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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왔다 가네!”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미륵(彌勒)"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If I am merely adding to what I already know, it is no longer learning.
단지 알고 있는 것에다가 보태는 거라면, 이미 배우는 게 아닙니다.
-- J.K., The Book of Life, January 10, HarperSanFrancisco,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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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6] ‘몸’은 “현재”에 있지만, “삶,” “인생”은
어떻게든 “고해”로만 살 게 아니며, 끝내 “괜히 왔다 가네!”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역시나, ‘지금 · 여기’ 그 말씀이지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현재, 지금 이 시각, 이 장소에 살아라, 그 말씀으로다가요.
우리들 몸뚱아리는 분명히 ‘현재’ 상태의 연속으로 존재하는 건데도 불구하고, 몸으로 행해지는 ‘행동’은 전부 다 ‘과거,’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머리..
그러니까 저 ‘배움’이라는 것도, 오로지 현재 순간에서의 교감, 교류쯤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 아니면 ‘배움’이 아니라, 그냥 ‘축적’ 또는 ‘반복’ 따위쯤이나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배움 속에서 상대방과의 실시간 접촉은 없게 되거나 또는 무시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대상이 부인이나 남편이라 한들, 그저 과거의 ‘이미지’로 대하는 것뿐이겠고 말씀입니다.
‘과거’나 ‘이미지’로 대한다면, 설령 마누라나 남편의 즉각적인 상태, 반응, 낌새, 아니면 여튼 그 뭐라고 할지 잘 안 떠오릅니다만, 그런 실시간 교류는 안 일어나는 거지요. 거기에 무슨 “사랑”씩이나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사랑”이란 오로지 ‘지금 ·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 상태, 마음자리, 행동 아닙니까. 이게 분명하지 않으신 분이 대부분이겠지요? 케이께서는 “사랑”을 늘, 언제나 그런 뜻으로만 쓰시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여기”일 때에야 “사랑”이라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꼭 그렇게 “사랑”하라고.. 그게 바로 “삶”이라고.. 하여튼 간에, 그만한 경지에 ‘이념’이 닿겠습니까, ‘사상’이 닿겠습니까, ‘민족’이 닿겠습니까, 조직 ‘종교’가 닿겠습니까, ‘국가’가 닿겠습니까, “유엔(UN)”이 닿겠습니까?
그런 것들로는 그야말로 ‘택도 없지’요? ‘이념’이나 ‘철학’이 인간들 더러 “사랑하라!”고 하겠습니까? ‘유엔’이 각국 원수들에게 “사랑하라!”고 한다고요? 심지어 ‘조직’ 종교로도 안 되는 일을 어찌..
인류라는 게 생겨난 지 250만 년 또는 700만 년에, 새로 오신 “성인(聖人)” “미륵(彌勒)”께서 오셨어도, 온 세상은, 더구나 여기는, 그저 그러거나 말거나, 그 꼴뿐입니다.
하여, 거기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삼천리금수강산 더 너머 어느 지역에 도도하게 이어이어 흘러오는 “홍익인간”의 고운 마음씨를 살려보자 함이고요.
인류에게 그거 말고는 달리 아무 길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라고 기어이 “선도국”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거 아닌가 합니다만······.
오래 전부터 “고해”에다가, 기후위기, 대멸종 아니라도 하루하루 망해가는 지구촌, 내가 들어 ‘더 망하게는 안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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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4] 역시, ‘오직, 모를 뿐’ 그 말에
배운다는 건 축적이나 저장이 아니라, 순간순간 오고 가는 ‘교감’쯤 되겠다고, 예전부터 그런 생각이었습니다만. 얼마나 그리 행했단 말일까요?
단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만난다면, 그건 전혀 “창조”적인 차원이 아니지요? 하지만, 바로 그게 우리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평생을 그렇게만 사는 거고요.
이미 알고 있는 수준에서 관계를 바라본다거나 세상을 굽어본다는 것은, 전혀 “배움”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뭔가 “창조”적인 바탕이 아니라면, ‘배우는 게’ 아니란 말씀이군요. 그냥 반복이거나 답습이거나 주입이거나 첨삭이거나 하는 따위는, 흔한 말로 진짜배기 ‘공부’가 아니라는 말씀으로다가..
