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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님 추천한 시들― 스크랩 세계의 오지, 라다크 노파 외 / 박희진
동산 추천 0 조회 105 16.06.04 09: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생진, 박희진 시인님 

 

세계의 오지, 라다크 노파 / 박희진

 

 

백내장으로 한 눈은 멀었기에 쪽안경 끼고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웃고 있다. 치근이

드러난 앞이빨 세 개로 어떻게 살아가나

싸구려 목걸이 왈, "왕년엔 그녀도 미인이었다오"

 

 

 

 

 

 

세계의 변방, 라다크에서 / 박희진

 

 

광활한 하늘과 광활한 벌판 사이

큰 스님은 큰 막대기, 작은 동승은

작은 막대기 짚고 가오. 뚜벅. 뚜벅. 뚜벅...

종일 말없는 둘은 움직이는 두 그루 나무...

 

 

 

 

벨라스케스「궁정의 시녀들」/ 박희진

 

― 프라도 미술관에서

 

가슴에 십자훈장을 단
장발 장신의 벨라스케스가
자기보다 훨씬 큰 캔버스 앞에 놓고
왼손은 팔레트, 오른손은 화필을 들고 있다.
모델 노릇하기 지겨운 어린 왕녀
슬그머니 돌아서서 나 몰라라 하는구나.
주변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귀여움,
(화려한 나들이옷 때문만은 아닐 터)
예쁘고 환하다. 물병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시녀가
열심히 달래 보나 대꾸가 없다.
왕녀가 좋아하는 개도 한 마리
앉아 있는 등허리에 왕녀의 놀이 친구
어린 소년이 발을 올려놓는다.
옆에는 난쟁이이자 뚱뚱보인 여자 익살꾼.
그런데 그 옆의 또 다른 시녀만은
서둘러 일어서서 두 손으로 옷자락 누른 채
상반신을 모로 약간 기울여서 인사를 올린다.
펠리페 4세 내외분의 느닷없는 출현을
눈치 챈 자가 또 한 사람 있다면 
아마도 저만치 문 열고 나가려다
돌아서서 이쪽 보는 기사(騎士) 양반일 터.
인사를 올린 시녀 등 뒤에서
한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여관장(女官長) 또한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왕과 왕비의 출현을 알리는 건
저만치 안쪽 벽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서다)

 

이상 서술한 인물들과 시공간(時空間)이
하나의 영상으로 한 폭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벨라스케스의「궁정의 시녀들」

 

이 유명한 그림 앞에 섰을 때다.
눈앞엔 바로 큰 공간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냥 어수선하고 침침할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홀연 선명하게
어린 왕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에 꽃이 달린
화사한 나들이옷,
구름같이 나부끼는 머리카락에도
리본이 꽂혀 있다.
약간 심술이 난 듯도 하지만
그냥 해맑고 귀엽게 생긴
어린 왕녀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의 인물들이
어렴풋하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자세의 두 시녀 비롯해서
캔버스 뒤에 서 있는 화가.
개와 익살꾼……
안길이가 긴 실내공간인데
벽면에 여기저기 희미한 대로
그림들이 걸려 있고
저만치 안쪽 열린 문가엔
엉거주춤 선 채로 뒤돌아보는
기사의 모습까지

 

지금 우리는 350년 전의 스페인 왕궁 안
유명한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의 공방 안을 구경하고 있는 거다.
공방 안에서는 모든 것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고 할까,
제자리에서, 제 모습, 제 가락 제 빛깔 지닌 채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면서 숨쉬고 있다.
개도 숨쉬고, 공기도 숨쉬고, 문짝도 숨쉬고,
개의 등허리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어린 소년도, 아니 거울 속의
한낱 가상(假像)인 왕과 왕비도
숨쉬고 있다. 따로 노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왕녀와의 연관 속에
안정된 통일성을 얻고 있다.
이런 박진(迫眞)의 조화로운 생명감을
화가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원근법에 의한 정연한 구도,
명암의 효과, 인물들의 생생한 얼굴 표정……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가 다
벨라스케스의 귀신이 곡할 만한
색채감각에서 숙련된 필촉 통해
창출된 빛깔들이 자연스런 조화를 이뤄낸 결과.
과장된 것, 기발한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는
추호도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감을  살리는 데
그가 택한 것은 오직 색채의
자유로운 구사였다.

