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되려 했어 외 1편
김개미
너와 함께 뱀이 되려 했어
오후의 따뜻한 바위를 타고 넘으며
새들의 노래를 들으려 했어
바람 좋은 풀밭에 머물며
장대 끝에 피는 꽃을 흔들려 했어
떡갈나무 뿌리도 알지 못하는
흙냄새와 너만 있는 곳으로 가
너에게 나를 꽁꽁 묶어두고
언제까지나 머리맡에 네 박동을 켜두려 했어
너는 뱀이 되지 않았지만 누가 너처럼
우아하게 나를 빠져나갈 수 있겠니?
낡은 비늘을 벗고 고통 속에서
네가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나 혼자 오래오래 지켜보려 했어
어쩌다 커다란 먹이를 먹으면
한 달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눈이 멀 때까지 너만 바라보려 했어
침묵으로 된 길고 긴 사랑 이야기를
너와 함께 써보려 했어
한 벌뿐인 드레스를 고목나무에 걸어놓고
못 찾는 짐승으로 남으려 했어
백 년 동안 계속되는 게으른 신혼을
너와 함께 맞으려 했어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내 머릿속엔
여전히 발견되지 않는 초록숲 빛난고
지금 내가 천하고 외로운 건
너와 함께 뱀이 되지 못해서야
너와 함께 무엇이 되지 못해서야
너와 함께 뱀이 되려 했어
꿈을 꾸는 게 좋아
꿈속의 나는 거울 속의 나와 달라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부모라서
나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아
가짜라서, 사랑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꿈을 꾸는 게 좋아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
일이 잘 안돼도 울지 않아
여기 이 시간 이 나라가 아니라서 좋아
신처럼 공중에 떠서
세상을 내려다보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 없어
꿈을 꾸는 게 좋아
집이 활활 타도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면
꽃을 가꾸는 엄마가 있어
귀신에게 잡아먹혀도 죽지 않고
빨간 자두를 치마폭 가득 담아
꿈을 꾸는 게 좋아
물이 펄펄 끓는 솥에
아빠릴 밀어 넣고 솥뚜껑을 닫아도
진짜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가짜 아빠가 술을 마시고 진짜 아빠가 되면
새로운 가짜 아빠가 나타나
― 김개미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걷는사람 / 2020)
김개미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 『커다란 빵 생각』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레고 나라의 여왕』 『오줌이 온다』 『미지의 아이』(공저) 『티나의 종이집』,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