‘알고 있는 것’은 ‘지식’인데, 그런 지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첨삭’이랄까 하는 저런 따위들은 전혀 ‘공부’가 아니란 말씀. 그러니 ‘지식’ 차원이 아닌, ‘실재, 존재’ 차원이라야, ‘공부’라는 말을, “배움”이란 말을 쓸 수 있겠습니다. 역시, “지금·여기”라는 경지겠지요. 저런 공부에는 ‘익힘’도 포함되겠고요. 처음에는 거칠고 서툴서다가도 나중에는 매끄럽고도 부드럽게 해내는 “행동”들 말씀입니다. 더구나 ‘기계적인 영역’의 ‘기술’에서는 아주 확실하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만요.
여기서 좀 더 보자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마음공부”라는 말이 있으니, “몸공부”라는 말도 있겠지요. 거기서 보자면, “마음공부”는 ‘깎아내고 버리는 것’이고, 그래서 다 “비우는 일”이고, “몸공부”는 ‘갈고 다듬는 것,’ “알차고 옹골지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거기서 말을 만들어보자면, “인생이란 고해가 아니라, 깍고 다듬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만. “마음은 깎고 몸은 다듬고!” 하지만 거기서는 ‘의지’나 ‘욕망’이 아니라, 오로지 “열정”이어야 하겠습니다. 아니면 ‘슬픔’이 따를 테니까요.
모름지기 “몸”과 “마음”이 함께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코 “마음”만 갈무리, 단도리해서 되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음공부”에 생각이 있다면, “몸”에 대하여 저절로 관심과 열정이 생기게 될 것도 같습니다. “몸”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면, “마음”이란 게 무슨 꼴이겠습니까! 그런 면에서도 ‘마음’을 다 깎아서, “마음”이 다 깎여서 비워진다면, 더는 몸만 남겠습니다. 아주 튼튼하고 씩씩하게 남겠지요? 그게 “자유인” 아니겠습니까? “마음”은 그 어디에도 머무는 곳 없이, “몸”만 아주 훨훨 삼천리 더 넘어 쌩쌩 날아댕기는 사람..
“마음”이 텅 비어 있다면, 사사건건 안 배우고 어쩌겠습니까? 보는 족족 만나는 족족 다 ‘배움’이겠지요. 물론 전혀 ‘채움’이 아니겠고요. 그때는 ‘안 만나야 될 인연’도 그 즉시 바로 알고 행동하게 될 듯도 합니다만. 제 얘기가 아니라서 말짱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더 할 것도 없겠고요. 어쨌거나 “인생은 배움”입니다. 죽을 때까지 말이지요. 거기서도 ‘익힘’이 작동하겠지만.. “창조”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전혀 “배움”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니..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자유인”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될 수도 있겠건만, 그렇게 가르치려고 하지를 않으니, 사회가 어찌 한발이나마 더 떼놓겠습니까!
세계적으로 “크리슈나무르티 학교”를 만들어놓으신 것도, 그렇게 ‘가르치자’는 “사랑”의 발로쯤 안 되겠습니까? 인생이란 어떻게든 저렇게 “괜히 왔다 가는 것”으로 팽개쳐서는 결코 아니 되는 거겠으니 말씀입니다. 글쎄요, 딴 시대였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야말로 인류사 “새로운 성인(聖人)”께서 오신 시대, 더더욱 “괜히 왔다 가는 인생”을 살아버리고 말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짜든지 간에, 피차 단 하나라도 더 배우고 가르쳐야지요. 더는 자기 스스로 학생이 되고 자기 스스로 선생이 되어야만 한다고도 하셨습니다만.
그게 안 되고, 인간들이 다들 ‘인식’의 “골”이 깊어지면 질수록 “관계”는 점점 더 엉망진창으로 되지 않습니까. 지나 내나 하루이틀 살아가면 갈수록, 그야말로 ‘더 좋은’ “관계”는 멀어지지요? 심지어 마누라와도, 남편과도 그렇지 않습니까!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자식들과도 마냥 좋기만 하십니까? 대한민국은 더 그렇지요? 이 어찌, 악담으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부디, 부부만이라도 정말 피차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기를..
