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도 약 590만t(600조원) 규모 리튬광산 발견 세계 2위 생산국
인도에서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로 사용되는 리튬이 처음 발견됐다. 추정 매장량 590만t 기준으로 보면 단숨에 세계 2위의 ‘리튬 강국’에 올라설 수 있는 규모다.
현지 지질조사연구소가 전날 북부 잠무·카슈미르의 레아시 지역에 590만t(추정치)의 리튬이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질조사연구소는 “인도에서 리튬 매장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리튬은 전기차를 비롯해 휴대전화·노트북 등 각종 전자기기 배터리의 핵심 소재다.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은 현재 리튬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을 펼치고 있다. JP모간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들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따라 당장 내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리튬 공급 부족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얀 석유’로도 불리는 리튬의 t당 가격은 1억원을 넘긴 상태다. 인도에서 매장이 확인된 리튬 590만t이 모두 사용 가능하다고 가정할 경우, 그 현재 가치만 600조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2022년 쿠알라룸푸르에서 타와우로 향하는 여객기 기내 뱀이 출현해 회항
2020년 한국영화 기생충 오스카 영화 아카데미 4관왕 수상
2019년 방탄소년단(BTS) 한국인 최초로 미국 그래미상 시상자로 참가
2018년 문재인 대통령 북한 고위급대표단 면담, 김여정 특사 ‘대통령 방북초청 친서’ 전달.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첫 경기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선언
2012년 물감 제조 50년… 전영탁 알파색채 회장 별세
전영탁(93) 알파색채 회장이 10일 오전 10시 12분 별세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주오(中央)대를 졸업하고 1962년 알파색채를 창업해 50년간 물감 제조에 힘을 쏟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국산 물감이 없었고, 일본 물감이 미술계를 휩쓸고 있었다. 전 회장은 1965년 '알파 포스터 칼라' 물감을 자체 개발해 대히트를 쳤다. 이 제품은 품질이 일제 못지않은 데다 예쁜 유리병에 담겨 있어 고급스럽고 화려한 느낌을 줬다. 1960년대 후반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미술 시간에 '알파 포스터 칼라'를 쓰는 학생들을 부러워했던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다.
전 회장은 1969년 국내 최초로 전문가용 포스터 물감 '알파 700'을 출시했다. 700번의 실험 끝에 탄생한 제품이라는 뜻이다. 이후에도 전 회장이 내놓은 제품은 '국내 최초' 기록을 이어갔다. 전문가용 수채화물감(1975년), 아크릴칼라(1981년), 마커 펜(1985년), 전문가용 동양화채색(2001년), 전문가용 파스텔(2005년) 등이 대표적이다.
전 회장은 한국 미술재료의 국산화와 세계화에 앞장선 공로로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수상했으며 영흥장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0년 김빛내리 서울대 중견 석좌교수 '셀' 편집위원 선임
2010년 2월 10일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41) 교수가 세계적인 생명과학 학술지 '셀(Cell)'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됐다.
서울대는 '셀'이 지난달 한국의 김빛내리 교수를 포함한 학자 9명을 새 편집위원(editorial board)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셀'은 '네이처(Nature)', '사이언스(Science)'와 함께 세계 3대 과학 학술지로 꼽힌다. 셀의 한국인 편집위원은 지난해 임명된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하택집(42) 교수에 이어 김 교수가 2번째다. '셀'은 마이크로 RNA(세포에서 유전자 기능을 조절하는 물질)를 연구해 국제학술지(SCI급)에 49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국제적인 논문에서 5200회 이상 인용된 김 교수 연구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앞으로 '셀'에 제출된 논문을 심사하고 과학기술 연구분야에 자문을 하게 된다.
현재 '셀' 편집위원회에는 2004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리처드 액셀(Richard Axel)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를 포함한 세계 석학 116명이 참여하고 있다.
한편, 김 교수는 2010년 1월 29일 열린 서울대 인사위원회에서 현택환(46) 화학생물공학부 교수와 함께 서울대 첫 '중견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서울대는 두 교수의 강의부담을 줄여주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한편 교수아파트를 무상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2010년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중국에 0:3으로 참패를 당함
(이 사건으로 32년 동안 이어져오던 공한증이 막을 내렸다.)
2009년 제과점 여주인 납치사건
2009년 2월 10일 발생한 제과점 여주인 납치사건이 경찰의 위조지폐를 사용한 함정수사 끝에 인질을 생환시키며 막을 내렸다.