 

한 30분쯤
프라도 미술관의 수없이 많은
걸작 그림들을 대충 보다가
다시 마지막으로 「궁정의 시녀들」
앞에 섰을 때다.

 

역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린 왕녀의 앳되고 고운 귀여운 모습뿐.
왕녀는 스스로 안에서 빛을 뿜고 있었건만
주변의 인물들은 그 침침한 어둠 속으로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확신한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최고걸작
일 뿐만 아니라
서양의 모든 명화 중에서도
십지(十指)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바로 완벽한 그림이라고.

 

 

지상(地上)의 소나무는 /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곳

그윽한 향기인다 신묘한 소리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곳

무지개선다 영생(永生)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울아버지 / 박희진

 

 

난봉꾼 울아버지
노름꾼 울아버지

 

진달래, 철쭉이 지천이면
민들레 홀씨마냥
바람이 나고

 

산까치 애첩 삼아
구름을 친구 삼아
세상을 떠돌다

 

하얀 눈덩이 바위가 되어
울엄마 가슴에
시커멓게 내려앉던 날

 

돌아돌아 그제서야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 울아버지

 

 

                                         시인의 젊은 날

******************************************

 

박희진(朴喜璡)·시인

 

1931년 경기도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1955년 ≪문학예술≫  등단
1961~67년 시(詩) 동인지 『六十年代詞華集』주재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한국시협상,

상화시인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실내악(室內樂)』사상계사,1960
시집 『청동시대(靑銅時代)』모음출판사,1965
시집 『미소(微笑)하는 침묵(沈默)』현대문학,1970
시집 『빛과 어둠의 사이』조광출판사,1976
시집 『서울의 하늘 아래』문학예술사,1979
시집 『가슴 속의 시냇물』홍성사,1982
시집 『사행시(四行詩) 백삼십사편(百參拾四篇)』삼일당,1982
시집 『가슴속의 시냇물』,1982
시집 『아이오와에서 꿈에,1982
시집 『라일락 속의 연인(戀人)들』정음사,1985
시집 『시인아 너는 선지자 되라』민족문화사,1985
시집 『꿈꾸는 빛 바다』고려원,1986
시집 『바다, 만세 바다』문학사상사,1987
시집 『산화가(散花歌)』,1988
시집 『북한산(北漢山) 진달래』하도락서,1990
시집 『사행시 삼백수(四行詩三百首)』토방,1991
시집 『연꽃속의 부처님』,1993
시집 『몰운대의 소나무』,1995
시집 『한 방울의 만남』미래사,1996
시집 『박희진 일행시 칠백수(一行詩七百首)』,1997
시집 『백절백경(百寺百景)』,1999
시집 『화랑영가(花郞靈歌)』수문출판사.1999
시집 『동강십이경(東江十二景)』수문출판사,1999
시집 『하늘·땅·사람』수문출판사, 2000
시집 『박희진 세계기행시집』,시와진실,2001 
 

 

 

원로시인 탐방 : 박희진 시인을 찾아서


한국인의 고유종교는 풍류도이다 / 김금용시인   

 

‘시낭송운동의 대부’라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박희진 시인<우리詩 > ‘시인탐방’ 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모셨다. 2007년에 예술원회원이 되시고 우리 시문단의

한 중심에 계신 선생님을 매달 시낭송을 통해 뵈면서도

선생님에 대한 집중조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륜을 더해갈수록 더 매력이 넘치는 영화 007의 숀 코네리처럼

선생님은 여든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이시다.

하얀 백발에 흰 구레나룻 수염을 온 얼굴에 감싼 모습은

세계적 작가, 헤밍웨이와도 흡사해서 어디서고 제일 먼저

눈에 뜨인다.

