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을 ‘놓는다’와 ‘녹이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요? / 칠통 조규일 선사님 금요 법문 말씀 자등명에 업이 달라 붙어있으면 업은 자등명 본성이 갖고 있는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서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이 끌어당기는 힘을 놓으면 즉, 자등명이 자석이라고 했을 때 자석의 힘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석의 힘을 없애는 게 뭐냐면 바로 如如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면 자꾸 갖고 싶어 하고 집착하지 않는가? 자석의 힘을 놓게 하는 게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如如이다. 如如하면 해진 만큼 달라붙어있던 업이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 일반적으로 나에게 부딪쳐 오는 모든 것들, 즉 생각, 마음,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것들까지도 모든 행위에 있어서 모든 행들이 如如해지면 如如해진 만큼 자석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다 如如해지면 다 놓을 수 있다. 녹이는 것은 업이 달라붙어 있는데 내가 자석의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이 무엇인가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업을 놓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데 “업을 녹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선사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바깥에서 업을 녹일 수 있는 뭔가를 쏟아 붓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골 부엌에 검정 그을음이 가득 차지 않았는가! 그 그을음을 그냥 두면 그을음이고 털어내면 털어진다. 어떤 녹이는 액체를 갖다 뿌려버리면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수행해서 갈 때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밖에없다. 그런데 저 위 세계에서는 업을 녹이는 게 있다라는 것이다. 이랬을 때 위 세계에서 확 쏟아 부어주면 부어준 만큼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녹이는 것은 자기가 자기 업을 녹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아주 극초초 미세하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업을 녹였다고 하는 것은 100을 녹였다라고 했을 때 선사님이 에너지 쏴줘서 녹인 게 100이라고 한다. 자기가 녹였다고 생각할 뿐이지 녹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 업을 얼마나 녹였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안다고 한다. 문: 위와 같다면 업이라는 게 어떤 형태로써, 에너지로써 다 ‘실체’로 있는 건지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모양이나 하나의 相으로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하면 행한 것을 내가 행했다고 相을 일으키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업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쇼핑가서 아! 저거 이쁘다, 갖고 싶다라고 하면 자기 안에 쏙쏙쏙 들어와서 탁탁탁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것을 넣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어! 저거 어쨌어, 어쨌어 하면서 자기 안에 자기도 모르게 들어있는 걸 얘기한다. 그것을 부딪치기 전에는 자기 안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부딪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된다. 좀 다르긴 하지만 선사님 또한 빈 깡통인데, 도반님들이 물어보면 물어보는 것에 부딪쳐서 대답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 선사님이 쏴주신 에너지로 업이 녹은 것에 힘입어 사경이나 위 세계 공부했을 때 업이 얼마나 녹는지요? 그것은 선사님이 에너지를 쏴 주지 않는 것과 쏴 주는 것으로 대별된다. 안 쏴 주고 사경을 해서 녹이는 건 극초소이고, 에너지를 쏴 줬을 때 그러니까 선사님이 에너지를 쏴 주셔서 좋아졌는데 자기 업, 습으로 인해서 다시 달라붙은 것들을 녹이거나 떨어뜨리는데 80% 이상이라고 한다. (빛방 회원님들이 선원에 와서 에너지 받고 사경을 정성껏 하면 80% 이상이다라고 한다) 문: 인간적인 3차원에 살면서 개인적인 취미생활이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자기가 만드는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 이런 것도 여여한 것인가요? 절대 여여하지 못하다. 그것은 자기를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 타고 흘러가고 있는 강물에 밧줄을 매고 세월이라고 하는 흘러가는 것을 더 이상 못 흘러가게 잡고 있는 것과 똑같다. 인간적, 3차원적 측면에서 취미생활이 있으면 편안하고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3차원에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탈출구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이것 역시도 자기를 현실세계에 묶는 것, 발목을 잡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어쨌든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하면 의식주 해결이 안 되므로 일을 하되 여여하게 일을 해야 되는데 여여하게 어떻게 일을 하느냐! 나한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인과 연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돈을 무작정 벌려고 한다고 해서 벌리지 않는 것과 같이 따라와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만 알면 쉽다라고 한다.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면 한 만큼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만 보고 가다 보니 목표에 눌려서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 향꽃 성확출 백순길님이 법문 동영상을 속기해 주셔서 공부하시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해서 편집해 올립니다. *** 직장다니면서 한땀한땀 속기한 귀한법문 기꺼이 나눠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오늘 생신이신 공치 조은순 선생님께서 올리셨던 글귀 그대로 올립니다. 