결국 본문 말씀은, 인간들이 ‘잔돌’ “소석” 잔머리 굴리면서 배운답시고 수천 년이 흘렀어도, 마냥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더 보태기만 할 뿐이니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런 모방과 축적과 답습의 결과 기어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거고요. 물심양면으로 두루 다 말씀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심적’인 문제, “고해”로 안 살면 행복한 거였는데요, 오늘날에는 거기에다가 ‘물적’인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거기서는 무려 “인류가 멸망한다”고 난리라서 “고해”는 여전히 영순위 못 되는 거지요?
하지만 ‘남아 있는 시간’이나마 “행복”하게 보내려면, 이제라도 이넘의 ‘나’가 죽어주는 수밖에 없어서 말씀입니다. 달리 단 한 갈래 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들 “평양성 해 안 뜬대도, 나 몰랑!” 그짝이라서 말씀입니다. 소위 “국가경쟁력” 운운, 창대하게 떠들어대면서, 한 차원 높게도 못 보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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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괜히 왔다 가네!”
“배움” “배운다”는 의미, 그 중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다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어린애들 아니라면, 의무교육만 그럭저럭 받았다면, 뭘 더 안 배워도 대충 살아들 갈 수 있는 거겠지요? 그러면 거기서 ‘더’ 배운다는 건 무슨 의미겠습니까?
언뜻 생각해보자면요, ‘배운다’는 걸.. ‘몸으로 익히고 두뇌에 저장한다.’는 두 가지 뜻으로 쓴다고 해도, ‘배워서 등쳐먹는 세상’이라는 소리가 통용되는 사회라면 그건 ‘익힘’보다는 ‘저장’쪽에 가깝겠지요? 아닐까요? 더구나 후자 쪽이라면, 도대체 뭔가를 ‘배운다’는 게 무슨 의미를 더 지닐 수 있겠습니까? 전자로서, ‘몸으로 익힌다’ 해도, 그런 걸로 갑질이나 해먹는다면 결국 마찬가지겠지만요.
물론, ‘교육’으로서 대한민국을 선진국 선도국 강대국 만든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속에서 각자 그만큼의 대우는 해주는 것이겠지만, 저 말씀은 그런 부국강병 차원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지요? 부국강병을 팽개칠 수는 없지만, 그때도 저 “홍익인간” 마음씨는 고스란히 그대로 살아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여기서 또 백범 선생의 소원, “우리나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문화” 말씀이셨지요. 그 말씀이 생각나지는 않으시는지요? 그 말씀, 또 끌어오냐고 하실까봐 좀 그렇습니다만. 어쨌거나 ‘배운 걸’ 가지고 베풀며 살아야 말이지요.
베푸는 건 나중 일이라 치고요. 우선은 그 ‘배운다’는 본래 의미는, 배운 걸 자신의 두뇌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 ‘저장된 것’들은 기억이고 기억은 생각의 소도구들이니까, 결국 그건 ‘나’를 내세우는 도구로 쓰일 터입니다. 그렇게 너나없이 ‘나’를 내세우는 흐름에 젖어 있기에, 꾸불텅꾸불텅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며, 하루 이틀 살아가는 게 다들 그토록 이토록 고달프고 고롭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인생이 고해지요. 그러니까 ‘배운다’는 본디 의미는 그 “고해”를 벗어나는 흐름이라는 뜻이 되는 거겠네요? 아닐까요?
‘왜, 그리 비약이 심하냐?’ 하실까봐, 또 좀 그렇습니다만. 그게 저런 의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다들 배운답시고, 두뇌에 저장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만 살다 만다면 끝까지 이 “고해”는 영영 못 벗어나는 거겠지요? 여기서 또 분명한 사실, 저런 거 아니라면 케이 말씀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케이 가르침 자체를 또 저장하시게요? 그렇다면 그건 무슨 경전 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또 하나의 사이비 종교 교리에, 결국 그를 ‘교조’로 만들어버리시겠습니까?
