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689
■ 3부 일통 천하 (12)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2장 자객 예양(豫讓) (2)
다음날 아침, 한강자(韓康子)의 밀명을 받은 단규(段規)는 진양성(晉陽城) 남쪽에 영채를 세운
위환자(魏桓子)의 군영으로 찾아갔다."저희 주군의 말씀을 전합니다."
좌우를 물리치고 나서 단규(段規)는 위환자에게 어젯밤의 일을 소상히 고했다.
위환자(魏桓子)는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나도 조씨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 일을 걱정하고 있었소.
이번 기회에 아예 흉악한 지백 놈을 없애버립시다."지백(知伯)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진양성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일까, 내일일까?'
그는 진양성(晉陽城) 안의 광경을 즐기기 위해 용산 영채 위에다 술자리를 마련했다.
"혼자 보기 아깝다. 한공과 위공을 모셔오라."
지백(知伯)은 한강자, 위환자와 더불어 진양성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시오. 저것이 진양성이오. 성벽이 3판밖에 남아있질 않소. 나는 이번 일로 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소.세상 사람들은 우리 진(晉)나라가 흥한 것이 주변으로 분수,
회수(澮水), 진수, 강수(絳水) 등이 흐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말인 것 같소.
"물은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오. 조씨(趙氏)가 물 때문에 망할 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겠소?"
말을 마친 지백(知伯)이 축배를 제안했다.
한강자와 위환자는 지백을 따라 술잔을 들고는 함께 부딪쳤다.
세 사람은 속으로 각자 소망을 빌었다.
'지씨의 번영을 위하여!'
'지씨의 멸망을 위하여!'
'지씨의 멸망을 위하여!'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품은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는 탁자 밑으로 서로 발을 건드렸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자주 의미있는 눈길을 교환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아무래도 어색했던 모양이다.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가 자기 군영으로 돌아가자 지백의 모사인 치자(絺疵)가
조용히 지백의 군막을 찾았다. 그는 애초에 이번 일을 계획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주군께서는 한씨와 위씨의 모반에 대비하십시오."지백(知伯)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아까 술자리에서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는가?""지난날 주군께선 한씨와 위씨에게 조씨의 땅을 쳐 3분의 1씩
나눠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조씨(趙氏)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한공과 위공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그런데도 그들은 오늘 몹시 심각했습니다.
이익이 눈앞에 있는데도 기뻐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 다른 계획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하하, 그대는 지금 표정만으로 저들이 나를 배신할 거라고 단정짓는 것인가?
그대의 조심이 너무 지나치구나.""웃어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제 말을 믿고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의 동태를 세밀히 살피십시오."
그러나 지백(知伯)은 여전히 치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며칠 후였다.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가 술을 가지고 지백을 찾아왔다.
지난번 술대접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였다.
두 사람을 보자 지백(知伯)은 문득 가신 치자의 말이 떠올랐다.
짐짓 표정을 굳히고 추궁하듯 물었다."두 분이 장차 변란을 일으켜 나를 칠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 돌던데, 두 분은 정말로 나를 칠 작정이오?"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는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일체의 내색을 하지 않고 동시에 되물었다.
"지공(知公)께서는 그 말을 곧이 들으십니까?""곧이 들었다면 이렇듯 두 분에게 직접 물어보겠소?
공연히 군사들을 어지럽히는 말이 나돌까 염려되어 입막음하자는 것뿐이오."
한강자(韓康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들리는 소문으로 조씨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우리 세 사람을 이간시키려고 한다더니, 과연 그것이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이는 필시 조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자가 우리 삼가(三家)를 분열시키려는 수작이 분명하오."
"한공의 말씀이 옳소. 조씨(趙氏)는 우리가 서로 의심을 품게 되면 자연히 진양성에 대한 공격을
늦추게 될 것이니, 기를 쓰고 이간지계(離間之計)를 쓰려들 것이외다.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오.
이제 곧 조씨 땅의 3분의 1을 나누어가질 터인데,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누가 그런 계책에
말려들 것이겠소?""바라건대, 지공(知公)께서는 어떠한 소문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한데, 대체 누가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지공께 말한 것이오?"
두 사람의 말에 지백(知伯)은 완전히 의심을 풀었다."실은 나의 가신 치자(絺疵)가 그 말을 들려주었소.
