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자수교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61, 통인동 1-2)
종로구 옥인동 21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지금의 통인동, 옥인동, 효자동, 창성동이 서로 맞닿아 네거리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 자수교(慈壽橋, 자수궁교)
조선시대 자수궁이 위치해 있던 곳이므로 다리 이름을 자수교라고 하였다
자수궁교 혹은 자수궁다리라고도 불렀다
<한양도성도>에는 수궁교(壽宮橋)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자시궁교(資始宮橋) 라고도 하였다
다리의 모양은 제일 중앙에 두 개의 돌기둥을 박아 교각을 삼고 그 위에 장대석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으며 다리 양옆에는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1927년 백운동천 암거공사로 인하여 소멸되었다
자교교회(紫橋敎會)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56, 창성동 156)
1898년 10월 2일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캠벨 (Josephine Campbell)에 의해 설립된 배화학당내 기도처에서 시작한 자골교회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절에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교인 약 70명이 모여 교회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그 역시적 첫발을 내딛는다
그후 1년이 지나 장소가 협소할 정도로 교인이 늘어났 고 학생수도 증가하자 캠벨부인은 미국 친구들의 원조 를 받아 학당기도실 자리에 벽돌 양옥 2층을 건축한 후 후원자들의 이름을 따서 '루이서 워커 기념예배당 Louise Walker Chapel)'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학당기도실은 <자골교회 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후 자골교회 예배당은 1904년 2월에 있었던 부흥회를 시작으로 신도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자 배화학당으로부터 독립하여 1906년 4월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던 한옥을 구입하여 이전하였고, 교회 이름을 <자교교회>로 바꾸었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마을 일대를 가리켜 옛부터 '자핫골', 또는 '자골' 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흐르는 하천을 건너는 자수교 (慈壽橋) 앞에 있다 하여 자하골의 '자'와 자수교의 '교'자를 취하여 교회명칭을 <자수교회>라 정하게 되었다
현재의 자교교회 건물은 미국의 외국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모금된 선교비로 1922년 봄, 종로구 창성동 156번지(195평)에 기존에 있던 한옥을 철거 하고 그 자리에 연화조 양옥 2층(82평)을 건축하여 2층은 예배실로 1층은 교육관으로 사용하였다
이완용 집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67-9, 옥인동 19-10)
이완용 저택은 전형적인 조선 정승의 99칸짜리 기와집이었다
이완용은 그 한 모퉁이에 1913년 4월 2층짜리 양옥 을 짓고 1926년 2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 양옥은 해방 후 김수임이 유명했던 조선공산당의 제2인자 이강국과 살던 곳이었다
그녀는 미 점령군사령부 특별수사기관의 최고 책임자 인 베어드 대령과도 동거했다
공산당 간첩이었던 김수임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체포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완용 사후(1926년 2월 11일) 이 집은 둘째아들 항구와 장손 병길에게 상속됐지만, 해방 수 미군정은 적산으로 징발해 군속에게 나눠줬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필지로 분할됐으며 그 분할된 필지에 옥인교회, 길담서원, 국민은행(청운동지점), 종로보건소 등 수 많은 시설 및 가옥이 건축되었다
♤ 집터와 저택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의 저택을 건축당시(1913년)의 집으로 알고 있는데, 옥인동 19-10번지 부동산 등기부를 살펴보면, 더욱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등기부에 따르면, 건물 소유자 윤 아무개 씨는 2003년 11월 4일 ‘소유권 보존등기’를 했다
소유권 보존등기는 부동산에 관해 최초로 행하여지는 등기로, 일반적으로 신축한 건물에 대해 소유권 보존 등기를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종로구청 관계자도 "단독주택으로 개인 소유의 집이고, 건축물대장에 사용승인일은 2003년이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건축물대장상 신축건물엔 구청의 ‘사용승인’ 절차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집터는 맞지만 약 100년 전 이완용의 옥인동 저택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2003년에 지은 신축 건물이다
판교신도시가 생기면서 운중동과 하산운동은 산운 마을로, 판교동은 판교마을로, 삼평동은 붓들마을로, 백현동은 백현마을로 구분되어 현재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백현마을에 이완용이 태어난 생가가 있었다
이완용의 집터(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6-1)는 이모씨가 살다가 판교택지개발사업으로 보상을 받고 떠났으며 그 후 수용되어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이완용 묘지
