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 짜 : 2020년 5월 16일(토)
구 간 :
창동역 ➡ 창동리 석조 표지석 ➡ 홍명희 옛집터 ➡ 송진우 옛집터 ➡ 김병로 옛집터 ➡ 정인보 옛집터 ➡ 양주목사 선정비 ➡ 문예봉 옛집터 ➡ 전태일 옛집터
➡ 함석헌 기념관 ➡ 회산군 묘 ➡ 김수영 문학관 ➡ 연산군 묘 ➡ 전형필 가옥 ➡ 계훈제 옛집터 ➡쌍문역
소요시간 : 약 6시간(09시 ~15시, 점심 식사시간 포함)
창동리 석조 이정표 (서울시 도봉구 해등로16길 81, 창동 266)
원래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95년 8월에 창5동 동사무소 옆 공터로 원래 모습 그대로 이전하고, 옆에 안내 표석과 새로 복원된 이정표를 설치하였다
새 이정표는 원래의 이정표와 같은 모형이다
이후 창5동 동사무소가 다시 이전함에 따라 2015년 5월 19일 원래 위치로 이전하였다
조선시대 양곡창고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창골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창동리'는 조선시대 마을이름이다
'창동리'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지금은 판독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전국 각지에 동명(洞名)을 알리기 위해 마을입구에 세운 빗돌의 시원적인 형태로 도봉구 창동지역의 옛 이름을 새긴 이정표로서 그 의미가 있어 도봉구 향토문화재로 지정한다
홍명희 옛집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36나길 40, 창동 820)
1939에 이사와 5년 여를 거주하다 1944년 봄 증조모 신씨 일가가 살고 있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강정리로 옮겨갔다
♤ 홍명희 생가 (홍범식고택,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 동부리 450-1)
1888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나 이곳 생가에서 13세까지 살다가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생가는 1730년경 혹은 1861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태인 군수와 금산 군수를 지낸 홍범식이 소유하고 있었다
홍범식은 홍명희의 아버지로,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1910년 경술국치)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항거하였다
(객사에서 목 매달았다)
♤ 익선동 옛집터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32가길 11, 익선동 33-6)
신간회 민중대회(1929년)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2년 1월 가출옥하여 대하소설 '임꺽정'을 집필하던 곳이다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북쪽으로 간 후 북한에 주저앉았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거쳐 부수상을 지냈고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68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나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은 몇 차례의 중단을 겪으면서 조선일보와 조광지 등에 13여년 동안 연재했지만 결국 끝을 보지 못했다
미완의 소설 '임꺽정'은 현재 북한에서 소설가로 활약중인 둘째 손자 홍석중이 뒷부분을 마무리 지었다
(홍석중은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장남 홍기문의 둘째 아들이다)
월북문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간행함으로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임꺽정’은 한국 근대 역사소설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우리말의 보고이자 대해(大海)로 불릴 만큼 언어 표현이 빼어난 소설로 정평이 나 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한 시기에 벽초는 일부러 이 어휘들을 집어넣어 쓴 것이다
♤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洪永淑, 또는 홍애연洪愛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는데, 맏딸 또는 둘째딸이라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1921년 생)인 홍주경과 홍무경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되자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으며, 이들 중 한명이 1950년 1월 15일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송진우 옛집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36가길 69, 창동 219-5)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거주했던 집터이며, 아파트 를 지으면서 집은 헐렸다
(일부는 송진우 옛집터가 삼풍유치원 쪽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오늘 함께하신 소요님의 증언으로 이곳이 집터임을 확증 할 수 있었다. 감사드립니다 ^ㅁ^)
태평양전쟁(1941년)이 일어난 후 많은 민족지도자 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에 가담하였으나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끝까지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 송진우 생가 (전남 담양군 금성면 손곡길 12-1, 대곡리 541-1)
1890년 신평 송씨 송훈(宋壎)과 남원 양씨의 넷 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곳은 한말 의병장 기삼연(1851~1908)이 을미사 변 이후 1896년 2월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평리원에 이감 중 탈출하여 은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의병장이며 성리학자였던 기삼연은 송진우 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하여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 원서동 옛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17, 원서동 74-1)
1920년대 초부터 1945년 피살당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 1945.12.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반탁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 에서 한현우 등 6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최송설당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의 도움으로 궁에 입궐 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보모 생활을 하고 김천으로 낙향하여 육영사업에 정진하였다
전재산인 30만 2100원을 기부하여 지은 김천고보가 현재의 김천중, 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고종으로부터 귀비에 봉해지고 송설당(松雪堂)이라 는 호를 부여 받았다
김병로 옛집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34길 14, 창동 731-43)
1934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김병로가 창동으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 이주해 창동은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됐다
일제는 이들 ‘요시찰(要視察)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 김병로 생가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160, 하리 519)
1888년 이곳에서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이루어 졌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순창군에 서 후손들의 고증을 거쳐 안채와 문간채를 2014년 5월에 복원을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공평동 옛집터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공평동 17)
1924년 4월 22일 오후 6시부터 공평동 49번지 김병로 집에서 조선변호사협회 임시총회가 회장 허헌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이미 멸실되었으며 이문설렁탕 앞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11년 이문설렁탕은 공평동재개발로 견지동 88번지로 이전하고
지금은 센트로폴리스빌딩이 들어서 있다
지하에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 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2대 대법원장으로 9년 3개월동안 재임했다
♤ 김종인 (경제학자, 관료, 정치인 -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김병로의 손자이다
즉 김병로의 둘째 아들 김재열의 외아들이 김동인이다
김재열이 1944년 병마로 사망하여 할아버지 김병로 슬하에서 자랐다
김종인은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역임한 화려한 정치 이력과, 1980년 광주 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것과, 계절마다 옷 바꿔 입듯 여당과 야당 을 수시로 오갔다
첫댓글 새로운 연재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