짐작컨대 젊으셨을 때는 물론이고 여성후배시인들이며 독자들이

많이 따랐을 것 같은데, 도통 관심 없는 표정으로 일관하시며

오직 詩하고만 사신다니, 개인적으론 늘 그 점이 궁금해서

벼르고 벼르지만, 글쎄, 오늘은 감히 여쭐 수 있을까, 말문을

여실까, 젯밥에만 맘이 생긴 땡중처럼 설렘을 감추며 대전서부터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도봉구 삼각산 아래 우이동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웬걸, 빨리 간다고 평소 다니지 않던 중부고속도로로

들어 섰더니 2차선 한 줄을 몽땅 군부대가 점령한 것처럼

시속 3,40Km 저속으로 차량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빠져나갈

도리가 없으니,..덕분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먼 길 오는 것만 걱정이 되셨던지, 사고 없어

다행이라고 점심까지 사주셨다.

마침 겨울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게 담쟁이 넝쿨에 내려앉는

덕성여대 앞 한정식 집이었다. 혼자 사시는 분이어서 내 생각엔

어디 추어탕, 혹은 감자탕집이라든가 뭐, 그런 따뜻한 가정집

식사를 하실 것으로 어림잡았는데, 빨갛게 익은 담쟁이 넝쿨이

줄줄 내려앉는 이층 창가를 예약해 놓으신 걸 보니 나름

선생님의 배려가 느껴져 그동안 휴대폰이 없어서 잘 연락이

된다는 둥, 이메일이 안돼서 사전 인터뷰 내용을 전달드릴

수 없다는 둥 궁시렁 거리던 좁은 소견이 쑥 들어가 버리고

선생님의 계속되시는 “시 사랑, 시 열정, 시 삶,”에 혼이 다

빠져버렸다.

평생 시와 함께 사신 분의 고해성사를 듣듯,피곤한 것도

잊고 밤늦게까지 선생님을 쫓아다녔다.

마침 그 날이 인사동에서 한 달에 한 번 갖는 <차나무시낭송>날

이었고, 마침 선생님 단독으로 한 시간을 진행하는 날이어서

선생님의 열정적인 시낭송과 시 강의를 성찬경 시인님을

위시해서 고창수, 김동호, 이무원 시인님들과 함께 경청할 수

있었다. 물론 몇 독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박희진시인은 삼각산(북한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우이동

고갯길의 빌라에 사신다.

순전히 삼각산을 바라보기 위해 근 13년 째 빌라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신다.

글을 쓰다가도 식사를 하시다가도 심지어 자다가도 내다보면

보이는 삼각산 때문에 떠나지를 못하신다고. 80세 어른이

오르내리시기는 쉽지 않은, 45도 경사진 비탈길을 매일

오르내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몇 시인들과 함께 방문했을 땐, 보름달까지

합세, 선생님 거실 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나가보니

선생님 앞마당으로 달님이 하얗게 멍석을 깔고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사시지만,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님을, 이런 이웃들 땜에

이곳을 떠날 수 없고 이 자연의 이웃을 시로 옮기기 바빠

외로울 시간도 없다는 것을 그 날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쫓아다녔지만, 질문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간 인터뷰가 많아서 같은 질문이나 답은

피하고 싶다 하셨으므로 주로 그 분이 희망하시는 앞날의

계획에 대해 중점을 두고 여쭸다.

인터넷 상에서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는 그 분학창시절

이라든가 여러 시에 관한 이야기는 따라서 생략한다.

말씀하시는 동안 내내 선생님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생기 넘치게 번뜩이셨고 진지한 얼굴은 홍조를 띄고

계셔서 이런저런 흥미위주의 질문을 한다는 건 또한

부질없기도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당신 혼자서도 충분히 하루 종일이라도

시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선생님 곁에 있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말씀에 빠져서 노트하는 것조차 잊고 귓바퀴를 활짝 열고

경청하게 됨을!

 

(* 인터뷰라서 존칭은 간단히 생략하겠습니다.)


릴케를 아느냐? 한국은 어떤 언어를 쓰느냐?


◈ 김금용 : 박희진 시인님, 선생님이 등단하신 지는 이미

44년이나 되셨는데요. 1955년 박목월 시인님의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신 이후, 현재까지 쉬지 않고 작품집을

발표, 총 34권의 시집과 번역시집, 그 밖에 시선집 등을

묶어내셨는데요.

그래도 돌아보시면, 어떤 때가 그래도 그 중 선생님 스스로

가장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신 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거기엔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박희진 : 돌아보면 내 나이 53세 때가 바로 새로운

전환점의 시기였어요. 그 때 나는 비로소 직장이었던

동성고교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자유롭게 시작생활에만

전념하게 되었으니깐요. 그만 두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교육부에선 이런 발표를 했어요.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에게 종신연금을 지급하겠다고요.

