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하나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좀팽이처럼>(1988)-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사색적, 반성적, 성찰적, 관조적
◆ 표현 : 시각적 이미지, 사색적 어조
자연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함.
유사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의미를 강조함.(1연과 2연)
시적 대상이 점차 바뀌면서 화자와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워짐.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3연 → 화자는 한 해가 다 지나가는 어느 겨울날 나뭇잎이 혼자서 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떨어짐의 원인이다. 2연에서는 바람 때문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노래했었다. 그런데 3연에 오게 되면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혼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비로소 나뭇잎은 생성해서 언젠가는 소멸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나뭇잎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로 확산하게 된다. 모든 생명체는 생성해서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4연 → 개별자로 태어나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을 살다가 마침내 각자의 생을 마감하며 소멸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뭇잎의 돋아남과 떨어짐을 통해 생성과 소멸에 이르는 인간의 삶을 유추하고 있다.
◆ 제재 : 나뭇잎 하나
◆ 주제 : 마지막 나뭇잎을 보며 느끼는 인생의 의미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여름) 무성한 신록 속에서도 화자가 인식하지 못한 나뭇잎의 존재
◆ 2연 : (가을) 단풍이 들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앞에도 화자가 인식하지 못한
나뭇잎의 존재
◆ 3연 : (겨울) 대추나무 가지 끝에 오직 하나 남은 나뭇잎이 지고서야 그 존재를
인식하는 화자
◆ 4연 : 나뭇잎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인식한 후에 알게 된 인생의 의미와 깨달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계절의 흐름 따라 시상이 전개된다. 한 여름의 무성한 나뭇잎도, 화려한 색깔로 바뀐 단풍과 바람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나뭇잎도 화자의 주위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 나뭇가지에 오직 하나 남았던 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화자는 그것을 인간들의 삶과 연관짓고 있다.
시상의 중심은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의 떨어짐'이다. 이 시의 시상은 시적 대상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단계까지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적 화자는 신록이 우거졌을 때(젊은 시절) 그 대추나무 옆을 지나갔지만 그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뭇잎이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질 때(중년 시절)에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가 문득 혼자서 떨어질 때(죽음), 바로 그것을 느낀다. 도대체 그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시들고 결국은 사라져 간다는 것, 생장과 사멸이라는 자연의 섭리 말이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결국 사멸 또는 죽음의 길을 가게 되지만, 살아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자신의 주변에서 하루도 끊이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말이다. 마치 무더기로 떨어지는 낙엽에서 '소멸'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외롭게 혼자 사멸하는 죽음을 통해서만 그것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다. 인간에서 있어서 죽음이란, 늘 있어 왔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항상 나만의 개별적인 죽음일 뿐이다. 각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일반화할 수 있는 어떤 추상적인 죽음이 아니다. 오로지 단 한 번뿐인 죽음인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저마다 한 개씩 떨어지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홀로 태어나 무리를 이루고 살다가 다시 홀로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뒤늦게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저마다 한 잎씩 돋아나고 떨어지지만 그 개체는 세상과 화합할 수밖에 없는 유의미의 존재임을 인식한다. 가까운 것에서 먼 것을 알아가듯 '나뭇잎 하나'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뭇잎 하나'가 우주며, 그 생몰이 곧 삶의 그것임을 일깨운다. 하지만 신록이 우거졌을 '젊은 시절'에는 그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드는 '중년'에도 몰랐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질' 때도 못 느꼈던 것을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가 문득 혼자서 떨어질' 때 비로소 비장한 자연의 섭리를 느낀다. 쉬운 일상의 언어와 명료한 구문의 시에서 깊은 삶의 사유를 담고 있는 김광규 시인 특유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 잔잔하고도 사색적인 시다.
■ 2009 수능언어영역기출문제
32. (나)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④
① 1연, 2연에서 유사한 구조의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화자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② 1~3연에서 '골짜기→길→대추나무→나뭇잎 하나'로 시적 대상이 바뀌면서 화자와
대상의 거리가 가까워짐.
③ 1~4연에서 '그러니까', '문득', '마침내'와 같은 부사는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인식에
주목하게 하고 있다.
④ 4연에서 '저마다 한 개씩'이라는 시구를 반복함으로써 세상과 화합할 수 없는
존재의 고뇌를 강조하고 있다.
⑤ 4연에서 화자는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자연물의 변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
[작가소개]
김광규 : Kim Kwang-Kyu대학교수, 시인
출생 : 1941. 서울특별시
소속 : 한양대학교(명예교수)
학력 :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 학사
데뷔 : 1975년 문학과 지성 등단
수상 : 2018년 제30회 정지용 문학상
2007년 제19회 이산문학상
경력 :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작품 : 도서 38건
1941년 1월 7일 생(8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에서 출생했다.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 '문학과 지성'에 등단했고 2007년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음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뜻이 분명하고 건강하며 읽는 이들에게 쉽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주요 작품으로는 「묘비명」[2],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어린 게의 죽음」, 「아니리」, 「도다리를 먹으며」, 「상행」, 「서울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