10일 밤 11시30분쯤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는 A(여·39)씨의 제과점에 모자와 흰색 마스크를 쓴 남성 2명이 들어와 이 중 한 명은 A씨를 제압하고, 다른 한 명은 CCTV에 테이프를 붙여 화면을 가렸다. 계산대에서 현금 80만원을 챙긴 이들은 승용차에 A씨를 태워 달아났다.
이후 납치범들은 A씨의 휴대전화를 사용해서 현금 7000만원을 요구하며 남편을 협박했다. 납치범들은 11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금품을 요구하는 전화를 네 번 더 걸었다. 범인들의 통화지점은 ‘서초동→성산대교 인근→망원동→가산동’으로 계속 바뀌었다.
경찰은 A씨의 남편에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연락하라”고 시켰다. 납치범들은 다섯 번째 협박전화에서 오후 2시쯤 성산대교 남단 노들길 인공폭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A씨의 남편은 11일 오후 2시쯤 형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접선 장소로 나갔다. 경찰이 준비해준 골프 옷가방에는 위조지폐 7000장이 들어 있었고 바닥에 위치추적장치가 달려 있었다.
납치범은 250㏄ 중국산 오토바이를 탄 채 나타나 가방만 낚아채 달아났으며 경찰은 오토바이 4대와 승용차6대, 영업용 택시 2대로 추격했으나 검거에 실패했다.
경찰은 오후 3시 55분쯤 서울 구로구에서 빈 가방만 수거했다.
납치범들은 오후 6시25분쯤 경기도 광명시 도로변에 A씨를 풀어줬다.
납치 19시간 만이었다.
이후 경찰은 피해자가 “체어맨 트렁크에 갇혀 있었다”고 진술한 것을 토대로 이 차를 찾기 시작, 용의 차량 1만1280대를 분석해 번호판을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이 번호판이 심모(28·무직·절도 등 전과 17범)씨의 프라이드 번호판임을 확인하고 13일, 심씨가 머물던 고시텔을 덮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심씨는 “우리가 받은 돈이 위폐란 사실은 TV 뉴스를 보고 알았고, 위폐는 정씨가 다 가져갔다”고 진술했으며 달아난 공범 정모(32·무직·전과 6범)씨는 수배중이다. 이들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만나 알게 된 ‘구치소 동기’라고 경찰은 밝혔다.
한편, 경찰이 사용한 위폐는 금품을 요구하는 납치 사건에 쓰려고 경찰이 자체 제작해 보유하고 있는 ‘수사용 위폐’다. 2005년 처음 만들었고, 실제 범인에게 건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의 위폐 7000장은 진짜 돈보다 1~2㎜쯤 크고 홀로그램도 금속성이 아닌 검은색이며 일련번호(EC1195348A)도 모두 똑같다.
2008년 숭례문, 방화로 전소
2008년 2월 10일 밤 11시 30분쯤,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4시간 만에 숭례문 2층 누각이 불에 타 완전 붕괴했다.
소방 당국은 화재 발생 직후 진압에 나서 화재 발생 2시간쯤 뒤인 오후 10시 30분 화재를 완전 진압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그 시각 2층 현판의 5m 안쪽 지점에서 다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해 숭례문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며 잿더미로 변했다.
국보 1호 문화재라는 이유로 소방 당국이 적극적으로 화재 진압을 시도하지 않아 화재가 확산되었다. 또한 문화재 내부에 소방 시설 설치 규정이 마련되어있지 않아, 숭례문 내부에는 화재에 대비한 스프링클러나 화재경보장치 등 화재 초기 진압 설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한편 숭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혐의로 구속 기소된 채모(당시 70세) 노인은 2006년 창경궁에 불을 낸 후 집행유예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채모 노인은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2008년 짐바브웨에 콜레라 창궐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창궐하는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 지금까지 1만6141명이 발병해 775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유엔이 2008년 12월 10일 밝혔다.
