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함석헌 기념관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23길 33-6, 쌍문동 81-78)
함석헌의 차남 함우용씨 부부가 1978년부터 살던 집으로, 함석헌은 이 집에서 1983년부터 타계하는 1989년 2월까지 7년간 거주하였다
함석헌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이 옛집을 보존, 2014년 9월 공사를 착공하여 2015년 9월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 함석헌 생가
190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생가는 확인할 수 없다
♤ 원효로 옛집터 (서울시 용산구 효창원로12길 12, 원효로4가70)
39.67㎡(12평)짜리 작은 집으로,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 친지들이 마련해 준 집이다
이미 멸실되었으며 그 자리에 승진빌라가 들어서 있다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현 오산 중,고등학교 - 보광동 소재)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씨알의 소리』탄생지이기도 하다
1942년『성서 조선』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서대문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해방 후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벌인 반소 - 반공 시위)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8년에는 자유당 독재 정권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써 투옥되었기도 하였다
1970년 4월 잡지『씨알의 소리』를 창간, 민중 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힘을 쏟았다
♤ 民 대신 "씨알"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전통 있는 순우리말인 겨레라는 단어가 이미 있는데 불필요하게 새 낱말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 1979년, 1985년 등 2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1650년대 영국의 조지 폭스가 제창한 명상운동에서 시작된 기독교 교파) 세계봉사회가 함석헌을 노벨평화 상 후보로 추천했다
즐거운 점심시간 입니당 ^ㅁ^
맛갈스런 밑반찬과
된장찌게? 청국장찌게? 아무튼 찌게 (다들 맛있다고 이구동성)
회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81)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과 영원군부인 안씨 쌍분 묘역
비신 앞면에는 '회산군지묘(檜山君之墓) 영원군부인 안씨지묘(寧原郡夫人安氏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황명정덕칠년윤오월십일일수(皇明正德七年閏五月十一日竪)이라 새겨 1512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동자석인(童子石人)은 쌍계를 갖추고 양손에 꽃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꽃의 형태를 달리하여 조각하였다
1512년(중종 7)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도상(圖像)을 수용하여 묘 동자석인으로 적용한 초기 사례로서 매우 중요한 석물(石物)이다
회산군 묘역 오른쪽 밑에 있는 新신도비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 회산군(檜山君)
1471년 성종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숙의 홍씨이다
(숙의 홍씨는 성종과의 사이에서 7남3녀를 두었다)
이름은 이염(李恬)이다
(연산군의 이복 아우)
1500년(연산군 6) 연산군에게 직간하다가 형 안양군 (安陽君)과 동생 봉안군(鳳安君)은 죽고, 회산군만이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만류로 궐문 밖으로 방면(放免)되었다
1506년(중종 1) 아우인 영산군(寧山君) 및 중신들과 반정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중종의 즉위로 사면되었 다
영원군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아들이 없어 중종이 회산군의 아우인 견성군(甄城君) 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 이수계(李壽誡)로 후사 를 잇게하였다
김수영 문학관 (서울시 도봉구 해등로32길 80, 방학동 498-31)
도봉구에 거주하였던 시인 김수영의 시문 및 시학의 세계와 그의 작품들을 주제로 업적을 기리기위해 서울시 도봉구청에서 도봉구 공립문학관으로 설립 하였다
2013년 11월 27일에 개관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도봉 구청에서 관장하며, 도봉구립 작은도서관과 강당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 김수영 생가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94, 종로 2가 84-11)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 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터에는 ‘YBM 어학원’이 들어서 있다
♤ 종로구 옛집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267, 종로 6가 116)
생가인 관철동에서 첫 돌이 채 지나지 않아 이사온 곳으로 200여평 규모의 큰 기와집이었으나 그가 12세 때 걸린 뇌막염의 치료비로 이 집은 처분되었다 (종로6가 116)
1935년에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면서 떠날 때까지 1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집 뒤채에는 그의 고모가 살던 약 40평 가량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김수영이 성장한 곳이다(종로6가 117)
그가 훗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곳도, 일제 말기 에 만주로 갔다가 해방 후 돌아와 산 곳도 바로 이 집이다
♤ 구수동 옛집터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198, 구수동 41-2)
1956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양계업을 했다
그 터엔 재개발로 어느 시기?인가 영풍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지만, 이튿날인 16일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 도봉구 본가 (서울시 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 도봉동 107-2)
한국전쟁 뒤인 1954년 무렵 선영(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등이 묻혀 있었다)이 있던 이곳(약 3,000평 중 약 500평이 군부대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약 2,500평을 1필지로 하여)으로 옮겨와 살았다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에 분가해 살고 있던 김수영은 어머니를 위해본가에 병아리 700여 마리를 분양하여 기르도록 하는 한편 수시로 찾아와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본가 터에 양계장 축사와 집필실(조그만 기와집) 만이 김수영의 주거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일 한 곳으로 남아 있다
집필실로 사용하던 곳(외딴집 - 흑염소 전문음식점)
양계장으로 사용하던 곳(광흥 돌핀 셔터 - 샷시 제작 등)
♤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1950년 결혼한 부인(김현경)은 조선인민군에 징집된 사이 아들을 김수영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김수영의 선배(?)와 새로이 살림을 차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거절당하면서 다시 한 번 깊이 절망하지만 결국 몇 년뒤 같아 살게 되고 김수영이 새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1990년대 초 김수영의 어머니가 죽자 남은 식구들이 의논하여 선영의 묘들을 파 화장하고 산골(散骨)하였 다
그에 따라 김수영의 묘도 개장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한 뒤, 묘 앞에 있던 시비를 1991년 4월에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구역 내 도봉서원 앞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아래 유골함을 만들어 묻었다
따라서 현재의 김수영 시비(詩碑)가 곧 그의 무덤이라 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