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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는데 내 나이 올해 86세.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더구나 이 나이에도 많은 교회에서 간증을 요청하고 65년째 운영하는 천안
호두과자사업도 여전히 일선에서 돌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심복순이라는 이름보다는 천안 호두과자할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매스컴을 통해 여러차례 보도된 것 외에도 천안의 명물이 된 호두과자를
맨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외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교회의 권사 심복순에 가장 만족하며 그 직분에 합당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인생이란 지나고 보면 참 허망하다.잘했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아쉽고
부족했던 일이 더 많다.그러나 바로 그 속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부터 언제나 나의 삶 속에 좌정하셔서 놀랍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 한다.자칫 자랑이나 미담으로 흐르지 않길 기도하며,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단 한분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천안을 생각하면 삼거리와 능수버들,호두과자를 떠올린다.
영·호남으로 길이 갈라지는 교통 요충지였고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아서였다.그런데 이 두가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65년 전에 첫선을 보인 호두과자만 맥을 잇고 있다.
이 호두과자를 처음 만든 것은 남편이었지만 호두형태의 모양과 팥앙금,호두를 넣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바로 나였다.나는 이 지혜를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이 때문에
나는 많은 물질의 축복을 얻었고 하나님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내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다.딸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이어서 부모님의 귀여움을 한껏 받으며
자랐다.건축측량기사였던 부친 때문에 여기저기 자주 이사를 갔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학교까지 졸업했다. 딸을 가르치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할 정도로 무지몽매하던
그 시절에 대전 정명여학교를 마친 것이다.
그런데 토속종교에 심취한 어머니가 나의 사주를 들고 점쟁이를 찾았는데 “잘사는 부자집에
시집가면 일찍 죽으니 가난한 집에 가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어머니는 대학을 나온 좋은 신랑감을 모두 마다하고 조실부모하고
학교도 보통학교를 중퇴한 과자기술자인 조귀금이란 청년을 내 배우자로 점찍으셨다.
주위에서 모두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순종 뿐이었다.내 나이 19세였는데 남편은 24세였다.아버지는 절대 안된다며 결혼을
3년이나 미루시다가 승낙하셨다.그런데 결혼 후 더 큰 마음고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김무정moojeong@kukminilbo.co.kr
심복순권사(2)
[국민일보]1999-01-15 01판 21면 1363자 생활·여성
알고보니 남편은 천안에서 소문난 한량이었다.
처음 결혼이야기가 나왔을 때 남편은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제과기술자로
많은 돈을 벌었다.남편은 일본 나가사끼의 유명한 과자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제과기술을
익힌 뒤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기술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가는 곳마다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당시 도지사 봉급이 80원인데 남편은 숙식까지 제공받으며 1백20원을 벌었다.
막상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남편은 친정에서 자신을 무시해 3년이나 결혼을 미룬 것으로 여겨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그래서 보란 듯이 결혼한 지 1주일만에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깜짝 놀랐지만,당시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달리 항의를 하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신앙이야기가 빠졌는데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
여름성경학교나 교회행사가 있으면 항상 맨앞자리에 앉아야 직성이 풀렸다.
왠지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안정되었기 때문이다.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때 내가 배운 성경말씀중에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인내하라'는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겼다.그래서 남편이 외도해도 참기로 했다.
