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음식 – 콩잎에 멜첫 / 강서
삼월이 되면 바람부터 달라지는 것 같다. 코끝이 맵게 시렸는데 달큼하고 부드럽게 변한다. 텃밭의 배추도 납작하게 땅에 엎디어 있다가, 어느 날 새 마음을 먹은 것처럼 잎이 연해지면서 며칠 새에 이파리들이 하늘을 향한다. 이제 꽃대를 올리겠다는 의지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내용을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다.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어느 작가의 작품을 보고 나서야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 나라처럼 늘 더운 날씨 속에 살면 생활의 변화가 크게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의복이나 이부자리를 새롭게 바꾸고 제철 과일과 음식을 먹는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사는 게 축복이라는 걸 살면서 깨닫는다.
제주는 철에 따른 음식이 뚜렷하고 생활상은 웃드르(산촌)와 알드르(해안)로 나뉜다. 웃드르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생활이고, 알드르에서는 밭농사가 발달하였으며,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활동을 통하여 식량을 마련하였다. 땅이 척박했기 때문에 비료가 시판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거름을 만들어 밭에 들였다. 오줌과 재, 변소나 외양간의 거름이 주로 쓰였다. 해변 마을에서는 마른 듬북(해초)을 거름으로 썼다. 보통 바닷가 근처에 듬북눌(해초를 쌓아 놓은 더미)이 보였는데 모래밭에 퇴비로 들이는 것이다.
집집이 불을 때어 음식을 했으므로 재가 많이 나왔다. 굴묵(군불을 때는 곳)에 모아두었다 마대에 담아서 불채장시(재를 사가는 장사치)에게 팔기도 했다. 그리고 집마다 오줌 항아리가 있었다. 멸치가 많이 날 때는 바닷가 넓은 바위나 길가에서 말려 멜컬름(멸치거름)으로 썼다.
사람들은 철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산과 들은 온갖 곡식과 열매를 내었고, 바다도 계절에 따라 다른 해산물을 내주었다. 제주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음식을 소중히 여겼다. 신성한 나무와 바위, 깊은 굴이나 얕은 궤 등 천지사방 모든 물질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음식을 저장할 줄 알았고 서로 도우며 정답게 살아왔다. 음식 장만은 여성의 몫이었다. 땔감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제주의 여성은 밭에 갔다 돌아올 때 등에 뭔가를 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나뭇짐이든 짚을 모은 것이든 집에 들여놓으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는 땅이 척박하고 논이 거의 없어 쌀이 귀했다. 보리와 조를 섞어 밥을 지어 먹다가 반지기 밥(쌀과 보리쌀을 섞은 밥)을 먹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쌀밥으로 바뀌었다. 보통 쌀과 보리를 7:3 정도의 비율로 밥을 지어 먹다가 압맥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 보드라움에 젖어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했다. 보리쌀은 애벌 삶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이 곧바로 쌀밥으로 빠르게 바뀌었기 때문에 압맥은 그리 오래 자리 잡지 못했다.
여성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다. 그래서 제주의 음식은 복잡하게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드는 게 많지 않다. 간단하고 빠르게 만드는 음식이 대중을 이룬다. 갓 낚아온 갈치에 우영팥(텃밭)의 배추와 호박을 넣은 갈칫국이 그렇고, 자리 무침도 한 가지다. 계절마다 신선한 재료에 조금의 양념을 첨가해 먹는 제주만의 독특한 식생활이 생겨났다.
봄의 마파람 뒤에는 메역 버난지(파도에 밀려온 미역)가 갯가에 떠오른다. 우리 동네에 미역과 우뭇가사리가 잘 떠오르는 자리가 있다. 파도에 밀려온 해초가 있는 곳은 바닷가 아무 곳에나 있는 게 아니다. 해류와 계절에 따라 장소가 다르다. 가시리(풀등가사리)가 자라는 곳에 가면 바닷물이 찰방찰방하는 곳에 미역이 떠내려와 있다. 어른이 발견했으면 벌써 건져 가고 없었을 터인데 밭에 나가고 없는 시간에 먼저 발견한 것이다. 갖고 간 구덕으로 몇 번을 집에 나른다. 낮은 눌(낟가리)위에 모양을 잡아 말린다. 큰 미역을 여러 장 길게 맞추어 널고 작은 미역으로 빈 곳을 채워 말리면 한 낭이 된다. 마른미역은 비싸게 팔려서 어머니가 채취해 온 것을 합해 열 낭이나 스무 낭을 채워 미역 장수에게 팔았다.
