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한성정부 유적지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 67-2)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 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취지서를 준비한 곳이다
♤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기미독립선언(1919 3. 1일)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성에 조직된 임시정부로, 1919년 4월 2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그 뒤 국민대회 장소를 서울 종로 서린동(瑞麟洞)의 중국요리점 봉춘관(奉春館 : 현 광화문우체국 자리) 으로 변경하였으며, 4월 23일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 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 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 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한성정부 약법(約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 제2조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함
- 제3조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
- 제4조 임시정부는 하의 권한이 유함 - 일체 내정, 일체 외교
- 제5조 조선국민은 하의 의무가 유함 - 납세, 병역
- 제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하야 헌법을 선포하기까지 차를 적용함
한성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호는 대조선 공화국(大朝鮮共和國)이었다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았으며, 국가원수는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載)였다
1919년 5월 31일 신흥우에게서 한성정부 수립의 문건을 건네받은 이승만은 6월 14일부터 대한공화국 대통령(Republic of Korea President)이라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이승만은 대통령 직함 사용에 집착한다
한성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로써 집정관총재 제도를 채택했으며, 내각은 7부 1국제로 시행되었다
집정관총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총장 신규식 (申圭植),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1919년 9월 11일 안창호의 주도로 통합된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되는데, 이때의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된다
이승만의 직책변화를 살펴보면
❶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❷ 1919년 4월 23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이승만
(안창호와 이승만의 서신)
❸ 1919년 9월 11일 통합된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치를 내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상하이의 상해임시정부도 설립되었는데,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1919년 9월 11일 이들과 통합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 되었으며, 위치나 과정상 상해임시 정부가 중심이 됐지만 명목상의 법통은 한반도 내에 있던 유일한 정부였던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상해에서 수립된 통합 임시정부는 상해의 독립운동가 들이 이전에 만들었던 임시정부가 아니라 서울의 국민 대표대회가 선포한 '한성정부'였다
이때 ‘임시정부’라 한 것은 이천만 민족의 총의로 독립을 선언했으나 영토와 대다수 인민이 적 치하에 있는 형편에서 자유로운 선거에 기초한 의회와 정부를 수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의할 것은 정부와 의회는 ‘임시’였어도 국가는 ‘임시’ 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19년 수립당시의 청사 건물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금천교 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3, 내자동 1-3 부근)
종로구 체부동,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 등으로 갈라지 는 사거리로 청계천의 지류인 백운동천에 있었던 다리이다
♤ 금천교 (禁川橋, 금청교禁淸橋)
5군영의 하나인 禁衛營이 한때 이 다리 앞에 있었으므로 글자를 줄여 禁橋라고도 했으며, 음이 변하여 禁川橋라고도 하였다
세 개의 홍예를 틀어서 교각을 삼고, 그 위에 귀틀을 설치하였다
홍예와 홍예 사이에는 面石이 끼워지고 각각의 면석에는 나티(짐승의 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 모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짜임새가 매우 우아하였고, 홍예가 시원스럽게 뚫린 모양이 마치 안경과 같다고 해서 일명 안경다리라고도 하였다
1928년 백운동천을 복개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 금천교시장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종로구의 대표적인 골목형 시장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밖으로 나오면 빵집과 과일가게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63년에 개설돼, 지금은 약 100개의 점포가 모여 있으며, 크고 작은 맛집들이 모여있는 음식문화의 거리로도 유명하다
청와대 진입로이자 경복궁 근처에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곳이며, 학생들의 출입이 빈번한 주통학로의 역할도 하고 있어 정비가 필요한 곳이다
김가진 집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5길 5, 체부동 86-1)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터이다
김가진의 집터는 이곳 말고도 백운동천에 지어 살던 백운장 영역은 지금의 청운동 1번지 부터 10번지까지 10.000여평에 이르는 매우 넓은 터였다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 바로 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청운동 벽산빌리지 등이 있는 곳이다
집사가 몰래 동양척식회사에 집을 저당잡혀 소송 중 이사한 내자동집터(광화문 풍림스페이스본 아파트 1단지)도 있다
♤ 김가진(金嘉鎭)
김상용(金尙容)의 12세 손으로 1846년 지금의 신교동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근처에서 태어 났다
호는 동농(東農)이다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 ·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마흔한살이 되던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한후 개화 관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천진 주재 종사관과 일본국 주재 판리대신 등으로 외교 일선에서 외국문물을 보고 배웠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는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서 각종 개혁안 을 기초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을 썼다(이 부분은 논란이 있음)
공조판서,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의장 등을 거쳐 59세가 되던 1904년(광무8년) 종1품 숭정대부의 반열에 올라 비원장, 법부대신을 지냈다
