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죤 테일러 존스(John Tayler Jones, 1833.3.25-1851. 9.13)
“태국에 네번째로 온 선교사이며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
죤 테일러 존스는 1802년 7월 16일에 미국의 뉴햄프셔주의 뉴 잎스위치에서 아버지 엘리사와 어머니 페르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브라드포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브라운 대학에서 1년을 공부한 후에 암헤스트 대학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1825년에 졸업하였다. 그후 3년은 앤도버 신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였고 그후 뉴톤 신학교에서 1년을 더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에 그는 당시 버마 선교사로 명성이 있던 아도니람 저드슨과 함께 사역하고자 버마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침례교 선교부에 버마 선교사로 허입되었다. 그는 1830년 7월 14일에 엘리자 콜만 그로우와 결혼하였고, 2주일 후인 7월 28일에는 침례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4일 후인 그해 8월 2일에는 버마 선교사가 되고자 보스톤 항구를 떠나 버마의 남부 몰메인에 도착한 1831년 2월 17일이었다.
당시 태국에 있던 귀츨라프는 미국과 영국은 물론이고 이웃 나라인 버마의 저드슨에게 태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버마에 와서 1년 반동안 미얀마어를 배우고 있던 죤스에게 버마의 침례교 선교부는 태국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그들 가족으로 하여금 태국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들이 6개월간의 여정을 통해 싱가폴을 거처 태국에 도착한 것은 1833년 3월 25일이었다. 그들은 태국으로 오는 길에 버마에서 입양한 12세 소년 사무엘 스미스를 데리고 왔다. (후에 그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태국에서 1849년부터 1858년까지 침례교 선교사가 되어 사역하였다. 이후에는 침례교를 떠나 방콕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며 살았다.) 죤스 부부는 타고난 성품과 학문적인 자질을 갖춰서 새로운 지역에 선교부를 개척하는 선구적인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잘 구비하였다.
존스는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에게 부여된 것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습득이었다. 태국어와 영어를 잘 아는 중국인 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태국어의 기본적인 원리를 잘 배웠다. 그는 인내와 끈기로 태국어의 구조를 잘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어려운 성조 등을 잘 익혔다.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도움으로 1842년에 그는 태국어의 기본 문법을 책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특별히 언어에 탁월한 은사를 지녔던 그의 아내 엘리자 그로우 존스의 도움으로 태국어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쇄소를 만들어 많은 기독교의 전도지나 종교 서적 등을 출판하기도 하였지만 지리와 천문학에 관한 교리문답서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교리문답서는 태국인들에게 는 이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연에 관한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기독교에 접하는 정신 적인 두려움을 제거해주고자 만들어진 것이었다.
존 테일러 존스는 태국의 선구적인 선교사로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친 선교사였다. 그는 1833년 3월에 태국에 오자마자 중국인들에게 전도하여 그해(1833년)말에 3명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는 현대의 세계지도를 태국에 소개하였으며 인쇄소를 설립하여 수많은 서적이나 전도지, 성경 등을 태국어로 인쇄하였다. 아마도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업적은 1840년에 태국어로 된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일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하였고 또한 태국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번역시에 헬라어 원문의 의미와 가장 가까운 태국어를 잘 사용하였다고 한다.
존 테일러 존스는 가정적으로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태국에 도착하고 난 후 다음해에는 콜레라와 장티푸스로 어린 아들과 딸을 잃어야 했고 언어에 탁월했던 동역자 인 엘리자 그로우 존스도 콜레라로 태국에 온지 5년째인 1838년 3월에 먼저 떠나 보내야 했다. 그는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시에 유딧 리빗과 결혼하였으나 다음 안식년 인 1846년 3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집으로 가던 중에 소천하였다. 그는 뉴햄프셔 출신 의 사라 슬리퍼와 1847년에 세번째로 결혼하고 태국에 돌아온 것은 1848년 2월이었다. 태국에 돌아온 후 1850년에는 선교부에 밤 사이에 대화제가 나서 모두가 목조 건물이 었던 침례교 선교부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인쇄소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역의 결 과물들이 화제로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쉬임없이 달려온 존 테일러 존스는 49세인 1851년 9월 13일에 태국 방콕에서 갑자기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예상치 못해 태국의 침례교 선교부나 태국 선교사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방콕의 단 비치 브레들리와 윌리암 딘과 함께 당시 태국 선교사역의 중심축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