오히려 집에 데리고 온 여자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남편이 오히려 `너는 속도 없냐'고
말할 정도였다.또 교회에 나가는 내가 미워 성경책을 세번이나 찢어 던졌는데 그때마다
소중히 다시 붙여 놓았다.나는 주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 믿지 않고 남자로 태어났다면 나 역시 한 여자로 만족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인데 지금은 때가 일러 싸우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신앙적인 면에서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 같다.남편의 사랑에 만족하고 돈도 잘 벌어서 자식 키우고 돈 쓰는
재미에 흠뻑 빠졌더라면 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제과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늘 새로운 과자나 빵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가 “천안 근처 광덕면에서 많이 나오는 호두와 흰 팥을 사용해 과자를 만들면
어떨까요.재료를 쉽게 얻으니 만들기 쉽잖아요”라고 제안했다.일제시대에는 밀가루와 설탕 등
제과재료가 매우 귀했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호두의 본딧말은 호도(胡桃)다.이는 고려 충렬왕 때 유청신이 사신으로 호국(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씨앗을 가져와 심고 이름을 몰라 호지(胡地)에서 온 과일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왕이면 호두모양의 과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내 제의가 받아들여져 서울 을지로 주물공장에서
틀을 맞춘 뒤 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1934년,드디어 천안호두과자가 첫선을 보였다.
심복순권사(3)
1930년대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호두과자는 말 그대로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가게 앞에 줄까지 설 정도였다.특히 단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더 많았다.
지금도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 중에서 이곳에 들렸다가 옛날의 바로 그맛이라며 회상에 젖는
사람도 많다.천안에서 유명해진 호두과자는 이제 전국을 무대로 팔려나갔다.
다음 중국 천진과 상해 서주까지 수출했고 일본 관동군사령부 산하 군부대에 납품했다.
이때 상호를 학화(鶴華)라고 붙였다.학처럼 오래동안 빛나라는 의미였다.
당시 제일 어려웠던 일은 밀가루를 구하는 것이었다.
특히대동아전쟁때는 호두과자를 만드는 일보다 밀가루 구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사실 학화호두과자가 이미 유명해졌고 독점품이었으니 부족한 밀가루를 좀 묽게 반죽하고
팥과 호두도 좀 적게 넣으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료나 양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흉년이 들어 팥을
구하기 힘들고 가격이 엄청 올랐어도 정해진 정량을 다 채웠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비슷한 경우를 너무 많이 경험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주님을 열심히 찾고 간구하다가 축복을 받고 모든 것이
편해지면 신앙도 함께 나태해지는 것이다.
“변함없는 호두과자를 만들 듯 신앙생활과 기도도 변함없이 하자”
이런 자세로 사업과 교회생활을 병행했다.사실 당시 내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남편이
놀기를 더 좋아해 내가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돈버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나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병원을 찾듯이 죄많은 사람이 교회에 가서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죄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느끼지도 울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전쟁이 터져도 피란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게 우리집 머슴으로 있었던 젊은이가
붉은 완장을 차고 북한인민군과 함께 찾아왔다.그리고 총부리를 내게 겨누며
돈 이십만원과 시계 망원경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어려워 고개도 못들던 친구가 내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니 마음이 차분해지며 진정됐다.저 친구가 머슴으로 있으면서 시계와 망원경을
얼마나 갖고 싶어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태연하게 있던 돈과 시계를 주고
망원경이 있는 곳도 알려 주었다.두사람은 아주 만족해 하며 돌아갔다.
지금 돌이키면 이 상황은 주님이 지혜를 주신 것이라 믿는다.
옛날을 생각하며 그 친구를 야단치거나 거부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지 모른다.
우리집은 인민군이 묵는 숙소로 변했고 모든 살림살이는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동안 힘들게 모든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4 6·25 당시 큰아이는 경복중학교,둘째는 경기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이 세번이나 서울에 올라가 간신히 아이들을 천안으로 데려왔다.
우리 식구는 집을 인민군에게 내주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산속에 숨어 지냈다.
모두 단벌로 집을 빠져 나왔기에 빨래를 할 때는 속옷과 겉옷을 차례로 빨아 입었다.
아이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다 헤어졌지만 천이 없어 속주머니를 뜯어 기워 입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때도 많았는데 그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잘해준 덕분인지 이것저것 식량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많았고 그 때문에 남들보다 고생을 덜했다.
그때 인생의 귀한 교훈을 얻었다.남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 베푸는 일에
내가 더 열심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성경에 남에게 베풀고 갚으면서 사는 것이
더 복되다는 말씀이 있다.은혜를 입으면서 `나도 이렇게 남에게 갚아야지'라는 다짐을 했다.