백순길님 공치 선생님 모두 감사합니다. 여기가 마음의 집이고 주소다. / 칠통 조규일 깨달은 이들은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같이 말을 한다. 마음을 알라. 마음을 밝혀라. 마음을 깨쳐라. 마음을 닦아라. 그리고 마음을 항복 받고 마음을 편하게 주(住)하라 하고 마음을 쓰는 법 마음을 행하는 법 즉 심법(心法)을 말한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不應住聲香) 미촉법생심(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주(住)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 마음을 어디에 머물러야 하고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고 마음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주고받으며 어디에 사는지 고향이 어딘지 묻고 대답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알려준다. 이렇듯 알아가고 알려주는 것은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몸 육체가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고향 역시도 마음의 고향이 아닌 육체의 고향을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체는 태어난 곳 항시 머무는 곳이 분명하고 오가는 데가 분명하게 자기 집에 있다. 몸은 이러한 육체 안에 있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몸은 자기 집이 있어 분명하게 머무는데 마음은 육신과는 달리 자기 집이 없다 그래서 마음은 일정한 주소가 없이 육신의 경계를 따라 6근과 6경 6처 생각과 의식(무의식 잠재의식)의 상(相)을 따라 마음의 집으로 삼으려고 마음의 주소로 가지려고 따라다니며 자기 자신도 모르게 상(相)에 집착과 애착을 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애착과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집착하고 애착하여 상(相)에 머무르면 눈 깜박할 사이에 다른 데로 옮겨가고 옮겨감으로 변하고 변하니 마음은 한시도 내 집이라고 다리 뻗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앉아 쉴 곳이 없다. 집 없이 떠는 떠돌이 신세라고 하겠다. 집 없는 떠돌이처럼 제 집 하나 없이 남의 집을 전전하며 떠돌아다니는 신세에 그것도 잠시 쉬어갈 틈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상(相)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상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돌아다니는 신세다. 상(相)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상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너 왜 그래"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마음이야" 한다. 자기 마음도 아니면서 마치 자기 자신의 마음인 듯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 저마다 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것을 마치 자신의 마음인 듯하고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상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것을 내 마음이라고 하고 있으니 상(相)에 옮겨갈 때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마음이 이번에는 여기서 머물러 쉴 수 있을까? 내 집이 될까? 내 것이 될까? 싶어서 상(相)을 따라 옮겨갈 때마다 얼마나 많은 애착과 집착을 가지겠는가? 여기에 본성의 속성 끌어당기는 힘이 함께 하고 있으니 그 애착과 집착은 대단하다 못해 감당하기조차 힘들다 감당하기조차 힘든 애착과 집착을 가지고 상을 옮겨다니니 상에 옮겨갈 때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의 아집과 집착과 애착을 가지게 되고 이렇듯 강한 아집과 애착 집착으로 내 것이라고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마음은 이러한 것으로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고 삼독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어찌 쉽게 버리겠는가? 쉽게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상(相) 업식(業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시도 때도 없이 상(相)의 경계로 옮겨다니며 돌아다녀야 마음은 얼마나 고달프고 괴롭고 불안할 것인가? 이렇듯 팔자 사나운 팔자도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런 마음에 어찌 불안 초조하고 고독하고 비관 타락 악의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듯 생긴 마음은 이러한 것으로 더욱 더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고 삼독심의 마음이 되어서 가지가지의 일을 저지르는것이다 이러한 그대 마음을 어찌 무심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집을 하나 만들어 주고 집을 정하여 주어서 집에서 마음 편히 쉬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여야 떠돌이 신세로 삼독심의 마음을 갖고 불안 초조하고 고독하고 비관 타락.... 악의로 가득 차있는 마음에게 집을 정하여 주고 마음의 주소를 주어 편안하게 쉬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은 6근과 6경 6처 생각과 의식(무의식 잠재의식)의 상(相)을 따라 왔다 갔다 할 뿐 본래 주(住)가 없으니 주(住)가 없는 그곳에다가 자리를 잡는 것이 마음의 집이 될 것이고 머물러 있는 마음의 집이 주소가 될 것이 아닌가? 본래 마음은 주(住)가 없으니 주(住)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주(住)가 아니한 곳에도 머무르지 말아야 할 것이고 상(相)이 없으니 상(相)에도 주(住)하지 않아야 하고 상(相)이 없는데도 주(住)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법(法)이 없으니 법(法)에도 주(住)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법 아닌 것에도 주(住)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본래 마음은 무주(無住)에 주(住)하는 마음이 마음의 주처(住處)일 것이고 마음의 주처(住處)는 바로 무주(無住)라 하겠으니. 