그러나 나는 두 분을 믿고 있기에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오히려 타일렀으니,
두 분은 더 이상 괘념치 마시오."그 날 세 사람은 여느 때보다 더 친밀하게 술을 마시며 즐겼다.
한강자와 위환자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 치자(絺疵)가 군막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주군께선 어찌하여 제가 두 일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말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러주셨습니까?"
지백(知伯)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대는 내가 그 말을 한 줄 어떻게 알았는가?"
"우연히 영문 근처에서 한공(韓公)과 위공(魏公)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곁눈질로 저를 흘겨보더니
황망히 병차를 타고 달아나듯 가버렸습니다.그들이 제 속마음을 모르고서야 어찌 저를 피하겠습니까?
그래서 주공께서 제 말을 그들에게 한 줄 알았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한순간에 갈라지는 것인가. 이 정도라면 치자의 말을 들을 법도 했다.
더욱이 그는 지씨의 여러 가신 중에서 가장 책략이 출중한 모사(謀士)가 아닌가.
그런데 지백(知伯)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르러 치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이었다.
"그 일은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말게. 증거도 없는데 의심하면 공연히 우리 삼가(三家)의
친분만 상할 뿐이네."지백으로서는 죽음의 수렁텅이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마지막 간언마저 묵살되자 치자(絺疵)는 군막을 나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아아, 지씨(知氏)의 목숨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내가 이런 주인 밑에서
충성할 까닭이 어이 있겠는가!"그 날 밤, 치자는 심한 오한증을 앓았다.물론 꾀병이었다.
다음날 치자(絺疵)가 심하게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지백(知伯)은 그를 위문한 후
강성으로 돌아가 병을 다스리게 했다.
치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레에 올라 강성(絳城)으로 가는 척하다가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이제 기회가 왔다.'치자(絺疵)의 후송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그 동안 한강자의 군막에 숨어 있던
조양자의 가신 장맹담이었다.
장맹담(張孟談)은 재빨리 한강자와 위환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후 물었다.
"두 분 장군께서는 용산(龍山) 저수지의 수문을 막고 지씨 영채가 있는 쪽 둑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움직이면 가능하오.""그렇다면 좋습니다.
두 분은 내일 밤 용산 저수지를 점령하고 둑을 무너뜨리십시오. 저는 오늘 밤 진양성(晉陽城)으로 돌아가
저의 주군께 군사를 몰고 성밖으로 나와 지씨 영채를 들이치라 말하겠습니다."
"알겠소. 기필코 성공하여 지씨(知氏)를 멸족시킵시다."
장맹담(張孟談)은 한강자와 위환자의 맹세를 받고 진양성 안으로 돌아갔다.
그간의 일을 보고하자 조양자(趙襄子)는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
- 이제 3월이 되었는데, 과연 곽산의 산신 예언이 맞아 떨어지는려는 것인가.
690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690
■ 3부 일통 천하 (13)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2장 자객 예양(豫讓) (3)
다음날이었다.날이 어두워지자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뒷 길을 통해
몰래 용산(龍山)으로 올라갔다.저수지를 지키고 있는 군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씨, 위씨의 연합군은 재빨리 습격하여 지씨(知氏)의 군사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저수지를 점령했다.어둠 속에서 한강자(韓康子)의 명이 떨어졌다."서쪽 둑을 무너뜨려라!"
어마어마한 물줄기였다.
아니 그것은 물줄기라기보다 수천 개의 바위 덩어리가 굴러떨어지는 기세라고 해야 옳았다.
쿵, 쿵, 쿵........!모든 것이 휩쓸렸다.흙은 쓸리고 나무는 뿌리째 뽑혀나갔다.
저수지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은 순식간에 산기슭을 무너뜨리고, 그 아래 주둔하고 있는 지백(知伯) 군의
영채를 향해 흘러들었다.군사들은 곤히 잠자고 있다가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았다."저수지가 무너졌다!"
초병(哨兵)이 외칠 틈도 없었다.요란한 아우성이 어둠 속에서 들끓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지백(知伯)은 잠에서 깨어났다.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세찬 물줄기 소리였다.
"무슨 일이냐?"그러나 물을 필요도 없었다.
