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송기교 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205-1)
♤ 송기교(松杞橋)
종로구 광화문길과 신문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청계천의 본류가 시작되는 곳에 있던 다리이다
<한양도성도>에는 松杞廛橋로 표기되어 있다
다리 부근에 가죽을 파는 松肌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일명 송기전다리, 송기다리, 송기교 라고도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松皮廛橋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며, <수선전도>에는 松橋로 표기하였다
1925년 콘크리트 다리로 한때 개수되었으나 복개공사로 인해 사라졌다
한성전보총국 터 (서울시 종로구 도렴동 80-2)
♤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
1885년(고종 22) 서로전선(西路電線)을 운영하기 위하여 한성(서울)에 설치된 전보국(電報局)이다
1883년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가 일본 나가사키 ~쓰시마(대마도)~부산을 연결하는 전신 선로를 개설한 것이 우리나라에 전신이 들어온 첫 사례이다
그러나 이 시설은 일본인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사실상 우리나라 전기 통신 사업의 시작은 1885년 8월부터 10월에 걸쳐 완공된 서로전선(西路電線)의 개통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서로전선은 청나라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그들의 자금과 기술에 의해 가설되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는 전신의 가설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그 시설 설치를 서둘렀다
1885년 6월 1일 중국 총판전국공정(總辦電局工程) 여창우 등이 청국인, 덴마크인 기술자를 대동하고 입국하여 인천~서울간을 측량하는 한편 조선 정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6월6일자 의주전선합동을 체결하였다
전문 8 조로 된 이 조약은 고종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사이에 사전 합의 가 있었으므로 바로 체결되었다
이리하여 경인(京仁)간 공사는 8월19일 전에 완료되어 8월 20일에 는 한성전보총국이 개국되었다
한성전보총국은 이 사실을 일본, 미국, 영국 등 각 공사관에 알리고 8월 25일 처음으로 서울과 인천간의 전신업무가 개시되었다
그 후 서울과 의주간의 공사도 순조롭게 추진되어 9월22일에는 평양분국이, 10월15일에는 의주분국이 개통되어 약 1,300리에 달하는 서로전선이 전부 개통되었다
이 선로는 압록강 건너에서 청나라 전선과 연결되어 외국과의 전신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설은 차관에 의해 가설된 것이고 전주 설치 등은 조선이 부담하였는데도 운영은 청국에서 독점하였다
한자, 영어, 프랑스어 전보만을 취급하고 국문 전보는 취급하지 않았다
전신 요금은 개설 당시 서울~인천간의 경우 한자는 1자에 5전, 영어 프랑스어는 1자당 10전이었다
그러나 서울~의주간의 요금은 명확한 자료가 없어 확인 할 수 없다
이 시설 운영비를 1년에 5,000냥씩 조선 정부에서 부담하기로 되어 있어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으나 선진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제고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서로전선이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
1887년 3월 남로전신선의 가설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정부에서는 고종에게 이를 전담할 관서 창설에 관한 재가를 얻어 같은 해 3월 13일에 창설하였고, 1893년 8월 17일 전우총국(電郵總局) 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조선전보총국은 당시 청나라가 관장하고 있던 서로전신선을 제외한 한반도의 모든 전신선을 관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전신사업 중추기관이었다
이 국(局)이 직제상으로 설립된 것은 1887년 3월 13일이었으나 실제로 건물이 배정되고 업무가 개시된 것은 남로전신선이 완공된 1888년 6월 1일이었다
총국에는 총판과 봉판·주사·위원 및 역원이 배속되었 는데, 전신업무 수행의 중추적인 구실은 주사와 위원 이 담당하였다
또한, 한글 전신부호와 요금 등이 명시된 독자적인 <전보장정 電報章程>을 제정하여 초창기 전신사업의 확고한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1885년에 서로전신선이 가설되었으나 청나라의 관할하에 있던 한성전보총국(화전국)에서 대신 관리, 운영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나라 전기통신사 에서 조선전보총국의 창설이 지니는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의 공식 기록에는 전보국으로 표기했으나 인장·양식지(樣式紙) 등에는 대조선전보총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조선의자주성을 나타냈다
♤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82년 이다
청나라 톈진에 전기기술을 배우러 간 유학생 상운(尙雲)이 귀국하면서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된 첫 전화기는 1896년 덕수궁에 공무용으로 설치한 것이다
당시 고종황제는 덕수궁 내 함녕전 대청마루에 궁중 전용 전화기를 개설하고 신하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궁중에 설치된 전화기는 고종의 3년상(喪)에도 이용됐다
순종은 고종이 승하하자 3년 동안 매일 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곡을 했다
내관이 홍릉으로 전화를 걸면 능지기가 수화기를 봉분에 갖다
대고 왕이 곡을 하는 방식이었다
고종 역시 대비 조씨의 무덤에 전화로 조석 문안을 드렸고 전화로 칙령도 자주 내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때만 해도 군신의 예가 엄격했던 시대라 신하가 임금과 통화할 때는 관복· 관모·관대를 착용하고 전화를 향해 큰 절을 세 번한 후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전화기를 지칭하는 이름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영어 텔레폰(telephone)의 한자음을 따서 덕률풍(德律風), 덕진풍(德津風)이라 불렀고 전어기(傳語機), 어화통(語話筒) 이라고도 했다.