마음의 집이 무상(無相) 무주(無住)가 집임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혼탁하여 한 치 앞을 분별할 수 없다보니 맑고 깨끗한 마음이 혼탁해지고 혼탁한 마음에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일어난 번뇌망상으로 앞을 분간하지 못한지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자기 자신의 본 주소를 알지 못하고 집을 모르고 고향을 모르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경계를 따라 6근과 6경 6처 생각과 의식(무의식 잠재의식)의 상(相)을 따라 가는데 마다 자기 집으로 삼고 닥치는 대로 실상으로 삼아 집착과 애착을 가지며 마음의 집을 이루려 하나니 마음의 집으로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내 마음이라고 하며 삼독심의 마음을 갖게 되고 삼독심을 갖게 됨으로 불안 초조하고 고독하고 비관 타락.... 악의로 가득 차있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 나라고 하는 육체로 일어나는 자기 자신 안의 모든 작용인 6근과 6경 6처 생각과 의식(무의식 잠재의식)의 상(相)의 작용이 모두 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집이고 일체 모든 법상(法相)이 모두 다 마음의 집이로되 이는 혼탁한 마음 삼독심으로 가득한 마음의 집이라 할 것이며 6근과 6경 6처 생각과 의식(무의식 잠재의식)의 상(相)과 일체 모든 법의 상을 여읜 깨끗한 마음이 본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본래 마음은 마음이 아닌 것이 마음이다. 이러한 본래 마음 깨끗한 마음은 상(相)이 없고 주(住)가 없으며 정함이 없는 것이 우리의 본심이다 이 백지와 같은 본심 때문에 인과 연을 따라 인연을 따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심법(心法)이라 하겠으니. 법(法)을 아는 만큼 마음을 통하여 행할 수 있고 마음으로부터 행하는 행이 인(因)이 되어 마음 안에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마음에 그려진 인연이 마음 밖으로 현현하여 나타난다 하겠다 이런 관계로 하늘(허공)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땅에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마음의 집과 주소를 설명했다. 설명하고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아무 필요가 없다 그대가 알아야 한다.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고 있고 그 마음의 고향은 어디고 그 마음의 집은 어디에 있고 마음의 집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확연해야 한다. 2006. 04. 08 08:53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가늠 인식 의식하는 것은 이와 같이 이루어진다. / 칠통 조규일 자성경계의 일원상은 알과도 같으며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은 알 속에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안팎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 인식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마치 알 껍질을 사이에 두고 안이다 밖이다 구별하는 것이다. 즉 알이 알 속에 있는 것을 감싸듯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자기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이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고 할 때의 나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바로 나이로되, 알에서 보면 자성경계의 일원상은 알 껍질이라고 할 것이며 나는 알 속에 있는 것을 나라고 할 것이다. 알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이란 알 껍질을 가늠하여 인식 의식하는데 있어서, 알 안에 있으면서 알 밖의 표면을 가늠해 알 수 없고, 알의 껍질의 표면을 가늠 인식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알 껍질 안쪽의 표면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가늠 인식 의식한다는 것은 알 껍질 속에서 알이란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가늠 인식 의식하되 알 껍질 밖의 표면을 인식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알 안쪽의 껍질의 표면을 인식 의식하는 것으로 알이란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벗어나 밖에서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가늠 인식 의식할 수 없고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인식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알 속에서 알 안쪽의 표면을 가늠 인식 의식하여 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벗어나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알거나 가늠해 알 수 없고 자성경계의 일원상 안에서 자성경계가 있음을 알거나인식 의식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가늠하지 못하거나 인식 의식 못하다가 알이란 자성경계의 일원상 안에서 알이 부화하듯 자기 자신의 경지가 점점 높아지면서 알에서 깨어날 시기가 되어감으로 해서 알의 안쪽 표면을 인식 의식하거나 또는 알의 안쪽의 표면에 닿음으로 인식 의식하며 어떻게 이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깰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자꾸만 인식 의식함으로 닿아 부딪치게 됨으로 해서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마치 알이 부화되기 전에 미세한 금이 점점 굵어지다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이 깨달음도 그러하다. 깨달음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자성경계의 일원상이란 상을 깨고 나와야 깨달음을 증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성경계의 일원상은 보는 자가 자기 안에서 보여지는 자성경계의 일원상 밖에서 바라보며 인식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가 자기 자신 밖으로 자성경계의 일원상 안에서 의식 인식하게 된다. 