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유노윤호 일본 오리콘 위클리 차트 1위 차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최고상인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까지 오스카 트로피 4개를 수상.
2020년 마지막 외국인 광복군인 중국인 쑤징허 사망(102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제23회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2.9일부터 25일 까지 17일간 평창, 정선, 강릉에서 92개국 2925명이 참가하였으며 15개 종목에 102개의 메달을 놓고 열전을 벌렸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등 북한고위급 대표단 서울 방문 후 평창 올림팩을 관전하기도 하였다
한국은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4개를 획득하여 종합 7위를 달성하였다
2014년 KBS 2TV 주말극 '왕가네 식구들' 전국시청률 48.3% 수도권시청률 49.9% 기록.
2014년 강원 속초에 대설 41.7cm
2012년 고리 원전1호기 전원 완전상실사고(black out) 발생
오후 8시 34분경 발전기 보호계전기 시험 중 외부전원공급 끊어지고 비상디젤발전기마저 작동하지 않아 발전소 전원 12분 동안 블랙아웃, 발전소장 등은 은폐 결정하고 비상발령도 하지 않고 사건기록도 누락시키고 핵연료 인출 등 정비 계속. 부산시 시의원(김근수)이 식당에서 우연히 소문을 들고 확인함으로써 알려짐
2010년 경기도 시흥시 북쪽 8km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3.0 지진 발생.
2009년 화왕산 억새태우기축제중 화재가 발생, 4명이 숨지고, 63명이 다침.
2009년 2월 9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경남 창녕군 화왕산 정상에서 '억새 태우기' 행사를 구경하던 관람객들이 갑작스러운 강한 역풍으로 번진 불길을 피하려다 4명이 숨지고, 63명이 다쳤다.
이 날 오후 6시 15분쯤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火旺山·해발 757m) 정상 부근에서 억새 태우기 행사가 진행되던 중 해발 742m 배바우 근처에서 갑자기 바람 방향이 바뀌어 불길이 방화선(防火線)을 넘어 관람객들 쪽으로 번졌다. 그러자 이를 피하려던 관람객 4명이 불에 타 숨지고 63명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화상을 입는 등 크게 다쳤다.
사고는 행사 진행요원들이 화왕산 정상 둘레 2.7㎞에서 동시에 억새에 불을 붙인 지 10분쯤 뒤 발생했다. 배바우 근처에서 타던 불길이 갑작스러운 역풍으로 방화선을 지나 관람객들 쪽으로 밀려들자 관람객들이 동요해 우왕좌왕했고, 수십 명이 달아나다 넘어지는 등 뒤엉키면서 절벽으로 떨어지거나 불에 탔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에서 1만5000여명의 관람객이 참가했었다.
당시 현장에는 행사 주최측인 창녕군과 소방서, 경찰서 공무원 등 114명이 안전요원으로 배치돼 있었으나 순식간에 번지는 불을 막지 못했다. 또 창녕군은 불이 관람객들 쪽으로 번지거나 산불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 2.7㎞의 화왕산성 주변에 너비 25m 안팎의 방화선을 구축하고 억새 등 불에 탈 만한 식물 등을 미리 제거했으나 불길을 막는 데는 무용지물이었다. 이에 따라 행사 주최측의 현장통제 계획이 허술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억새 태우기는 화왕산 정상 화왕산성 내 18만여㎡의 억새밭을 불태우는 것으로, '화왕산에 불이 나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물러간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창녕군과 창녕지역을 근거로 한 배바우산악회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1995년 처음으로 억새를 태웠으며, 1996년·2000년·2003년·2006년에 이어 2009년은 여섯 번째 행사였다.
2007년 박찬호, 연봉 300만불에 뉴욕 메츠 선발투수로
2007년 2월 9일(한국시각) 박찬호(34)가 뉴욕 메츠와 구두 계약했다. 1년간 옵션 포함 300만 달러의 조건에 메츠와 구두 합의를 했다고 박찬호의 국내 매니지먼트사인 ‘팀61’이 발표했다. 48시간 이내에 신체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으면 정식 계약을 할 예정. 박찬호는 이로써 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이후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 2005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이어 세 번째로 유니폼을 갈아입게 됐다.
