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980년 09월 22일 이란 · 이라크 전쟁
이란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를 지지하고 있는 이란군들의 모습
사담 후세인 이란을 침공한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의 1979년의 모습.
이란·이라크전 발발 1980년 9월 22일, 간헐적으로 전개되던 이란·이라크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전쟁은 이라크 공군기가 테헤란 등 이란 공항을 폭격하면서 시작됐지만 그동안 내연해 온 국경분쟁과 종교갈등이 원인이었다.
분쟁은 1937년에 그어진 샤트 알-아랍 수로 동쪽(이란쪽) 국경선을 팔레비 이란 전 국왕이 1975년에 중앙으로 변경하면서 시작됐다. 1979년 집권한 후세인이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립이 심화되던 터에 종교갈등까지 더해져 충돌을 부채질했다.
1979년 회교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호메이니가 후세인의 반대파 시아파를 지원한 것이 후세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이란의 군사력이 전과같지 않음을 간파한 후세인은 국경선 회복에 힘을 쏟았다. 자신의 독재권력을 반대하는 이라크 내부의 불만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혁명 불만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이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장기 소모전으로 전개돼 양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만 남긴채 1988년 유엔의 중재로 막을 내렸다
이란의 석유파이프를 공격하고 있는 이라크군.
➡️2015년최영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 돈은 장학금, 몸은 연구용으로 기증
➡️2011년‘영어의 바이블’
성문영어 저자, 송성문 별세
➡️2001년바이올리니스 아이작 스턴 타계
➡️1999년미국 배우 조지 스코트 사망
➡️1997년기아자동차 화의 신청
➡️1994년뽀빠이 만화가 자겐도르프 사망
뽀빠이는 <골무극장(Thimble Theater)>이라는 제목의 잡지 만화 조연으로 처음 등장했던 캐릭터. 이후 뽀빠이는 플라이셔 스튜디오를 통해 파라마운트의 애니메이션 [베티 붑의 대나무 섬Betty Boop's Bamboo Isle]에 등장해 그 유명한 노래 ‘뽀빠이는 뱃사람(I'm Popeye the Sailor Man)’을 불러 존재감을 다졌다. 의외의 인기에 눈을 돌린 파라마운트는 곧 [뱃사람 뽀빠이, Popeye the Sailor Man]라는 독립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만들어 뽀빠이를 주인공으로 데뷔시킨다.
뽀빠이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그것을 이겨내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그를 사랑하는 올리브 오일, 그의 연적이자 영원한 맞수 부르터스가 등장한다. 뽀빠이는 위기에 처했을 때 시금치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시금치는 칼로리가 거의 없어 실제로 힘을 쓰는 데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뽀빠이는 언제나 시금치를 먹고 힘을 얻었고 그 덕분에 1930년대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량이 30%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에 감격한 텍사스주의 시금치 재배 농부들은 뽀빠이의 동상까지 세워주기도 했다.
➡️1990년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 개막(~10월 7일)
➡️1986년스톡홀름 협약 조인
➡️1983년대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2년대처 영국 수상 중국 방문
➡️1982년한국, 서독과 재정협력협정 서명
➡️1982년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회, 83년도 연차총회 서울개최 의결
➡️1981년과기처, 10억원 규모의 기능장려기금을 마련.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에 장려금 지급하기로
➡️1981년한국-코스타리카,
입국사증면제 합의
➡️1980년이란-이라크전(戰) 발발
➡️1980년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 취임
➡️1977년정부, 소비자보호 기본법안 마련
➡️1975년주민등록증 갱신 발급사무 시작
➡️1975년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1971년판문점서 남북직통전화 개통
➡️1969년멕시코의 대통령
(1958-64) 로페스 마테오스 사망
➡️1966년이병철 삼성그룹회장,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의 은퇴 발표
▶️1966년 9월 22일
정기국회때 국회의원 김두한이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항의로 정일권 국무총리 이하 국회의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이른바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터졌습니다.
➡️1965년중앙일보 창간
➡️1964년프랑스, 신군비 5개년계획 발표
➡️1964년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
(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1960년민주당 구파, 분당 선언
➡️1955년충주비료공장 기공
➡️1950년미국 제트 전투기,
F84 첫 대서양무착륙횡단 성공
➡️1949년국회,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1948년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ㆍ공포
대한민국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특별행위처벌법을 공포했습니다.
➡️1947년일본-소련 무역협정 체결
➡️1942년미국의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 랄프 아담 크램 사망
➡️1941년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37년국민당,
중국의 국공합작 선언서를 공포
➡️1919년조선미곡주식회사 설치령 공포
➡️1914년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 사망
➡️1911년44세의 사이 영,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완봉
➡️1908년영화감독 김유영 출생
➡️1905년시인 이산 김광섭 출생
▶️1869년 9월 22일
독일 작곡자 리하르트 바그너가 지은 니벨룽겐의 반지의 4개 오페라의 첫째인 라인의 황금이 뮌헨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1862년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 노예해방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주의 연방 조기복귀였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을 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1792년프랑스 국민공회, 왕정 폐지하고 공화정 선포
▶️1503년피우스 3세 교황에 선출
https://youtu.be/IOGqlnTbBcM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편집 그레이스
첫댓글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역사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감사합니다 ~영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