짐바브웨에서 콜레라는 보건의료 체제의 붕괴와 깨끗한 식수 부족으로 인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최신 자료에 따르면 콜레라 사망자는 전날 보다 거의 200명이 늘어났다. 앞서 유엔은 짐바브웨에서 1만3960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중 589명이 숨졌다고 보고했다. 짐바브웨 정부는 콜레라가 진정됐다고 주장하나 구호기관들은 앞으로 비가 오면 병과 굶주림에 시달려온 주민 사이에 콜레라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경고했다. 짐바브웨의 콜레라 사태는 수백명의 콜레라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짐바브웨를 떠나면서 인접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보츠와나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7년 탤런트 정다빈 숨진 채 발견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정다빈(27.본명 정혜선)씨가 2007년 2월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10일 새벽까지 청담동 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밤 3시20분쯤 남자친구 이모(22)씨의 집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 L빌라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날 오전 7시50분 정씨가 화장실에서 수건걸이에 목욕용 타월로 목을 맨 채 숨져 있는 것을 이씨가 발견, 신고해왔다”고 밝혔다.
경찰은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외상 흔적이 없고, 최근 정씨가 전 소속사와의 법적 분쟁 과정에서 친한 매니저가 구속돼 많이 힘들어했다는 유족측 증언에 따라 사인은 일단 자살로 추정한다”고 했다.
2005년 극작가 아서 밀러 타계
2005년 2월 10일, 극작가 아서 밀러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밀러는 대공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접시를 닦고 부두의 하역노동자로 일하며 혹독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경험으로 밀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배웠고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밀러는 ‘매카시즘 광풍’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갖은 모욕과 경멸을 받으며 한 순간에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세일럼의 마녀재판(1692년)을 소재로 ‘크루서블(1953년)’을 발표하며 매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결국 브뤼셀에서 개막된 ‘크루서블’ 공연 참가도 저지당한 채 ‘빨갱이’를 색출하기 위한 미 의회의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당해야했다.
하지만 밀러의 연극 작품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56년 6월 29일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이었다. 당시 신혼여행을 위해 여권을 신청했지만 공산주의 운동을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 밀러가 국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등 여러가지로 화제가 된 결혼이었다. 1962년 먼로가 자살하자 밀러는 그녀를 모델로 한 연극 ‘전락’을 발표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1999년 YWCA 이끈 여성계 원로 손인실 여사 별세
대한적십자사 부회장과 대한 YWCA연합회 회장을 지낸 손인실 여사가 1999년 2월 10일 지병으로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손여사는 평생을 여성 운동과 시민 운동에 헌신한 여성계 원로다. 1935년 이화여전에 입학하면서 인연을 맺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에 평생 봉사해온 그는 이사와 실행위원, 연합회 회장, 명예 연합위원까지 지냈다.
학생 시절 스케이트 선수로도 이름날린 그는 훤칠한 인물과 활달한 성격에,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합리적 일처리로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여성 운동 일선에서 존경받아왔다.
1917년 기독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그곳서 자랐다. 정동제일교회 담임 손정도 목사가 아버지. 대한 YWCA 활동 외에도 재건 국민운동본부 중앙 부녀국장(63∼64), 범여성 가족법 개정촉진위원회 부회장(73∼78) 소비자보호단체 협의회 회장(80∼82)을 지내며 시민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96년 서울대공원, 희귀동물 흰코뿔소 국내 첫 출산
1996년 구자춘 前 내무부 장관 별세
자민련 부총재인 구자춘 의원(64)이 1996년 2월 10일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구의원은 3-4공화국에서 행정 요직을 두루 거친 화려한 경력의 정치인이었다.
경북 달성 출신으로 대구사범을 나와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 군에 입대, 미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몸담았다. 5·16 당시 포병 대대장으로 혁명주체의 일원으로 참여, 혁명정부에서 충남전남도경국장을 거친 뒤 1963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어 1980년까지 서울시경국장 제주지사 수산청장 경북지사 서울시장 내무장관 등 요직을 꾸준히 역임했다. 1980년 이후 정치권 바깥에 머무르기도 했으나, 13대에 경북 달성고령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정계 활동을 재개했다.
14대에는 민자당 후보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참여, 부총재를 맡았다. 최근 15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 지역구 활동에 매달려왔다.
1996년 농업진흥청, `컬러 감자` 개발
1995년 핵이식 기법 복제우(牛) 첫 탄생
핵이식 기법에 의한 복제 젖소 송아지가 1995년 2월 1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황우석교수팀은 이날 오전 경기도 이천군 달성목장에서 사육중인 핵이식 대리모 젖소 1백여두 중 한마리가 복제송아지를 출산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핵이식 기법이란 우량종 암컷의 수정란에서 분열된 여러개의 할구를 분리해 떼어낸 뒤 각각 핵이 없는 난자와 인공적으로 결합, 동일한 우량형질을 갖는 여러마리의 복제동물을 생산하게 하는 유전자 조작기술이다.