그날 저녁 반찬은 미역무침이다. 물미역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바락바락 주물러 떫은맛을 빼야 한다. 초록색으로 곱게 변한 미역을 썰어 양념하고 쪽파를 다듬어 송송 썰어 넣는다. “ᄎᆞᆷ지름 ᄒᆞᆫ 방울 비추라.(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라.)” 라는 어머니 말씀에 참기름을 수저에 덜다가 미끈거려 덜컥 한 수저를 넣어 버렸다. 미역무침을 맛본 어머니가 웃으면서 “느네 어멍 깨 말이나 해 먹었댄 소문나서냐? (네 어머니 참깨 농사지어서 몇 말이나 거두었다는 소문 나서 이렇게 참기름을 많이 넣었느냐는 말)” 라고 하셨다.
미역무침을 맛있게 먹는 나를 보시고 상군 해녀 되기는 글렀다며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셨다. 물질을 잘하는 해녀는 해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아이가 크면 당연히 해녀가 되는 줄 알았던 때였다. 어머니도 문어나 소라를 많이 잡아 오긴 했지만 즐겨 드시지는 않았다.
참기름은 귀해서 제사나 명절에 나물 무칠 때 썼다. 식용유가 시판되기 전이었다. 무정하고 푼푼하게 쓴 기름이 유채 기름이다. 요즘은 카놀라유로 불린다. 그런데 유채 씨앗을 얻기까지가 너무 힘들다. 어떤 농사인들 힘들지 않은 게 있으랴만 유채는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땀띠가 날 것 같다.
성인이 된 지금도 차를 타고 가다 유채꽃이 만발한 곳을 지나갈 때가 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차를 한곳에 세우고 바라본다. 아름답게 보이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특별한 감흥이 없다. 곱게 핀 유채꽃을 생각 없이 보는 것이다. 어릴 때는 계절이 정지해 주길 바랐다. 꽃이 핀 채로 유채가 더 이상 익지 말았으면….
초여름의 달궈진 햇볕과 바람 없는 옴팡밭에 장대하게 펼쳐진 익은 유채를 생각해 보라. ‘이걸 언제 다 베나.’ 하는 생각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일하기 싫어 앉아서 낫 등으로 흙을 툭툭 두드리다 일어서서 새삼스럽게 밭 주변을 둘러본다. 돌담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저 나무가 언제 저렇게 자랐지?’ 생각한다. 마치 열심히 일하다 허리를 좀 펴 쉬려고 하는 것처럼. 여기서 베다 싫증이 나면 저기로 옮기고, 저기서 베다 또 싫증이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겼다. 부모님은 나의 게으름을 알고 계셨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어린 내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하랴만, 이제부터는 게으름피우지 말고 본격적으로 잘해보리라 결심하고 낫을 들어 열심히 베고 있노라면 여기서 물 가져와라, 저기서 모자 가져오라 하며 심부름을 시킨다. 그러면 일의 흐름이 끊긴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든다.
유채를 베기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는 몸도 마음도 히밀히밀(일을 게으르거나 성의 없이 하는 모양)하다. 그러다 점심을 먹을 때가 가까워지고 일도 손에 조금 익으면 어떤 기가 찬 깨달음을 얻는다. 이 유채를 베지 않고는 밭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꾀병도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프다고 해서 집에 먼저 가라는 허락이 떨어져도 멀고 먼 들길을 뙤약볕 맞으며 걸어가고 싶지 않다. 나무 그늘도 없는 밭이라 낮잠을 잘 수 없어 꾀병을 부려도 얻을 게 없다. 게다가 놉을 몇 사람 빌어서 왔으니 맛나는 ᄎᆞᆯ래(반찬)가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 때까지 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계산을 하는 내 마음도 모르고 동네 어른 한 분이 어쩌면 아이가 저리 착하냐고 부모님께 묻는다. 이때다 싶어 얼굴을 해쓱하게 하고 이마를 짚으며 한마디 한다.
“어무니, 나 더위 먹은 거 닮수다. 머리가 아프고예, 속이 늬울늬울ᄒᆞ우다.(속이 메스꺼워요.)”
“아이고, ᄋᆞ거(여리디 연한 어린 것). 밭이 완 고생해염져. 저기 담 그늘에 강 앉앙 쉬라.”라는 말이 떨어지면 드디어 자유다. 햇볕이 비껴가서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는 돌담에 기대어 앉는다. 흙냄새가 신선하다. 어른들이 일하는 모습을 쳐다본다. 자기 밭이 없어 남의 집 일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고, 어머니가 며칠 일해 준 대가로 품앗이하러 온 이도 있다.