이완용은 이미 생전에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조선 최고의 지관들을 동원해 명당자리를 물색한 끝에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에 있는 선인봉 중턱의 첩첩 산중을 영면의 장소로 택했다
이완용 묘소는 그의 종손 이석형에 의해 파헤쳐져 시신은 화장 산골되었고, 관뚜껑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같은 우봉 이씨인 역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불태워졌다
유골을 화장시킨 후 인근 장암천에 뿌려버리고 현재는 채석장으로 바뀌어 이완용의 묘는 없어졌다
♤ 김수임(金壽任)
1911년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11살 나이에 민며느리로 팔려나가야 하는 가난 속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4년 뒤 야반도주했고, 이때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며 결국 1932년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세브란스 치과과장 비서 겸 통역으로 일했으며, 모윤숙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줄줄 외는 기독교 신자" "아주 명랑하고 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였다
이랬던 그녀가 미군정 헌병대 사령관의 동거인이 되고 모윤숙의 낙랑클럽에 참가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50년 4월 21일, 한국 전쟁 발발 두 달을 남겨놓은 시기에 김창룡에 의해 체포돼 오제도 검사에 의해 간첩혐의로 기소됐다
그가 체포된 시기는 김삼룡·이주하가 체포된 직후 였고, 김수임 체포 뒤에는 바로 북로당에서 파견한 성시백도 함께 체포됐다
이때 그녀에게 적용된 혐의는 베어드 대령을 통해 취득한 정보를 남로당에 넘겨줬고, 또 1942년 알게 된 이강국을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월북하게 했다는 것 등 총 13가지 혐의다
이강국은 북에서 초대 외무상을 했을 정도의 거물이었 다
그녀는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정에 넘겨졌고, 3일 연속 재판이 열렸으며, 마지막 날인 6월 16일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불과 두 달 만에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단짝 모윤숙은 김창룡이 김수임 을 체포하도록 돕는다
천하의 특무대장 김창룡도, 최고의 공안검사 오제도도 미군헌병대사령관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모윤숙의 자서전에는 "언니, 오늘 언니 생일인데 미역국이나 같이 먹어요" 하면서 김수임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모윤숙의 이력으로 봐서 그 반대 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모윤숙·노천명은 3일 연속해서 재판을 방청하 러 나왔다
하지만 김수임의 사형선고로 이들과의 인연이 끝났다
그리고 사형선고 9일 뒤 전쟁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3일 뒤 급히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운 점, 김수임이 들것에 실려와 재판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고문과 강압수사 흔적 그리고 그에게 적용된 국방경비 법 자체가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하지만 전쟁이란 폭풍 속에 이미 당사자는 세상에 없었고, 전쟁 후에도 전후 복구 등으로 그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졌다
오히려 전후 남북의 이념 대립은 더욱 명확해지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는 속았다>(1964), <김수임의 일생>(1974), <나, 김수임>(1997) 등 영화와 연극으 로 제작됐다
상촌재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2-11, 옥인동 19-16)
경복궁 서쪽 지역 세종마을의 옛 명칭인 '웃대'(상촌,上村)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 전통한옥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며, 지상 1층 연면적 138.55㎡ 규모로 별채, 사랑채, 안채 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남향의 대청을 가지는 ㄱ자집으로 설계되었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가로와 필지에 대응하도록 축을 틀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랑채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기술인 온톨의 우수성 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온돌 상부를 투명한 보행 바닥으로 조성하여 상촌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온돌 내부를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고, 겨울철에는 직접 장작과 숯을 가지고 온돌에 불을 지피며 온돌문화를 가장 실감 나게 체험 할 수 있는공간이다
별채는 세종대왕 탄신지인 세종마을의 역사성을 고려해 한글과 관련된 전시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목적과 원리, 세계 석학들의 한글 예찬을 담은 영상 등을 전시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자수궁 터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68, 옥인동 45-1)
이곳은 조선초기 5부학당 중 북학(北學)이 있던 곳이었으며, 광해군 때 그 자리에 자수궁을 지었다가 뒤에 '자수원(慈壽院)'으로 고치고, 후궁이나 궁녀들 중에서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을 수용했다
