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고분과 어숙묘 둘러보기를 마치고 동네 강아지의 패기 넘치는 환송을 받으며 도착한 곳~
금성대군 신단입니다.
너무 많이 알려진 곳이라 새삼스레 부언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조선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던 해,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 금성대군은 성삼문 등과 함께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명으로 이곳 순흥부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다시 단종 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그를 사모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앙심을 품게된 여인의 밀고로 지금의 소수서원 옆 죽계천에서 모두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 냇물을 따라 10리를 흘렀고 그 핏물이 그친 자리가 지금의 피끝마을(동촌)이랍니다.
당시 순흥부의 성인남성들 대부분이 역모죄로 처형을 당해 길거리에는 부모잃은 아이들만 가득하였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제월교 다리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던 아이들을 데려와 기르게 되었는데
이때 부터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하지요.
이후 200여년이 지나서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그를 기려 신단을 세운 곳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저 시골 동네의 조금 사는 집인가 싶을 정도의 작은 규모이지만,
이곳 순흥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듯 합니다.
신단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바라본 모습입니다.
제일 안쪽 가운데에 있는 제단이 금성대군을 모신 신단과 비석이고,
앞쪽은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절한 무명의 유림들을 기리는 제단입니다.
이미 점심 때가 한참 지났으니 위장은 비어가는데, 신단과 바로 맞은 편 죽계천을 바라보며 먹먹해진 가슴이 쉽사리 진정이 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짜로 배를 곯을 수는 없지요.
답사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순흥 기지떡 본점에 왔습니다.
번듯한 건물에 홈페이지 까지 있는 유명한 떡집이랍니다.
이쪽 지방 기제사에 올리던 '기제떡'이 변하여 '기지떡'이 되었다는데, 쌀가루를 술로 발효시켜 찐 증편입니다.
횡성 안흥 심순녀찐빵집도 예전에 갔을 때는 언덕 위에 작은집이었는데 지금은 도로변에 큰 건물을 짓고 영업을 하더니,
이곳도 예전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이렇게 번듯한 건물로 이전한걸 보면,
떡장사도 예전 호랑이한테 고갯길에서 떡을 갈취당하던 시대는 이미 아닌 듯 합니다.
당일 만든 떡만 판매한다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찍혀있습니다.
기지떡과 인절미 두가지만 판매하는데 1kg에 6천원이니 가격도 저렴한 편이네요.(기지떡 홍보대사가 된 듯~ㅎ)
열어보니 이렇게 생겼습니다.
근처 '선비촌'에 들러 벤치에서 인절미로 점심을 떼우고 다시 염소 등에 올라 성혈사를 찾아갑니다.
성혈사로 향하는 지방도에는 곳곳에 제설용 모래가 깔려 왕복 2차로가 1차로로 변해 있습니다.
경사가 꽤 가파른 언덕을 불안불안하게 올라갑니다.
새로 지은 누각 앞에 염소를 붙들어 매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꽤 높은 산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내려다 보는 전망이 시원~합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사기(寺記)가 분명치 않고 절집도 그리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신라시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땅의 이름깨나 있다는 절집의 사기를 보면,거의 대부분 원효 아니면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씌어있습니다.
수백군데 절집을 모두 원효와 의상스님이 지었다 하니 도대체 그 스님들 염불은 언제하고 설법은 또 언제 했던걸까요?
아니면 말 그대로 신통력이 있어서 분신술이라도 썼던 건지~
앞에 보이는 큰 건물은 10여 년 밖에 안된 요사채,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 위 작은 건물은 산신각, 담장 안쪽 건물은 나한전입니다.
그럼에도 여기를 꼭 와보고 싶었던 것이 실은 저 나한전의 문살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담장 한켠에 나 있는 출입문을 따라 들어서는데 키 작은 석등의 머리가 보입니다.
곁에 서 보니 정말 아담하게 생겼군요.