그때 결심했다. 커서 우리 마을 사람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농사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너나없이 농사를 지었으므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사계절 밭에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농사 때문에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적게 와도 걱정이었다.
유채는 추운 겨울에 김을 매고 더위가 시작될 때 벤다. 김을 맬 때는 손이 시리고 수확할 때는 더워서 이마에 땀이 나는 것이다. 서쪽 밭의 유채를 베고 나면 동쪽 밭인들 익지 않고 기다려 주겠는가. 우리는 학교에라도 가지만 부모님은 하루도 쉴 틈 없이 또 다른 밭의 유채 수확을 해야 했다. 유채는 대가 굵기 때문에 종일 베는 게 무척 힘들다. 학교가 파한 후 밭에 가면 어머니께서는 “하늘의 해는 작대기 받혀 놔시냐? ᄒᆞᆫ저ᄒᆞᆫ저 일 ᄒᆞ라.”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해는 작대기 아닌 쇠막대를 받혀 놨는지 질 듯 질 듯 지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 갈 때가 가까워져서야 새삼스레 일할 마음이 생긴다.
유채 털 때는 덥기도 하거니와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지면 크게 다치기 때문에 조심조심 걸어 다녀야 한다. 낫으로 베어 낸 자리는 무척 날카롭다. 복숭아뼈를 긁히는 일은 다반사다. 이때 아이들이 하는 일은 넓은 밭에 한 무더기씩 베어 놓은 마른 유채를 한곳으로 모아오는 것이다. 그 일은 진저리나게 오싹한 일이다. 이유는 유채를 베어 며칠간 말리는 사이에 서늘한 그 밑으로 기어든 도마뱀이나 지네 등이 가끔 나와 혼비백산하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런 것에 무척 예민했다. 어머니께서는 “유달리 그러니까 네 눈에만 그런 게 더 뵈는 것 아니가.” 하고 말씀하셨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온종일 일하지 않고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끝나니까 다행이었다.
수확한 검은색 유채는 햇볕에 잘 말려서 기름을 짜온다. 이 유채 기름으로 일 년을 쓰는 것이다. 집마다 그 시기에 기름을 짜기 때문에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기계로 유채를 볶고 나서 기름틀에 얹으면 기름 또한 조금씩 천천히 흐른다. 참새 오줌도 저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지켜본다. 기다림에 한계가 올 무렵 기름 짜기가 끝난다.
길쭉한 유리병에 담긴 기름을 들고 껑충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 식사는 밥에 간장을 넣고 갓 짜온 고소한 유채 기름을 넣은 비빔밥이다. 온 가족이 특식을 즐기는 중에 어머니께서 한마디 쐐기를 박으신다. “봐라, 일을 하니까 이런 맛있는 것도 먹는 거지.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밭 갈앙 온 쇠나 쇠막(외양간)에 있던 쇠나’. 그 시간에 놀았다고 뭐 별거 있느냐? 사람이나 쇠나 몸을 놀려야 산다.”
보리는 유채보다 일찍 수확한다. 보리 수확은 날씨가 좋거나 그간에 큰 마파람이 불지 않았다면 하늘거리는 보리를 베는 것은 덜 괴롭다. 보릿짚은 다른 작물에 비해 부드럽고 가볍다. 하지만 수확하기 전에 큰바람이 불었다면 보리는 이삭이 무거워 이리저리 헝클어지고 허리는 꺾여있어 일손이 더 들고 작업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보리도 베고 나서 며칠을 말린다. 유채는 한 무더기씩 모아 놓지만 보리는 길게 줄지어 널어놓는다. 그래야 여물이 잘 마르기 때문이다. 놉을 빌어 며칠에 걸쳐 보리를 묶으면 타작할 준비를 한다. 하루 전에 사람을 빌어 한 곳으로 지어 나르거나 온 가족이 나른다. 이즈음에 보리방학을 했다. 방학이라도 일만 하다 보면 끝나버려 별 재미가 없다. 부엌의 부지깽이도 돕는다는 농사철에 어른의 일손을 도우라는 의도다.
