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예부인(花蘂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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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비 서씨(慧妃 徐氏) 또는 화예부인(花蕊夫人)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의 시인·문인이자, 후촉 황제 맹창(孟昶)의 황후였다. 송나라 조광윤에게 포로로 잡혀왔으나 시문에 출중하여 조광윤의 궁중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시서를 남겨 후세에 전한다.
조광윤 조광의 형제간의 알력을 낳게 한것도 화예부인 서씨의 계교에 다른 것이며 이후 송나라 태조는 죽고 그 후손도 송나라의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동생 조광의의 자손들이 계승한다.
절세의 장군 조광윤은 서촉의 화예부인 서씨에 의하여 동생과의 알력으로 일신의 공적이 수포가되어 버리고 후손은 왕위를 갖지 못한 비운의 왕손들이 되었다.
1 생애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 황제 맹창의 황후로 시와 글짓기에 능통하였고 재주와 미모를 겸비하여 화예부인(花藝夫人)이라 불렸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충무부절도사(忠武府節度使) 왕전빈(王全斌)에게 군사 6만을 주어 후촉을 공력하게 하였다. 후촉은 군대가 14만이나 되었으나 많은 전사자를내고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 부자가 사십년을
풍족하게 병사를 길러왔지만
일단 적을 만나니
동쪽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는구려!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송태조의 후궁이 된 화예부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하였다로 결말을 맞는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는 모습은 시속에서 역역하다.
훗날 일본 명치유신과더불어 살아지는 구슈 강성(岡城)의 최후를 보는 사건에서도 화예부인을 이용한 글이 나온다.
2 조광윤 형제의 갈등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인 조광의가 서로 질투하여 다투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서씨와 함께 포로로 잡혀오고 맹창이 죽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조광윤은 재빨리 서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여록》(爐餘錄)에 의하면 '촉주가 죽자 곧 태조의 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노리고 있었다.
서기 976년 겨울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워 침대에 누워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조광의는 서씨에 대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밤중에 조광의는 형 조광윤을 몇번이나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서씨를 희롱했다. 조광윤이 일어나 이를 알고 분노하여 옥부(옥으로 된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1] 놀란 황후와 태자가 왔을 때는 이미 임종이 가까워져 있었고,
조광의는 슬그머니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광윤은 세상을 떠난다.
송 태조 건덕(乾德) 2년 11월, 조광윤은 충무절도사 왕전빈(王全斌)에게 6만 병사를 이끌고 촉으로 진격하라 명했다. 동시에 공장(工匠)들에게 명해 변량(汴梁)에 촉의 군주 맹창이 살 주택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유조를 내린다. “행군하여 이르는 곳에서 민가를 불사르거나 백성을 쫓아내거나 분묘를 파내거나 뽕나무를 벌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과 마을을 함락한 후에 포로를 남살하거나 재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때 변량에 큰 눈이 내렸다. 송태조는 강무당(講武堂)에서 검은 단비 옷을 입고 일을 보다 갑자기 좌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입고도 춥다고 느끼는데 서정을 나간 장병들이 생각나는구려. 눈서리를 뒤집어 쓸 텐데 어찌 이보다 못하다 하겠소?”
즉시 의복을 벗어 태감에게 주면서 촉 지역으로 달려가 왕전빈 장군에게 전달케 하고 전군에게 두루 상을 내리지 못하여 유감이라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군대는 용기를 내어 진군하였다. 성도를 지키고 있는 촉나라 병사는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우리 부자는 따뜻한 옷과 풍족한 양식으로 병사들을 40년 양성했는데 적을 만나자마자 화살 한 촉 쏘지 못하는 구려!”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건덕(乾德) 3년 음력 정월 보름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공평장사 이호(李昊)가 표를 써 맹창에게 스스로 성문을 나가 투항하라 상주하였다. 왕전빈이 출병한 날로 세면 66일 만에 후촉이 멸망한 것이다.
전촉 왕연이 후당에게 멸망당한 것보다도 빠르다. 두 번 다 표를 써서 올린 인물이 이호다. 그래서일까, 충성심을 갖고 있던 어떤 인물이 이호의 집 대문에 “대대로 항복하라는 표를 올린 이 씨 집안”이라 쓰기도 하였다.
푸른 버드나무가 낙엽을 휘날릴 때, 맹창, 화예부인과 이호 일행 33명은 변양으로 압송된다. 두견새들은 “가면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울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변량으로 압송된 후 맹창은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고 검교태사 겸 중서랑이 되었다. 송 태조 조광윤은 그처럼 맹창을 우대했지만 절세가인이라 귀가 닳도록 들었던 화예부인을 한 번 봐야 갈증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대전으로 초빙하면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것은 분명하였다.
계책을 세웠다. 맹창에게 상을 내리면서 그의 시종과 가속들 모두에게 상을 내리면 궁으로 들어와 감사를 표할 것이 아닌가. 당연히 화예부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감사를 표하는 그날 맹창의 모친 이부인 뒤로 화예부인이 따라 왔다.
태조는 특별히 주의해서 보았다. 그녀가 어전 앞으로 왔을 때에야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도취할밖에. 자세히 뜯어봤다. 형용할 수 없는 백만교태가 아닌가. 화예부인이 신첩이라 칭하며 황상의 만수무강하시라 고원할 때의 교태와 교음이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꾀꼬리 소리가 아니던가.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제야 태조는 정신을 차렸다. 양 눈을 부릅뜨고 화예부인을 훑었다. 하나도 빼뜨려서는 안 된다는 듯이. 화예부인도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태조를 흘깃 훔쳐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떨어뜨린 머리카락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설 때의 추파는 넋을 잃게 만들었다. 태조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당연하고. 7일 후 맹창은 급병으로 죽는다. 나이 47세였다. 역사가들은 태조가 독살했다고 보기도 한다.
태조는 맹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5일 동안 입조하지 않고 소복을 입었다. 그리고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맹창이 죽자 맹창의 모친은 울지 않았다. 술을 들어 땅에 뿌리며 제를 지내면서 말했다. “너는 사직을 보존하지 못했으면서도 죽음으로 순직해 명예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아끼었구나. 나도 네가 구차하게 삶을 갈구하는 것을 보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지금 네가 죽었으니 내가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수일을 절식하고 죽었다.
맹창은 낙양(洛陽)에서 장례를 치루고 그의 가족은 변경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럼, 화예부인은? 술 몇 잔을 마신 화예부인은 태조의 손에 이끌려 침궁으로 들어갔다. 얼마 없어 귀비에 봉해졌고. 그때부터 태조는 매일 조정에서 물러나면 화예부인을 찾아가 술 마시며 읊조리는 시가를 듣는 게 낙이 되었다. 물론 화예부인은 여전히 맹창을 잊지 못하여 그림을 그렸다하기도 하지만…….
화예부인은 나중에 송나라 권력투쟁의 와중에 휩쓸렸다. 태자를 세우는 문제에 있어 태조의 동생 광의(光義)의 이익과 상충되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을 때 나중에 태종이 되는 조광의가 쏜 화살을 맞고 죽는다. 태조는 그 뜻을 알아차렸으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애도하는 도중 군기처에서 급박한 전장의 소식이 들려왔다. 웅심이 발동해 기병하고 출정하면서도…….