인천에 전화가 개통된 것은 1896년 윤 8월 23일이고 최초의 공중용 전화는 1902년 3월 20일 개통되었다
사역원 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81-3)
♤ 사역원(司譯院)
1393년(태조 2)에 설립된 외국어 교육 기관이자 통·번역 사무와 실무를 맡던 관청이다
고려 시대 명칭이었던 통문관(通文館), 상원(象院) 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 사역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사대교 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어·몽어·여진어·왜어 등 외국어를 교육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둘째는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등을 맡아보는 일반 관부(官府)로서의 기능이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이미 고려시대인 1276년 (충렬왕 2)에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한어를 교육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일반 관부로서의 기능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양정 창학 터 (서울시 종로구 도렴동 82-6)
1905년 2월 엄주익(嚴柱益)이 창설한 근대식 사립 학교로 현 양정고등학교와 양정중학교의 전신이다
1905년 5월 12일 개강하였다
당초에는 전문학교를 지향하여 법학통론·헌법·국가학· 형법총론 및 각론·민법총론·물권법·채권법·상속법· 형사소송법·민사소송법·상법총론·국제법 등 20여 개의 교과목을 두었다
1907년에는 엄귀비(嚴貴妃)로부터 황실 재산과 내탕금(內帑金)으로 학교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1908년 경제학과를 병설하였다
그러나 국권피탈 후 1913년에 공포된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전문과정이 폐지됨에 따라 6회의 법률학과 졸업생과 1회의 경제학과 졸업생 등 총 145명을 배출하고 수업연한 4년의 양정고등보통 학교로 개편되었다
초대 교장에는 창립자 엄주익이 취임하였으며, 1918년 11월 만리동에 현대식 교사를 지어 이전 하였다
1922년 2월 수업연한이 5년으로 연장되고 1938년 4월 양정중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52년 9월 다시 양정중학교와 양정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양정은 특히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체육부를 중점 육성하여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종목에서 재학생 김은배(金恩培)가 6위를 차지하였고,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5학년 학생 손기정(孫基禎)이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금메달을, 그리고 졸업생 남승룡(南昇龍)이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마라톤 양정’의 전통을 과시하였다
양정중학교와 고등학교는 1988년 3월 목동 신시가지 의 신축교사로 다시 이전하였다
♤ 엄주익(嚴柱益)
1872년(고종 9) 6월 26일 한성부에서 엄인영(嚴仁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후 엄귀비의 7촌 조카로, 엄주익은 엄귀비의 증조부 엄성복(嚴性復)의 장남 엄재화(嚴載和)의 증손자였다
대한제국 때에 관료생활을 하다가 1910년 을사늑약 이후로 관직을 사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2월 11일 양정의숙과 양정여자고등보통학교 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고, 1907년 엄귀비로부터 경선궁과 영친왕궁에서 전라남도 무안, 광양과 경기도 이천, 풍덕 각 군(郡)소재 토지(주로 논)총계 약 200만평을 하사받아 교육활동에 투자하였다
1913년 2월에는 재단법인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 하였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다가 1931년 4월 26일 오후 9시 45분경 경성부 종로구 관철동 35번지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현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방정환 생가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5가길 5, 당주동 1)
♤ 방정환
1899년 11월 9일 출생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이며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천도교청년 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때 청년결사조직인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했고 기관지이자 문예동인지인《신청년(新靑年)》(1919년) 발행, 편집에 주도적이었다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주적 독립(해방)을 주창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고, 민족의 미래,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어린이》(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생전에 실천하고 남긴 업적을 보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 였다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의 조직과 3·1독립운동 참가, ‘천도교소년회’결성 및 육성이나,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늙은이’ ·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일 및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 제정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 어린이날
- 1923년 5월 1일 색동회 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교당에서 개최
-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에 행사 개최
-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행사 개최 중단
- 해방 후 1946년 첫째 일요일인 5월 5일 오전 11시 휘문중학교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행사 개최 (이때부터 5월 5일로 정착됨)
- 1954년 중앙청에서 이승만 내외가 참석함으로써 국가적 행사로 정착
- 1973년 3월 법정기념일로, 1975년 1월 법정공휴일 로 지정
주시경 집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36, 내수동 75)