“진리”에 산다는 게 바로 그거 같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배운다’는 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교감’ ‘오고감’ ‘교류’ “친교”쯤 되지 싶습니다. 그리고 저장하지 않아야지요. ‘저장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런 말 들었다고, 평생 해와서 아주 뿌리 깊은 습관으로 되어 있는 ‘저장’을, 그 자리에서부터 딱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 다들 평생, 저장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온 거 아닙니까? ‘오고감’ “친교” 그건 남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그야말로 ‘배움,’ 스스로 ‘몸으로 얻어내야 하는 거’겠지요. “독수리의 비상”이라는 책 제목도 생각납니다.
배우는 상태로, 베푸는 마음으로,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배운 걸 ‘저장’해서 ‘나’의 소도구가 되게 해버리는 한, 죽을 때까지도 인생은 피지 못하고 시들어만 갈 터입니다. 대부분 인간들이 꼭 그렇게 살다 가는 거겠고요. 또 생각납니다. “괜히 왔다 가네!” 한때 유명했던 어느 스님 입적할 때 하신 말씀이라지요?
끝내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주제를 조금이나마 벗어나보자면, 일상에 파묻힌 채로, 늘 하던 그대로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기사, ‘나 좀 내버려둬라! 그저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란다!’ 하고 있는 판이라면 더 무슨 말이 들리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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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진짜로 ‘인간’들 성품이 좀 나은 ‘나라’라야 말이지요
‘배운다’는 건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만, 이게 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건 전부 다 ‘축적’해나가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서, 두뇌 기억 저장소에다가 등록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건 딱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작용을 ‘인식’이라고 명명해본 것이고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recognize, 그쯤 되겠지요. 그런데 ‘배운다’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아니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니 인식이 아닌 차원을 상정해봐야겠고, 그걸 일컬어서 ‘지각’이라고 해보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perceive, 그 쯤 되겠지요? 국어에서도 단어가 서로 비슷하게 쓰인다고 하겠고,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러나 케이 말씀의 ‘배운다’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짐짓 구분을 해보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저 ‘배운다(leaning)’는 의미는 ‘축적’이 아니라시니까, 그러면 그건 그 순간에 일어나는 ‘교류’나 ‘교감’ 쯤 되지 않겠습니까? 더는 ‘친교’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순간의 실제 상태를 바로 감각 · 감지 · 지각하는 것입니다. 역시 ‘나’의 개입 아닌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찌 “평생을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에게 어찌 ‘나’를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고 ‘나’ 없이 살아라 한단 말입니까? 야속함을 넘어서, 그건 아예 안 되는 일이겠지요? 그게 안 되니 “인생이 고해”이기도 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삶의 순간순간을 ‘배우고’ 산다면 인생이 고해로 안 되는 것입니다. ‘나’가 개입 안 하니까요. 말은 쉽게 이렇게 했지만, 이걸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 자신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거나 ‘배운다’는 의미도 각자가 손수 몸으로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걸 진짜로 얻어냈는지 아닌지 누가 간섭할 일도 못 되고 말씀입니다. 자기가 정말 “자유롭게” 사는지 아닌지 이 세상 누가 제일 잘 알겠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봐도, ‘꼭 나처럼 무지랭이로 살겠거니’ 할 수 있을 뿐이지요? 더구나 ‘나’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평생 ‘나’로서만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알아본단 말이겠습니까? 그러니 함께 살지도 못 할 거 아니겠습니까? 함께 살아서도 안 됩니다. 그들 하는 짓들이 ‘깊이 병들어 있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짓’들뿐일 텐데, 견딜 수 있는 데까지는 견딘다 하더라도, 끝까지 그들과 한 무리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필요한 것이 ‘배우는 것’이겠지요.