그렇다면 진짜 화예부인은 조광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까? 화예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사서는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조광의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북송 중기 소박(邵博)의 『문견근록聞見近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조광윤이 친왕과 후궁을 데리고 후원에서 활쏘기 경연을 벌였다.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술을 권했다. 조광의가 대답하기를 “만약 화예부인이 나를 위하여 꽃을 꺾어오면 마시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조광윤이 화예부인에게 꽃을 꺾어 오라 보내자 조광의가 활시위를 당겨 쏘아 죽였다. 그리고는 조광윤의 다리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막 천하를 얻었습니다.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중요할 때입니다. 부디 주색을 멀리하소서!” 조광윤은 불쾌했지만 동생을 책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송 말년의 『철위산총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돼있다. 화예부인이 송나라에 귀속된 후 조광의도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리 만무하였다. 어느 날 후원에서 사냥할 때 화예부인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조광의는 “활시위를 조절하고 짐승을 맞추려 하다가 갑자기 화살을 돌려 화예를 쏘아 맞췄다. 활 맞고 죽었다.”
조광의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죽였는가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나는, 조광의가 인품이 높고 절개가 곧아 사직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일체를 고려치 않고 그 형의 옆에 있는 ‘화근’을 제거했다고 본다.
둘째는, 조광의가 흠모를 넘어 질투가 심하여 내가 얻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얻지 못하게 만들려고 일세의 미녀를 없앴다고 본다.
셋째는, 화예부인이 황위 계승자 문제에 있어 조광의에 불리했다는 설이다. 조광의가 원한을 품고 보복했다는 것이나 이야기는 다시 꼬리를 물고 길게 뻗어 나가 화살맞은 것은 화예가 아니라 궁녀였다.
화예는 훗날 조광윤과 조광의 형제사이를 불화를 이르켜 송나라는 조광윤의 후손은 없고 동생 조광의의 자손이 대를 이어 간 사실들을 참고하면 화예부인의 원한이 얼마나 깊고 철두철미하였나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기록은 다르다.
첫째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조광의 자신이 호색한이었다. 그는 나중에 남당 이욱의 소주후(小周后)에게 탐욕을 부려 강제로 빼앗은 것이 전형적이 예이다.
두 번째 이유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조광의가 화예부인의 미색에 침을 흘린 것은 맞지만 결코 미인 하나 때문에 조광윤에게 죄를 지어 자신의 황위 계승권에 악영향을 미치도록 할 인물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이치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황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조광의는 표면적으로 가장 겸손하였고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고분고분 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내도 최소의 기준이 있었다. 바로 그의 계승권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됐다. 영향을 준다면 보이는 족족 가차 없이 죽여 없앴다. 무자비하기 그지없었다.
최후에는 ‘촉영부성(燭影斧聲)’이란 천고의 미스터리를 남기지 않았던가?
3. 촉영부성(燭影斧聲): 송태조의 갑작스런 죽음
송태조 조광윤은 황제로 즉위하여 17년 되던 해 초겨울 만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세상에 ‘금궤지맹(金櫃之盟)’이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조보와 조광의가 날조한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조광윤이 뜻밖에 죽음을 당한 후 황제의 자리를 그의 아들 조덕소가 아니라 동생 조광의가 이어 받은 사실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무인출신이라 남달리 건강했던 조광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건을 후세에서는 ‘촉영부성(燭影斧聲)’ 또는 ‘부성촉영(斧聲燭影)’이라 불렀다.
이는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와 도끼소리’라는 뜻으로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후세의 사가들은 조광윤의 죽음 역시 태종 조광의에게 혐의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조광윤의 죽음에 대해서는 송나라 중기에 조정의 대신이나 환관들과 교제가 잦았던 승려 문영(文瑩)이 송대(宋代)의 잡다한 이야기를 모아 쓴 야사(野史) 『속상산야록(續湘山野錄)』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976년(태조17) 10월 20일 밤 송태조 조광윤은 태청각(太淸閣)에 올라 천기를 살펴보았는데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날씨가 청명해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날씨가 급변해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함박눈과 우박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랴부랴 태청각에서 내려와 변경윤(汴京尹)으로 있는 동생 조광의를 침궁(寢宮) 만세전(萬歲殿)으로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후사(後事)를 부탁했다고 한다. 침궁 밖에서 호위하던 환관과 궁녀들이 보기에는 촛불에 그림자가 흔들리고 조광의가 몇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피하면서 무엇인지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술을 끝낸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궁 밖에는 눈이 수북이 쌓였다.
조광윤은 도끼로 눈을 찍으며 조광의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잘 한다! 잘 해...!!」
이어 그는 허리띠를 풀고 잠에 들었으며 코고는 소리가 벽력같았다. 그날 밤에 조광의는 황궁에 머물렀고 새벽 네 시경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환관과 궁녀들이 달려가 보니 황제는 이미 죽어있었다.
조광의는 즉각 형의 영구(靈柩) 앞에서 황위에 올라 태종이 되었다. 이로써 송태조 조광윤의 아들인 조덕소와 조덕방은 황제가 될 기회가 없어졌다.
그리고 조광의는 전례 없이 태종으로 즉위한 당년에 연호를 송태조의 ‘개보(開寶)’에서 ‘태평흥국(太平興國)’으로 바꿨다.
원래 연호는 이전 제왕의 위엄을 존중하기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부터 새로운 연호를 시작하는 것이 원칙인데, 조광의는 976년 10월 20일 조광윤이 죽고 그 해가 한 달 반도 남지 않았는데, ‘개보’를 쓰지 않고 976년 당년부터 ‘태평흥국’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형인 조광윤의 황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유명한 사마광(司馬光)이 쓴 『속수기문(涑水記聞)』에 의하면 내용이 다르다.
이에 따르면, 976년 10월 20일 밤 송태조가 만세전(萬歲殿)에서 별세했다. 이미 때는 심야 두시 경이었다.
송황후는 환관 왕계은(王繼恩)을 4남 진왕(秦王) 덕방(德芳)에게 보내 즉시 입궁해 황위를 계승하도록 명했다.
그런데 왕계은은 실권자 조광의에게 의지해 자기이익을 보호받으려는 생각에서 덕방에게로 가지 않고 곧장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에게로 갔다.
어쩌면 사전에 조광의가 환관을 매수해 미리 짠 각본이었는지도 모른다. 왕계은이 황망히 진왕부(晋王府)에 도착하니 입구에는 이미 의관(醫官)인 좌압아(左押衙) 정덕현(程德玄)이 와 있었다.
왕계은이 그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의관 정덕현이 말했다.
「한 반시간 전쯤 누가 와서 진왕(晋王)이 급한 병에 걸렸다고 고함을 쳐서 황급히 달려온 길이오.」
그러던 차에 마침 진왕 조광의가 나타나서 세 사람은 눈 덮인 길을 밟으면서 급히 황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송황후는 왕계은과 마주치자 물었다.
「덕방은 어찌 되었소?」
그러나 송황후는 왕계은과 함께 나타난 진왕(晋王) 조광의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애걸했다.
「우리 모자의 목숨은 진왕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조광의가 말했다.
