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시간/서안나
잠시 모래가 되겠습니다
모래 의자에 앉아 모래 모자를 쓰고 모래 연필로 모래의 시를 쓰겠습니다
이것은 몰락의 서두입니다 모래를 움켜쥐면 나만 남습니다 모래는 아름다운 배반
입니다 무너지는 유령입니다 부서져 시작됩니다
모래는 혼자 남는 노래입니다 부서진 문자로 가득합니다 모래를 만지면 따뜻합니
다 누군가 다녀간 모양입니다 지워도 남습니다 지워도 남는 것은 운명이라 생각하
십시오 한 생이 아픕니다
여자가 무너져 모래가 되고 모래가 무너져 말할 수 없는 무엇이 됩니다 당신이 공
터가 되는 이치입니다
지워지는 상심은 아름답습니다 모래는 나를 붙잡는 손입니다 홀수에 가깝습니다
모래의 고요가 활활 타오르는 저녁입니다
모래 의자에 앉아 모래 가면을 쓰고 모래 수첩에 모래의 시를 적습니다
죽은 자들이 손을 내밉니다
모래가 다시 시작됩니다
파(波)/서안나
그리울 테면 그리워 보아라
뱀을 죽이면 비가 온다
누군가 나에게
현무와 주작을 아느냐고 말했다
물 수 자를 쓰면
해변이 부서진다
저녁의 해변은 남은 사람의 것
나는 물결에 잡힌 사람
아버지 49재 날
나는 손가락을 베어
나를 뚝뚝 떨어뜨렸다
붉은 별이 몇 개 떴다
아버지가 핏방울처럼 번져간다
몸에 별을 가두고
입술을 꼭 다물고 느리게 빛났다
아버지는 어디쯤에서 뒤돌아보실까
우리는 정녕 아름다웠던가
물에 발을 담그면
운명이란 바다를 다 가졌다는 것이다
더 춥고 싶었다
그리움은 물결치는 것이므로
어떤 통화 / 서안나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
아 환장해 불겄네. 뭣이라고요. 사기꾼 이라고야.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것네. 내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착하게 살아 불고 나쁜 짓은 안 해봤는디 사기꾼이라고요. 아따 선상 아무리 세상이 각박혀다고 혀도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로서니 말씀이 너무 심허시오. 나도 처자가 있는 사람인디. 다음주엔 꼭 보내준다고 허지 않소. 나도 거짓말은 싫어하는 사람인디.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 안 하요. 그 머시냐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이 부도만 안 내부렀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소. 기다려 달라고 암 생각 없이 그 말을 믿은 게, 신용사회를 믿은 게 내 잘못이구만. 뭣이라고요. 내일까지 갚아야한다는 말이요.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겄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은 거요. 발가락으로 들은 거요. 이보쇼. 아 이보쇼. 긍께 내일까지는 힘들당 게요. 이보쇼. 내가 돈을 맹글러 서울까지 왔응께 다음주까지만 기다려 주라고요. 아, 이보쇼.....이보쇼...
얼굴이 시뻘게지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끄는 핸드폰.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
위층 사는 그 여자 / 서안나
위층에 사는 그녀는
내 꿈이 어둠보다 더 견고해질 무렵 돌아온다
요란한 구두 굽 소리와 금속성의 열쇠로
내 꿈을 여는 그 여자
나에게 귀가의 순서를 외우게 하는 그 여자
날마다 술을 오지게 먹고 오는 그 여자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로 슬픔의 행방을 알려주는 그 여자
욕실 앞에서 멈추는 그 여자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여자
온 몸을 열고 방음되지 않은 슬픔을 토해내는 그 여자
자신을 스쳐간 손가락들을 욕실바닥에 꺼내놓는 그 여자
그리곤 큰 소리로 나의 슬픈 밤까지 엉엉 울어주는 그 여자
하수구로 흘러내리는 그 여자
흐르고 흘러 다시 맑게 피어나는 여자
몇 번 오가는 길에 마주쳤던 그 여자
늦은 오후 화사한 얼굴로 야단스럽게 집을 나서는 그 여자
세상의 어둠을 몸으로 끌어 담는 가죽부대 같은 그 여자
내 위층에 사는 곱슬거리는 긴 파마머리 그 여자
예수처럼 얼굴이 갸름한 그 여자
새벽마다 자신의 슬픔을 꾹꾹 밟고 오르는 그 여자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 서안나 시인 약력 ]
* 1965년 제주 출생.
* 1990년 ‘문학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 1991년 「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
*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등 출간.
*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 선집 2』 『전숙희 수필선집』,
*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이 있음.
* 〈불교문예 작품상〉 수상.
* 〈서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