1904년 그가 비원장으로서 창덕궁 후원 중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고종이 남은 자재로 김가진의 집을 짓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장안으뜸” 이라는 “백운장”이었다
백운장 옆에 ‘몽룡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시를 지었다
그는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는 1907년 이듬해 1908년 9월, 마지막 관직인 규장각 제학을 사임했다
1908년 대한협회의 창립에 관여하고 제2대 회장이 되어 자주국가로 다시 일어서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1910년 일본과 강제 병합이 되고 대한협회도 해산 되자 그는 백운장에 칩거했다
일제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구한말 중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김가진에게도 가강 낮은 등급인 남작을 수여했으나 연금 수령은 거부했다
1917~1918년경 백운장의 집사가 김가진 몰래 백운장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저당잡혀 소유권이 넘어갔다
소송을 제기했지만 일단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 때 간 곳이 사직동 162번지 지금의 스페이스본 자리 50여평 한옥이었는데 여기서 한두해 살았다
이곳 길 이름이 한때 동농(東農,김가진의 호)길이었다
1919년에는 더 작은 체부동 86번지(지금의 토속촌 삼계탕 자리)로 옮겼다
이 무렵 3.1운동이 일어났다
74세의 노구에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동단의 총재직을 수락 한뒤 그해 10월 셋째 아들 김의한 (1900~1964)만 데리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상하이로 망명했다
망명길 열차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사직도 기울었는데
부끄러움을 안고 죽음을 견디며 지금껏 살았구나
늙은 몸이지만 아직 하늘을 뚫을 뜻이 남아
단숨에 높이 날아 만릿길을 떠나가네
민국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몸 돌보랴
천라지망 경계망을 귀신같이 벗어났네
누가 알아보랴 삼등열차 안의 이 나그네가
누더기 걸친 옛적의 대신인 것을
그는 대동단 총재로서 국내의 조직과 연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며 임정의 고문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교민들을 다독였다
이듬해 며느리 정정화가 시아버지와 남편의 뒷바라지 를 위해 상하이로 찾아온다
그녀는 6차례나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등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김좌진의 권고로 무장투재을 위해 만주로 가려던 중 1922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건 물론이고, 육신마저 이국땅에 의탁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김의한 내외는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또 다른 전쟁(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의한은 북을 택했다
동농 김가진은 현재 손문의 부인 이름을 딴 상하이 송경령능원에, 아들 김의한은 평양 재북인사묘에, 며느리 정정화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상하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산가족인 셈이다
김가진은 독립 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국가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이며, 또한 친일인명 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은 등재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에서 대신(지금의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 관리를 지낸 인사들 가운데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현지에서 돌아가신 유일한 분이다
세종대왕 탄생지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118-1)
일부 인사들은 작은 공로만 있어도 생가를 복원하고 업적을 기리는 등의 사업이 활발한 우리나라인데, 최고의 위인인 세종대왕이 나신 곳인데도 기념관 하나 없이 표지석만 덩그러니 서있는 이 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0여 년전부터 "세종대왕생가터 성역화추진위원회" 라는 시민단체가 생겨 활동해왔지만 그동안의 정부와 일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직 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대하는 까닭은 탄생지를 정확히 고증하지 못한다는 것과 생가 모습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된장 ㅠㅠ)
다만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하는 세종이야기전시관 (광화문광장지하)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이상의 집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통인동 154-10)
이상(李箱 - 본명 김해경金海卿)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3살 때 큰아버지(김연필,金演弼)에게 양자로 들어가 1933년 집이 팔리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썼다8
(이상의 아버지는 손가락 3개를 잃은 장애인으로, 이발업에 종사하였다)
시인이며 소설가로서 한국문단의 한 가지로 우뚝 선 문인이지만, 그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건축가여서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한 이력도 있다
1936년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 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 학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맞은편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비밀스러운 공간과 도 같은 발코니가 등장한다
두 사람도 허용되지 않는 비좁은 이곳에 서면 아래로 이상의 집 중정이 펼쳐지고 그 위로는 한옥의 지붕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중정 한 번 쳐다보고 한옥의 지붕을 쳐다보길 여러 차례 하다보면 어느새 서촌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을 느껴볼 수 있다
♤ 철거 위기에 있던 이곳을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시민 모금과 기업 후원으로 보전, 관리하고 있다
♤ 이상의 제비다방 (서울시 종로구 종로5길 7, 종로 1가 33)
제비다방과 기생 출신 금홍은 한 묶음이다
이상은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1933~1935년 제비다방을 운영했다
(이상의 소설 ‘날개’ 속 ‘연심’이 금홍이다)
구본웅의 막내아들 구순모(71)씨의 과거 증언도 찾아냈다
“(맏형 구환모는) 아버지를 따라 몇 차례 같은 다방에 간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바로 여기라고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비록 그 찻집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이상이 다동으로 이사하기 전에 운영하던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형과 함께 그곳의 지번을 확인해 본 결과 그곳의 주소가 ‘종로1가 33번지’였다.”