어미소의 유전형질은 분리된 할구속에 포함돼 전달되므로 이론적으로는 분할된 할구의 수에 따라 수백마리 이상의 복제동물을 생산할 수 있다. 연구팀은 "전량 외국에서 수입하는 우량우의 수정란은 개당 1백만~4백만원을 호가한다"며 "핵이식란은 생산단가가 2만원 선에 그쳐 수입대체효과도 클 것"으로 전망했었다.
1992년 한국-우크라이나 국교 수립
1992년 소설 ‘뿌리’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 사망
소설 ‘뿌리’와 ‘말콤X’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70)가 1992년 2월 10일 급환으로 미국 시애틀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아 서부아프리카 감비아의 한 마을에 대한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를 토대로 소설 ‘뿌리’0를 완성, 197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나중에 12시간짜리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방영됐는데 당시로는 미국 텔레비전 사상 최대기록인 1백30만명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선조들의 일상생활을 섬세한 정서와 풍부한 표현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인종들에게 뿌리찾기의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됐다.
1921년 8월 11일 뉴욕주 이타카에서 출생한 헤일리는 서부 테네시의 헤닝시에서 성장했다. 성장과정에서 그는 외조모 등 인척들이 전해주는 자신의 조상이야기를 듣고 나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20여년 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1959년부터 잡지사 투고를 통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흑인 과격단체의 비판에도 불구, 그의 유려하고 섬세한 필치는 미 흑인문학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91년 마이크 타이슨, 인디애나주 배심서 강간죄 유죄 평결
1990년 인도네시아 켈루드화산 폭발
1987년 미국공중위생국장관, 에이즈확산 막기 위해 콘돔 TV광고 승인
1984년 한국-쿠웨이트, 통산증진 및 경제기술 협력 협정 체결
1982년 경로우대제 실시
1981년 이라크, 이란에 평화협상 제의
1977년 박정희 대통령 임시행정수도 건설구상 발표
1977년 2월10일,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이전·건설하는 문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발표하자 서울 시민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착잡함이 교차했다. 교통난 해소를 반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사시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적의 지상포화 사정거리 안에 수도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 전국토의 0.63% 면적에 남한 인구의 20%(725만명)가 집중된 인구과밀이 행정수도 이전의 이유였다.
서울에서 고속도로·전철로 1시간~1시간 반에 닿을 수 있는 지점이 후보지 요건이었다. 그러나 후보지로 거명된 지역에서 투기 조짐이 일고 언론도 연일 관련기사를 쏟아내자 박 대통령은 3월7일 “10년 혹은 그 이상 걸릴 것” “서두르지 않겠다”며 분위기를 식혔다. 한편으로는 차분하게 수도이전을 준비해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마련, 국회에 제출(6월20일)했고 후보지도 내정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충남 공주시 장기면이 후보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경 10km 부지에 인구 50만명 규모 도시가 당시의 계획. 설계도면·조감도·5층짜리 종합청사 모형까지 완성된 상태였으나 박 대통령 서거로 유야무야됐다. 1981년 새 정부가 임시행정수도 건설계획을 백지화한다고 발표, 수도 이전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1974년 극작가 유치진 사망
1970년 여성교육가 김활란 사망
1969년 고급담배 `청자` 시판개시
1965년 춘천댐 수력발전소 준공
춘천호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과 서면에 속하며 춘천시내에서 약 12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1965년 2월에 준공된 춘천댐으로 생겨난 인공호수로 상류는 파로호 밑까지 이어진다. 북한강의 본줄기를 막아 만들어진 높이 40m길이 453m의 콘크리트댐인 춘천댐은 신북면 용산리와 서면 오월리 사이 북한강 본류에 댐을 축조하여 그 저수의 낙차를 이용하는 수력발전소이며 발전과 수위조절에만 쓰일 뿐 농업 용수로는 쓰이지 않는다. 한국전력이 시공 감독한 이 발전소는 공사비 26억 7천여만원, 공사 연인원수 209만여명, 담수량 1억5천만㎥ 발전량 57,600KW, 댐의 높이 40여m, 매몰지역 용지매수 260여만평, 건물 1,400여동이며 칼푸링식 일본제 발전기 2대로 57,600KW의 발전량을 갖추고 있다
춘천호 호수면의 수위는 해발 130m로 의암호의 수위보다는 31m 높기 때문에 이 호수에 유입되는 수계유역 103m 이하의 농경지가 수몰되었다.