「우리 함께 부귀를 누립시다. 걱정하지 마시오.」
10월 21일 아침, 조광의는 조광윤의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 사건은 제삼자(第三者)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증명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천고의 의문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믿을만한 기록인『송사(宋史)』의 「태조본기(太祖本紀)」에는 이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계축일(癸丑日) 저녁, 황제께서 만세전(萬歲殿)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50세이시며, 대전(大殿)의 서쪽 계단에 안치했다.」
이로써 송태종 조광의는 ‘촉영부성’이라는 의문을 남기면서 그의 형을 죽인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광의는 자신의 장자가 안전하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토록 자상하게 아껴주었던 형 의 자식들마저 핍박해 덕소는 979년(태종4)에 자결하고, 덕방은 981년(태종6)에 원인도 모른 채 앓다가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 광미마저 984(태종9)년에 죽게 함으로써, 태종은 즉위한지 8년 안에 그의 어머니가 ‘금궤지맹’의 유언을 통해 황위계승자로 거명했다던 사람들을 말끔히 제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송이 끝날 때까지 계속 조광의의 직계후손이 황위를 독점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권력의 무상함과 잔인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2.촉영부성(燭影斧聲)’ 사건으로 조광윤이 죽을 때 조광의는 38세였고 조광윤은 50세였다.
조광의 자신과 조보가 은밀히 진교병변을 획책해 형을 황제로 만들어 주었는데, 자기 덕분에 황제가 된 형이 세상물정 모르고 너무 오랫동안 보위(寶位)를 지키고 있어 정작 주동적 역할을 한 자신에게 언제 황제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생겼을 것이다.
조광의는 형이 50세가 되어도 보위를 내놓을 기미가 없으면, 진왕부(晋王府)의 막강한 참모진과 재력을 동원해 제2의 병변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미리 작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촉영부성(燭影斧聲)’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광윤(趙匡胤)이 무대에 섰던 스타(star)이고 동생 조광의(趙匡義)가 각본가 겸 연출가였다면, 마침내 연출가 자신이 무대에 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황제가 된 조광의는 978년(태종3) 1월 한림학사 이방(李昉) 등 여러 학자에게 명하여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케 하여 2년 후인 980년(태종5) 9월에 50권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편수관을 일일이 독대하여 자료를 제시하면서 보충하거나 수정하도록 간섭했으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도록 했다.
실제로 『태조실록』에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인명, 지명이나 내용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촉영부성(燭影斧聲)’도 이런 연유로 다만 한 줄로 기록하게 하여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편수관 중에서 이지(李至)는 “눈병이 났다.”는 이유로 사관(史官) 직을 그만두었고, 편수관 장필(張佖)은 스스로 “자신은 옛 남당의 신하로서 송조(宋朝)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고 겸양하면서 사표를 냈다.
그리하여 결국 장박(張泊)과 송백(宋白) 등이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장박은 오래지 않아 『태조실록』편찬의 공로로 부재상인 참지정사에 올랐으나, 그 후 다시는 국사편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살펴본다면, 금궤지맹과 ‘촉영부성(燭影斧聲)’은 결국 당대의 야심가 조광의와 책사 조보의 작품이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화예부인 서시의 작품으로 화예부인의 최후를 예단 할 수는 없다. 역사는 역사이고 사실을 사실이기 때문이다.
3. 궁사(宮詞)는 화예부인과 깊은 연관이 잇는 작품중 하나이다.
[ 宮詞 ]
중국시의 한 체(體)로서, 궁정 내부의 비사(秘事) 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읊은 것.
당나라 왕건(王建)이 유명한 현종(玄宗) 황제의 궁정생활에 대해 고로(古老)들로부터 들은 것을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읊어, 궁사 100수를 지은 것이 그 처음이라고 한다.
그뒤 5대의 후촉시대(後蜀時代)에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왕비인 비씨(費氏), 즉 보통 화예부인(花蘂夫人)으로 알려진 부인이 왕건의 궁사체를 본떠서, 스스로 경험한 궁정생활을 읊어 궁사 100수를 만들었다. 왕건과 화예부인의 이 작품이 말하자면 궁사의 정형이라 하겠다.
본래 왕건은 훌륭한 시인이었고, 화예부인 또한 뛰어난 여류작가였으므로 이들은 다 같이 화려한 궁정생활의 숨은 이면을 훌륭하게 묘사했던 것이며, 따라서 후세에 그들을 따르는 작가가 많아 드디어 중국시에 궁사라는 한 유형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송대(宋代)에는 왕규(王珪)의 궁사 100수가 유명한데 왕건·화예부인의 작품과 더불어 '삼가궁사(三家宮詞)'로 일컬어진다. 원대(元代)에는 양유정(楊維禎)의 궁사가 유명하고, 명대(明代)에는 종실(宗室)의 영권왕(寧權王)이 지은 궁사 107수, 같은 종실의 주정왕(周定王)이 지은 《원궁사(元宮詞)》 100수, 그리고 진종(陳悰)이 지은 《천계궁중사(天啓宮中詞)》 100수 등이 뛰어나다.
진종의 궁사는 매 수마다 상세한 주석이 있어 시 속에 담긴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한층 더 흥미가 있어서 청조(淸朝)에 이르러 오성란(吳省蘭)의 《십국궁사(十國宮詞)》 등 이것을 모방한 것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고로들로부터 들었거나 스스로 경험한 일을 읊은 것이 아니고, 사서(史書)나 수필 등에서 취재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 또한 고래의 뛰어난 궁사를 편집한 것으로, 청나라 주이존(朱彛尊)의 《십가궁사(十家宮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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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절은 어리어리 검패는 쟁글쟁글 / 幢節玲瓏劍佩高
안상가에 의조 관원 두 줄로 나눠 섰네 / 案邊分立兩儀曹
원조라 대궐 바라 세 번 숭을 부르니 / 元朝望闕嵩呼罷
전각의 봄구름이 채색 깃발 끼고 도네 / 殿角春雲擁彩旄
이는 망궐례(望闕禮)를 가리킨 것으로서 사대(事大)의 성실을 으뜸으로 했으니,
소견이 또한 높다 하겠다.
봄 제향 다다라라 이른 새벽 재를 하니 / 節臨春享値齋晨
궁빈들도 옥신당(玉宸堂)에 근접을 못하누나 / 未許宮嬪近玉宸
그날 되면 상의가 어복을 배정하니 / 當日尙衣排御服
망포랑 정대는 한때에 다 새로워지네 / 蟒袍鞓帶一時新
옥신당은 경복궁(景福宮)의 통명전(通明殿) 북쪽에 있다.
청필을 세 번 외쳐 합문이 열려지니 / 淸蹕三聲啓閤門
작은 수레 새벽에 서원을 나도누나 / 小輿晨出轉西垣
임금님이 연은전에 납신다고 말 전하니 / 傳言駕幸延恩殿
아마 정녕 침원에 앵도를 올리오리 / 想是櫻桃薦寢園
위곡(委曲)하고 완창(婉暢)하다.
밝기 전에 장신전 바깥 문이 열리어라 / 未明長信殿門開
궁녀들은 작선 온다 소리를 외치누나 / 宮女傳聲雀扇來
새벽이면 대가님이 문안 먼저 드리나니 / 拂曉大家先問寢
상서로운 오색 구름 봉래궁(蓬萊宮)을 옹위했네 / 五雲佳氣擁蓬萊
이하 여섯 수는 다 양궁(兩宮)을 받드는 지극한 효성을 말한 것이다.
금을 바른 합자에 은 술잔이 포개놓여 / 金泥盒子疊銀罍
동조로 떠메가라 걸음걸음 재촉하네 / 舁向東朝步步催
미란이라 표태라 어선을 차릴 적에 / 麛卵豹胎排御膳
성은이 친히 손수 조미(調味)하여 온 거로세 / 聖恩親自手調來
십분 친절을 그려냈다.