타작하는 날은 일이 일찍 끝나서 좋다. 타작 기계가 밭에 설치되면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여러 사람의 협업이 시작된다. 보리를 담은 마대가 점점 많아지고 보릿단은 줄어든다. 그즈음 이 밭 저 밭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보리의 고시락(까끄라기)을 태우는 것이다. 고시락이 목에 붙으면 어찌나 깔끄럽고 가려운지 모른다.
수확해 온 보리가 마루에 쌓이면 다음 날부터는 말려야 한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마당 흙의 이슬이 걷히면 여러 개의 멍석을 펴서 보리를 말린다. 학교 다녀와서 해야 하는 일은 돼지 먹이를 주고 널어놓은 보리를 뒤집어 주는 것이다. 해가 어느 정도 기울면 거두어들인다. 며칠 뒤면 고방의 큰 쌀독 몇 개에 고슬고슬한 보리가 가득하다. 그즈음 농협에서 보리수매를 한다. 일 년 먹을 양식을 남기고 나머지는 파는 것이다. 보리 수확이 끝나고 비가 오는 날, 어머니는 가마솥 뚜껑에서 보리를 볶았다. 보리개역(미숫가루)을 만들려는 것이다. 밥에 비벼 먹기도 하고 물에 타서 먹기도 한다. 농부나 어부의 간식거리로 최고였다.
이즈음에 멸치와 자리돔이 나는데 집마다 멜젓(멸치젓갈)과 자리젓을 담갔다. 멜젓은 콩잎에 쌈을 싸서 먹었다. 여름이 되면 어른들이 밭에서 일하다 집으로 돌아올 때 콩잎을 따서 온다. 여름 농사는 콩을 많이 파종해서 콩잎이 풍부했다. 농약도 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남의 밭에서 콩잎을 좀 따가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콩잎에 멜첫은 신랑과 각시’라는 얘기가 있다. 잘 익은 멜젓에 풋고추와 다진 마늘을 넣어 콩잎에 싸 먹는 풍습은 제주의 오래된 음식 문화이다.
콩잎 여러 장을 한 손에 펼쳐 밥을 얹고 멜젓을 곁들인다. 늦은 봄에 난 멸치로 젓을 담그면 살이 녹지 않아 콩잎 쌈을 먹을 때 제격이다. 멸치가 굵으면 그 맛이 더 좋다. 풋고추를 뚝뚝 썰어 놓아 매콤한 맛을 즐기기도 한다. 어릴 때는 콩잎 쌈을 즐겨 먹는 어른들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 진가를 알게 되었다. 여름 더위에 입맛을 잃었을 때 콩의 영양가가 그대로 들어있는 콩잎만큼 좋은 식재료도 없다. 게다가 더위에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멜젓과 자리젓은 소금과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 훌륭한 반찬이 되는 것이다.
젓갈은 소금의 양을 잘 맞추면 알맞게 발효되어 냄새도 좋다. 어머니는 해마다 여러 가지 젓갈을 담그셨다. 고도리(어린 고등어)젓과 각제기(전갱이) 젓도 담그셨다. 이 두 가지는 살이 깊어서 그런지 배를 갈라서 소금을 친다. 잘 발효되면 젓갈에 모래알 같은 게 생긴다. 잘 익었다는 표시이다. 외할아버지께서도 간이 맞게 되었다면서 어머니가 만든 젓갈을 얻어가기도 하셨다.
우리 마을은 오래전부터 고도리가 많이 잡히는 주산지였다. 미처 다 먹지 못한 고도리는 밭에 거름으로 쓸 만큼 흔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각제기도 흔했다. 외할아버지는 선주여서 받는 몫도 많았다. 그것을 쇠달구지에 싣고 가서 중산간 마을에 내다 팔았다. 곡식이나 돈으로 바꿔 오는 것이다. 잊히지 않는 광경은 젓갈을 담고, 배를 따서 바닷가 너른 바위에 널어 말리고도 남은 것은 길가에서 말렸다. 밭의 거름으로 쓰는 것이다. 그곳을 지나칠 때 나던 비릿한 냄새가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 집도 아버지 몫으로 받아온 생선을 마당이나 길가에 널어 말렸다가 거름 대신 밭에 들였다. 각제기는 음력 칠월이 되면서 맛을 더하는데 배를 가르고 소금을 쳐서 마른 생선으로 쓴다. 그 맛이 담백하면서도 베지근하다. 음력 팔월 초하루에는 가문별로 모둠벌초를 한다. 추석이 오기 전에 벌초할 때 마른 각제기를 구워서 제물로 쓰기도 한다.