그 발표가 나던 해가 마침 근무 20년째라 난 바로 사직서를

썼지요. 난 지금이나 그 때나 시만 생각했고, 혼자 몸이니

종신연금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지요.

물론 주위에선 많이들 만류를 했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어요. 시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있었고요. 덕분에 그 때부터 자유롭게 세계여행도

다닐 수 있었으니깐요.

당시 900 달러로 미국을 거쳐서 파리에서 런던으로

네팔에서 카트만투까지 갔었는데, 이때 불교문화를

돌아보며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요.

또한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열린 국제문학창작포럼에도

참석, 한국대표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시를 소개했습니다.

이 때 각국문인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릴케를 아느냐? 그의 시는 읽었느냐? 이북도 종교가 있느냐?

한국은 어떤 언어를 쓰느냐? 그들의 황당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면서 저는 한국인으로서 우리 모국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만약 한국어가 없었다면 물이 없는 물고기처럼 어떻게

숨인 들 쉴 수 있으랴 깨달아지더군요.

어쨌든, 17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46세까지 겨우 5권 밖에

내지 못했었는데, 직장을 그만두던 53세, 즉 1984년부터

지금까지 쓰고 발표한 시집이 20 여권이고 산문집까지 치면

31권이나 됩니다.

내 생각대로 난 퇴직한 후에야 자유로운 시 정신 가운데서

엄청난  시를 쓰고 발표할 수 있었던 거죠.

덕분에 테마별로 시집을 출판할 수 있었죠.

<박희진 세계기행시집(2001)>, <연꽃 속의 부처님(2002)>,

<사행시 사백수(2002)> <1행시 960수와 17자시 730수.

기타(2003>가 그 때로부터 출판된 것입니다.

또한 초기, 중기, 후기로 정리해서 출판하겠다는 약속대로

2004년 첫시집 <실내악(1960)>과 <청동시대(1965)>

<미소하는 침묵(1970)> <빛과 어둠 사이(1976)>을 고스란히

묶어 <박희진 전집> 중 <초기시집(2004)>을 냈고요.

시집을 사려는 독자수가 적어 당연히 적자인데도

내 시를 인정하고 과감히 출판해준 최두환 사장님 덕분에

마음 놓고 지금까지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 김금용 : 저도 그 감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은근히 부러웠고요. 그렇게 우정과 의리를 지켜가는 분이

출판계에 있는 한 아직 우리 문단은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저도 한.중 대역판 시집 <나의 시에게>를 낼 때

무조건 그 분을 찾아 출판을 했죠. (웃음) 선생님, 그런데

최근 일어번역 시집을 내셨다고 들었는데 말씀 좀 해주세요.


<칠월의 포플러>와 <한 방울의 만남>


◈ 박희진 : 사행시집인 <칠월의 포플러>와 <한 방울의 만남>

이란 시집 두 권을 2008년 10월, 일본 동경문예관 출판사

에서 단독 출판했습니다.

역자는 일본의 문예평론가로서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고노(鴻農映二)라는 번역가에요.

그는 이미 서정주시인의 <신라풍류(新羅風流)>, 김수영,

김춘수, 고은 시인의 <한국3인시선>을 묶어 번역,

일본에 소개해 온 사람입니다.

우연히 문학모임에서 알게 됐는데, 마주칠 적마다 내 시를

번역하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부탁을 했지요.

사실 한국 번역문화원으로부터 출판비 보조를 받고 싶어

신청했는데, 안되더군요. 결국 자비로 냈는데, 일본서

출판하다보니 번역비랑 해서  꽤 들어갔습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가 아직까지 많이 외국에 소개되고 수출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이를 좀 개척하고도 싶고 해서 시도했지요.


◈ 김금용 : 이 사행시집은 저도 갖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7월의 포플러>라는 시가 생각이 나요.

아주 감각적인 시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를 시집제목으로

잡으셨군요. (나중에 돌아와 찾아보니, 이 시엔 밑줄까지

그어가며 메모하고 접어두었던, 좋아하는 시였다.

이참에 여기 소개한다.)