1962년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 2월 10일 5·16군사정변 직후 전국토의 유기적·효과적 개발을 도모함과 동시에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도모하기 위해 국토건설단이 창단됐다. 이 건설단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행에 따른 장기개발사업에 필요한 집단노동력을 운영하면서 군 미필자를 일정기간의 노력 봉사 후 병역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1석 2조의 정책이었다.
정부가 지난 1961년 12월 2일 공포한 국토건설단설치법은 전문18조 부칙으로 되어있다. 이 법에 의하면 국토건설단은 국토건설총장을 단장으로 동청에 설치하며 기간요원과 건설원으로 구성한다. 신분이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기간요원은 예비역중 지원자중에서 임명하며, 건설원은 28세이상의 방역미필자와 징병적령자로서 징집면제자 등에서 편입하기로 되어있는데 이들 건설요원의 근무연한은 18개월이며 지원자에 한해서는 12개월로 되어있다.
이들이 투입된 건설현장은 댐공사, 철도 부설 등 사회 기간산업 분야였다. 그러나 노동 경험이 없던 건설단원들의 공사 진척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취지는 좋았지만 투자비용 대 효과면에서 큰 이익을 볼 수 없었다. 이렇듯 운영 효율상의 문제로 같은 해 11월 30일 정부 방침에 따라 전원 귀향하고 건설단도 자연 해체됐다.
1962년 소련 영공에서 격추당한 미국 U-2기 조종사 개리 파워스와 소련 거물 스파이 루돌프 아벨, 베를린 그리니케다리에서 맞교환
1958년 튀니지, 프랑스 보복으로 프랑스 군사비행기 착륙 저지
1953년 구주 석탄광업공동시장 발족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으로 불리며 6.25. 전쟁중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국군이 작전을 펼치나 빨치산 유격전술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오익균(吳益均) 연대장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이틀 간에 걸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다. 그리고,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산(朴山) 총살했다.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3월 29일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3부 장관이 사임하고 김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은 국회의 결의로 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재판 결과 오익균 대령, 한동석 소령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1951년 거제도 반공포로 999명 구국 충성으로 혈서 진정. 국군, 서울진입
1949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초연
미국의 젊은 극작가 아서 밀러의 세 번째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이 뉴욕 모로스코 극장에서 1949년 2월 10일 그 첫 막을 올렸다. 주인공 윌리 로만 역은 리 콥이, 연출은 엘리아 카잔이 맡았다. 이 작품은 주인공 윌리 로만이 30년간 오직 ‘세일즈맨’으로 ‘성실’하게 살아오다 삶에 지치고 자식으로부터 배신당하게 된 후 보험금을 가족에게 주는 최후의 선물로 남기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세일즈맨...”은 그 내용에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 미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 연출면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늙고 피로에 지친 그의 뇌리에 쉴새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을 현실과 교착시켜 무대에 표현한 극작술은 가히 독창적이라 할 만했다. 극히 현대적이고 미국적인 소재를 보편적인 비극으로 승화시킨 이 걸작은 2년간 무려 742회나 공연됐으며 퓰리처상, 비평가연맹상 등이 수여됐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연극계 최대 걸작의 하나’ 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 작품과 함께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으로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1949년 한민당, 민주국민당으로 개편
1948년 김구, '3천만 동포에 읍소한다'는 남한 단정 수립 반대 성명 발표
1947년 안재홍 초대 민정장관에 취임
1947년 2월 10일 미군은 미군정에서 남조선과도정부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단계로 안재홍을 최초의 민정장관에 임명했다. 취임식은 하지 중장, 러치 미군정장관 등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미군정청 광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좌우 합작파인 안재홍이 민정장관으로 취임한 데서도 드러나듯, 이 과도 정부는 미국이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남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좌우합작운동의 열매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11일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해 순수한 군정을 실시하다가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넘겨주는 첫 단계로 이날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6월 3일 미군정은 한국의 과도적 집행부로 `남조선과도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군정 법령 제141호를 통해서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의 입법·사법·행정기관을 통칭한 이름이었다.