‘배운다’와 ‘안다’를 ‘감지’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배운다’를 ‘감(感)’의 영역으로, ‘안다’를 ‘지(知)’의 영역으로 말씀입니다. 몸으로 얻어내야 하는 것에, 이런 언어적인 구분과 분별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해를 더 해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써보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지식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양의 경·론·소를 비롯한 수많은 전적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지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지(知)’라는 것은 본래 ‘알고 판단한다’는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고, ‘식(識)’을 판단 이전 상태까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역시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냥 ‘주의상태’만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의상태’가 이미 “고해”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딱 그것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안 살아야지, “고해”를 못 벗어난다면, 저 수많은 지식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궁극적으로 “삶”의 길은 지식으로 가는 길이 아닐 것입니다. 지식 많다고 행복하다면 모를까.. 그런 면에서도 지식은 딱 기계적인 영역에서만 그 효용이 인정될 수 있을 뿐이겠지요. 겨우 두뇌의 산물인 지식으로 어찌 저 “진리”에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일입니다. 역시 사변적인 설명들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도 하겠지만, 고도의 지식에 사변을 더한다고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뻔히 “책”일 뿐이면서, 그 한계를 넘자니까 저게 해결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무슨 다른 개념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언어적인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설령 부처님 말씀이라고 해도, 그 핵심은 저 모든 경전을 넘어서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전 안 읽어야 되는 걸까요?
저렇게 ‘배운다’는 것은 “진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예 ‘지식’의 차원이 아니니까요. 배우지 않으면 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자유인” 되지는 못하겠지요? 우리 사회에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많습니까? 말의 용법이 다르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전혀 ‘배운 사람’이 아닌 겁니다. 그들 역시 ‘깊이 병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인 거지요. 더 나아가서 좀 고상하다는 ‘종교인’이라고 해도, 역시 저 ‘깊이 병든 사회’의 구성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조직들로 해서 사회는 더 분열되어 있고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은 단일 종교 사회도 아니라는 면에서, 저런 분열들을 더 절절하게 피부로 느끼며 살아들 가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 현상’ 아니란 말입니까? 순기능이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각각 조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왜 남북통일만 문제랍니까?
또 해석이랍시고 줄줄이 늘어지려 하는군요. 이게 아마도 젊은 시절 ‘무슨 말을 못 하게’ 당하고 살았기에, 아예 아주 생매장 당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트라우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 태어나서, 그것도 이 한반도에, 그나마 의미 있는 거 하나 좀 해보자고 했는데도,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하고자 했는데도, 저 부패하고 타락한 무리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고 배제되어 진짜로 죽은 채로 세월만 보냈기에.. 아니, 이제 정말로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살아서야 쓰겠습니까?
누군가 의도적으로 죽이려 한다고 해도, 더 이상은 매장된 채로 죽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고작 기껏 한다는 게 인터넷 어느 한 구석에 글 한 줄 올리는 게 다일 뿐입니다. 세상은 저다지도 말도 안 되게 굴러가고 있는데 말씀입니다. 오로지 지꺼만 챙기고 있는 주제에들.. 진짜로 ‘인간’들 성품이 좀 나은 ‘나라’라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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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나를 만나는 사람 만세!”
그게 불경이든지 성경이든지 코란이든지, 무슨 천수경, 화엄경, 반야바라밀다심경이든지 간에 “책”은 지식이지요. 전부 다 인간의 머리로 써낸 거 아닙니까? 거기서 또 짐짓 ‘인간이 쓴 게 아닌 책’ 얘기도 있지요? 어쨌거나 저러니까 책을 읽는다든지 또는 다른 누군가의 강연·강의나 설교·설법을 듣는다든지 하는 그런 식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잘들 하는 말로 스스로 ‘깨달아내야’ 하는 거지요. 그게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몸’으로 얻어내야 하는 걸 테니까, 이 ‘잔머리’ 가지고 제 아무리 굴려봤자 “진리”에는 다다를 수 없겠습니다. 좀 억지로 그걸 ‘인식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런 ‘지식’ 아닌 영역을 ‘지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에는 ‘솔 소리 바람 소리..’ 하는 ‘감각의 영역’도 포함되겠습니다.
저런 ‘지식의 영역’이 아니지만, 가슴 뜨거운 누군가 살아가다가 어떻게든 “진리”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을 터이고, 그걸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거친 벌판에서 한 그루 나무와 함께’라든지, 여튼 “그 사랑을 만나게 될 때, 그때 당신은 이른바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도 하셨지요. 나아가서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그 “사랑의 화신”이니까, 몸소 “나를 만나는 사람 만세!”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오죽하셨겠습니까.
