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의 세계)蘇東坡거사 - 계성산색
계곡의 물흐르고 새 우는 소리가 부처의 장광설인데, (溪聲便是 廣長舌)
산빛인들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리오. (山色猜非 淸淨身)
여래의 8만4천 법문을, (夜來八萬 四千게)
다른 날 어떻게 그와 비슷하게라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까. (他日如何擧似人)
蘇東坡거사(1037~1101)의 오도송이다.
당.송 8대 문장가의 한사람인 동파는 笭蘊거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중국 선문의 양大 거사다. 그의 이 개오시를 공안으로 `溪聲山色'이라 한다. 공안 이름 그대로가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동파는 송대 최고의 시인으로 벼슬이 항주 자사등을 거쳐 禮部상서(장관)에까지 이르렀으며 집안의 文才가 뛰어나 부친 旬, 아우 轍과 함께 `三蘇'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불교를 좋아해 자칭 `전생이 중'이었다고 하기도 했고 법맥상으로는 임제종 황룡파 소각상총(일명 동림상총)선사의 제자다. 역시 임제종 황룡파 거사이며 당.송 8대가의 한사람인 黃廷堅(호.山谷:1045~1105)과 동파 두사람을 송대 시.서.화의 명인으로 손꼽아 `蘇黃'이라 칭하기도 한다. 東坡와 山谷은 모두 다 선종 족보(법맥도)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출가승과 동격의 有髮거사들이다.
동파의 오도송 `계성산색'은 허다한 선사들의 機鋒을 뛰어넘는 걸작으로 평가돼오고 있다. 그는 운문종의 佛印(일명 雲居了元선사)(1032~1098). 玉泉承晧선사(1011~1091)등을 찾아가 禪法을 익힌 후 어느 날 강서성 여산 동림사 의상 총선사를 참문, 바위와 돌같은 무정물도 설법을 한다는 `無情說法' 화두를 받았다. 東林常聰(1025~1091)은 임제종 황룡파 선사였다.
동파가 "자비를 베푸시어 미혹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상총은 "그대는 어찌하여 무정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고 有情說法만을 청하시오"라고 반문한다. 동파는 말을 타고 폭포수 소리가 요란한 여산의 깊은 계곡 소로를 내려오면서 화두 `무정설법'을 골돌히 참구했다. 태고의 정적을 깨뜨리는 여산 폭포의 飛流 소리가 귓전을 때리면서 이태백의 <望慮山瀑布>라는 시를 동파의 머리 속에 떠오르게 했다.
향로봉 햇빛에 자색 연기 서리고,(日照香爐 生紫煙)
중턱에 폭포수 걸려 쏟아지네.(遙看瀑布 屆前川)
나르는듯 3천길을 떨어지니,(飛流直下 三千尺)
은하수 하늘에서 떨어지는가.(疑是銀河 落九天)
동파는 이태백의 7언절구를 떠올리면서 여산폭포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아, 이거구나!"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저 폭포수 소리가 존재의 근원을 밝힌 부처의 법문이 아닌가. 그는 여기서 활연 대오하고 <溪聲山色>이라는 개오시를 읊었다. 이것이 바로 동파의 오도시 詩作배경이다.
나는 지난해 중국 선종 사찰 답사 중 호남성 형양시 남악 형산의 남악회양선사 행화 도량 복엄사(옛이름 般若寺)에서 절마당 앞산 바위에 청나라때 한 선승이 큰 글씨로 새겨놓은 동파거사의 공안 `계성산색'을 보고 꽤나 반가워 했다. 음각한 글자에 붉은 페이트칠을 해놓아 검푸른 바위, 푸른 초목, 홍색 글자가 그림처럼 어우러진 한폭의 `公案畵'였다. 새삼 동파의 공안에 매료돼 여산에 올랐을 때 백거이 초당의 서예가한테 7언절구의 `溪聲山色'을 써달라고 부탁, 글씨 한폭을 답사 기념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계성산색'이라는 공안을 낳은 동파의 開悟 화두 `무정설법'은 조동종 개산조 동산양개선사(807~869)의 개오 공안이기도 하다.
동산은 남양혜충국사(?~775)와 장분이라는 학인의 선문답에서 비롯된 `무정설법'이라는 공안에 疑團을 품고 운암담성선사를 참문, 깨달음의 문을 열었다. 동산의 나이 31살,운암 58세 때의 일이다. 동산이 이 화두를 타파, 돈오한 일화를 보자.
동산은 안휘성 남전산의 남전보원선사를 참문한 후 호남성 위산의 위앙종 개산조 위산영우선사를 찾아갔다.
동산:얼마전 남양혜충국사께서 `무정설법'을 설했다는데 그 오묘한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위산:너는 아사리(고승.승려)라는 말을 알고 있나.
동산:알지요.
위산:그럼 아사리로서 그 공안을 한번 풀이해 보라.
동산:忠국사의 무정설법은 세계가 불심과 佛性에 귀결된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담벼락.기왓장.자갈돌 등도 모두 법을 설하고 있으며 그 설법의 그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속인은 六根의 속박을 벗어나 지혜의 근원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무정물의 소리없는 大法을 듣게 된다는 얘기지요.
위산:내가 생각해 낸 것들도 있는데 忠국사와 별 차이가 없네. 단지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없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네.