남은 추위 쌀쌀하여 겹보료를 뚫고 드니 / 餘寒料峭透重茵
호피 방장 초피 이불 봄인 줄을 모를레라 / 豹帳貂衾不覺春
장신전에 밤이 오자 포근히 잠 못 드니 / 長信夜來眠未穩
여의를 들라 하여 궁가는 친히 묻네 / 宮家親問女醫人
형용이 지극히 아름다워 정리(情理)가 도저하다.
건춘문 밖 의장(儀仗)은 우레 같은 외침인데 / 建春門外仗如雷
법부의 풍정이라 작은 잔치 열렸구려 / 法府豐呈小宴開
꽃 속에 줄을 지어 궁녀가 나타나니 / 花裏一班宮女出
양궁은 모처럼 서총대에 납시누나 / 兩宮初幸瑞葱臺
뛰어나 더욱 좋다.
늦은봄 장추궁(長秋宮)에 탄신이 다가오니 / 春晩長秋屆誕辰
조라로 함봉하여 기린 비단 진상하네 / 皁羅封進錦麒麟
법석이라 상준은 전 앞에 배치하고 / 上尊法席排前殿
소균 풍악 차례로 꽃 너머서 아뢰누나 / 花外韶鈞次第陳
명(明) 나라서 보낸 비단 구장이 찬란해라 / 勅賜羅紈燦九章
붉은 함의 싸고 싼 것 천향을 띠었구려 / 硃函包裹帶天香
황제 은택 바다 같아 모두 함께 즐기면서 / 共驩帝澤如深海
자궁께 먼저 청해 총광을 받으시게 / 先請慈宮賞寵光
토산물의 진상이 내일 아침 일인지라 / 土宜封進在明朝
비실이 엉겨엉겨 전묘에 열지었지 / 篚實離離列殿寮
하나하나 품제가 임금님 손 거쳤으니 / 一一品題經御手
검은 삼베 하얀 모시 교초보다 낫고말고 / 黑麻霜苧勝鮫綃
이하 세 편은 또 사대(事大)를 말한다.
문서를 감진하는 일이 은대에 있어 / 文書監進在銀臺
부새 가진 낭관이 새벽을 대어 왔네 / 符璽郞官趁曉來
보함을 메고 나와 침합에 당도하자 / 擡出寶函當寢閤
중관이 친히 받아 임금 앞에 열어 놓네 / 中官親向御前開
형용이 친절하다.
밝은 아침 배표하니 옥패(玉佩) 소리 쟁글쟁글 / 平明拜表佩聲喧
향안의 앞머리에 지존이 꿇어앉네 / 香案前頭跪至尊
광악이라 수당이 길을 먼저 인도하니 / 廣樂綉幢先引路
사신이 떠받들고 대궐 중문 나오누나 / 使臣擎出殿中門
음절(音節)이 갱굉(鏗鍧)하다.
선니에게 제 올리고노부가 돌아오니 / 親享宣尼鹵簿回
취화 먼저 인도해라 계화가 피었구려 / 翠華先導桂花開
나인들이 다투어 궁문을 끼고 보니 / 內人爭擁宮門見
문무의 신은 급제(新恩及第) 모두가 준재로세 / 文武新恩摠俊才
이는 석채(釋菜)를 마치고서 취사(取士)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첨황이 처음 붙고 전홍이 선명한데 / 籤黃初貼篆紅鮮
옥진이라 자개상은 어전에 놓여 있네 / 玉鎭螺床近御前
큰 촛불 반이 타고 궁루는 기나기니 / 椽燭半燒宮漏永
대가님 내일 아침 경연을 여신다오 / 大家明日早開筵
이는 근학(勤學)의 일을 말한 것이다.
놀빛 같은 궁중 술 수뢰에 넘실넘실 / 御醞如霞瀲獸罍
좌합에 선지(宣旨) 내려 수연이 열렸구려 / 傳宣左閤綉筵開
내정에선 대낮에 은촉을 배치하니 / 內庭當晝排銀燭
사신의 밤 등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네 / 留待詞臣夜來對
자루 붓 먹 발린 채 양전을 기다리는데 / 三筆淋漓待兩銓
한 자루 뽑아들어 으뜸으로 승천하네 / 一枝抽得首陞遷
겸양하신 성상(聖上) 마음 천명을 아시나니 / 聖心謙讓知天命
조화라 어찌 감히 권형(權衡)을 피하리까 / 造化安能敢避權
이는 명종(明宗)ㆍ중종(中宗)도 다 그러했다. 사(辭)가 곡절(曲折)이 있어 스스로 전아(典雅)함을 깨닫겠다.
동정에서 책시(策試)하여 완란이 모여드니 / 彤庭策士集鵷鸞
임금님께 아뢰어 관을 바로 쓰셨구려 / 已報君王起整冠
무장이라 새벽녘은 촛불 휘황한데 / 武帳曉開銀燭爛
사람 볼까 피하여 제목을 손수 여네 / 手開題目避人看
이는 책사(策士)의 일을 말한 것인데 사(詞) 역시 창량(暢亮)하다.
춘당이라 무사(武事) 사열 연이어 정 울리고 / 春塘閱武疊金鉦
극위는 삼엄할사 채장은 선명하이 / 戟衛森森彩仗明
궁녀들은 느지막에 발 틈새로 노려보며 / 宮女晩來簾隙覰
꽃 너머서 타구하는 그 소리를 멀리 듣네 / 隔花遙聽打毬聲
책상 앞에 가득 쌓인 재단된 문서들을 / 裁斷文書積案前
한꺼번에 메고 나와 합문에서 선포하네 / 一時舁出閤門宣
금오의 장주는 잘 처결해야 하겠기에 / 金吾章奏當詳決
붉은 실을 따로 가져 자세히 묶어 놓네 / 別把紅絲仔細纏
교기에 비 안 온 적 달이 벌써 지났으니 / 郊畿不雨已三旬
임금님 근심 겨워 자신을 옮기셨네 / 聖念憂勤避紫宸
대관에게 특별 분부 수라차림 제한하니 / 特敎大官裁御膳
적어랑 하장이랑 시물(時物) 신물(新物) 줄었구려 / 赤魚蝦醬減時新
빤 옷 가죽신이 겨울을 두 번 나니 / 澣衣革履再徑冬
상복이야 어찌 귀한 저 저호를 용납하리 / 常服寧容紵縞封
예전 일을 잘도 아는 머리 하얀 상궁들은 / 白髮尙宮知舊事
모두 말이 공검일랑 인종님과 같았다고 / 共言恭儉似仁宗
검은 비단 거죽 입혀 초피를 새로 호아 / 新縫貂帔掩烏紗
추위 맞춰 내려주어 은총 한결 더하누나 / 賜趁初寒寵渥加
직성하는 종반에겐 두루 응당 상주지만 / 直省從班當遍賚
그 중에도 제일 먼저 대신 집에 보내주네 / 就中先送大臣家
겹창 뚫는 모진 추위 성상(聖上)은 근심하사 / 寒透重簾軫聖憂
한림을 친히 보내 감옥살이 살피라 하네 / 翰林中使按牢囚
경범죄는 직결하여 얼어 죽는 일 없도록 / 罪輕當決無敎凍
금오와 상구에게 특칙이 내렸다오 / 特勅金吾與爽鳩
강연이라 선호라 어상이 널찍한데 / 江硯宣毫敝御床
비백을 휘두르니 천장이 찬란하이 / 閒揮飛白燦天章
촛불 앞에 스스로 구언 교서 초한 거지 / 燭前自草求言敎
구구하게 묵황을 본받자는 것 아니로세 / 非爲區區效墨皇
강포 차림 아침나절 대궐 중앙에 서서 / 絳袍朝立殿中央
어휘를 친히 쓰니 축지가 꽃답네 / 御諱親書祝紙芳
내일이 한식이라 능에 절을 드리겠기 / 明日拜陵寒食節
예방 승지 나와서 향폐(香弊)를 전하누나 / 禮房承旨出傳香
이어(俚語)를 썼으나 역시 아름답다.