또 다른 여름 반찬으로 수박을 된장과 함께 먹는 것이다. 작거나 다 익지 않은 수박은 반찬이 마땅찮은 여름에 된장과 잘 어울렸다. 어느 수박밭이 농사를 다 끝내어 파장한다고 하면 그곳에서 수박 여러 덩이를 지고 와서 그늘에 며칠씩 두면서 먹었다. 요즘도 그렇게 먹는 사람이 많다. 냉장고에 잘 익은 수박을 두었다가 쪼개서 된장을 조금 얹어 먹는데 시원하고 물이 많아 오이냉국도 필요 없을 정도다. 붉고 단 수박에 된장을 겸하여 먹는 것이다. 달고 짠 맛의 조화인데 요즘 사람들의 말로 옮기면 ‘단짠단짠’하다. 영양학적으로도 아주 좋다. 심한 더위와 갈증을 풀 때도 물보다 시원한 수박이 훨씬 효과가 빠르다.
호박잎국 또한 여름부터 가을까지 자주 애용하는 국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어 된장을 풀고 호박잎을 넣어 끓인다. 다 끓고 나면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익반죽하여 수제비를 떠 넣는다. 남은 반죽은 물에 개어 국에 넣으면 묽은 국이 완성된다. 냉장고에 두었다가 시원하게 먹기도 한다.
“ᄀᆞ슬 호박썹국은 노리궤기보단 ᄃᆞᆫ덴 ᄒᆞᆫ다.”라고 하는데 가을 호박잎국은 노루고기보다 달다고 하는 말이니 얼마나 즐겨 먹었는지 알 수 있다. 호박잎은 쪄서 멜젓에 쌈을 싸 먹기도 좋다. 집마다 돌담에 호박잎이 너풀거려 보기에도 풍요로웠다. 더위로 입맛을 잃었을 때는 짭짤한 젓갈이 입맛을 돋운다. 밥을 물에 말아 잘 익은 자리젓으로 한 끼를 때우는 이도 많았다. 자리돔은 가시가 세기 때문에 자리회나 무침을 먹을 때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가시 조심해라. ㅇㅇ집 애기도 자리 먹다가 가시 걸려서 혼났져.”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가시가 위험하니까 자리돔을 잘 다져서 자리물회를 만들어 주신 적이 있다.
여름 반찬으로 콩장이나 마늘장아찌를 넣어 지진 우럭조림도 맛있다. 풋마늘로 장아찌를 만들어 놓았다가 여름 내내 먹는다. 마늘종이 나오기 전에 잎과 뿌리까지 사용한다. 제주에서 ‘지’ 또는 ‘지시’라는 말은 장아찌를 이르는 것이다. 마늘로 만들면 마농지시, 콩으로 만들면 콩지시(콩자반), 깻잎으로 만들면 깻잎지시가 된다.
낚아온 생선을 조릴 때 짭짤한 마농지나 콩자반을 밑에 깔고 그 위에 우럭을 넣고 졸이면 맛있는 우럭 조림이 된다. 우럭만 먹는 게 아니고 생선 맛이 배인 마농지도 먹고 콩조림도 함께 먹으면 너무 짜지도 않으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해 질 녘에 할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다.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시기 전이었는데 할아버지는 테우에서 낚시해 온 우럭을 가지고 조림을 준비하고 계셨다. 어린 나에게 우럭조릴 때는 마농지나 콩장을 밑에 깔아야 맛있는 조림이 된다고 하시며 솥에다 넣으셨다. 그리고 불을 땔 때는 어질 현(賢)자로 지펴야 한다며 손수 가르쳐주셨다. 아궁이 속의 불이 괄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었다. 웬만한 남자 어른들은 부엌에 잘 들지 않는데 할아버지는 밭에서 늦게 오시는 할머니를 생각해 주셨던 것 같다.
어느 가을날, 특별한 일 없이 바다에 갔는데 아주 쉽게 문어를 잡은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른 해초 위에 풀썩 앉아있는 문어를 발견한 것이다. 발이나 몸을 적셔 바다에 들어가야만 잡을 수 있는 게 문어다. 얼마나 신나고 기뻤던지 한쪽 손에 문어를 들고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를 외치며 집으로 달려왔다. 어머니께서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날 색깔도 고운 붉은 문어죽을 먹었다. 우리 집의 문어죽을 만드는 방법은 좀 독특하다. 돌문어의 빨판을 깨끗이 씻어낸 후, 납작한 돌 위에 놓고 작은 먹돌(차돌)로 문어를 두드린다. 그러면 조직이 부드러워져서 칼로 썰지 않아도 된다. 죽이 다되어 한 수저 뜨면 저절로 알맞은 크기로 떨어진다. 돌문어답지 않게 부드럽고 폭신하다.