 

“가장 투명하고 순수한 하늘의 살 속 깊숙이/보라,

타오르는 대지의 혓바닥 녹색의 불길! / 쉿쉿 소리 내며

그 작열하는 입맞춤에 눈 부셔/ 당황한 천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난다”

(7월의 포플러)

 

  그런데, 또 하나의 시집 제목은『한 방울의 만남』인데,

이 시집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요.


◈ 박희진 : 일역시집을 내는데 특별히 <사행시집>을

그 중 선택한 데에는 내가 1968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35년간 줄곧 써왔던 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내 시의 독자 중에는 이 사행시를 선호하는 분들이 많아서

취침 전에 꼭 서너 편씩 읽는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간 一行詩 , 四行詩, 十四行詩를 썼는데, 그 중

사행시를 특히 사랑합니다.

따라서 이번 일역시집을 낼 때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물론

이 <사행시집>이었죠. 그러나 사백수를 다 실을 수는

없어서 그 중 211편만 실었습니다.

그리고 <한 방울의 만남>은 그간 출판했던 처녀시집

<실내악>부터 <청동시대(1965)> <미소하는 침묵(1970)>

<빛과 어둠 사이(1976)> <서울의 하늘 아래(1979)>

<가슴 속의 시냇물(1982)>외에 기타 시집에서 22편을

함께 실은 일역시집입니다.

 “한 방울의 만남”이란 시를 시집제목으로 한 이유는

이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 방울의 이슬을 통해

동서고금이 만난다것이죠.

김창렬 화가의 물방울이란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소재이기도 합니다.


시낭송에 특별히 뜻을 둔 이유는

 

◈ 김금용 :  선생님은 세미나다, 망년회다 등, 일체의

문인모임엔 잘 가시지 않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럼에도 공간시에 나가시고 이생진시인님과 매 달 마지막 주

월요일에 인사동에서 하시는 시낭송, 또 <우이시 낭송회>

<공간시> 등엔 꼭 참석하시는데, 특별한 뜻이 있으신지요.


◈ 박희진 : 저는 문단사람들 이름을 잘 못 외웁니다.

어떤 시인한 출판기념회에서 그 시인은 세 번이나 자기

시집을 드렸는데도 못 알아보시냐고 섭섭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그런 자리에 안 나갑니다. 신문도 안 읽어요.

산만해져서요. TV도 때론 불쾌해져서 잘 안보고, 특이한

사건이나 사람에 주목하는 Killing Time 같은 것만 봅니다.

꼭 필요한 프로는 비디오로 저장했다가 찬찬히 다시 봅니다.

저는 비사교적이고 폐쇄적인 기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안갑니다. 그러나 시낭송 모임엔 꼭 참석하려

합니다.   기운이 없을 때라도 시낭송회엔 가급적 빠지지

않고 나가서 시간만 허락해준다면,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죠. 사람들은 저를 ‘시낭송운동의 대부’라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싫지 않습니다.

내 두 번째 시집인 <청동시대>를 발간했을 때, 처음으로

서울의 신문회관 대강당에서 [박희진 자작시 낭독회]를

열었는데, 그것이 첫 개인시낭송회였죠. 당시 시인이

홀로 신문회관 강당에서 300명이 넘는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두 시간 넘게 자작시를 낭송한다는 것은 신문에

크게 보도될 정도로 큰 이슈였습니다.

그 뒤 1970년에는 성찬경 시인과 함께 [박희진 성찬경

2인 시낭송회]를 명동의 한 카페 ‘삐아뜨르’에서

열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빨간 피터 팬의 고백”이란 연극으로 유명한

추송웅 연극배우가 살롱 드라마를 하던 곳이었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달에 네 번 가졌습니다.

이 때 MBC와 TBS 방송에도 출연하여 시낭송을 했고요.

그 뒤 1979년, 구상 시인, 성찬경 시인과 함께 만든 것이

[공간시낭송회]였습니다. 지금까지 26년간 해 오고 있죠.

물론 최근 시인들의 참여숫자가 많이 줄어 걱정이 크긴

합니다만,.. 그러나 우이동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23년간

승승장구로 발전해 온 <우이시낭송회>는 흔들리지 않아서

참 고무적입니다.(웃음) 

이외에도 이생진 시인과 함께 <인사동 시낭송회>와

일곱 분의 시인들과 함께 <차나무시낭송회>를 하고

있는데, 최근엔 체력이 달리는 걸 느끼네요.