제주에서 바쳐온 말 모두 다 용손이라 / 耽羅貢驥盡龍孫
옥을 뿜는 천 발굽 내구의 문이로세 / 噴玉千蹄內廏門
다만 삼십 필의 승황을 가리고서 / 只擇乘黃三十疋
환위랑 여러 둔에 골고루 나눠 주네 / 摠分環衛及諸屯
탄신 맞아 하례 올려 금란에서 끝이 나자 / 誕辰陳賀輟金鑾
합문(閤門) 밖의 여러 공들 문안만을 드리누나 / 閤外諸公只問安
마장을 마련하여 법종에서 반포하고 / 供御馬裝頒法從
곧 명개를 가져다 재관에게 공급하네 / 旋將明鎧給材官
원중이라 봄철에 종친들을 접대할 제 / 苑中春接內宗親
봉악을 높이 치고 법주를 마련했네 / 鳳幄高張法酒陳
투호놀이 활쏘기를 특별히 허락하니 / 特許投壺仍貫革
비낀 해에 모화의 금은빛이 눈부신걸 / 帽花斜日燦金銀
선계가 해명되자 종묘 뵙고 돌아오니 / 璿系昭誣謁廟廻
봉래궁에 시종하는 백관의 환패 소리 / 百官環佩侍蓬萊
높은 간대 해 오르자 금계는 춤을 추고 / 高竿日上金鷄舞
의장(儀仗)이 늘어서라 천세 소리 들려오네 / 千歲聲從仗裏來
의장이 풀리어라 대궐 뜰엔 하마 사양 / 彤墀放仗已斜陽
진수를 분부하여 옥당에 내려주네 / 敎輟珍羞下玉堂
문무루에 저장된 만 권의 서책들을 / 文武樓中書萬卷
어전에서 종일토록 운향에 쬐누나 / 御前終日爆芸香
봄날이라 꽃구경 옥화당에 거둥하사 / 看花春御玉華堂
동호에서 올린 삭계 글을 친히 보시누나 / 親閱東湖朔啓章
천안이 흐뭇하여 웃음 한 번 웃으시니 / 饒得天顔開一笑
북방에서 지금 막 수의랑이 돌아왔네 / 朔方初返繡衣郞
성 남쪽 정승님이 서연을 모시는데 / 城南丞相侍書筵
오래 입은 면포는 깃이 하마 뚫어졌네 / 猶着綿袍領已穿
종일토록 대가는 검덕을 감탄하여 / 終日大家嗟儉德
내려준 깁 빛나빛나 말 안장에 포개졌네 / 賜羅璀璨疊鞍韉
사직단(社稷壇) 제사 끝나 경첨을 아뢰는데 / 社壇祀畢報瓊籤
악장에 가을 추워 주렴 아니 걷었구려 / 幄帳秋寒未捲簾
느지막 궐문 앞에 전하는 말 당도하니 / 向曉闕門傳語至
육룡이 수레 메자 엄고 세 번 울리누나 / 六龍初駕鼓三嚴
전아(典雅)하다.
원 밖에서 중관이 첩여에게 알리는 말 / 苑外中官報婕妤
현관이 가마 타고 농사 구경 납시다가 / 縣官觀稼駕肩輿
온종일 대궐 앞에 선소가 전혀 없어 / 殿前盡日無宣召
선조의 내훈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네 / 譯得先朝內訓書
오늘은 사기라서 청재에 앉으시니 / 今朝私忌坐淸齋
장주가 앞에 쌓여 취재를 못하여라 / 章奏盈前未取裁
백판에다 공사를 가득 써 올리면서 / 白板滿書公事進
연달아 사알 불러 은대가 들썩이네 / 連呼司謁鬧銀臺
조종의 공업이 산하에 있는지라 / 祖宗功業在山河
이백 년 이래에 지과를 기뻐하네 / 二百年來喜止戈
왕의 자취 터가 잡힌 유첩이 남았으니 / 王迹始基遺牒在
육궁에선 다투어 어천가를 부르누나 / 六宮爭唱御天歌
서교에서 조칙 맞아 북이 세 번 울리어라 / 郊西迎勅鼓三通
극위(戟衛)는 대열 짓고 구진의 붉은 깃발 / 森戟鉤陳大旆紅
전해 외쳐 시신들 일제히 말에 오르니 / 傳叫侍臣齊上馬
연 앞의 맑은 창은 깊은 궁에 들리누나 / 輦前淸唱徹深宮
당체시 노상 읊는 성상의 슬픈 정곡 / 每吟棠棣聖情哀
북전이라 때때로 작은 악장(幄帳) 열리누나 / 北殿時時小幄開
낮을 당해 태관이 곡연을 배설하니 / 向午太官排曲宴
원문에선 두 분 군이 듭신다고 전해 외쳐 / 苑門傳叫二君來
상서는 멀리서 변무장을 받들어라 / 尙書遠奉辨誣章
황제 칙지(勅旨) 정녕하여 총광을 빌리었네 / 帝勅丁寧借寵光
꽃비단 검은 초피 모후(母后)에게 은혜 미치고 / 花錦皁貂恩逮母
다시 또 소배방의 금배를 반사(頒賜)하네 / 更頒金帶小排房
기이한 빛 방에 가득 주태가 찬란하니 / 異光盈室絢珠胎
여러 경을 급히 불러 풀을 걷어 오게 하네 / 急召諸卿捲草來
밤중이자 여관이 짚새기를 꼬면서 / 夜半女官綯藁索
뉘가 아들 많고 또 재(災)가 없나 물어보네 / 問誰多子又無災
금린이라 살찐 잉어 사옹에서 올려오니 / 錦鱗赬鯉薦可饔
발랄한 은 소반에 꼬리 갈기 빛이 붉어 / 潑剌銀盤尾鬣紅
선부에게 분부 내려 회를 빨리 치게 하여 / 特敎膳夫催作膾
수라 때에 맨 먼저 덕빈궁에 올리라네 / 飯時先進德嬪宮
겨울철 전에 앉아 사륜을 열람할 제 / 冬時坐閱殿絲綸
공봉하는 향료는 기운이 봄과 같네 / 供奉香醪氣似春
술맛이 요새 와선 사뭇 독하고 매워 / 酒味近來頗酷烈
중관은 말 전하네 여자의 의인에게 / 中官傳語內醫人
운잔의 주홍 새서(璽書) 은사에 절 올리며 / 雲牋紅璽拜恩私
여관(女官)들은 다투어 숙의에게 하례하네 / 爭賀昭容進淑儀
십 년이라 내직은 전급이 없었는데 / 內職十年無轉級
금분에 이제 처음 사내 아일 씻깁니다 / 金盆今始洗男兒
여반들은 일제히 새 단장을 갓 끝내자 / 新粧初罷女伴齊
동틀 무렵 중궁은 전 서쪽에 앉아 있네 / 拂曙中宮坐殿西
삭참이라 재배하고 눌러 시립해 보니 / 再拜朔參仍侍立
어의의 겸제 사용 오늘에야 알았다오 / 御衣今識用縑綈
이하 7편은 후덕(后德)에 관계된 것이다.