그때 고생하며 움츠려 지낼 때 누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그렇게 고맙고 감사했다.
남이 잘해주면 자기도 잘해주고,남이 못하면 자신도 못하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배려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그때 얻은 경험으로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휴전이 되면서 우리 가게는 다시 문을 열었고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아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그때는 거지가 엄청나게 많았다.
피란을 왔다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이나 고아들이 문전걸식을 하며 떠돌았던 것이다.
우리가게에도 거지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던 12월 어느날,아기를 업은 20대 후반의 여자거지가 가게를 찾아왔다.
다리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데 여름옷을 입은 갓난아이에게 속옷 한벌만 사달라고 간청했다.
너무 불쌍해 시장에 데리고 가서 아기옷과 맨발인 그녀를 위해 버선까지 사주었다.
다음해 여름,다시 불쑥 나타난 그녀가 호박 두개를 내게 내밀었다.
다리밑 공터에 호박을 심어 거둔 것이라고 했다.팔아서 다른 데 쓰라고 말했지만 막무가내로
놓고 갔다.그날 저녁 나는 정말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호박찌개를 먹었다.
당시에는 호두과자를 모두 손으로 직접 구웠기에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다.
그래서 그것을 챙겨 놓았다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1970년대 중반 어느날 21세의 청년이 나를 찾아와서 “저의 어머니께서 제가 호두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컸다고 말씀하셨어요.할머니가 아직도 그곳에 계신지 알아보라고
해서 왔어요”라고 말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갔다.
그후 그의 어머니가 울먹이며 가게로 전화를 했다.그리고는 세월이 흘러도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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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안성심교회를 건축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다
.나는 원래 내가 소유한 과수원터중에서 가장 좋은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짓겠다고 작정을 했었다.
그런데 둘째아들이 금광사업하는 친구를 돕는다며 보증을 섰다가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내 소유의 많은 땅이 모두 압류를 당하고 종국에는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보증 서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지만,그 여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이제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모든 것을 정리해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가자.
더 이상 천안에 미련을 갖지 말자”
내가 서울로 갔더라면 교회를 건축하고 미력하나마 각종 선교사업에 참여하는 일도 그때를
기점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었을 것이다.경제활동을 멈추고 자녀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하면
선교일을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앞에 한 약속은 꼭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과수원터중 3백평을 약속대로 교회에 바치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무서측은 내가 돈을 빼돌리기 위해 땅을 판 것으로 여기고 1천만원의
양도소득세를 부과했다.1977년 당시의 1천만원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하나님,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있습니까.아들이 빚보증을 잘못 서 그 많던 재산을 모두
빼앗긴 것만 해도 괴로운데 교회에 바친 땅에 양도소득세라니…”
세금을 내지 못하면 일단 구속된다고 했다.평생 남을 속이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아들이 보증 잘못 선 죄밖에 없고,남은 땅을 교회에 바쳤더니 이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77년 12월22일.성탄절을 3일 앞두고 나는 천안경찰서에 유치됐다.
유난히 추운 날씨가 내 기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2주후 내가 무죄인 것이 밝혀져
당당히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지만,그 당시 차디 찬 마룻바닥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복잡하고 미묘했다.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경험을 한 것도 감사하다.
수감생활을 통해 내가 무엇에 대해 감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들어간 뒤 처음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의 고난이 오히려 복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쁨이 강물처럼 넘쳤다.하나님께서 나를 단련시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과정을 밟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곳에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고난에
감사하며 그것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경험을 한 데 대해 감사하자.
일제때 신앙의 선조들중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었던가.이것을 계기로 주님께 더 헌신하자”
경찰서에서 나온 후 은행대출을 받아 세금을 냈고 교회명의로 땅의 등기도 마쳤다.