만약에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자기 자신 안에서 의식 인식된다면 아마도 알이라기 보다는 알 속에 있는 노란자와 흰자가 있는 가운데 노란자가 흰자로 올라서면서 올라선 흰자에서 예전에 노란자를 인식 의식하고 그것을 자성경계의 일원상으로 잘못 인식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식 의식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 밖으로 인식 의식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 안에서 알이란 자성경계의 일원상이 의식 인식된다는 것은 업(식)덩어리란 노란자에서 식(識)의 옷이란 흰자에서 업(식)덩어리란 노란자를 벗어난 흰자란 식의 옷에서 엷은 흰자에서 노란자를 포함한 흰자를 인식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2009. 08. 11. 07:56 업에 대하여 / 칠통 조규일 보이지 않는 쪽에서 한 마디만 더 해 달란다. 우리는 ‘업’입니다 라고 한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업’이라고 하는 존재인데 여러분들은 ‘업’이라고 하면 다 무서워하고 피하려고 한단다. 그런데 무서워하거나 피할 게 아니란다. 친구로 생각해달란다. 업이란 자기가 행한 것을 놓지 못하고 갖고 있는 게 업이다. 그러면 행한 것을 갖고 있으니까 알게 모르게 행한 건 자기가 아는 건 아는 것이고 모르는 건 모르면서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모른다라고 했을 때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느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모르는 것을 또 아는 것이다. 어쨌든 아는 것에 아는 것, 모르는 것에 아는 것 때문에 쉽게 얘기해서 업은 결국 나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업을 자꾸 무서워하고 피할수록 더 달라붙는다. 그냥 친구처럼 지내다 보면 느슨해진다. 그래서 업으로 인해서 병이 생긴 사람들의 많은 사람들이 그 병을 무서워함으로 인해서 아픔과 고통이 왔을 때 힘들어하지만 그 업으로 인해서 병이나 고통, 아픔을 내 업으로 인해서 생긴거다라고 생각하고서 친구로 지내면 병도 호전된다, 좋아진다라고 얘기를 한다. 그래서 업은 무서워하거나 피하는 게 아니라 친구로 받아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려놓으면 더 쉽게 내려놔진다고 얘기한다. 병원에서 그러지 않는가! 우리가 병 걸리면 그 병이 어떻게 생겼든 간에 친구처럼 생각하라고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지 않는가! 그러다 친숙해지면 좋아진다고들 얘기하지 않는가! 그런 것이 이 부분에 해당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수행하면서 거기에서 어떤 것들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업에 의해서 자기 마음이라고 하는 부분 또는 생각이라고 하는 부분에 어떤 것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맞닥뜨려 들어왔을 때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또는 자기가 좋아해도 그것을 함으로써 내 안에 들어왔을 때 내 안에서 갖고 있는 것들이 그것에 대해서 약간 부정적이다라고 하면 그런 것들이 들어오면 외관상으로 누군가 봤을 때, 또는 누구한테 얘기했을 때 ‘어, 좋겠다’라고 하지만 자기는 그게 들어왔을 때 내 안에서 그게 반응을 좋은 쪽으로 안 하니까 안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자기 스스로가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고 있느냐! 그랬을 때 그 하고 있는 과정에서 자기가 바라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 이런 것들이 들어왔을 때는 그런데 우리는 예를 들어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계단을 밝고 올라가야 되지 않는가! 계단 밟고 올라가다보면 어느 때는 그 계단이 좋을 수도 있고 또 어느 때는 싫을 수도 있다. 똑같은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내가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려 하면 좋은 데도 밟고 올라가야 되고 싫은 데도 밟고 올라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서 어디를 지향해서 목표를 두고 가느냐 했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금방 얘기한 것처럼 자기가 그런 것들은 좋은 건 좋은 것대로 나쁜 건 나쁜 것대로 다 그냥 밟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흐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봐야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진정 내가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밑을 바라보면 그런 느낌을 자기 안에서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목표한 어디를 향해서 갔을 때. 보이지 않는 쪽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보다. ‘우리 그렇게 해서 왔는데요, 여기까지밖에 못 왔어요, 더 올라가고 싶거든요’라고 얘기를 한다. 아, 더 가시면 되죠. ‘그렇죠’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저 따라간다고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늘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늘 그렇지 않은가! 자기 스스로한테 내가 왜? 라고 물었을 때 이런 게 돼야지 된다는 것이다. 원 글은 190915 금요법문의 내용중 일부분이며 향꽃 성확출 백순길님께서 법문 동영상을 속기해주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공부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4정도 요체 / 칠통 조규일 정도(正道) 2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가되 맑고 깨끗한 진리의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심(正心) 속 올바른 생각을 하고 정사(正思) 속 올바른 말을 하며 정언(正言) 속 올바른 행동을 한다면 정행(正行) 속 언제나 편안한 마음 진리 속 진리로 살리라. 칠통 조규일 저서 / 나 찾아 진리 찾아 빛으로 가는 길 - 생의 의문에서 해탈까지 - 漆桶 명상 시집에 상재되어 있는 정도(正道)1, 2 란 글 (102쪽가 10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