1909년(융희 3)에 늦여름에 호열자(콜레라)가 유행하자 격리병원으로 '순화병원'을 설치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염병환자 격리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시립중부병원으로 바뀌었다가 1977년 시립중부 병원과 남부병원을 통합하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으로 이전하여 '서울의료원' 이 되었고, 서울의료원은 2011년 서울 중랑구 신내동으로 옮겼다
1970년대 이후 이곳에 군인아파트가 들어섰다
♤ 자수궁(慈壽宮)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태조의 7남)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이 옛 무안대군 집을 수리하고 세종의 후궁을 옮겨 살게 했다
이후 이 곳에는 역대 선대왕의 후궁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성종 때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머물면서 잠시 이름이 창수궁(昌壽宮)으로 바뀐다
이 외에도 폐비 윤씨와 단경왕후도 폐비가 된 이후 한동안 머물렀으며 인종의 후궁 정씨도 살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정기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덕궁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 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자수궁은 폐궁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이 변해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여승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 되었으며 많을 때는 최대 5천여 명의 여승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여승의 폐단이 심하다고 하여 부재학 유계의 상소를 계기로 1661년 자수원은 폐지되어 없어졌고 어린이들은 환속시켰으며 노인들은 성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
1663년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쪽에 비천당(丕闡堂)을 세우고, 또 일량재( 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 순화원(順化院, 순화병원,順化病院)
대한제국과 일본 통감부가 협약하여 설립한 피병원 (避病院:전염병환자 격리병원)으로 1908년(순종 2, 융희 2)년 7월 23일 제사친묘諸私親廟를 합사하라 는 칙명을 받들어 유비박씨의 신위가 옥동의 경우궁 으로부터 육상궁 별묘로 옮겨진 뒤 사당의 기능이 상실된 옛 경우궁(자수궁)터에 세웠는데 1909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7월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피병원은 순화원 공사 시작 1개월쯤 후인 1909년 10월 16일 폐쇄되었다
따라서 순화원은 광제원 부설 피병원의 기능을 대체 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으로도 보여진다
1911년 순화원 시설이 경성부로 이관되면서 경성 부립순화병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편 1911년 작성된「경성부시가도」(지도 14)에는 이 병원이‘경성피병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순화병원은 종전대로 전염병 환자만을 취급하였고 한의방韓醫方도 적용하였다
이후 순화병원은 한국전쟁 후 유엔군 사무실로 사용 되었다
1954년 10월 30일 제정된 서울시립병원 설립조례 에 따라 이 자리에는 1959년 서울시립 중부병원이 들어섰으며, 제10대 서울시장 장기영 재임시 (재임기간 1960년 5월 2일 ~1960년 6월 30일) 일반 병원으로 용도 변경되었다가 1977년 7월 2일 서울시립 강남병원(강남구 삼성동 68번지)이 신설될 때 통합되면서 폐원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효자동사무소, 옥인변전소, 아파트 등이 들어 서 있다
옥인동 대공분실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18-6, 옥인동 45-21)
경찰 대공분실(보안분실)의 역사는 한국민주화운동 탄압의 역사다
대공분실은 간첩과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이곳에서 수사받은 사람의 대부분은 간첩이 아니라 민주화운동가들이었다
1979년 10월 건립된 옥인동 대공분실의 정식명칭은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1대이며, 부국상사란 별칭 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경찰이 과거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했던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대공분실 보안분실 자리에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의 대규모 통합청사를 신축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옥인동을 비롯해 대신동, 장안동, 신정동 등 서울의 4곳에 흩어져 있던 대공분실을 한데 모은 통합청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완공 후 서울경찰청 자하문로별관으로 사용 중이다)
김재규 집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6, 옥인동 13-1)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현 무궁화동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살해?)한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가 살던 집터이다
2010년 재단법인 '아름다운재단'이 이곳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후 가회동 생활을 접고 2011년 이주했다
첫댓글 새해에도 멋진 발걸음 이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