스프링캠프 시작을 일주일 앞두고 맺은 뒤늦은 계약이지만 박찬호의 메츠행은 최선의 선택이다. 연봉은 2006년(1533만 달러)보다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올 시즌의 성공을 바탕으로 새로이 다년 계약을 노리는 박찬호로선 돈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가 더 중요시했던 것은 선발로 뛰면서 많은 승수를 따낼 수 있는 팀. 그런 점에서 메츠는 현재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해답이다. 지난해 97승65패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던 메츠는 타선이나 구원투수진에 비해 선발 투수진이 취약하다
2003년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 공식은퇴 발표
2003년 2월 09일, ‘아시아의 골잡이’, ‘황새’ 황선홍(35)이 끝내 날개를 접고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한·일 월드컵 이후 부상으로 은퇴의 기로에서 고심하던 황선홍은 9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를 공식발표했다. 회견장엔 팬들이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히’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작별을 아쉬워했다.
1988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황선홍의 축구여정은 20세기 말 한국 축구의 역사와 동의어였다. 그는 A매치에 103회 출전, 50골을 뽑아낸 발군의 스트라이커였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본선에 4회 연속 출전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황선홍은 94미국월드컵 때 많은 찬스를 날려 팬들의 비난에 직면했고 98프랑스월드컵 때는 대회 직전 무릎 부상을 당해 벤치 신세를 지는 등 고비마다 부상의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나 황선홍은 2002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48년 사상 첫 승리이자 4강 진출의 주춧돌이 되는 통쾌한 선제 결승골을 꽂아 해묵은 한을 단번에 씻어냈다. 국내 프로무대에서는 1993년 포항제철에서 데뷔, 통산 64경기 31골 16도움을 기록했고 일본 J리그 시절인 1999년엔 24골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막
‘지구촌 눈과 얼음의 축제’ 동계올림픽이 9일(한국시각)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라이스 애클스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5만6000여명의 관중과 160개국 지구촌 사람들이 지켜본 개막공연의 주제는 ‘마음의 불을 밝혀라(Light the Fire within)’. 희망을 상징하는 주인공 ‘빛의 소년(Child of Light)’이 개막행사의 처음을 비롯, 행사 곳곳에 출연하면서 전 세계가 상처받은 인류애를 함께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유타주의 5개 인디언 부족이 5대륙를 대표하는 선수와 우정을 나누는 내용을 담은 공연도 이어졌다.
선수단 입장은 ‘빛의 소년’이 근대 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 선수단을 이끌면서 시작됐다. 허승욱을 기수로 한 한국선수단은 하얀색 파커 위에 예쁜 색동 조끼를 걸쳐입고 42번째로 경기장에 들어와 많은 박수를 받았다.
개막식 대미를 장식한 것은 성화점화. 딕 버튼, 도로시 해밀, 페기 플레밍, 스콧 해밀턴 등 미국이 낳은 동계스포츠 스타들에 의해 스타디움 내에서 전해진 성화는 최종적으로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대회에서 미국이 아이스하키 금메달을 따낸 당시 대표선수들에 의해 738개의 유리로 만들어진 약 36m 높이의 성화대를 타고 점화돼 솔트레이크시티를 환하게 비췄다.
개막식은 부시 미 대통령 등 요인들이 대거 참석해 삼엄한 경비 속에 열렸다. 개막식 동안에는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반경 72㎞ 이내가 비행금지구역으로 선포됐고, 강화된 검색에 입장객들은 2~3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2001년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의 수산고교 실습선, 하와이 앞바다에서 충돌
일본의 수산고교 실습선과 미 핵잠수함이 2001년 2월 9일 하와이 앞바다에서 충돌, 9명이 실종되고 12명이 부상했다. 이날 오후 하와이 오아후섬 남쪽 앞바다 18km지점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소속 핵잠수함 `그린빌`호(6090t급)가 부상하면서 일본 우와지마(우화도) 수산고교 소속 조업 실습선 `에히메마루`(499t급)를 들이받았다. 에히메마루는 충돌 10분 만에 침몰했다. 에히메마루에 타고 있던 고교실습생과 선원 등 35명 중 26명이 구조됐으나, 실습생 4명을 포함 9명이 실종됐다. 그린빌호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이날 사고의 책임을 물어 그린빌호의 함장을 직위해제, 미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 사령부 참모로 전보했다.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선박 간의 충돌사고는 이번이 두번째로, 지난 1981년 일본 화물선과 미 핵잠수함 조지 워싱턴호가 가고시마현 근해에서 충돌해 2명이 사망한 바 있다.
2001년 우리 나라 전국 144개 모든 통화권 지역을 고속 대용량(155Mbps∼5Gbps)의 광케이블로 연결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구축
2000년 주한미군,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용산기지 하수도로 방류
(주한미군 사령부 7월14일 공식 인정)
2000년 한국 뇌사 공식 인정
우리나라에서도 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정부는 2000년 2월9일 국무회의를 열어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 장기 매매를 임의로 알선하거나 교사하면 2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시행령은 장기 기증자 및 이식 대기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국립장기이식관리기관에서 통합, 관리함으로써 장기를 이식받을 사람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선정토록 했다.