침상에서 내려서는 순간 발이 물에 잠겼다. 물은 이미 침상까지 차 올라오고 있었다.
"못난 놈들!"지백(知伯)은 저수지를 지키는 군사들의 부주의로 저수지 물이 새어나온 것으로 짐작했다.
군막 밖의 병사들을 불러 지시했다."속히 저수지의 둑을 수리하라."
그러나 물은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불어만 갔다. 그제야 예사롭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지백(知伯)은 안색이 굳어졌다."지국(知國), 예양(豫讓)은 어디 있느냐?"
허둥거리지 말자고 속으로 자신을 타일렀으나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지백의 외침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지국(知國)과 예양(豫讓)이 그 곳에 나타났다. 뗏목을 타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뗏목 위로 올라선 지백(知伯)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조씨(趙氏)의 병사들이 저수지를 습격해 둑을 무너뜨린 듯 싶습니다."
아직 한강자와 위환자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한 지국과 예양은 그렇게 대답했다.
지백(知伯)은 물결따라 떠내려가는 뗏목 위에서 영채를 돌아보았다.
영루는 어느새 완전히 침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군량미만이 물결에 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군사들은 물 속에 잠겼다 떠올랐다 하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백은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그때였다.어디선가 북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돌아보니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의 군사들이 수십 척의 작은 배에 나누어타고 미끄러져오고 있었다.
지백(知伯))이 예양을 돌아보며 말했다."어서 저들에게로 가 물에 빠진 군사들을 구하라 전하라."
예양(豫讓)이 몸을 채 돌리기 전이었다."지백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리라!"
한강자와 위환자가 외치는 소리였다.동시에 배에 타고 있던 한씨와 위씨의 가병들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백의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쳐죽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백(知伯)은 비로소 사태를 짐작했다.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눈앞이 캄캄해왔다. 그는 뗏목 위에 주저앉아 길게 탄식했다.
"아, 내가 치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치자, 치자는 어디 있느냐? 치자를 데려오라."
미친 듯 울부짖는 지백을 예양(豫讓)이 곁에서 달랬다."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사태가 매우 급합니다. 주군께선 속히 산을 따라 달아나 진(秦)나라로 가서 군사를 청하십시오.
그 사이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막겠습니다."그 말에 지백(知伯)은 정신을 차렸다.
떠내려가는 작은 배를 하나 낚아채 그리로 옮겨탔다.지국(知國)이 지백을 호위하기로 했다.
지백(知伯)과 지국(知國)을 태운 배는 산 뒤편으로 미끄러져 겨우 물이 없는 곳에 당도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저수지의 물이 지백 군의 진영을 덮치는 때와 같이하여 진양성을 나온
조양자(趙襄子)의 수하 병사들이 용산 뒤편에 매복하고 있었을 줄이야.
지백(知伯)과 지국(知國)이 땅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수백 개의 창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하지만 조씨 군사들은 그가 지백인 줄을 알지 못했다.한 군관이 나와 외쳤다.
"지백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지백은 꾀를 쓰기로 했다.
"지백(知伯)은 뗏목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소.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만 한다면
내가 그쪽으로 안내해주겠소.""좋다."자신을 겨눈 창끝의 예리함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지백(知伯)과 지국(知國)은 재빨리 몸을 돌려 자기들이 타고 왔던 배를 향해 달렸다.
"앗, 저놈들이!"지백은 기를 쓰고 달렸다.
뒤에서 추격해오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이제 몇 걸음만 가면 배다.
그런데 하늘은 끝내 지백(知伯)을 버리기로 작정했음인가.넘어져 있는 나무 줄기에 지백의 발이 걸렸다.
지백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뜨겁게 달군 듯한
쇠꼬챙이 같은 것이 가슴 한복판을 후벼팠다."헉!"지백(知伯)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지백의 마지막이었다.진(晉)나라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지백은 이렇듯 한순간에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지백의 죽음을 목도한 지국(知國)은 더 이상 달아날 마음을 잃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지국을 사로잡은 조씨 군사들은 그제야 죽어 자빠져 있는 사람이 지백임을 알고
시체를 조양자에게로 끌고 갔다.조양자(趙襄子)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그는 지백이 죽었음에도 그의 죄목을 낱낱이 열거하여 꾸짖고는 친히 칼을 뽑아 시체의 목을 잘랐다.