(1934년 5월 1일자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끽다점 평판기'를 보면 "제비다방 손님은 주로 화가, 기자 그리고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할 일 없이 차나 마시며 소일하는 유한청년들이었고" "그들은 '육색肉色' 스톡킹으로 싼 가늘고 긴 각선미의 신여성들을 바라보며 황홀해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1944년까지 ‘다동 72번지’에 거주한 구환모(당시 6세)는 할머니 몰래 집에서 50m도 안 되는 ‘다동 33-1번지’, 이상과 변동림이 살고 있는 집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1935년 여름 금홍이 떠나고, 4년이나 쫓아다닌 권순옥마저 그해 8월 29일 결혼하자 이상은 9월 제비다방을 폐업한 뒤 다동 33-1번지에서 변동림과 동거를 시작했다)
통인시장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5길 16, 통인동 13-1)
일제 강점기인 1941년 효자동 인근의 일본인들을 위하여 조성된 제2공설시장을 모태로 한국전쟁 이후 서촌(西村) 지역에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옛 공설시장 주변으로 노점과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36호 '시장규칙'에 따르면 조선의 재래시장은 제1호, 일제의 새로운 시장 중 일반 소비자 상대는 제2호, 도매 및 경매시장은 제3호 공설시장으로 하였다)
2005년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현행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인정시장(認定市場)으로 등록된 뒤 현대화 시설을 갖추었고, 2010년 서울시와 종로구가 주관하는 '서울형 문화시장'으로 선정되었다
2011년에는 시장상인회가 미울기업으로 (주)통인커뮤니티를 법인 등록하여 통합콜센터와 배송센터를 설치하고 온라인 쇼핑몰도 개설하였다
점포 수는 70여 개로 식당과 반찬가게 등 요식 관련 업소가 가장 많고 채소, 과일, 생선, 정육 등 1차 생산품을 판매하는 업소가 그 다음이며 그 밖에 내의와 신발 등의 공산품, 옷 수선과 가방 및 구두 수선 업소 등이 있다
통인시장 내부에 있는 도시락 카페 통(通)은 2012년 1월 오픈 이후 유명세를 타 종로구 대표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내 맘대로 도시락'은 엽전으로 반찬을 구매해 자신만 의 도시락을 구성하는 이색적인 전통시장 체험 프로그램이다
2014년에는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와 성 김 주한 미국대사가 다녀갔다
효자아파트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55, 통인동 5-1)
정확히 말하면 '효자상가아파트'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1년 효자동에 거주하는 일본인 들을 위해 개설한 통인시장을 1층으로 두고 점차 층을 쌓아 올린 주상복합아파트다
원래는 공설시장을 목적으로 지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정작 시장은 지금 모습처럼 1층으로만 길어졌다
1960대 후반에 지금의 5층짜리 외관을 갖추었고 지층부터 2층까지는 상가이고, 3층부터 5층까지가 살림집이다
정확히는 통인시장은 효자이파트 1층상가의 한 부분인 셈이다
정확한 건축연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50년은 지났고, 잘 알려진 국내 최초 주상복합아파트인 세운상가 다음 순이다
지금이야 허름해 보여도 그 당시 '아파트'라면 전부 획기적인 건물로 간주됐다
비슷한 역사를 지닌 서소문아파트, 동대문아파트와 마찬가지로 효자아파트도 공무원, 연예인, 정치인 같은 소위 '있는 사람들'이 거주했다
3층부터는 마주보고 늘어서 현관문들 사이로 길게 뻗은 일자형 복도가 펼쳐진다
집집마다 문양이 다른 낡은 녹색 창살과 드문드문 새로 꾸민 것 같은 현대식 창문과 현관문 모습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입주자의 입맛에 따라 바뀌었을 터이다
5층으로 올라가 내려보면 1층에서 보았던 계단의 모양이 한층 더도드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