용비어천가家는 2004년 건설된 18층 오피스텔로
주시경 옛 집터이다
♤ 주시경(周時經)
1876년(고종 13)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초명은 상호(相鎬)인데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이라고도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1887년 6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로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 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 독립협회 에 참여 하였다가 서재필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영국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지식욕은 대단하여 야간에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마치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을 3년간 공부하는 열성을 가졌다
숙명여자고등학교 · 서우학교(西友學校)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협성학교(協成學校) · 이화학당 · 중앙학교 · 휘문의숙 · 보성중학교 · 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1910년 한일합병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 위해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국어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대표적 저술인『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1914년 7월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정말 아까운 인재를 일찍 보내야 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에 한글학회 의 주선으로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하였고, 다시 1981년 12월 12일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그는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자이다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주시경마당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108)
주시경은 세종대왕이 창제(1443년)한 훈민정음의 대중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한'(큰, 많은, 넓은, 바른, 하나의 뜻)과 '글'의 합성어인 '한글'이라는 명칭도 그가 만들었다
하지만 주시경의 의도한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뿐, 한글을 만든건 주시경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글은 갑오개혁(1894년 7월 ~ 1896년 2월) 때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5세기에 창제되었기에 수백 년이 지난 근대에 그것을 상용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주시경은 국어의 음운의 연구와 문법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인물로,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은 국한문 혼용체로 사용하면 문제가 해결하기 때문에 본래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은 뜻밖에도 1877년 영국인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쓴『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이다
그후 띄어씌기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건 주시경이 교정을 본『독립신문』이며, 1933년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 한글날
- 1926년 9월 29일(음) 제1회 '가갸날'
- 1928년 9월 29일(음) '한글날'로 변경
- 1931년부터 10월 29일(양)
- 1934년부터 10월 28일(양)
- 1945년 ~ 현재 10월 9일(양)
종교교회 (宗橋敎會,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8길 48, 도렴동 32)
1897년 10월 미국 남감리회가 파송한 첫 여선교사 캠벨(J. P. Campbell) 부인이 내한하여 경복궁 옆 잣골(종로구 내자동)에 독자적인 여선교부지를 마련하고, 1898년 8월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캠벨 부인은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을 기해 집회를 시작했는데, 당시 배화학당 학생과 교사 외 외부 사람들도 다수 참석하였다
‘잣골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실이나 선교사 사택에서 예배드리다가, 1901년 가을 벽돌 예배당(루이즈 워커 예배당, Louise Walker Chapel)을 건축하였다
여성 중심의 학교 교회인 잣골교회에 교인이 계속 증가하자 1908년 4월 종침교(琮琛橋) 부근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를 옮겨가면서 이때부터 ‘종교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편 잣골에서 도렴동으로 교회를 옮길 때 따라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잣골교회를 지켰던 교인들은 이후 창성동 자수교(慈壽橋)아래 자리 잡으면서 ‘자교교회’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종교교회는 1910년에는 도렴동에 십자형 고딕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첫 번째로 교회를 지을 때 사용한 벽돌(1910년 ~ 1958년)
두 번째로 교회를 지을 때 사용한 벽돌(1958년 ~ 1999년)
종침교 터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8길 39, 내자동 223)
♤ 종침교(琮琛橋)
종로구 내자동 71번지 부근 종교교회 앞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許琮과 그의 아우 許琛이 거짓으로 이 다리에서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다는 핑계를 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뒷날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이 일화에서 그 형제의 이름자를 따서 종침교 라고 불렀다고 한다
줄여서 宗橋라고도 하였으며, 부근의 마을이름은 종침다릿골이다
