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인 나혜석(1896~1948).
그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여권운동가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다. 필자는 2004년 한 서점에서 700페이지에 달하는 <나혜석 전집>(태학사, 2000)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혜석을 조선 신여성을 대표하는 화가로 알고 있었기에 관심을 갖고 책을 살폈다. 그가 쓴 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 등을 보며 나혜석이 뛰어난 작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글이 모두 수록된 <나혜석 전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구미(歐美)여행기다.
근대의 해외여행기를 남기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도서관 누리집에서는 ‘歐米婦人의 家庭生活(구미부인의 가정생활)’로 찾아볼 수 있다.
<나혜석 전집>에는 구미여행기 중 파리 체류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나혜석 부부가 1927년 6월부터 1928년 9월까지 파리에 체류한 사실을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이미 90여 년 전에 파리에 체류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혜석은 조선에 돌아온 후 파리 체류 경험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도 그중 하나로 1934년 3월에 <중앙> 잡지에 발표한 글이다. 나혜석 부부는 파리 체류 초기에 소르본느 대학 근처의 호텔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나혜석 혼자 프랑스 가정집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그 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집은 파리 상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라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 있고 우거진 수풀, 엉켜 오르는 덩굴, 작약화, 월계화,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감자, 상추, 파, 콩이 심겨 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비둘기, 밀봉(꿀벌)을 기른다.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1936년 4월 <삼천리> 발표.
“내가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마침 고우(최린의 별호) 선생이 와 계셔서 유력한 사람의 소개로 통변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 삼인이 시외 기차를 타고 약소국민회 부회장 살레 씨 댁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경성서 영등포 갈 만한 거리의 별장 많은 곳이라 살레 씨의 댁도 살레 씨 장인이 돌아갈 때에 준 별장이라 합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두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나혜석이 머물렀던 프랑스 가정집은 르 베지네(Le V sinet)에 있었고, 샬레(Challaye)라는 사람의 집이었음이 밝혀졌다. 중요한 단서 두 가지가 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어도 이 가정을 찾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필자는 이 가족과 나혜석이 머물렀던 집을 찾을 수 있었고 나혜석, 그리고 샬레 가족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나혜석이 남긴 글이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했을 일이다.
결혼 조건으로 남편에게 젊은 나이로 사망한 애인 최승구의 묘지를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던 그, 어린 자식 셋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1년 8개월간의 구미여행을 시도했던 그는 1세기나 앞섰던 여성운동의 개척자였다. 같은 파리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나혜석의 파리 체류는 많은 울림을 준다.
자유로운 삶과 예술 활동을 펼친 신여성
01 유럽 여행 때의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02 짧은 단발머리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나혜석. 당시조선에서는 여성이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집 가족은 50여 세 된 살레 씨, 40여 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 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펠리시앵 샬레(F licien Challaye, 1875~1967)는 일본과 조선을 이미 방문한 적 있는 아시아 정통학자이며 철학과 교수인 동시에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1917년 10월에 조선과 일본을 방문했고, 1919년 4월에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당시 조선은 3·1운동의 여파로 일본의 탄압이 극심할 때였고, 샬레는 이때 본 참혹한 기억을 <Souvenirs sur la Colonisation(식민지에 관한 기억)>(1935년 발표)이라는 책자에서 ‘식민지 상황의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평화주의자, 반식민주의자인 샬레는 일본 식민지상의 조선을 직접 목격한 드문 서양인으로 당시 파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일부 한국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샬레의 부인 쟌느(Jeanne)는 샬레와는 두 번째 결혼으로 전 남편과의 두 딸과 샬레와의 사이에서 난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부인은 프랑스 여자 참정권 운동회 회원으로 가정에 충실한 현처양모요, 사회상 견실한 활동가입니다. 이날 놀고 가서 그 후 한 번 다시 갔을 때 프랑스 가정에 가 있기를 원하였더니 두말 아니 하고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기뻐서 곧 이사를 하였습니다. 때에 부군은 독일 베를린에 가 있을 때입니다. 이래 3개월 동안 살레 씨 가족과 기거,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나혜석이 어떤 이유로 프랑스 가정집에 들어가 살게 됐는지 그 계기가 명확하다. 나혜석은 매우 모범적인 프랑스 중상류 지식인 가족과 5~6개월을 같이 살면서 프랑스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몸소 접하게 된다. 그는 3개월이라고 했으나 필자가 보관하고 있는 나혜석의 당시 사진이 1928년 4월 2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거주 기간을 1927년 12월부터 친다고 해도(이 집의 처음 방문이 1927년 11월 11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5개월이 지나고 있던 셈이다. 조선에서 신여성으로서 살면서 시대를 앞서갔던 나혜석에게는 프랑스 가정집에서의 생활이 마치 붕어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을 것이다.