이른 아침 식감이 삭선을 진설하니 / 食監朝陳朔膳筐
까만 배라 붉은 대추 가장 색다른 빛을 / 玄梨紅棗最輝光
합 안에서 여러분 왕자를 불러내어 / 閤中呼出諸王子
중궁 슬하로 나가 다투어 맛을 보네 / 爭就中宮膝下嘗
여러 빈방 액문을 마주 대해 열렸으니 / 諸嬪房對掖門開
매일 밤 살짝 재미 자주 갔다 돌아오네 / 每夜偸歡數往廻
어둠 속에 말 웃음 들리잖게 조심조심 / 暗裏不敎人笑語
중전 상궁 갑자기 나타날까 두려워서 / 怕他中殿尙宮來
의련의 진배일랑 자주 말라 분부하고 / 進排衣練莫敎頻
겸주를 죄다 흩어 궁인(宮人)에게 상을 주네 / 散盡縑紬賞內人
외가에만 혜택을 치우치게 아니하고 / 不向外家偏惠澤
서적만을 가져다 제친에게 주었다오 / 只將書籍賜諸親
평상시엔 전합을 열어놓지 말게 하여 / 殿閤常時不許開
제방은 문틈으로 문안하고 돌아가네 / 諸房門隙問安廻
첫새벽에 특별히 황금약을 열게 하니 / 凌晨特啓黃金鑰
왕자의 부인들이 선물(膳物)을 올려오네 / 王子夫人進膳來
기도 파한 뭇 망제(望祭)에 모든 무당 배척하며 / 罷祈群望斥諸巫
내주에 진수 올림 허용하질 아니했네 / 不許珍羞薦內廚
성스러운 덕이 본래 기호가 없지마는 / 聖德本來無嗜好
수중엔 오히려 대진주를 가졌어라 / 手中猶捻大秦珠
대군에게 바친 폐백 천 끝이 더 넘으니 / 大君貢幣過千端
내다 팔아 좋은 비단 구해 드리도록 하네 / 斥賣令求上服紈
기릉의 연례 진상 이해 들어 정지되니 / 今歲綺綾停例進
문틈으로 상의관을 친히 불러 분부하네 / 隙門招敎尙衣官
원조라 궁중 하례 새벽같이 시작되어 / 元朝內賀拂晨來
어합에 문안하는 첩자가 돌아오네 / 御閤親安帖子廻
후대에 다시 올라 햇빛을 바라보니 / 更上侯臺看日色
뭉게구름 서린 채색 봉래궁(蓬萊宮)을 둘렀어라 / 簇雲霏彩擁蓬萊
이 아래는 궁중 절서(節序)에 대한 고사를 기재하였다.
저녁이자 등롱이 전대에 비추니 / 當夕燈籠映殿臺
상서 맞이 다투어 자하배를 올리누나 / 延祥爭進紫霞杯
모든 방문 닫아라 사리를 감췄으니 / 諸房門閉藏絲履
한밤중에 여윈 귀신 들어올까 두려워서 / 恐有中宵瘠魅來
해일이 지나가고 자일이 어두워지니 / 亥日纔過子日曛
궁녀들은 대궐 앞에 구름처럼 늘어섰네 / 殿前宮女立如雲
밤새도록 짚불을 여러 원에 살라대니 / 連宵藁火燒諸苑
돼지 주둥이 지져대고 쥐 주둥이도 지져대네 / 猳喙熏來鼠喙熏
봄을 맞는 방자는 은화로 첩을 지어 / 延春榜子帖銀花
세 궁에 올리고서 좋은 날을 축하하네 / 持獻三宮其拜嘉
인승이랑 채번을 재단하여 이루어지자 / 人勝彩幡初剪出
자의를 시신 집에 나누어 보내누나 / 紫衣分送侍臣家
오색 구름 서린 끝에 아침 햇빛 찬란해라 / 朝暾晃朗矞雲端
인일이 맑고 밝아 양전이 즐겨하네 / 人日淸明兩殿歡
새벽부터 반궁에선 선비를 고교(考校)하니 / 拂曉泮宮方校士
중관을 친히 보내 황봉을 내리누나 / 黃封宣賜遣中官
초벽이 너울너울 이삭 줄기 얽혔는데 / 椒壁離離綴穗莖
요화로 엿 만들어 토우를 제사하네 / 土牛初祭蓼花餳
시녀들이 다투어 전 앞에 모여들어 / 殿前侍女爭來集
금년에는 곡일이 맑다고 축하하누나 / 共賀今年穀日晴
내주에선 모처럼 향반을 쪄내어 / 香飯初蒸出內廚
상원이라 대보름 뭇 까마귈 먹여주네 / 上元佳節飼群烏
전맹에 해 오르자 앞다투어 바라보니 / 殿甍日射人爭看
기왓골 여기저기 하얀 밥알 깔려 있네 / 鴛瓦離離白粒鋪
새벽종 갓 들려라 운려가 열리나니 / 曉鍾纔徹敞雲廬
오늘 아침 어느덧 이월이라 초하룰세 / 驚覺今晨二月初
취충을 없애자고 연례행사 시행하니 / 要除臭蟲行舊事
궁앞 뜰에 솔잎을 여기저기 깔았구려 / 亂鋪松葉殿前除
궁중이라 한식날 연기 아니 금하는데 / 寒食宮中不禁煙
상림원(上林苑)의 쑥잎은 새파랗게 우거졌네 / 上林艾葉欲芊綿
궁 사람 캐고 캐어 소매품에 가득 차니 / 宮人採摘盈懷袖
흰 가루로 전 만들어 어전에 올리누나 / 煎作霜糕薦御前
청명이라 개수는 병랑에 소속되니 / 淸明改燧屬兵郞
문당에게 전해주어 건장으로 들어가네 / 傳授門璫入建章
유화는 하 새롭고 괴화는 갓 고우니 / 楡火正新槐火嫩
세 전에 분산하고 여러 방에 미치누나 / 散分三殿及諸房
금중이라 삼월 삼질 좋은 철을 만나 하니 / 禁中佳節値三三
여러 전의 궁아들은 엷은 옷을 입어보네 / 諸殿宮娥試薄衫
상림원을 향해 가서 다투어 투초하니 / 爭向上林來鬪草
그 중에도 맨 먼저 의남초(宜男草)를 취하누나 / 就中先取翠宜男
상도화(緗桃花) 비끼어라 벽도화(碧桃花) 중얼중얼 / 緗桃斜映碧桃開
백엽의 해당(海棠)에다 옥매도 끼었구려 / 百葉玟瑰間玉梅
푸른 등자(凳子) 붉은 분이 전폐에 널렸으니 / 靑凳紫盆羅殿陛
오늘은 상림에서 꽃을 진상해 오네 / 上林今日進花來
한낮이자 회랑에선 죽렴을 걷었어라 / 日午回廊卷竹簾
푸른 뽕잎 따고 따서 광주리에 가득 찼네 / 靑靑桑葉摘盈籃
궁인들이 대궐 아래 앞을 다퉈 와 바치니 / 宮人殿下爭來獻
첫잠 잔 팔잠에게 밥을 주라 명하누나 / 命餧初眠八繭蠶
귀인이 처음으로 엷은 깁옷 떨쳐 입고 / 貴人初試薄羅衣
홍도화 꺾어든 채 전 문에 기대었네 / 手折紅挑倚殿扉
해가 늦은 두청에 공사가 끝이 나니 / 日晩頭廳公事畢