미국은 장기공유정보체계를 민간단체가 관리하고 일본은 장기알선업체가 대신한다. 정부가 장기이식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또, 그동안 무법상태에서 행해졌던 뇌사자 장기기증이 합법화되면서 뇌사자 장기의 배분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꾀할 수 있게 됐다.
세계적으로 뇌사가 처음 인정된 것은 1971년 핀란드의 국민보건국이 ‘시체 조직의 적출에 관한 훈령’을 공포하면서부터였다. 이때까지 뇌사를 법적으로 인정한 나라는 미국, 프랑스, 영국, 핀란드, 일본, 대만 등 16개국이었다. 뇌사를 공식 인정하는 ‘장기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나온 첫 뇌사판정자는 2000년 2월15일 인천 가천의대 부속 길병원에서 나왔다.
1999년 빈민 운동가 제정구 의원 별세
빈민 운동가 출신의 한나라당 제정구 의원이 1999년 2월 9일 밤 폐암으로 55년의 생을 마감했다. 제 의원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당했다.
재야운동가 시절 `도시 철거민의 대부`로 불렸던 그는 빈민운동의 공로로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시흥 일대 달동네에서는 그가 직접 찍어 만든 `제정구 블록`이 안 들어간 집이 없을 정도였다. 1987년 대선 때 후보단일화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양김 분열에 실망, 1988년 4.26총선 때 `새정치`를 기치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종로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 때 민주당 후보로 시흥-군포에서 당선, 처음 원내에 진출했고 15대 총선에서 재선됐다. 1995년 민주당에서 국민회의가 분당할 당시 그는 "DJ 덕분에 의원이 됐지만 대의명분은 지켜야 한다"며 민주당에 잔류, 소신을 실천했다. 정부는 한평생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도시 빈민을 위해 살아온 공을 기려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1997년 아르테아가 부통령,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
1997년 2월 9일 위기에 빠진 에콰도르 정국을 이끌고 갈 신임 대통령으로 미모의 법률가 출신 로살리아 아르테아가 부통령이 선출됐다. 이로써 반정부 시위와 총파업, 대통령탄핵에 이어 군부 쿠데타설로까지 치닫던 에콰도르의 정국 위기는 일단 해소됐다.
의회결정에 따라 그녀는 에콰도르 헌정사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그녀는 법률가와 교육자 경력을 가진 여성 정치인으로 교육부장관을 거쳐 1996년 7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에 축출된 압달라 부카람 후보(46)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부카람이 경제정책 실패와 온갖 기행으로 원성을 사자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걸었다.
지식인층과 각 정당에 지지기반을 쌓은 그는 대통령 탄핵으로 빚어진 난국을 수습할 해결사로 나서게 됐다. 아르테아가는 늘 웃음짓는 얼굴처럼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한-중 해저광케이블 개통
우리나라 충남 태안과 중국 산동성 청도를 잇는 총길이 5백49㎞의 해저 광케이블이 1996년 2월 9일 개통됐다. 이번에 개통된 한·중 해저 광케이블은 한국통신과 데이콤이 1993년 6월부터 약4백억원을 투입, 건설한 것으로 초당 신문 8천8백 쪽 분량의 정보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 5백60Mbps급 시스템 2개로 구성돼 있다. 또 각 시스템은 1만5천1백20개의 전화회선 용량을 갖고 있어 1만5천명 이상이 동시에 전화통화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국제통신회선은 인텔샛(국제통신위성기구)이나 일본을 우회한 케이블망을 포함해 1천84회선에 불과, 양국이 심각한 통신회선 부족사태를 겪어왔다. 그러나 이번 한·중 해저 광케이블의 개통으로 모두 8천3백74회선을 확보함으로써 최근 급증하는 양국간 통신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됐다.
한-중 양국은 이날 두 나라간 해저 초고속 광케이블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케이블을 이용한 이수성 국무총리와 중국의 이붕 총리간 영상 대담을 10여 분간 가졌다.
1996년 윤치영 前공화당 당의장 별세
민주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98)가 1996년 2월 9일 서울 중앙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윤씨는 두세기에 걸쳐 살아오면서 독립운동과 학자, 정치가로서 갖은 풍상을 겪어온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1898년 2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때인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어 미국 컬럼비아대와 조지 워싱턴대를 거쳐 1934년 아메리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제시절 한때 독립운동 관계로 9개월간 영어(囹圄)생활을 하기도 했던 윤씨는 해방직후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승만 박사의 비서실장과 제헌 및 2, 3, 6, 7대 국회의원, 초대 내무장관, 국회부의장, 대한국민당 당수, 공화당의장 등을 지냈다.
