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자 보호의무자 제도, 가족에 ‘독박 책임’… 정부는 뒷짐
[조현병 환자 관리 부실]
오늘 정신건강의 날… 중증 정신질환자 가족들의 이야기
비자발적으로 입원한 정신질환자 10명 중 7명은 가족에 의해 입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에 규정된 보호의무자 제도 때문인데 이를 두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정신질환자 입원 및 치료 책임을 가족에게 미루면서 치료 공백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발생한 흉기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질환자의 치료 공백은 자칫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국가와 지자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 출동한 경찰도 ‘보호의무자’ 있으면 손 놔
동아일보는 10일 ‘세계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중증 정신질환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족들은 “정부에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큰 정신질환자를 법원 판단으로 입원시키는 사법입원제를 도입한다고 하는데 보호의무자 제도를 개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았다.
9일 보건복지부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정신질환자의 비자발적 입원 건수는 18만7570건에 달했다. 이 중에는 가족 등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이 12만7238건(67.8%)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경찰에 의한 응급인원은 4만1687건(22.2%), 지자체에 의한 행정입원은 1만8645건(10%)에 불과했다. 전체의 3분에 1에만 정부나 지자체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건강복지법이 보호의무자에게 “정신질환자의 치료 및 요양과 사회 적응 훈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1차 책임이 가족 등에게 있다 보니 경찰이나 지자체도 개입을 꺼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30년째 조현병 환자인 형을 돌보는 김영희 씨(49)는 “6년 전 형이 극도로 흥분한 증세를 보여 경찰에 신고했는데 출동한 경찰은 보호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이송을 거부했다”며 “사설 구급차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 달라고 사정해 사설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형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 이미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력도 있다”며 “그럼에도 경찰과 소방도 민원이나 소송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2019년 4월 경남 진주시의 임대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살해하고 17명에게 부상을 입힌 안인득(46)도 사건을 저지르기 전 응급 입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노모가 당시 요양병원에 있었음에도 보호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관리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 “보호의무자 입원 규정도 까다로워”
가족이 환자를 병원에 이송한다고 모두 입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최근 5년간 보호의무자 입원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경우는 2194건이나 된다. 보호의무자 요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서류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A 씨는 올 3월 조현병을 가진 친언니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의사로부터 “보호의무자인 부모가 아니라 입원시킬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현행법상 부모가 아닌 형제자매가 환자의 보호의무자로 인정받으려면 동거 사실과 경제적 부양 사실 등을 증명해야 한다. A 씨는 “부모님과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됐는데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막막했다”고 말했다. 보호의무자 2명이 동의해야 한다는 규정도 핵가족과 1인 가구가 많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전문가 상당수는 정신질환자의 치료 공백을 막기 위해선 보호의무자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중증 정신질환의 무거운 부담은 더 이상 개인과 가족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며 “입원을 포함한 어려운 결정을 가족에게만 부여하는 보호의무자 입원 제도 폐지를 적극 논의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또 “중증 정신질환 치료를 가족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는 중증 정신질환 국가책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보호의무자 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이 올 2월 발의됐지만 4월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된 채 제자리걸음만 이어가는 상황이다.
최미송 기자
강력범죄 피의자 중 정신질환자 작년 6052명
[조현병 환자 관리 부실]
4년새 27%↑… 코로나로 치료 놓쳐
“치료-돌봄 확충 방안 마련을” 지적
최근 잇따라 발생한 ‘묻지 마 흉기 난동’ 사건 중 상당수는 치료를 중단한 조현병 환자의 소행이었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조현병 환자의 범죄 비율은 일반인보다 낮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기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조현병 환자에 대한 치료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9일 경찰청에 따르면 살인과 성폭행 등 5대 강력범죄 피의자 중 정신질환자는 2018년 4774명에서 지난해 6052명으로 약 27% 늘었다. 코로나19 확산 기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의 증세가 악화돼 그중 일부가 범죄까지 저지른 것으로 풀이된다.
올 8월 3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에서 차량 및 흉기 난동으로 14명의 사상자를 낸 최원종(22)은 2020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판정을 받은 후 치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 날(4일) 대전 대덕구의 한 고등학교에 침입해 교사를 흉기로 찌른 20대 남성 역시 2021년 조현병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같은 달 19일 서울지하철 2호선 전동차에서 흉기를 휘둘러 승객 2명을 다치게 한 50대 남성도 미분화조현병으로 치료를 받다가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이제 엔데믹에 접어든 만큼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와 돌봄 확충 방안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해국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공공 정신병원 등이 코로나19 환자를 수용하느라 병원 문을 닫으면서 정신질환자 상당수의 증세가 악화됐다”며 “공공 상담 서비스 등을 대폭 확충해야 정신질환자에 의한 흉악범죄가 추가로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조현병 환자는 치료만 받으면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이 일반인보다 낮다”며 “제대로 된 치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미송 기자
보호의무자制, 유엔-인권위서도 폐지 권고… 美는 사법입원制-대만은 지역사회서 심사
[조현병 환자 관리 부실]
해외선 가족外 경찰 등도 입원요청
“입원-치료에 국가 개입 여지 늘려야”
정신질환자 비자발적 입원 시 보호의무자 동의를 받도록 하는 제도는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폐지 권고를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21년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전가하는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족이나 후견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심사기관에 의한 입퇴원 결정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보호의무자에 의한 강제 입원 제도를 여전히 유지하는 나라는 동아시아권에서 한국과 중국뿐이라고 한다. 한국의 보호의무자 제도에 영향을 준 일본의 경우 보호의무자 개념을 법에 규정했다가 2013년 보호의무자 제도를 폐지하고 입원 절차를 단순화했다.
꼭 보호의무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가족 등의 동의를 얻으면 입원시킬 수 있게 해 결과적으로 보다 신속한 대응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현병 환자 신고를 받으면 지자체장이 정신보건지정의에게 진단을 의뢰하고, 진단 결과가 나오면 ‘정신의료심사회’가 강제 입원을 결정하는 절차도 시행하고 있다. 정신의료심사회엔 법률 전문가와 장애인 복지 연구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등 관련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대만 역시 보호의무자 대신 지역사회 정신치료심사회 허가를 통한 강제 입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은 보호의무자와 무관하게 사법입원제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영국과 호주는 법조인과 정신건강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정신건강심판원에서 정신질환자의 강제 입원 및 치료 여부를 결정한다. 가족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지역사회, 동거인 등이 언제든 병원에 입원 요청을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도 가족이 정신장애인의 입원과 치료를 결정하고 국가가 가족이 관여하지 못할 때에만 개입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때가 됐다고 지적한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사법입원제 도입 논의가 진행 중인데 이에 앞서 응급 입원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인권과 치료를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의 첫걸음”이라고 지적했다.
최미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