성상께선 술을 따라 가는 봄을 전송하네 / 聖君斟酒送春歸
방거랑 닫는 말은 양대에 걸렸어라 / 紡車走馬掛涼臺
사월 파일 관등하러 양전이 납시었네 / 八日觀燈兩殿來
명년에 하느님이 복 내릴까 점을 치며 / 暗卜明年天降嘏
나인들은 다투어 옥충의 재를 보네 / 內人爭看玉蟲灰
돌 분의 맑은 물을 여관들이 끌고 나와 / 女官提出石盆湯
새벽같이 어전에서 꽃잎을 적셔주네 / 趁曉澆花御座傍
옥색의 여미향은 하마 벌써 눈 같으니 / 玉色酴醾香已雪
전의 서쪽 해돋이에 요황을 감상하네 / 殿西初日賞姚黃
천중이라 합문 앞에 상첩이 붙었는데 / 天中祥帖閤門前
창포주(菖蒲酒) 잔에 가득 애호도 달려 있네 / 蒲酒盈觴艾虎懸
몰래 어원을 향해 여반을 불러내어 / 偸向御園招女伴
푸른 괴수(槐樹) 그늘 속에 추천을 시험하네 / 綠槐陰裏試秋千
단오날 대내에서 채선을 내리는데 / 綵扇端陽內賜時
은대와 경악에서 은혜 가장 많이 입네 / 銀臺經幄最恩私
바람 머금은 그 부채 봉안에다 백동(白銅) 고리 / 含風鳳眼銅環箑
관가가 아니고선 가질 수 없는 거지 / 不是官家不得持
삼복이라 궁중 단장 부환을 제거하고 / 三伏宮粧去副鬟
잠방이 차림 서합에 빙산을 첩지었네 / 衩衣西閤疊氷山
채운 수박 담근 오얏 더위 한창 식히는데 / 割苽沈李方蠲熱
궁감이 문득 와서 만반을 재촉하네 / 宮監俄來促晩班
촉만반(促晩班)은 보석반(報夕班)으로 된 데도 있다.
맑은 물결 굽어 쏟아 홍루를 안고 도니 / 晴瀾曲瀉抱紅樓
보름날 틈을 타서 잔치 놀이 벌였어라 / 望日偸閒作宴遊
얼음에다 채운 단병 한속(寒粟)이 일어난 듯 / 團餠侵氷寒起粟
유두건만 머리 감을 생각마저 포기되네 / 却抛雲髻洗流頭
갈잎 빻고 고기 다져 만두를 만들어라 / 糝蘆泥肉製饅頭
참외와 과일들을 걸교루에 벌여놓았네 / 瓜果爭陳乞巧樓
밤이 들자 나인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 入夜內人爭指點
은하수 서쪽 가라 견우에게 절 드리네 / 絳河西畔拜牽牛
중원이라 좋은 철 난분을 차려놓고 / 中元佳節設蘭盆
만과는 주렁주렁 백종이 번성쿠나 / 蔓果紛披百種繁
동서에 조회 파하자 궁감은 물러가서 / 東序罷朝宮監去
상림원 깊은 곳에 죽은 넋을 제사하네 / 上林處深祭亡魂
호서에서 처음으로 진상해온 이른벼는 / 湖西初進早稻來
은합에 소복소복 흰 쌀의 무더길레 / 銀盒離離白粒堆
침원에 걷어보내 오전을 지공하고 / 輟送寢園供午奠
내의는 아울러 자하배를 올리누나 / 內醫兼進紫霞杯
석 달 가을 달빛은 이 밤이 가장 좋아 / 三秋月色此宵多
지대라 뒷동산을 잠시나마 지나보네 / 苑後池臺得暫過
흠경각 앞에 오자 하늘은 물 같으니 / 欽敬閣前天似水
돌 난간 높은 데서 상아에게 절하누나 / 石欄高處拜嫦娥
날을 가려 원서당에 선비들을 고시(考試)하니 / 涓辰試士苑西堂
최고 소리 두둥둥 하마 벌써 석양일레 / 催鼓逢逢已夕陽
유삼이라 국영으로 남 모르게 짝을 맺어 / 萸糝菊英偸結伴
통명전을 벗어나 중양놀이 짓는구려 / 通明殿外作重陽
동지(冬至)라 관대에서 한 양을 기다리니 / 至日觀臺候一陽
황패는 양전(兩殿) 뜰에 완항처럼 늘어섰네 / 兩庭璜佩立鵷行
용포자락 일찌감치 전전에 다다르니 / 龍袍趁早臨前殿
선주에 재촉하여 팥죽을 올리게 하네 / 催進仙廚豆粥嘗
원내라 요림 속엔 들매화 모양 변코 / 苑內瑤林變野梅
대궐 뜰 궁기와는 한빛으로 하얗구나 / 殿墀宮瓦白皚皚
금천교 다리 위에 갖신 소리 모여드니 / 錦川橋上靴聲集
이는 다 오늘 아침 눈을 하례하자는 것 / 盡是今朝賀雪來
납일이라 재단에 눈이 한창 몰아치고 / 臘日齋壇雪驟來
육군은 들 밖으로 사냥갔다 돌아오네 / 六軍郊外獵初廻
멧돼지랑 다람쥐가 낭옥에 가득 차니 / 豪猪蒼鼠堆廊屋
오는 해를 기다려서 두재를 낫게 하네 / 留待來年療痘災
구나 소리는 침문에 들려오고 / 驅儺聲徹寢門深
학춤이랑 계구는 금림에 들썩이네 / 鶴舞鷄毬鬧禁林
오색 처용 일제히 소매를 떨치면서 / 五色處容齊拂袖
기행으로 다투어 봉황음을 부르누나 / 妓行爭唱鳳凰吟
‘妓行相對讚觀音’으로 된 데도 있다.
홍건의 가면으로 소 형상을 시늉하며 / 紅巾假面着牛形
징 북 들썩이고 도열(桃茢)로 뜰을 쓰네 / 鑼鼓喧闐茢掃庭
수만 집이 한때에 귀신을 몰아내라 / 萬戶一時驅鬼出
천왕이랑 선녀를 문병에 붙인다오 / 天王仙女帖門屛
맑은 새벽 소대에 홍금을 하사하니 / 淸曉昭臺賜錦紅
고화는 차곡차곡 자리는 선명하네 / 誥花晴壓紫泥瀜
내인과 방외들은 다투어 와 하례하고 / 內人方外爭來賀
상식도 오늘 아침 상궁에게 절을 했네 / 尙食今朝拜尙宮
이하는 궁중의 고사를 잡기(雜記)하였다.
품 좁은 깁저고리 꽃무늬도 자잘할사 / 衫羅窄窄小花文
새로 들어온 궁인 두 대로 갈라졌네 / 新入宮人兩隊分
어상을 한번 모실 차례임을 알겠으니 / 知是御床容一直
뭇사람 속에 먼저 붉은 치마를 입었구려 / 衆中先着石榴裙
세숫대야 받들어라 작은 주방 지키면서 / 匜槃直守小廚房
요지 향해 무릎 꿇고 주장을 올리누나 / 跪向瑤墀進酒漿
내가 만나뵈도 오히려 피할세라 / 逢着內家猶不避
일생 동안 한번도 군왕을 못뵙는걸 / 一生曾未識君王
허, 광녀(曠女)와 기재(棄才)가 얼마이랴.