특히 그는 1963년 5월과 1968년 6월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의 당의장을 역임하면서 격동기 한국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왔다. 그는 공화당 창당이 한창인 1963년, 혁명주체간의 불화로 공화당의 해체론마저 대두되는 와중에서 공화당을 맡아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했다.
제헌의회에서 국회부의장(1949∼50년)을 지낸 그는 2대 민의원을 충남 공주, 3대 민의원을 서울 중구(국민당)에서 당선됐다. 6대와 7대의원은 공화당의 전국구 2번을 받았었다. 이후 그는 공화당 총재상임고문(1970∼73년), 국토통일원고문(1972∼84년), 안중근이사 숭모회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장 등을 거쳤다.
1995년 김종필 총재, 민자당 탈당
1995년 삼성전자 제2의 반도체 신화 창조한 TFT-LCD 양산 1라인 준공식
1993년 정주영 국민당 대표, 정계은퇴
1992년 제16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알베르빌)
제16회 동계올림픽대회가 1992년 2월 9일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개막돼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65개국 2천6백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통일후 첫 출전한 독일이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44년동안 계속 출전해온 한국은 김윤만 선수가 남자 1천m 스케이팅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남자1천m 쇼트트랙에서 김기훈선수와 이준호선수가 나란히 금메달,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2, 은1, 동메달 1개로 세계 10위를 차지해 아시아 정상으로 군림하던 일본(11위)을 처음으로 제치는데 성공했다.
1990년 3당합당의 결과, 민주자유당 창당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1990년 1월 22일 합당선언을 한 후 1990년 2월 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전당대회 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어 합당을 의결, 민주자유당으로 창당됐다. 이로써 민자당은 모두 2백16석(민정계 1백27, 민주계 54, 공화계 35)의 의석을 보유하게 돼 개헌선 1백98석을 크게 웃도는 거대야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합동회의는 3인 최고위원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규정한 당헌을 채택, 공동대표 3인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씨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그후 5월 9일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당총재로,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씨를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출했다.
민주자유당 창당은 제5공화국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276석 중 148석만을 얻어 여대야소 정국이라는 위기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3당을 통합해 거대야당을 탄생시킨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12월 다시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1989년 화염병사용 처벌법 국회통과
1989년 ‘우주소년 아톰’ 의 제작자,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사망
일본 최초이자 동양 최초로 만화영화를 만들어 동양적 캐릭터를 개발한 데즈카! 그의 주인공들은 일본과 동남아를 휩쓸고 미국·유럽에까지 진출해 활약했다.
7백여 종의 만화책과 60여 종의 만화영화를 제작했으며 로봇 소년 아톰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과학기술에의 열정을 심어줌으로써 오늘의 전자산업 왕국 일본이 있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즈카는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1953년 의사고시를 합격하지만 의사로 활동하지 못한다. 뛰어난 스토리 구성과 박진감 있는 화면전개로 일약 데즈카붐을 일으킬 때 ‘의사가 그린 만화’ 라는 사실이 부모들에게도 보증수표로 통하게 되면서 만화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1961년 ‘무시프로덕션’ 을 만들어 만화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63년 1월 ‘철완 아톰’ 을 방영해 40.3%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미국에 수출했다. 1966년 직접 COM이라는 만화잡지를 창간했으나 과도한 투자로 1973년 4억 엔의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출판사들이 그의 원고를 거절하기도 했고 은행문도 굳게 닫혔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와 리얼리티로 그의 만화는 다시 인기를 얻어 죽기 직전에는 일본 전체에서 소득이 7위를 기록했다. 1989년 2월 9일 그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왕’‘황제’‘일본의 디즈니’ 등의 수사 외에 ‘쇼와 시대 최고 지식인 중의 한 사람’ 이라는 칭호가 붙었으며 1994년 4월 25일 데즈카의 고향인 다카라즈카市에는 일본 사상 처음으로 만화가를 기념하는 데즈카 기념관이 세워졌다.
1988년 삼성반도체-금성반도체-현대전자-전자통신연구소 공동으로 4MD램 개발
1986년 핼리혜성, 76년 만에 지구에 접근
1984년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망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가 1984년 2월 9일 오후 10시50분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 소련관영 타스통신, 국영TV-라디오는 이 사실을 사망한지 22시간이 지난 10일 오후에야 공식 발표했다. 안드로포프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공산당 서기장에는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13일 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됐다.