전에는 해산물이 풍부해서 그런지 게도 먹는 게, 먹지 않는 게 구분을 했다. 보통 곤쌀겡이(무늬발게)라는 쌀알 모양의 무늬가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을 먹었다.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서 게장으로 먹기도 한다. 겨울에는 게로 죽을 만들어 할아버지 댁에도 가져갔다. 추워서 게가 잘 움직이지 못하므로 작은 돌들을 뒤집어서 양동이에 많이 잡아 온다. 수돗물에 한 시간 정도 담구면 모래나 파래 같은 것을 뱉어낸다. 해감을 시키고 나서 덩드렁마께(둥글고 큰 방망이)로 찧은 후, 뜨거운 물을 부어 즙을 따라낸다. 노르스름한 물이 나오는데 살살 따라내어 죽을 쑨다. 어릴 때 먹었던 겡이죽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제주에는 큰 썰물에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 바릇잡이(해루질)하는 날이 있었다. 제일 큰 썰물인 삼월 보름 물지(물때)에는 야곱의 자손들이 걸어갔던 홍해가 갈라지듯 깊은 바다였던 곳도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는 썰물에도 보이지 않던 여(바다의 크고 작은 섬)도 그때는 바지를 걷은 어린아이가 드나들 수 있다. 온 동네 사람이 바릇잡이에 나서는 날이다. “삼월 보름 물지에 바다에 가지 않는 사람은 도둑질하려고 집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날, 우리 가족도 갯가로 나갔다. 멀리서 보니 벌써 사람들이 새까맣다. 어려서 그랬던지 혼자 뒤에 남겨졌다. 큰 여에 가려면 개울처럼 흐르는 좁은 물길을 건너야 한다. 그곳을 건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운데 있는 돌을 뒤집어 보았다. 전복이 붙어 있었다. 오분자기도 아니고 전복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녀들이나 떼는 전복을 눈앞에서 보니 소리를 질러 아버지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보여주어야 더 즐겁지 않겠는가. 전복을 떼어 구덕에 넣고 큰 여에 도착했다. 이 구멍 저 구멍에 오분자기(떡조개)가 비작(어떤 물건이 여기 저기 많이 있는 모습)했다. ‘그 귀한 오분자기가 이렇게 많다니. 해녀들은 이곳을 모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분자기를 찾는 와중에 성게를 까서 이제 갓 자라기 시작한 어린 미역에 싸 먹었다. 달콤하고 짭조름하니 무척 맛있었다. 전에도 바릇잡이를 가면 미역에 성게알을 싸서 먹기를 좋아했다. 오분자기는 어쩌다 겨우 한두 마리 정도 채취하는데, 집에 가져올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먹었다. 하지만 깊은 바다엔 그렇게 많이 있다는 걸 았게 되었다.
성게는 말할 것도 없이 돌구멍마다 지천이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 해초가 가득해서 헤치는 순간, 미역치에 쏘였다. 너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런 모습을 보았던지 부모님이 오셔서 손을 보셨다. 손가락은 붓기 시작했고 통증은 오래 계속되었다. 바다의 단맛과 쓴맛을 다 체험해 본 날이었다.
해변에 사는 부지런한 사람은 반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겨울에는 참파래를 말려서 솔잎 불에 살짝 구워 간장에 찍어 먹거나 무침을 해도 맛과 향이 뛰어나다. 가시리는 무를 넣고 따끈하게 된장국을 끓이면 온종일 밭일을 하고 돌아온 가족의 추위를 풀어주었다. 겨울철에 무성하게 자라는 미역쇠와 넓패도 훌륭한 국거리가 되었다. 이 두 가지 해초는 초불을 삶아서 두 번째에 국을 끓여야 부드럽고 풍미가 좋다. 미역쇠는 넓패보다 보드라운 해초여서 식구가 다 좋아했다. 제주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의 기후로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해서 겨울에도 산천이 푸르고 나물의 종류도 많다. 유채나물과 시금치도 흔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은 냉이도 보였다. 그래서 겨울을 나기 위한 시래기 말리는 것이 흔하지 않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동치미는 접해보지 못하였다.
