다는 핑계도 있습니다만.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세상은 사랑과 평화로 가득할 것이다.” ‘참, 좋~은 말이다.’ 싶습니다. 거기서 “우리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단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실상, 현실, 사실에는 ‘가정법’을 쓸 수 없지요. “보이는 그대로 그냥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되는 게 인간이라는 거 아닙니까. 보이는 모든 사물, 현상을 ‘나’로서 재단해버리니까요.
가정법으로도 안 되고, 바로 보려고 해도 안 되니, “진퇴양난”에 “고해”이기도 합니다. 역시 이어지는 얘기지만 여기서는 그냥, 바로 그 ‘나’가 원흉이다, 그러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런 ‘원흉’이 80억 개가량 된다는데, 그게 한꺼번에 고쳐질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라도 ‘나’부터입니다. “내 탓이요!”가 그 말이지요?
속으로는 “존경을 가장한 악의”를 품고 있는데, “맑고 향기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종교인’이라 해도, ‘나’가 흐려놓고 있는데 어찌 ‘맑다’는 말이며, ‘악의’를 품고 있는데 어찌 ‘향기’롭단 말입니까?
장삼이사, 서민들도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종교인”으로 사는 그대들, 부디, 제발, 크리슈나무르티 말씀 단 한마디라도 좀 제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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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5] 반성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너와 나’ 사이가 바로 “세상” 아닙니까? 그 ‘사이’ ‘사이’가 세상 맞지요? 조금 폼 나는 소리로 그걸 “관계”라고 하지요? 그걸 또 “관계론”으로 넓히기도 하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 ‘사이’에 있는 게 뭡니까?
본문에서 가장 거슬리는 단어가.. ‘존경을 가장한 악의’라는 말이네요. 바로 며칠 전에도 당한 일이라서 생생합니다. ‘존경’은 빼고.. 그냥 ‘아는 사이’를 빌미로 휩쓸려 간 건데요, 우짜등간에 ‘아주 다 망가뜨려놓고야 말겠다’고.. 개망신 톡톡히 당하게 해서 아주 폭망하게 하겠다고.. 콧구멍 ‘생매장’ 신세나마 끝장을 내주겠다고.. 아예 숨통을 끊어주겠다고.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겨우 노래 몇곡 부른 거뿐인데 말씀입니다. ‘아직도 무슨 노래방 댕기냐?’ 하실 분 계실까요? 예, 이제 사람 만나는 거 자체가 무서워서.. 더 이상은 진짜, 사람 냄새 안 나는 이 도회지 살아서는 안 될 거 같기도 하고요. ‘실속’ 좀 제대로 챙겨야 되겠습니다. ‘말로만’ 궁시렁거리고 말 일이 아니지요. 참.. 지금도 순전히 거짓말만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스스로 또 무서워서.. 역시 ‘마음’이 안 죽고 살아 펄펄 날뛴 결과겠습니다. 그들이 소위 ‘아는 사람’들이라서 막상 대놓고 삿대질도 못 하겠고요. 어쩌겠습니까, 이제 안 만나야지요. 참, 괜찮은 친구도 있는데요.
그만큼 제 스스로가 저 ‘사람’들과 “관계”를 제대로 이루고 사는 게 아닌 거지요. 이런 반성이 어찌 처음이겠습니까만. 마냥 이대로라면 여기서 인생 종친다 해도, 뭐 그리 아까울 것도, 더구나 억울할 것도 없겠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 보면, 빤히 드러나는 것이고 그냥 찬찬히 보기만 하면 속된 말로 ‘지 꼬라지’ 안 드러날 수가 없겠습니다만.. 뭐가 좀 야물어져야 말이지요. 그저 ‘몰캉하기만 해서는..’ 반성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 듯한데다가, 그 반성이나마 제대로 하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여튼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아직은 살 날이 좀 남았지 싶은데, 마냥 요모냥요꼴로 마감할 수는.. 이미 ‘반성’ ‘결심’ 수준으로는 안 되는 거고. 그러니 맨날 하는 소리, ‘그저, 드러나는 니 모습이나 제대로 봐라.’ 그 생각뿐이군요. 참.. ‘딱하다 딱해..’ 그러실 것 같기만..
‘변명’에.. 더 이상 끄적거려본들 짜다라 뭐 더 나올 것도 없겠습니다. ‘니 모습 보는 게 우선이지..’ 어디 간들 또 더 이상 된통 진짜 ‘당’할 빌미나 안 주고 살아야 할 텐데요.. 참.. 우짜다가 이런 신세가 된 건지.. 좀 우습기도 하고요. 그나마 ‘진짜로 망한 건 아니잖아!’ 하면서 스스로 위안으로 삼아보는 수준밖에 안 되니까.. 설마.. 아직도 지독한 저들 ‘조직의 따끔한 맛’을 못 봐서, 그냥 이러고 사는 걸까요?’ 대한민국 어딘들, 사람 못 살 데는 없겠거늘, 왜 마냥 도회지에서 이러고만 있는지.. 스스로 딱해서요..