<도성대지도>와 <한양도성도>에는 종침교의 다리 위치에 松橋라고 표시되어 있어 ≪경성부사≫에서는 두 다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1925년 백운동천을 복개하는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 허종(許琮)
자는 종경(宗卿)·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양천(陽川), 1434년 군수 허손(許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좌의정 허침(許琛) 의 형이다
세조 3년(145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함길도병마 절도사·전라도관찰사, 이조판서·좌참찬·우찬성· 우의정에 이르렀고,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허종은 세조 6년(1460)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 절제사도사로 출정하였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 (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기복되어 조석문(曺錫文)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성종 22년(1491) 여진족 우디거(兀狄哈)가 함길도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도원수가 되어 이를 격파하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국방과 문예에 큰 공을 남겼다
♤ 허침(許琛)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頤軒),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양천(陽川), 1444년 군수 허손(許蓀)의 아들이며 허종(許琮)의 동생이다
성종 6년(1475)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 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 우의정에 이르렀고, 그해 연산군의 생모 윤비폐출(尹妃廢出)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처벌되었지만 당시 할머니의 상으로 불참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하고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내수사터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72)
♤ 내수사(內需司)
조선시대 왕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곳이다
내수사는 내시들이 관장하였으며, 정부기구가 아닌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곳이었으므로 관료들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에서 통치기구는 아니며 단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사적 조직이다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에 그 재산이 귀속되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소송을 통해서 자신들의 선조가 일제에게 하사받은 토지를 찾는 상황에서도 조선왕조 황실 후손들에 의한 내수사 관리하에 있던 재산 회복 움직임이나 소송은 없었다
(내수사는 오늘날의 경찰의 사직동팀, 신길동팀, 과거 안기부의 미림팀, 아니면 현재의 청와대 개인금고 관리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 (내자호텔터,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8길 31, 내자동 201-11)
이곳에 최초로 고층건물이 들어선 것은 1935년 미쿠니(三國)석탄회사의 사원아파트(관사)로 4층 본관과 3층 별관으로 나뉘어 가족용 41가구와 독신자용 28가구 등 총 69가구가 거주하였다
이것은 1930년 회현동에 건설된 3층짜리 같은 회사의 사원아파트(관사)와 함께 우리나라 아파트의 시원을 열었다
[참고로 이 두 아파트와 비슷한 시기인 1932년에 (1930년?, 1937년?) 건설된 '도요타(豊田) 아파트'(현 충정아파트)는 일반인 상대의 임대아파트 의 시초일 뿐만 아니라 1979년 도로확장으로 일부 (1/3)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현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초기아파트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아파트는 해방과 함께 '내자호텔'이란 이름으로 주한미군에게 무상공여되어 줄곧 주한미군의 숙소로 사용됐다
이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던 이곳이 우리에게 모두 알려지게 된 것은 1979년 10월 26일 사건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음주 가무에 동원된 여성들이 궁정동 안가로 가기 직전 이곳 1층 커피숍으로 호출 되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기다리던 곳으로, 사건현장에 있던 두 여인의 현장검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둘은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다
심수봉도 가수지만 대학생 신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훗날 김재규의 재판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 가운데 하나가 약 200명쯤 되는 여성이 박정희에게 호출을 받았을 때, 대통령에게 가기 전 기다리던 곳이 바로 이 내자호텔 1층 커피숍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일부를 증언하고 있던 유서 깊은 곳이었지만 1990년 사직터널이 2개에서 3개로 늘어나는 도로확장으로 사라졌다
또한 이곳은 어의궁터이기 하였다
♤ 어의궁(於義宮)
어의궁은 기록상 세 곳에 있었다
인조가 살었고 효종이 태어난 중부 경행방에 있던 '상어의궁'(현 피카디리극장), 인조와 효종이 옮겨와 살았던 동부 숭교방의 '하어의궁'(현 효제동 한빛웨딩 프라자),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될 때 살었던 서부 인달방의 '어의궁'(서울지방경찰청)이다
상어의궁은 잠룡지라고도 부르고, 하어의궁은 어의본동궁, 용흥궁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어의궁 하면 하어의궁을 말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에는 경무과 분실, 경무과 창고 였으며, 해방 후에는 경찰피복창에서 경찰전문학교 서울분교였다가 서울지방경찰청이되었다
장흥고터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 201-14)
♤ 장흥고(長興庫)
고려ㆍ조선시대에 돗자리(席子)ㆍ유둔(油芚) 등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오늘날 조달청의 업무를 일부 수행하는 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