어릴 때는 겨울에 각제기젓을 자주 상에 올렸는데 양념을 늘 도맡아 했다. 머리부터 꼬리지느러미까지 도마에서 곱게 쪼아 아이들도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쪽파를 송송 썰어 넣고 맛내기 양념과 깻가루를 추가한다. 눈 맞은 배추에 얹어 먹으면 감칠맛이 더하고 짭짤한 게 입맛을 돌게 했다. 국은 무나 배추 또는 애벌 삶은 넓패나 미역새를 넣은 된장국을 많이 만들었다. 여기에 김장 김치와 모자반무침, 삶은 양배추와 고등어구이 등이 올라오면 그 시절 겨울의 상차림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따뜻한 방 안에서 먹는 저녁은 소박하지만 풍요로웠다. 거기다 밖에 눈이 쌓여 있으면 더 좋다. 내일 어머니가 밭에 가지 않으니, 점심에 칼국수를 만들어 주실 수 있다.
언젠가 겨울에 동네의 생선 파는 할머니가 손수레에 고등어를 가득 싣고 우리 집에 오셨다. 아마 고등어가 많이 잡힌 때인 모양이다. 크기가 무척 컸다. 가격이 쌀 때 절여두었다가 겨우내 먹으라는 것이다. 어머니께선 일일이 배를 가르고 소금을 쳐서 큰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맛있는 자반고등어가 되었다. 내장도 따로 젓을 담았다. 추운 겨울날, 밭에 다녀와서 자반고등어에 무를 넣어 고등엇국을 끓여 먹었다. 기름지면서도 짭짭한 게 정말 맛있었다. 고등어조림은 국을 끓일 때보다 물을 적게 잡는다. 무를 넣고 고춧가루를 넣어서 조리면 된다.
겨울 방학 때는 땔감 하러 오름에 가기도 했지만, 어머니 따라서 밭에 김도 매야 한다. 김치와 자반고등어 한 마리면 훌륭한 점심이 된다. 검불을 모아 불을 붙이고 삭정이를 주워다 숯불을 만들어 고등어를 굽는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등어의 맛은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절인 고등어는 국과 조림, 구이 등으로 쓰임새가 많았다.
항아리에 가득했던 고등어는 아끼면서 먹어도 어느새 허리를 점점 굽혀야 꺼낼 수 있다. 항아리가 비어간다는 얘기다.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면 바다에 톳이나 모자반 등이 떠올라 썰물이 되면 건져다 무침을 만들어 먹었다. 갯가에 가면 물미역이나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싱싱한 해초도 주울 수 있었다.
벌써 사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 오월이 되면 “멜(멸치) 들었져.” 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동네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손에는 ‘족바지’라고 부르는 뜰채와 대나무로 짠 구덕을 들었다. 외할아버지 댁 뒤에는 넓은 갯바위가 펼쳐져 있다. 어른 손가락만 한 크고 통통한 멸치가 발 디딜 틈 없이 즐비하다. 포식자인 큰 물고기들을 피해 왔다가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자 나가지 못하고 갯가에 널브러진 것이다. 대구덕에 주워 담기만 하면 되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각, 갯가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멸치를 줍고 있다. 워낙 큰 것들이라 몇 개만 주워도 두 손에 가득했다. 해가 떠오르면서 사람들은 솥을 걸어놓고 바닷물에 멸치를 삶아 말리느라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멸치 삶는 냄새가 구수하다. 아이들은 즐거움에 덩달아 뛰어다니며 웃었다. 그때의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바다가 주는 혜택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바다와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친척들에게 말린 멸치를 보내셨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을 큰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 댁에 먼저 가려고 했다. 무엇을 가져갈 때마다 동전을 자주 주셨기 때문이다. 라면땅이나 자야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갓 삶은 멸치는 향도 좋고 베지근한 맛이 난다. 좋은 날씨에 바싹 말린다. 그렇게 장만한 것은 항아리에 담아놓는다. 이른 저녁 후에 입이 궁금할 때 바가지에 꺼내다 먹기도 했다. 육수를 만드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는데, 어느 해는 절구에 찧어 가루를 만들어 된장국 끓일 때마다 넣었다.
한번은 마을의 백사장에 쥐치가 가득 밀려왔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쥐치를 실은 어선이 난파했다고 한다. 쓸어 담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것을 줍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껍질을 벗겨 소금물에 삶아 말렸다. 흰살생선의 맛은 비린내도 없이 담백했다. 쥐치 조림도 며칠을 먹었다. 지금도 쥐포를 보면 그때의 풍요로움이 떠오른다. 값진 추억이다.