초년에는 이불 안고 춘당에 직했는데 / 初年抱被直春堂
병으로 휴한하여 곡방에 있게 됐네 / 因病休閒在曲房
굳이 소아를 맞아 데려다 대식하며 / 强就小娥來對食
의장을 손수 열고 나상을 내주누나 / 手開箱篋乞羅裳
대식(對食)이란 두 글자는 반사(班史) 비연전(飛燕傳)에서 나왔는데 지금 궁중에도 있다.
합문 밖 첫새벽에 백관이 웅성웅성 / 閤外凌晨擁百官
뜰을 나눈 깃발들은 서린 용이 찬란하네 / 分庭旗尾燦龍蟠
궁인들은 가서봉 알지를 못하고서 / 宮人不識哥舒棒
횡문의 적장으로 인증하여 보는구려 / 認作橫門赤杖看
은선 두른 비단 보에 귀한 음식 고이 싸서 / 圈銀羅褓裹瓊饔
사묘의 재하는 날 상궁을 보내누나 / 私廟齋晨遣尙宮
유모를 바로 쓰고 연로에 다다르니 / 帷帽着來臨輦路
어인은 오화총을 끌고 나와 올리누나 / 圉人牽進五花驄
경루(瓊樓)에 홀로 앉아 붉은 나의 수놓으니 / 瓊軒坐繡紫羅衣
한 가닥 향 연기는 창 밖으로 흩날리네 / 一炷爐香散晝扉
종일토록 궐문에 갈도 소리 못 듣겠고 / 終日闕門無喝道
요즘와선 더욱더 간서가 드물다오 / 爾來尤覺諫書稀
봄비단 가는 띠는 서비로 질끈 묶고 / 春羅細帶束犀比
보월의 얽힌 구슬 자리를 맺었구려 / 寶月珠纏結紫褵
예관에게 분부 내려 별원을 치장하니 / 敎着禮官治別院
대방이라 옹주님 혼기가 닥쳤기에 / 大房翁主有婚期
서궁으로 밀려난 뒤 구관을 닫아건 채 / 譴在西宮閉九關
삼년이 지났어도 용안을 못뵈었네 / 三年猶未覲龍顔
오늘 아침 비로소 황감을 하사받고 / 今朝始賜黃柑子
보낸 사람 마주 대해 검은 머리 매만지네 / 却對來人理翠鬟
은대로 올렸어라 봉잔이 차곡차곡 / 銀臺投進疊封箋
관료들 성적고사 이해에 있음일세 / 知是官僚殿最年
성상께서 열어보는 그날을 기다려서 / 直待上前開坼日
글월 아는 궁녀들이 어상(御牀)에 접근하네 / 解書宮女近床邊
문무를 뜰에 나눠 계화가 향기롭자 / 分庭文武桂初香
문틈으로 궁녀들은 두어 줄을 둘러쌌네 / 門隙宮娥擁數行
장원을 외쳐오자 후배가 많아지니 / 唱到壯元多後拜
발 밀치고 다투어 녹의랑을 바라보네 / 排簾爭看綠衣郞
접고 펴길 폐했어라 아첨을 깊이 꽂아 / 深揷牙籤廢卷舒
노랑보에 겹겹 싸서 재려에 두었다오 / 重包黃袱置齋廬
사람이 훔쳐보질 못하도록 함봉하고 / 緘封不許人偸見
전조부터 내려온 석하서라 이르기만 / 道是前朝石下書
내일 새벽 산릉(山陵) 거둥 화류 말을 익히느라 / 明晨陵幸習驊騮
태복은 원 속에서 아침 내내 남아 있네 / 苑裏終朝太僕留
말 잘 타는 내승을 입닳도록 칭찬하며 / 爭賛內乘騎馬慣
채찍을 비껴 들고 작은 홍루 지나가네 / 嚲鞭橫過小紅樓
원화는 잎이 뜨고 물조차 해맑은데 / 圓花浮葉水漣漪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와 봄 적삼을 빨래하네 / 來浣春衫慶會池
날마다 발 밖에서 오고 소리 들려오니 / 每日隔簾聞午鼓
옥 섬돌 꽃 그림자 두어 전을 옮겼구려 / 碧堦花影數塼移
무고라 동녘 머리 별원이 깊숙하니 / 武庫東頭別院幽
대방에서 오히려 내중에 와 노니누나 / 大房猶到內中遊
궁아(宮娥)에게 허(許)할 건가 횡루에 오르도록 / 橫樓肯許宮娃上
굽이굽이 모두 다 상렴을 내렸구려 / 曲曲緗簾盡下鉤
유적이라 봄날 아침 자신을 둘렀는데 / 褕翟春朝拱紫宸
향기로운 어삼엔 수놓은 기린 주름졌네 / 御衫香蹙繡麒麟
은비녀 칠보(七寶) 머리 앞에 나와 절 올리니 / 銀釵寶䯻當前拜
궁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 이르는걸 / 道是宮中第一人
궁중(宮中)을 승은(承恩)으로 한 데도 있다.
자옥이라 구란의 비녀를 새로 꽂고 / 新簪紫玉九鸞釵
웃으며 옥계 내려 봉혜를 신는구려 / 笑下瑤階躡鳳鞋
귀가를 향하여 사물이라 자랑하며 / 說向貴家誇賜物
먼저 가슴 앞의 작은 금패를 내보이네 / 胸前先示小金牌
연꽃 버선 노랑치마 남다른 사랑 입어 / 蕖襪緗裙荷寵殊
겨울 아침 부름 받아 호담요에 꿇어앉네 / 冬朝承召坐氍毹
관가는 당 동쪽을 자수(自手)로 가리키며 / 官家自指堂東廡
양귀비(楊貴妃)의 출욕도를 감상하라 이르시네 / 令賞楊妃出浴圖
가을이라 비단 요로 난방을 지키자니 / 羅裀秋直小蘭房
고요한 밤 바람 슬슬 전각이 서늘쿠나 / 靜夜西風殿角涼
잠결에 부르시는 말씀 소리 들리는 양 / 睡裏訝聞天語喚
발을 누른 은방울이 땡그랑 울리누나 / 壓簾銀蒜響琅璫
꽃 서린 둥근 베개 검은 머리 기름지고 / 蟠花圓枕膩雲鬟
용뢰(龍腦) 사향(麝香) 타는 연기 박산이 어둑하이 / 龍麝霏熏暗博山
오경이라 장막 속에 놀라 꿈을 깨니 / 帳裏五更驚夢罷
쇳소리 징글징글 당기어라 구문 고리 / 鏁聲金掣九門環
자료수집 東齊 2244 李觀熙
**역사는 무한하겠지만 왕조는 눈송이처럼 사라졌으나, 곱고 고운 기록은 오래토록
보는 이를 자극하며 가르침을 받게 합니다.
한 여성이 이루어 놓고 간 뒷자취 일지언정 남긴 자취는 중화의 핵심에 있던 송나라를 흔들어 놓은 시들은 아직도 흐르는 향기와 땀내음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네요,
그 한 잎 한수 마다 고인 수정같은 물방을은 아직도 연연한 그늘로 땀을 닦아주는 군요.
첫댓글 책 한 권에 비길 만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