한 달에 네 번 시낭송회에 가려니 이 나이에 힘이 안들겠어요?

허허,.! 그러나 힘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작정입니다.


김금용 : 방금 <우리詩>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요.

<우리詩>의 고문으로서 한 말씀 들려주세요.

아시다시피 우이동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시사랑을

펼친다는 포부 아래 2007년부터 사단법인으로 등록,

월간<우리詩>를 정식으로 냈습니다.

이 때 부터 신인등단제도에 따라 상, 하 반기에 각 한 명씩

이미 세 명의 신인시인들도 배출했습니다.

이번 2009년 상반기에는 두 신인시인이 배출되었고요.

또한 중앙문단으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지방 시인들을 발굴,

순수지향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지면할애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詩>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

이신지요. 도움이 될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 박희진: 나 같이 인터넷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시를

발표할 때도 많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죠.

한 제자가 마침 내게 인터넷 배우라고 컴퓨터를 설치해

줬는데,... 나는 영 맘이 안갑니다.

여전히 불편한 기계일 뿐이고요, 하하,..!  어쨌든 24년간

우이동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끌어왔던 <우이시 낭송회>를

사단법인 월간 <우리詩>로 바꿔 “열린 문학”의 한 모습으로

전국적인 시모임으로 펼치는 것은 아주 좋은 운동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젊은 시인들 중심으로 개선해나가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간시>와 비교해 보면, 분명한 것은 <우리詩회>

아주 희망적이라는 것이지요. 우선 회원 숫자가 계속

늘고 있고, 우리시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시와 독자 간의 거리를 줄이고 그 저변확대에도 성공한

같아 기쁩니다. 신인들 양성에도 앞으로 힘을 쏟아

순수지향의 올곧은 단체로 잘 커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금용 :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럼, 2009년 올해엔 다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앞으로 쓸 시의 주제는 “풍류도”


박희진 : 최근 일역시집 두 권 외에 우리글 출판사에서

초기시집 네 권을 묶어 <미래의 시인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선집을 냈는데, 앞으로도 계속 중기, 후기를 더 묶어내야

하는 게 제 숙제입니다. 또한 앞으로 쓸 시의 주제를

“풍류도”로 잡고 있습니다.

그간의 내 생각과 깨달음을 시로 연재해서 써 볼 생각입니다.

시를 쓰는 생활이란, 고려 말의 목은 이 색이 말한 “종신지락

終身至樂”입니다.

아시다시피 종신지락은 하루아침의 낙이 아니고,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나는 예술친화적 삶을 적극적으로 누리고 싶고,

詩作을 할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詩作은 그래서 일종의 종교 같습니다. 나는 “각자覺者

기쁨”말하는 불교를 믿습니다.

그러나 불교 하나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세계 어떤 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등산로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죠.

모두 하나의 정상을 향해 나가고자하는 정신, 거기에

무한한 희열을 느낍니다.

한국엔 원래 고유의 종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분명 우리

고유의 종교가 있었고, 그것이 <풍류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어령 박사가 번역, 정리한 삼국사기 권 제 4 <신라본기>

중  “난랑비서鸞郞碑序”에도  당에 유학 갔던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와 가야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묘(玄妙)한 도에 심취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선사禪史”가 남아있지는 않으나 나름 “풍류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풍류도는 불교와 유교, 도교를 포괄한, 하나로 회통할 수

있는, 소화력을 갖춘 도라고 봅니다.


김금용 : 그러나 풍류도라 하면, 막연히 이해되기는,

옛 양반들이 그저 산수를 돌아다니며 집안이며 나라를

염두에 두지 않고 한량하게 놀며 지내던 것부터 연상이

되는데요.


◈ 박희진 : 그렇죠. 얼마간 편견이 있습니다.

사대주의에 젖어있던 양반들은 우리나라 것에 대한

경시가 많았죠.