옛날의 바다는 씨 뿌리지 않고 거둬들이는 곳이었다. 계절에 따라 먹을 것을 내는 땅과 다를 게 없었다. 여름날 조무래기들은 수영 실력을 뽐냈다. 바다도 부드러운 여울을 만들어 주며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물놀이를 끝내고 저녁 반찬거리로 게를 쇠꼬챙이에 잔뜩 꽂아 집으로 돌아갈 때, 바다를 향해 고맙다고 눈인사라도 할 걸그때는 고마움을 몰랐다.
며칠 전, 아침 운동을 다녀온 가족이 불러서 나가 보니 큰 그릇에 멸치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너무 뜻밖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안도로를 걷는데 바닷가에 멸치가 하얗게 밀려와 파닥이고 있더란다. 맨 손이라 목에 둘렀던 넥워머의 한쪽을 묶어 담아 온 것이다.
밀려온 멸치는 많은데 줍는 사람은 몇 안 돼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워 입꼬리가 올라간다. 옛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얼갈이배추를 넣고 국을 끓였다. 멜국의 쌉싸래하면서 베지근한 맛이 옛날의 그 맛이다. 나머지는 소금에 버무려 젓갈을 담갔다. 여름에 콩잎 쌈에 먹을 것이다. 제주살이를 시작한 분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흥분해하며 당장 가 보자고 한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바닷가에 허연 부분이 있다. 그때까지도 멸치가 많이 깔려있었다. 마침 썰물이라 금방 비닐봉지 하나를 가득 채웠다. 멸치튀김을 할 거라고 한다. 식재료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요리가 이렇게 다르다. 당연히 젓갈과 멜국을 만들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옛날 어머니의 테왁은 풍요로웠다. 물질하다 우럭이나 돔을 쏘면 배를 갈라 빨랫줄에 장대를 괴어 높이 매달아서 말렸다. 마른 우럭은 제사 때 쓰거나 열 개를 채워 비싼 값에 팔았다. 일본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사 가기도 했다. 잘 말린 보리 항아리 속에 보관했는데 가슬가슬한 게 습기가 차지 않아 저장이 가능했다. 마른 생선구이는 지금도 제사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이 오십 년이 넘었다. 바다가 키운 생물을 먹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느낄까. 내가 평생 먹은 생선과 해초는 바다가 키워 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족이 점점 씨가 말라가고 있다. 옛날 제주 바다에 풍부했던 오분자기는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오분작뚝배기를 파는 식당이 그렇게 성황이었는데 지금은 전복으로 대체되었다. 청각도 별 어려움 없이 채취해서 냉국을 해 먹거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식재료였다. 여름에 말렸다가 김장할 때도 썼다. 하지만 요즘은 깊은 바다가 아니면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우뭇가사리가 자랐던 곳에는 엉뚱한 해초가 차지하고 있다. 갯바위도 톳과 지충이, 넓패와 미역새 등으로 걸어 다니기가 어렵게 미끄러웠는데 지금은 맨 몸인 검은 바위가 많다.
얼마 전 바닷가 동네에 사는 지인의 집에 갔을 때였다. 바람에 밀려온 물미역이나 주우러 바다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했더니 가볍게 웃는 게 아닌가. 이젠 바람이 세게 분 다음 날에도 미역이 잘 보이지 않는단다. “옛날 같은 줄 아니?”하는 말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봄이면 밤사이 멸치가 밀려와 갯가를 덮고, 썰물이 되면 오분자기와 소라, 보말과 성게가 풍부했던 바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말은 아이들이나 잡아 와 저녁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까먹으며 웃음꽃이 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해녀들이 채취해 판매한다. 보말칼국수와 보말국 등을 식당에서 팔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한동안 많은 사람이 보말을 식당에 내다 팔았다. 지금은 씨가 말랐다. 사고 싶어도 구하기 어렵거니와 무척 비싸다.
제주 바다가 신음하고 있다. 거기에다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까지 흘러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이미 해양쓰레기로 고통받는 제주 바다에 미래가 있을까. 조간대에는 톳과 미역, 우뭇가사리와 청각이 많았고, 큰 썰물에는 아이가 전복을 뗄 수 있는 그런 청정한 바다였다. 바다가 더 이상 오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 세대에게 건강한 바다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첫댓글 매달 너무 재밌게 읽습니다. 멜젓에 콩잎, 전갱이 젓갈...군침이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