아래 달린 글에도 ‘당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만, 최근에도 서너 번, 저 ‘꼼수’ 작당들과 마주친 겁니다만, 이왕에 했던 말도 있고,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마라!” 그 말이 더없이 맞는 말입니다. 괜히 어리숙한 채로 저들에게 낚여서는 코꿰이는 짓은 안 해야지요. 그러나 모르는 일입니다. 좀 교묘, 교활해야 말이지요.
‘너와 나 사이가 너무도 넓구나!’ 소월시 한 구절.. ‘초혼’이라는 시..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인간들이여!’ 지구촌, 꺼져가는 이 배 위에서.. 벋어간다는 “한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꺼지나 마나 “고해”이긴 마찬가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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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촛불혁명마저 시나브로 졸아들어서
세계적으로 페이스북 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크리슈나무르티 관련 교류에 참여한 게 어언 3 년이 되었나 봅니다. 그 전까지는 2001년 ‘다음’ 사이트에 ‘인터넷 카페’ 하나 만들어놓은 게 다였지요.
여전히 기껏해야 그 가르침을 번역하고 해석을 가해보는 모양새일 뿐이지만, 그마저도 그리 환영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아니, 아예 훼방만 일삼는 무리들 때문에 별로 신나는 일도 못 됩니다. 어제도 당한 일입니다만, 은근한 포위망은 항상 좁혀오고 있고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이게 그만큼 의미 있는 활동도 아닌 듯한데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더 근원적인 사실로,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크리슈나무르티”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관심 자체가 보이지를 않으며, 아예 “참된 것”을 찾아서 “삶”을 제대로 살아보라고 가르치지도 않기에 말씀이지요. 관심 있는 사람이래야, 오천만 인구 가운데 손가락 합친 숫자나 될까 말까 그럴 뿐이겠습니다. 그나마 물에 물 탄 듯일 뿐이고, 그 언저리에는 갑순이마냥 ‘척’이나 하고 있는 ‘사이비’들 뿐이고 말씀이지요. 그야말로 “진리”를 말씀하시는 “인류사적인 성인”의 출현에도, 1970년대 후반 국내 소개된 무렵 잠시 일어난 ‘붐’ 말고는, 막힌 하수구 물 빠지듯 시나브로 졸아들어서, 오늘날에는 그 표상으로 저렇게 찌꺼기들만 박혀 있을 뿐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고작 저잣거리 한 귀퉁이에 널부러져 썩고 있을 뿐이니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제일 눈에 밟히는 말씀입니다만, 기껏해야 ‘존경을 가장한 악의!’ 이게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설령 그 어딘가에 좀 그럴듯하게 보이는 관계가 있다고 해도, 역시 그 한구석에 저런 ‘악의’들이 똬리를 딱 틀고는 교활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에서도 몇 사람 “성인의 말씀”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저러한 ‘존경을 가장한 악의’ 때문에, 또는 조직 종교의 위력에 매몰될 뿐이었겠고 말씀이지요. 그나저나 우리 인간들 존재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면, 저런 ‘악의’가 오히려 훨씬 자연스럽겠지요? 이런 말이 불편하게 들린다고 해도, 우리들 사실 그대로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선의’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선의’로 살아가는지 모르는 판에, 어찌 남들 속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좀 지났습니다만, 얼마 전에 번역 게시한 글, “깊이 병들어 있는 사회에 잘 적응한 몸이, 과연 그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나 영향력보다는, 무엇보다도 우리들 각자가 사회에 대하여, “깊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기나 한지, 제대로 느끼고나 있는 건지, 아니면 “사회야 어차피 그런 거니까 거기서 내 꺼나 챙겨야지.” 하고 있다면, 그런 개인들이 그 사회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하게 되겠습니까? 역할이나 마나 저렇다면 “병든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참으로 진지한 젊은이들이 아니라면, 이런 차원에서 제대로 생각해보는 사람도 극히 드물겠지요?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다면, 거기서 ‘입신양명’ 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하염없이 마냥 그렇게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깊이 병든 사회”니까, 거기서 정말로 맑고 밝은 흐름이, 이미 타락해버린 ‘조직 종교’들 말고, 진짜 참으로 경건하고 질박한 “종교”적 흐름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우리 사회에 꼭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극동 한반도 쪽에 그런 흐름이 유구하고도 도도하게 이어져오고 있기도 하고 말씀입니다. 우리들 관심이 없으니, 그런 진리의 말씀들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겠지요? 자본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인 언론이 있다고 해도, 그 구성원에 ‘나’를 문제 삼는 “지성”이 어디에 얼마나 활동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활동은커녕 오히려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기 일쑤겠지요? “지성”으로 ‘그냥 놔두기만 해도’ 다행일 텐데요, 기어이 사람들은 전부 다 각기 제 쪽으로 끌어들여서 망가뜨리려고 안달일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딱 끊어버리시는 것이겠지요. 기어이, 나무꾼 행세나 하실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자체가 병들어 있다는 뜻이겠고, 그 관계가 건강하지 못해서, 어깨 팔 다리 목 가슴 손 발 등짝 엉덩이까지, 곳곳이 결리고 배기고 땡기고 따끔거리거나 하다못해 넌지시 뭉근하다는 말입니다. 팍삭 늙어버린 무슨 구순노인사회도 아니고, 골골백수들만 모인 공동체도 아니고 말씀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상을 “교육”에서도 제대로 알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아프기는 아픈데, 팔 다리 어깨 어디가 아픈지, 밥통 심장 간장 췌장 얼마나 아픈지, 도대체 가늠도 못 하고 있는 꼴입니다. 겨우 한다는 소리, “이딴 건 아픈 거 아니다!” 그러니 명색이 “세계사적인 촛불혁명”을 거쳤다 해도, 거의 말짱 도루묵 다 돼가는 꼴 아닙니까? 혁명이 진행 중이라 해도 말씀이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병든 사회는, ‘촛불’로 치유되는 게 아닙니다. 구성원 각자가 제 아픈 곳을 몸소 들여다봐야지요.