1947년 파리서 5개국 평화조약 조인
1947년 월북 시인 임화, 시집 `찬가`를 백양사에서 첫 춮판
1939년 로마교황 비오2세 사망
1932년 독립운동가 양기하 선생 순국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임정요인 하산 양기하 선생이 1932년 2월 10일 사망했다. 1878년 충남 논산태생인 양기하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공주군수로 재직하다 1910년 만주로 망명、을사조약이후 강원도 의병장 유인석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진력했다.
양기하 선생은 1919년 서간도에서 항일 무장 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을 결성해 반일활동을 벌였다. 이후 한국노병회、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를 거쳐 1929년 조선혁명당 정치부장으로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는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다 1932년 2월 중국 요령성 관전현에서 일본경찰과 격전끝에 순국했다. 정부는 1995년 6월 양기하선생 유해를 중국 요령성에서 봉환, 동작동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장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27년 조선일보사, 월간지 `신조선` 창간
1923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 사망
X선을 발견한 빌헤름 콘라드 뢴트겐이 1923년 2월 10일 71세의 나이로 뮌헨에서 사망했다.
뢴트겐은 1869년 취리히공과대학 졸업 후 A.쿤트의 조수가 되어 1872년 그를 따라 뷔르츠부르크대학으로 옮겼다가 1874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 강사, 1875년 호켄하임농과대학 수학 ·물리학 교수, 1876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 초청교수, 1879년 기센대학 물리학 교수 ·물리연구소 소장을 냈으며, 1888년 뷔르츠부르크대학 물리학 교수로 돌아왔다가 1900년 뮌헨대학 교수가 됐다.
뢴트겐은 1895년 바바리아에 있는 브르소브루크대학에 있을 당시 음극선관에서 방출되는 새로운 방사선을 발견했다. 그는 이 방사선의 성질을 잘 몰랐고 X는 수학적으로 미지의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므로 그것을 X선으로 명명했다. 사람 손의 뼈를 보여주는 첫번째 X선 사진은 몇주 후 찍혀졌으며, 뢴트겐의 발견은 급속도로 의학에 이용되어서 질병을 진단하고 몸속의 물질들을 탐지했다. 1901년 그의 업적을 기리며 첫번째 노벨물리학상이 그에게 수여됐다.
1913년 일본 내각불신임안으로 동경서 폭동발생
1912년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 조지프 리스터 사망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 - 장 앙리 뒤낭 (Jean Henri Dunant)
장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 1828년 5월 8일 ~ 1910년 10월 30일)은 국제적십자의 창시자이다. 앙리 뒤낭은 1828년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 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깔뱅을 존경하는 개신교신자였다.
앙리의 부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로 아버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사회운동 및 경제적 독립 개신교 전통에서 자란 앙리 뒤낭은 나눔의 실천을 중시하는 개혁교회(Reformed)으로 전향하였다.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힘썼으며,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YMCA(기독교 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활동하는 한계를 발견하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회사(製粉會社)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적십자 창립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활동에 참가했다.
이때의 경험은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렸는데,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말년 적십자활동을 통해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하여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였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하였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초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며, 1864년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98년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출생
1898년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 출생
1894년 영국 정치가 맥밀런 출생
1890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출생
1837년 러시아 작가 푸시킨 사망
1775년 영국 수필가 찰스 램 출생
1763년 영국-프랑스 파리조약 체결로 북미지역이 영국에 귀속
북아메리카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간의 7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파리조약이 1763년 2월10일 체결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대한 패권을 놓고 이른바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영국이 미국 북동부에 식민지를 확보하고 서부로 확장하려는 시기에 발생했다. 오하이오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영국출신의 식민지인들과 서부 일대에서 인디언과 모피 거래를 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식민지인들과의 이해가 대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식민지보호를 위해 해군을 파견하고, 프랑스도 인디언과 제휴하여 이에 대항하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점차 전쟁상태로 돌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했으나 1757년말경부터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의 활기찬 지휘력 등 여러 가지 요인에 힘입어 영국이 잇따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고, 퀘벡 전투에서는 양국 사령관 제임스 울프와 몽칼름 후작이 치명상을 입었다.
결국 두 나라와 스페인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파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대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으며, 영국은 캐나다와 인도에 대한 독점적인 우위권을 확보하고 스페인으로부터도 플로리다를 얻었다. 스페인은 그대신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게 됐다.
1755년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 사망
1487년(조선 성종 18) 신찬 동국여지승람 간행
1363년 명재상 황희 태어남
1007년(고려 목종 10) 개성 진관사 9층탑 완성
676년(신라 문무왕 16) 부석사 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