더 항의를 하지 않고,세금이 나라를 위해 긴요하게 사용되기만을 기도했다.
이 첫 교회의 기공식을 앞두고 주님은 내게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간구했던 남편의 구원이었다.남편은 오토바이를 타다 다쳐 골수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했고 자주 병원신세를 졌다.나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지내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남편의 건강보다 구원을 위해 더 많이 기도했다.그리고 성전 짓는
건축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놀랍게도 주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이다.
7기도응답으로 남편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속을 썩이던 남편은 병환으로 거동을 못하게 되자
그제야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나는 아예 남편에게 경북 김천의 용문산기도원에서 지낼 것을
권유했다.믿음이 없던 남편은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완강히 반대하더니 병세가
심해지면서 인간의 의술로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승낙했다.
매주 월요일이면 밑반찬을 들고 용문산을 찾았다.
가게도 돌보아야 하니 여간 바쁘고 힘들지 않았다.그곳에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남편은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고 병도 치료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치료를 받은 후 용문산 정상 사자봉과 맷돌바위까지 오르내렸다.
거듭난 남편은 이후 나의 신앙생활을 적극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나중에 집사안수까지 받았다.
또 첫교회인 성심교회를 지을 때는 맨먼저 터를 닦았고 기공예배의 모든 준비도 도맡아 했다.
`하나님,감사합니다.남편이 성전 짓는 건축가가 되게 해달라는 저의 기도에 응답하셨군요.
믿고 구하면 무엇이든 이뤄 주신다는 말씀을 다시 확인시켜주시니 감사드립니다'.
1979년 1월에 시작된 교회건축은 그해 12월에 완공돼 입당예배와 헌당예배를 함께 드렸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나의 마음에 한없는 기쁨과 감사가 솟아올랐다.
성전을 하나 봉헌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다.당회장으로 천안중앙장로교회
이상구 목사님이 오셨다.
나는 성전봉헌의 감격속에서 평생 일곱개의 성전을 짓겠다는 서원을 했다.
성경에서 7이 완전숫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내 나이가 66세여서 그 이상 지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넘치게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은 오늘까지 여덟개의 성전을 짓는 데
참여하도록 역사하셨다.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이뤄진 교회건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부족한 손길을 통해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그 일은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아들의 빚보증으로 그 많던 재산과 땅을 다 잃고 난 후에 나의 재물관도 변했다.
예전에 하나님께 드릴 때는 내 것의 일부를 드린다는 자세였다.그러나
이젠 내 것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니 필요하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드려야 한다는 것으로 변했다.
세상에 재물을 쌓는 것은 허망하다.주위에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 못 드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돈이 없으면 시간을,시간이 없으면 건강이나 지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수 있다.사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다.
성경 신명기 28장을 보면 복 받는 방법이 단순명료하게 나와 있다.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복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과 떡반죽 그릇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앞서 복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주님은 이 믿음의 그릇의 분량대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은 헤아리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주위에 교회안에서는 천사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주님과 나의 영적 관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고,
부족한 것은 기도와 헌신으로 채워야 한다.
8 교회건축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교회를 지어 달라거나 건축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그런 교회 중에서 감동이 오면 찾아가 보곤 했다.
천안의 모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남의 밭에 천막교회를 세우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 겨우 3백만원을 모아 땅주인에게 3백만원을 건넸다.그런데 목사님이 영수증을 받지 않아
땅주인이 나중에 언제 돈을 주었느냐며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천막을 뜯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도움을 호소했다.
목사님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성도들도 천막교회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나는 우선 그 교회성도들이 교회건축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같이 기도하며 간증집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교회에서 강사를 초청하면 준비기도를 충분히 하라고 말한다.
강단에 서면 교회의 영적 상태가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집회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합당하고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도록 지혜를 주세요”
천막교회 안에는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이 앉아 있었다.나는 마가복음 9장23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주제로 간증하고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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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권사님 소천하신지가 한참 되었는데...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