“책”이나 “말” ‘믿음’ 수준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씀을 두고도 또 “아마추어 메시아”니 하는 따위로 ‘비아냥’거리기나 하겠지요. 어떻든 저 “사랑”과 “진리” 그게 그 얼마나 엄청난 일일지.. 그 사회와 역사와 인류에게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일지.. 우리는 머리로나마 알 수도 없겠지요? 설령 그 공동체 속에 겨우 몇 사람 안 된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그런 게 바로 “종교”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혁명이란 행복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러더니만, “종교”도 딱 그짝일까요?
지구에 인류가 생겨나고 250만년 또는 350만년 아니면 600만년, 그 훨씬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간 세상은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종교’랍시고 전부 다 “조직”화해놨고, 그 결과로 인간들의 “분열”을 조장해왔으며, 그 가장 큰 적폐가 바로 “전쟁”이라고 하겠지요? 역사적으로 저 수많은 ‘종교전쟁’들을 보세요. 게다가 오늘날이라고 뭐가 다릅니까? 소위 미국 911 테러를 ‘문명출돌’이라고도 하지만, 그 바탕에 종교가 깔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종교랑 돈이랑 엮여 있기도 할 테니까요.
이 몰골로나마 어떻게 “성인의 시대”를 살아낸다고 지척지척 가고는 있는데, 뭐 그리 짜다라 ‘행복’한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리”와 “자유”와 “행복”을 말씀하시는 건데도 불구하고.. 불혹, 이순 다 지나도 어떻게 이다지 허허롭기만 할까요? 일단은, 저 말씀들을 제대로 못 알아먹어서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결국은 이렇게 완전 생매장된 채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인’을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하고 “무위”를 얘기하는 “성인(聖人)의 시대”를 살다 가는 올바른 길일까요?
어쨌거나 지구촌 어디어디 할 것 없이, 세상이란 어차피 ‘깊이 병든 사회’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고 뭐 그리 다르단 말입니까?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 니나내나 간에 다들 ‘병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깊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뚱이, 밥통, 염통, 간뗑이, 오줌보 따위로부터 시작해서 두개골, 모가지, 팔뚝, 장딴지를 포함해서 끝내 골통까지,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있겠습니까? 거기서 골골백수 살아본들 뭐 그리 대단한 일일 거라고. 그야말로 ‘활짝 피게’ 살다 가야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두고 ‘선도국’이니 ‘선진국’이니 심지어 ‘강대국’이라고까지 불러준다는데, 여기서 보면, 그리 많이 재보지 않아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는 나라들이 천지삐까리 아닙니까? 다분히 코로나 ‘방역’ 때문에 그렇게 불러준다고도 할 텐데, 그거 말고 뭔가 진짜로 좀 앞서갈 방도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여기는 건국이념, 교육이념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한 나라였습니다.
참, 아련한 소리지요? 글 제목을 저렇게 붙여놨습니다만, 사실상 “‘인간’들 성품이 좀 나은 ‘나라’라야 말이지요.” ‘민도’라는 말도 있고 무슨 ‘국격’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한민족이 과연 그런 것들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들 맞습니까? 별로 보잘 것도 없는 이웃 나라 빗대어 볼 건 더 아니지요? 그들 역시 세계 근현대사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좀 밴댕이 소가지들 아닙니까? 이런 말도 ‘국뽕’일까요? 오히려 ‘선진국’ ‘선도국’ “강대국”이라는 말에 우쭐해 있는 모습들이 ‘국뽕’ 맞은 거 아닐는지요? 그것도 치사량으로다가..
여튼간에, 시시각각 드러나는 모습에서 배우기만 할 일입니다. 이게 꼭 ‘되·떼·때 왜·쪽·바리’들 악써가며 저들의 하는 꼴에 해당하는 말만도 아니지요? 우리 역시 ‘실제 그대로의 모습’이 그때그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국가 차원에서든지 정권 차원에서든지 남북 차원에서든지 동서 차원에서든지, 기어이 “개인” 차원에서까지 말씀입니다. 거기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게, 두말할 거 없이 바로 “개인” 각자의 차원이겠습니다. 항상 스스로 배워야지요. 스스로 선생이 되고 동시에 스스로 학생이 되어서 말씀입니다. 그게 가장 근본적인 “배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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