그 동생 지국(知國)도 참수형에 처했다.
조양자(趙襄子)는 지백에 대해 몹시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몸뚱아리와 머리를 따로이 묻게 하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래야 저승에 가서도 살아날 수 없지 않겠는가."
지씨의 남은 군사를 이끌고 한씨와 위씨의 군사들에 대항하여 싸우던 지백의 가신 예양(豫讓)은
점점 힘이 빠졌다.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죽지않고 달아나면 다행이었다.
그때 한 군사가 달려와 예양에게 고했다."주군께서 조씨 군사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예양(豫讓)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일반 병사로 가장한 후
석실산(石室山) 쪽으로 달아났다.뿌우~!길게 소리가 울려퍼졌다.승리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였다.
동쪽 초원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조양자(趙襄子)의 눈에 그 날의 아침해는 유난히 찬란하게 비쳤다.
이제 남은 것은 뒷마무리.먼저 조양자(趙襄子)는 조씨, 한씨, 위씨의 군사들을 한곳에 집결시킨 후
무너진 저수지의 둑을 막고 물줄기 방향을 동쪽으로 돌렸다.
이로써 용산(龍山)의 계곡 물은 전처럼 진수(晉水)로 흘러들게 되었다.
진양성의 물도 줄어들기 시작했다.조양자, 한강자, 위환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은 손을 잡았다.
"수고했소.""애쓰셨소이다."그들은 언제 싸웠냐 싶게 친밀하게 굴었다.
조양자(趙襄子)가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이 몸은 두 분의 도움을 받아 함몰 직전에 놓인 진양성(晉陽城)을 구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외다.
그런데 지백(知伯)이 비록 죽긴 했으나 아직 그일족이 많이 남아 있소. 풀을 베고 그 뿌리를 남겨두면
결국 불행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오."한강자(韓康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번 기회에 아예 지씨 일족을 모조리 처단해 그 동안의 설움을 풀어야 하오."
조양자(趙襄子)와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는 마치 친형제라도 된 듯했다.
다음날 그들은 각기 가병을 이끌고 도성인 신강(新絳)으로 돌아왔다.일 년여만의 귀성이었다.
삼가(三家)의 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씨 일족의 집들을 일제히 포위하고는
지씨(知氏) 성을 가진 사람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내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이리하여 진(晉)나라에서 지씨 일족은 씨도 손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지과(知果)만이 진작에 성을 보씨(輔氏)로 바꾸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는 지난날 지백에게 바쳤던 1백 리 땅을 도로 찾았다.
이어 조씨, 한씨, 위씨의 삼가(三家)는 지씨 일족이 가지고 있던 땅을 모조리 몰수하여
똑같이 3분의 1씩 나누어가졌다.BC 453년. 즉 진애공 5년 3월의 일이었다.
후일담 하나.
조양자(趙襄子)는 진양성을 구하고 지백을 멸망시킨 여러 가신들에 대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실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일 공로자로서 장맹담(張孟談)을 천거했다.
그러나 조양자(趙襄子)는 뜻밖의 인물을 제일 공신으로 선정했다.
- 고혁(高赫).수근거림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장맹담(張孟談) 또한 불만을 표했다.
"고혁은 한 가지 계책도 세운 적이 없으며,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운 일도 없습니다.
그런 고혁에게 일등 공로를 내리시니 저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조양자(趙襄子)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백(知伯)이 진수의 물을 끌어다 진양성을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몹시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그때 모든 가신들은 먹을 것이 생기면 자기의 배부터 채우고 그 남은 것을 나에게 주었으며,
자리가 생기면 자신의 몸부터 편하게 하고 남은 자리에 나를 쉬게 하였다."
"그러나 오직 고혁(高赫)만이 자신의 몸보다는 나의 몸을 먼저 생각했고, 행동거지 또한 공손하고 근엄해
한 번도 군신(君臣) 간의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진양(晉陽)의 주인으로서 권위와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모름지기 싸워서 이기는 공로는 크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예법(禮法)은
만세에 길이 남는 모범이다. 어찌 고혁(高赫)에게 일등의 상(賞)을 내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비로소 장맹담(張孟談)을 비롯한 가신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69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