당시 세종대왕이 지은 한글조차 무시하고 사용하기를

꺼려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사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면,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산수를

갖춘 곳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작은 땅이지만,

사계절의 분명함과 맑은 물과 수려한 산이 한데 어울려져

절로 노래와 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는

데엔 이런 환경적인 배경이 있어서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들어오기 전 분명 단군 때부터 우리의

생활 속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던 종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 도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민족만의 종교는

묻혀버렸던 것이죠.

더군다나 체계화 문자화 되어있지 않아서 이 三敎에 묻혀

버린 것이죠. 그러므로 나는 단군을 제 1호로 이규보,

정철, 윤선도, 김시습, 이퇴계, 이율곡, 등 풍류도인을

대상으로 시를 쓸 계획입니다.

자연과 회통함으로써 장수를 누린 분들을 그 대상으로

<풍류도인열전>을 쓰고자 합니다.


김금용 : 그럼 이 시도는 처음이신 거겠군요.


◈ 박희진 : 이전에 <화랑연가>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풍류도에 대한 염두를 두고 쓴

시편들이었습니다.

“天地人, 三才의 균형과 조화” 란, 자연에서 인간이 나오고

그 인간들 속에서 문명과 문화가 나왔다는 것으로, 이것이

풍류도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문명치중으로만 달리기 때문에,

자연을 이용만 했기 때문에, 지구의 위기설까지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금용 : 그렇다면, 이제 선생님의 말씀처럼

풍류도를 통해 이런 위기 극복이 될까요?


◈ 박희진 : 그렇죠. 전국의 사찰을 누비고 다녀보면

여전히 풍류도가 살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원두막이나 정자를 보면, 하나같이 자연과 더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임을 알 수 있고요.

이를 통해 한국의 건축사도 알 수 있는데, 인간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상의 곰과 천상의 신이 만나 인간인 단군을 탄생시키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도록

하는 건국신화의 이념이야말로 낙천적이고도 긍정적인

세계관갖춘 풍류도를 설파하신 것입니다.

이 풍류도를 통해 자기한계의 극복을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김금용: 구체적으론 어떻게 풍류도를 익혀야 할까요?


 

풍류도에서 종신지락을 찾을 수 있다


◈ 박희진 : 종신지락을 아는 사람들은 풍류도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멀리 찾을 게 아니라, 가까이 우리 삶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 익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수화, 다도 등을

통해서도 풍류도를 찾을 수 있겠지요.

구도求道이니깐요. 원래 求道에는 예술인, 기능인, 종교인이

다 포함됩니다. 그들이 다 구도하는 사람들이죠.

얼마 전 김상유 화가의 판화 “장락長樂”을 보았는데,

들판에 햇살이 쏟아지고, 꽃밭에 무수한 꽃들이 만발한데,

그 중에 홀로 한 남자가 앉아있었습니다.

이는 장락무극長樂無極“을 말하는 것이죠.

기독교에선 신락神樂(초성적 즐거움)이고, 불교에선

아정상락我靜上樂이고요. 모두 종신지락 終身至樂을 말함이니,

다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 김금용 : 말씀 잘 들었습니다. 특히나 선생님의 시에

대한 끝없는 정열과 새로운 창조정신과 그 모색에 대해,

그 꾸준한 연구에 대해 말씀을 듣는 내내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선 이미 사회적으로나 문단에서 정상에 올라와

계신 분인데도 여전히 새로운 창조에 목말라 하시고,

연세가 많으심에도 늘 공부하시는 자세를 갖고 연구대상을

찾으심에 놀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고요.

개인적으로도 저를 돌아보며 게으름피지 말고 정말 열심히

시를 쓰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오늘 인사동에서 가지신 차나무시낭송에 저도 참석,

많은 원로시인들을 뵙게 돼서 기쁘고, 시간가는 줄 몰라

하는 독자와 후배시인들과 함께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경청하게 돼서 기쁩니다.

앞으로 많은 시인들이 선생님 말씀과 시사랑처럼 시를

자신의 삶에 종신지락 終身至樂으로 삼아 열심히

연구하고, 성실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쓴다”는 선생님 말씀을

새겨서 “문학은 청춘의 전유물이 아니고, 문인들이

장수를 누리면서 풍요롭게 쓰고 발표해야 한다.”에

바탕을 두고 새 <풍류도>에 대한 시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 김금용 시인 

 

 

                                                      우이동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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