1914년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로포프는 1954년 헝가리주재 소련대사, 1961년 당중앙위원, 1967년 KGB 의장과 정치국의 후보국원을 거쳐 1973년 정치국원이 됐다. 이는 1953년 처형된 베리아 이후 KGB 총책과 정치국원을 겸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5년동안 KGB 책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의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5월 당 요직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
1983년 4대문안 재개발지구 고도규제 완전철폐
1982년 JAL 여객기 가와사키 앞바다 추락
1981년 폴란드 수상에 야루젤스키 취임
1979년 알제리 새대통령에 샤들리대령 취임
1977년 카터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계획발표
1977년 3월 9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한-미관계를 놓고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선거당시 주한미군지상군의 단계적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이날 박 외무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선거공약은 불변임을 강조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기간은 4-5년이 적절하며, 철수일정은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마련할 것이며, 철수는 또 일본의 완전한 이해와 참여로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했다.
이외에 한국정부가 북한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상군을 갖도록 한국의 전력증강계획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한국의 공중방위를 위해 상당기간 미공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1973년 영국-프랑스, 동독 공식승인
1971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1967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발효
1962년 정부, 충주에 제4비료공장 설치계획 발표
1960년 `자장가 변주곡`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도흐나니 사망
1957년 미국 5천kw 원자로 발전 개시
1950년 미국 `매카시 선풍` 개시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열린 공화당 여성당원 대회 초청 연사 매카시 상원의원은 보수파 중에서도 특히 우편향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후에 `매카시즘`이라 불리게 된, 사상 희유의 빨갱이 사냥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온 매스컴이 대서특필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석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저명한 중국학자 라티모어를 필두로 애치슨, 마샬 등 민주당 정부요인들까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비단 매카시 뿐은 아니었다. 초선의 공화당 의원이었던 리처드 닉슨도 이에 가세했다. 정부와 의회, 학계, 문화계, 노동계, 헐리우드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곧이어 1954년 12월 상원은 67대 22로 매카시가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견책을 결의, 4년에 걸친 집단 광기에 끝을 냈다. 매카시는 그후 비서와 결혼했으나 술에 빠진 생활을 계속, 3년 후인 1957년 실의 속에 알코올 중독증과 우울증으로 48세 나이에 죽었다. 한 정치신인의 야욕과 사회의 불건강한 정신구조가 함께 빚어낸 한 시대 우화였다.
1950년 미국-영국-캐나다, 원자력회의 개최
1946년 소련 제4차 5개년계획 발표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 및독일에 선전포고
1943년 미국, 주48시간 근무제 실시
1943년 일본 군인 카탈가나루섬에서 철퇴
1909년 독일-프랑스, 모로코협정 조인
1904년 제물포 전쟁
1904년 2월 9일,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함대가 맞붙었다.
당시 제물포는 하루 전에 중국 뤄순항에서 벌어진 러일 전쟁 탓에 전쟁을 피해 밀려든 각국의 함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 군함은 물론 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의 군함들까지 같이 정박해 있던 제물포항에서 일본은 각국 함선에 정오까지 제물포항을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러시아의 전함 바락(노르만인)호와 카레예츠(고려인)호는 자국의 상선 숭가리(송화강)호와 함께 정박해 있었는데 러시아는 전쟁 당사국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곧이어 러시아 함정과 일본 함대 간의 해상 포격전이 전개됐다. 전함수 14 대 2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응에 나섰던 러시아 함대는 1시간 만에 만신창이가 돼 소월미도로 돌아갔다. 수병 33명이 사망하고 97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 함대는 항복하지 않은채 침몰하며 자폭했다.
러일전쟁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인의 기개를 세계에 알린 자랑스러운 날'로 기념하고 있는 전쟁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바락호 함장의 동상을 세우고, '바락'이라는 영화와 제물포해전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 정도였다.
1890년 네덜란드 건축가 오우트 출생
1881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사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81년 2월 9일 사망했다. 신과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의 소설들은 `넋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문학만이 아니라 사상계 전반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문학세계에는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신질서가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다양한 상황속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내는 다색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18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싫증을 느끼고 때마침 출간된 발자크의 소설에 영향받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젊은 시절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한 서클에 가입했으나 이 서클이 관련된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황제의 특사로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배된 그는 4년간의 유형생활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자에서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로 사상적 변신을 하게 된다.
1874년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 사망
1865년 독일 지리학자 드리갈스키 출생
1859년 미국 오르간 제작자 호프 존스 출생
1788년 오스트리아, 터키에 선전포고
1773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 제9대 대통령 출생
1614년 영창대군 사망
1404년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