그러니 이게 누구 하나 제 아픈 몸 손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하기에 이렇게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훼방꾼들만 득시글거리는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 이전 정권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판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이니 한반도니 하는 공동체는 완전 볼 장 다 본 파장 무렵이겠지만요.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사회가 무너지는 데 100 년이 걸렸다면, 다시 세우는 데에는 1,000 년이 걸린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거나 아예 터다지기부터 안 되어 있다면, 쓸 수 있는 에너지 다 동원한다고 해도, 그게 제대로 건설되겠습니까? 더구나 조선조 후기부터 기득권으로 군림하던 무리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면, 설마 그들이 세상을 새로 일으켜 세우려 하겠습니까? 그런 무리들이 사회 곳곳에 틀어박혀 있으니, 더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는 거지요.
이제 겨우 그런 무리들 정신 좀 차리게 해줄 수 있는 사회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보겠는데요, 여전히 그대로 썩어 있는 저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 잔당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순순히 고백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나마 최소한 그쯤은 되는 것이 올바른 처사 아니겠습니까? 그냥 ‘죽어라’ 한다고 고이 죽어줄 인간들도 아니겠습니다만. 가장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세력이 다스린다고 해도, 정말로 종교적인 개인들이 쑥쑥 태어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름진 토양에 알맞게 비가 내려준다고 해도, 겨우 하나두나 가물에 콩나듯 할 수 있는 일일 뿐인데요. 하물며 그런 꿈틀거림을 마치 지렁이 밟듯 은근히 잘근 밟고 있다면, 또 그냥저냥 죽어 나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거기서 꿈틀거린다고 대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마나 행여나 “질서가 있을 것이고 평화와 행복이 고여 있을” 저런 세상이 과연 오기는 오겠습니까? 언제쯤 오겠습니까? 안 오겠지요. 물론 오나 마나 각자 제 할 만큼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세상에 아무것도 바랄 것 없는 개인”이라면, 자신의 삶 자체를 그렇게 풍요롭게 살 거 아니겠습니까? 풍요로우니까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 거지요. 그 풍요라는 게 설마 ‘국민소득’이요 ‘은행잔고’겠습니까? 다만 안 아프게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서 계신 분, 편히 잘 계시는지 걱정도 되고요.
여튼 개인 각자가 행복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진짜로 “행복한 사회”로 되는 거지요. 백번천번 더 한 얘기입니다만. 그런 가운데 저 “존경을 가장한 악의”도 아니고, 그저 망가지게 해꼬지하려는 군상들만은 조심에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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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존경을 가장한 악의’
‘존경을 가장한 악의(ill will which assumes the form of respect).’ 글쎄요, 어떻게 무신 ‘존경’으로 ‘가장’이나마 했겠습니까?
주변에 널려 있는 꼬라지들은, 하나 같이 비아냥거릴 뿐이고 심지어는 대면에 주먹까지 날리려고 발악인데요. 갈수록 인간들 만나는 게 ‘무섭’습니다. 아마도 더 심해지겠지요?
꼭 지금 제 주변의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의 바탕이 저렇게 ‘존경을 가장한 악의’들이 들끓으며. 아주 지 세상인양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를 봐도 항상 그렇지요? 그 가운데서도 ‘정치’ 분야라면, 더 엉망에 진창 아닙니까? ‘종교’는 좀 낫습니까? “참으로 행복한 세상”은 언감, 소위 그냥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도 아득할 뿐입니다. 까마득하지요.
우짜든지 간에, 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부터가 시작일 터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순간순간 드러나는 ‘자기자신의 실제 모습’ 보는 것이겠고 말씀입니다. 역시 천번만번 더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들 그 ‘시작’부터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겁니다. 도대체 ‘스스로를 보려고’ 안 하는 거니까요.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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