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신교 터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116, 신교동 59)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을 인왕산 기슭에 지으면서 왕래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1760년경에 제작된 도성대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1800년 이후에 제작된 <한양도성도>와 ≪대동지지≫ 및 <수선전도(首善全圖)>에 다리가 표시되어 있어 1800년을 전후로 만들어진 다리로 보인다
1911년이 제작된 <경성부시가도>에는 오늘날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 있었으며, 1925년부터 시행된 복개공사로 인해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다리라고도 하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이 지역이 다리 이름을 따서 신교동이 되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있어 다리의 형체를 볼 수 없으며 새 다리가 있던 자리는 신교119안전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복개할 때 난간석은 현 청운초등학교 교정에 보관하였다
푸르메센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89, 신교동 66)
종로장애인복지관은 종로구가 부지를 제공하고 비영리공익법인 푸르메재단이 건축비 80억 원 전액을 종로구 직원을 포함한 시민모금으로 마련, 건립 후 종로구에 기부채납하는 방식으로 국내 최초 민·관 복지 협력 거버넌스 사례다
지상 4층 연면적 3745㎡ 규모에 장애인 치과, 한방 재활치료를 병행하는 재활의원, 어린이 재활센터, 북 카페 등이 자리해 장애 진단에서부터 재활 · 자립까지 한 곳에서 지원한다
또한 동농 김가진의 생가터로 알려져있으나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국립서울농학교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103, 신교동 1-1)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으로, 1913년 제생원 맹아부가 학교의 뿌리이다
1931년 제생원 맹아부를 현 신교동으로 이전하였고, 1945년에는 국립 맹아학교로 개칭하여 6년제 초등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명은 1988년 서울선희학교로, 2002년에는 서울농학교로 개칭되었다
♤ 정철 생가터
1536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나 1593년 임진왜란 때 강화도 유배 중에 굶어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철은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문인이며 정치가로 당시 언문으로 하대받던 한글로 성산별곡, 사미인곡, 관동별곡을 지어 우리 가사문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정철은 당쟁에서 밀려 유배로 떠돌다가 복직되기를 여러번 반복하는 순탄하지 못했다
정여립 사건 때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영수로 동인들 을 철저하게 압박하고 추방하여 후대까지 동인들 집안 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표지석은 청운초등학교 앞에 있으나 생가터는 서울농학교내 은행나무 언저리로 추정된다
♤ 선희궁 터
이곳은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위 (神位)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된 사묘의 자리이다
사묘는 조선시대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이 그의 모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1764년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사당을 세우고 '의열묘(義烈墓)'라 했다
이후 정조 때 선희궁(宣禧宮)으로 바꿨다
1908년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져 경우궁과 합사되었다
선희궁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에는 복원 된 선희궁 건물과 주춧돌, 기단, 담장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서울시 보호수 은행나무(1-15호)와 느티나무 (1-27호)가 300여 년 동안 선희궁과 함께하고 있다
♤ 총독부 제생원터
1905년에는 이필화가 ‘사립 경성고아원’을 설립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이필화의 경성고아원을 인수하여 ‘조선총독부 제생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천연동 98번지 숭의묘터에 고아, 맹아, 정신질환자를 수용했다
그러다가 정신질환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넘기고 고아를 교육하는 양육부와 맹아를 가르치는 맹아부로 나누었는데, 맹아부는 천연동에 두고 양육부는 선희궁 터로 이전한다
1931년 양육부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재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땅을 매입하여 이전하고 천연동에 있던 맹아부를 선희궁으로 옮겼다
맹아부가 1959년 1월 1일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로 분리되었다
김상용 집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33길 22-10, 청운동 52-8)
이곳은 김상용(金尙容)의 옛 집터로서 그의 자손들이 세거(世居)하면서 김상용의 사당(祠堂)과 영당(影堂)을 그 안에 봉안하고 태고정(太古亭) 이라는 초당 을 꾸며 놓았던 곳이다
♤ 김상용(金尙容)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金克孝),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동생이다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 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당하 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선원유고》 등이 있다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52, 청운동 5)
♤ 몰몬교(모르몬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줄여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초대 교회의 신권 조직과 교리와 운영 원리를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주장하며, 회복된 기독교를 표방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성립된 기독교 교파이다
1830년 뉴욕 주에서 조셉 스미스 2세를 포함하여 6명의 설립등기인으로 공식 설립되었다
종교학에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파생된 분파가 아니므로 별도의 교파로 분류되어 있다
성경과 더불어 몰몬경과 같은 경전을 공인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모르몬교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이 명칭은 교회내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공식 명칭 사용을 요청하고 있다
1955년 처음 대한민국에 소개되었을 당시에는
'Latter-day Saints'를 한국어로 직역하여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로 불렸으나 2005년 7월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보통 개신교, 정교회, 가톨릭과는 다른 독립적인 교파
로 여겨진다
실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와는 기본 교리부터 많이 다르기에 일반적으로도 독립적인 교파로 분류된다
백운장 터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6)
♤ 백운장(白雲莊)
대한제국기에 법부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1846 ~1922)도 별서(別墅)인 백운장(白雲莊)을 이곳에 조성해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지금도 김가진의 별서 터의 일부와 1903년(광무7)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고 쓴 그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백운장은 김가진 일가의 중국망명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고급요리집으로 사용되었던 기록과 사진이 확인 되고 있으며, 해방 이후부터 1961년 박정희 정권 때 불하 결정되기 전까지 요정정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 도 하다
이곳은 1915년 일본인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청향원(淸香園)이라는 이름으로 고급요리집을 지었다가 1929년에 백운장(白雲莊)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62년 9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에서 이 일대를 구입하여 지금은 포교원이 들어섰다
♤ 청계천의 본류인 옥류동천이 시작되는 곳(즉, 청계천의 발원지)으로, '백운동(白雲洞)'이란 이름은 흰(白) 구름(雲)이 뜬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로 붙은 것이다
여기서 '동(洞)'은 행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곡'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백운장 자리에 한국 본부 역할을 할 교회를 세웠다
1963년 교회에 땅이 넘어가고 1970년 교회가 세워졌으니 백운장는 그 사이에 헐렸을것이다
또 하나의 청계천 발원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산 1-1)
여기의 발원지는 지금 군사시설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며, 언젠가 개방이되면 좀 더 연구하여 발원지로 서의 고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왕산 수성동계곡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청계광장을 출발하여 금천교를 거쳐 백운장 터 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ㅁ^
안녕하세요
걷기에 함께하려는데요
네! 기회가 되면...
잘좀 부탁드려도될께요
너무도 사진이나 설명들이 참 좋으시네요~~
혹시 스케즐이나 모임장소를
공유하려면 어떤절차를 해야하는지요?
제가 개인사정으로 당분간 모임 계획이 없습니다요 ㅠㅠㅠ
네 나중에 다시모임하 시면
부탁드릴께요
넵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