자그마한 키 만큼이나 받침과 기둥 장식이 귀엽게 생겼습니다.
받침은 거북을 조각하였고 기둥은 용이 휘감은 모습을 새겼는데~
나름 멋있게 만드려고 노력한 그 모습이 순진하기 이를 데 없어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이 건물이 창건된 것이 조선 명종 때이니 고려시대 국가적 지원을 받던 불교의 위세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지요.
그런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는 참... 정직한 모습입니다.
이건 원주 흥법사지에 있는 진공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이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비신 옆면에 조각된 용의 모습입니다.
진공대사 탑비나 지광국사 탑비가 세워진 시기는 모두 통일신라말기~고려초이니 위 성혈사 나한전 석등보다 최소5~600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지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기술은 더 세련되어지고 고도화 되는게 자연스러운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형상을 새긴 조각의 수준이 이렇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인 것은 왜 그럴까요?
단순히 석공 개인의 능력차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 없는 "문화적 역량의 차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실감하게 됩니다.
예정에 없던 석등에 대해 잡설이 길어졌네요.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이며 기둥 머리 사이에도 공포를 얹은 다포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공포와 공포 사이에 각종 수인을 지은 부처상을 그려넣었군요.
글씨 보는 눈은 없으니 뭐라 얹을 말은 없지만 글쎄요....?
눈길을 아래로 내려봅니다.
총 6장으로 된 문짝 안에 나무로 조각한 문살이 말 그대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3자를 특히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 낸 "3대 꽃문살"이라는게 있답니다.
강화 정수사, 부안 내소사, 그리고 이곳 성혈사의 꽃문살을 말한다지요.
물론 다른 곳을 넣어서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소한 이곳 성혈사 나한전의 문살 조각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중앙 출입문의 왼쪽 문살입니다.
연꽃과 연잎이 가득하고 황새인지 해오라기인지 물고기를 찾아 걷고 있는데~
바로 발 밑에 있는 물고기를 아직은 못 본 듯 합니다.
운이 좋은 물고기네요.
위에 있는 문살도 다른 곳에 놓으면 감탄이 나올만한 수준이지만 여기 오른쪽 문살에 비하면 심심하기 그지없네요.
이곳에 새겨진 조각들은 말 그대로 입을 다물 수없게 만드는 명작입니다.
연꽃과 연잎 가득한 호수에 하늘에서 날아오는 황새,
지금 막 물고기를 잡은 물총새,
연못을 헤엄치는 기다란 용,
연잎 줄기를 붙잡고 노는 어린 동자,
연잎 위에 웅크린 개구리,
연잎 그늘에 숨은 게 두마리와 수많은 물고기들,
한마리는 결국 황새에게 잡혔군요~~
왼쪽 황새는 오늘 저녁 굶게 생겼고~
오른쪽 황새는 오늘 저녁 아랫배 두드리게 생겼고~
연꽃은 만개하고~
모란꽃도 무더기로 피어나고~
꽃무늬 창살은 더 이상 나무 조각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숨을 멈추고,
눈만 크게 뜨고,
저 꽃잎에서 풍기는 향기가 내 몸에 온전히 배일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성혈사 나한전 앞에서 나는 다음 답사지를 잊었습니다.
염소 고삐를 풀어 언덕을 내려와~
죽령을 거꾸로 넘고~
박달재를 지나~
늦으면 눈에 담아둔 꽃향기가 달아날세라 충주~장호원 국도를 내달렸습니다.
2014. 4. 14. 여주 스카우트
첫댓글 문화재 탐방 외에 카메라 테스트까지 제대로 하신 듯~^^
그 목적도 있었지요~
색감이라든가 접사 기능 등...
근데 역시 캐논 보다는 색감에 힘이 없네요.
읽어 내려 갈 수록 깊이 빠져드는 ....
한편의 다큐프로그렘같은 .. 잘 봤네요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