“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 말 단자를 배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 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1932년 1월 <삼천리> 발표.
일제 지배하의 억압적이고 가난한 조선을 떠나 모든 게 자유로운 파리에서 자유로운 학생의 위치를 되찾은 나혜석의 날아갈 것 같은 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다.
1928년 4월 2일 샬레 씨 집 정원에서 샬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나혜석(윗줄 세 번째)과 남편 김우영(아랫줄 왼쪽), 당시 유학생 서영해(아랫줄 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필자가 엘렌느(샬레씨 부인 쟌느의 딸)의 맏딸 안느(Anne)로부터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억압된 조선에서의 비참한 최후
나혜석의 파리 생활은 최린과의 연애를 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최린은 1927년 12월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반제국주의 연맹총회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들렀는데, 이 행사를 주관한 샬레 씨 집을 방문하기 위해 11월 11일 나혜석과 유학생 공진항을 통역으로 동반하고 이 집을 방문하게 된다. 나혜석과 최린은 샬레 씨 집 방문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지고, 12월 중순 최린이 파리를 떠날 때까지 한 달 동안 만남이 지속됐다.
최린은 천도교 신자로 3·1운동의 33인 민족대표에 속했지만 1922년부터 그를 ‘문화정치’에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 식민지 정치에 동조하며 변절했고 이후 한국전쟁 때 납북된다. 1927년 최린의 유럽 방문은 일본인 아베의 은밀한 사주로 유럽 유학생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당시 최린의 나이는 49세로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과는 달리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마도 이런 성향이 나혜석을 강하게 끌어들이고, 거기에 파리의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도 한몫 더해서 이들의 사랑이 더 깊어졌을 거라 생각된다. 이들의 연애는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도 소문날 정도로 알려졌다고 한다. 나혜석은 당시 생각이나 했을까? 이 연애로 인해 조선에서의 자신의 인생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나혜석 부부는 1년 8개월의 화려한 구미여행을 마치고 1929년 3월 12일 조선에 돌아온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다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으며, 파리에서 임신한 넷째 아들을 그해 6월에 낳아 새로운 육아생활을 감당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나혜석 부부는 전 재산 2만원을 다 털어 여행비를 감당했던 것이다. 혹시 라도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을까 하여 보냈던 나혜석의 편지를 남편이 알게 되면서 이 부부는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이혼고백장」 글과 최린 소송사건으로 당시 조선사회에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킨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혼고백장」, 1934년 8~9월 <삼천리> 발표.
그러나 나혜석이 조선 남성에게 던진 비판의 화살은 더 크게 그에게 되돌아왔다. 조선 남성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 여성들이 나혜석 편에 선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조선 남성과 마찬가지로 나혜석의 혼외사랑을 인정하지 못했다. 반면에 유부남이었던 최린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변함없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혜석은 완전히 혼자가 됐다.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이혼고백장」, 1934년 8~9월 <삼천리> 발표.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신생활에 들면서」, 1935년 2월 <삼천리> 발표.
이렇게 절망적인 생활 속에서 나혜석은 글쓰기에 몰두한다. 1938년까지 그는 여러 잡지에 다양한 형태의 글을 기고하는데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을 포함한 구미여행기도 이 시기에 쓰였다. 조선을 그토록 떠나고 싶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또 아이들이 있는 조선을 떠날 수가 없었던 나혜석은 구미여행기를 쓰면서 행복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위로로 삼은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림보다 글에 몰두한 또 다른 이유는 이혼으로 인한 타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그림 그리기가 어려워진 데다 그림 그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그의 불행으로 인해 후대에서는 나혜석의 선구자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나혜석이 파리에 돌아갔다면 그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1932년 1월 <삼천리> 발표.
한경미
불문학을 전공, 프랑스에서 30년 이상 거주하며 번역가, 통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시대 앞서간 나혜석, 불행은 필연이었나’ 등 나혜석 선생과 관련한 다수의 칼럼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오랜 조사 끝에 확인한 사실을 근거로 2013년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을 제작했다.
[출처] 희귀 자료 열람실 l 여성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다 나혜석 여행기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작성자 오늘의 도서관
첫댓글 나혜석이 자유로운 영혼인줄 알았지만
자녀들 3명을 맡기고 구미 여행을 떠났다니 신여성 맞네요
그당시로선 정말 파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