동산:잘 모르겠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위산:(위산은 拂子를 세워 들고) 알겠는가.
동산:모르겠습니다.
위산:부모가 낳아준 이 입을 가지고 너를 위해 그 말을 해달라는 얘기냐.
동산:그러시다면 화상과 함께 道를 이룬 분이 계십니까.
위산:있다. 풍릉이란 곳에 운암담성이란 도인이 있으니 가 보아라.
동산:무정설법은 어떤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
운암:無情(무심.무념)이어야 들을 수 있다.
동산:그럼 화상께서는 들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운암:만일 내가 들을 수 있다면 너는 지금 내 설법을 들을수 없을 것이다.
동산:왜 화상의 설법을 뭇듣는단 말입니까.
운암:(역시 손에 들고 있던 拂子를 치켜 세우면서) 들리느냐.
동산:안 들립니다.
운암:내가 설법하는 것도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무정설법을 듣겠단 말이냐.
동산은 여기서야 위산선사가 불자를 들어올린 뜻을 알아차리고 開悟했다.
동산은 즉각 자신의 오도를 게송으로 읊어 운암에게 바쳤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무정설법의 불가사의여!
귀로 듣고자하면 안들릴것이니,
눈으로 보고 들어 깨달음을 얻네.
선에서의 拂子는 진리당체.자아를 상징한다. 따라서 불자를 세워 보이는 것은 진여자성(깨달음의 경지)이나 존재의 근원을 드러내는 행위다. 반대로 불자를 내던지는 행위는 불성이니, 자아니 하는 名相조차를 버리고 어떠한 형상에도 매이지 않는 無餘急槃의 경지를 상징한다. 불자는 원래 파리나 모기 등을 쫓고 먼지를 터는 단순한 생활용구인 터리개였으나 후대 선문에서 이같은 상징과 권위를 갖는 法具가 됐다. 운수납자들의 행각용 지팡이었던 주장자도 똑같은 경우다. 선승의 권위를 상징하는 주장자는 꺼리김 없이 말하는 것, 즉 `부처는 없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와 같은 의미를 갖는 무정설법의 행동언이다. 주장자로 법상을치고, 땅을 찍고, 학인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행위 속에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립성불, 一切斷盡의 뜻이 담겨있다. 주장자는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크게 한 소식한 선림의 도인이 돼야 주장자를 휘두를 수 있다. 나이 먹었다고, 중노릇 오래 했다고, 승단 벼슬 좀 했다고 주장자를 들수 있는게 아니다. 이는 선림의 不問律이다. 선림에 풍미하는 `할과 방'도 불자나 주장자와 같은 의미를 함축한 선행위의 상징이다. 불자 한번 들고, 주장자 한번 찍는 속에 전 우주를 삼키고 수미산을 날릴 수 있는 기량을 가졌을때만 불자와 주장자를 가지고 놀수 있다. 이래서 `법구'라 하는 것이다.
洞山은 위산과 운암선사를 참문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무정설법'을 최초로 설파한 南陽慧忠국사의 관점을 알아낸 후 품어온 의단을 스스로 해결, 開悟의 문을 연 것이다. 동산은 위산영우선사를 찾아가 `무정설법'을 참문하기에 앞서 <반야심경>의 `六根皆無'(眼.耳.鼻.舌.身.意란 원래가 공이고 없다는것)'을 물었다. 동산이 든 화두 무정설법은 먼저 의문을 일으킨 육근개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위산과 운암은 道伴관계였다. 위산은 동산에게 운암선사를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운암이 나에게 "학인이 스승의 명을 받고 떠나면 그 다음엔 어쩌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반드시 새고 스며드는 것을 끊어야(분별심을 없애고 번뇌를 단진해야) 道를 이룰수 있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렇게 한다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게 될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가장 중요한것은 내가 위산이라는 이곳에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했지. 위산이 "나는 위산이라는 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를 특별히 강조한 점은 많은 여운을 갖게 한다.
"새고 스며드는 것을 끊는다"는 행위를 완성하고 스승을 잊을 수 있다면 成佛을 거의 다 이룬 것이다. 위산의 말은 이럴때는 스승도 자기의 존재를 학인의 의식속으로부터 거두어 들여 스승이라는 名相을 없애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불한 사람에게는 스승이라는 것도 필요없다. 이것이 선가의 師資相承에서 거듭 강조돼온 스승을 뛰어넘고 부처도, 조사도, 부모도 죽이는 `超師'의 전통이다. 동산은 위산이 들려준 운암과의 법담을 듣고는 곧바로 운암에게로 달려갔던 것이다. 동산은 운암이 불자를 치켜세우는데서 급기야 무정설법을 이해한다. 동산의 오도송 마지막 구절 眼處聞時方得知의 `안처문시'는 바로 운암이 불자를 들어 무정설법을 설파한 것을 가리킨다. 설법은 그저 눈과 귀로 듣는것이 아니다. 눈과 귀의 한계를 넘어 마음으로 들어야 진정한 佛法을 듣고 볼 수 있다.
선학 용어로는 이를 `通感'이라 한다. 六根, 즉 마음과 물질이 서로 통하는 物我一體, 만물 일체의 경지가 바로 통감의 세계다. 동산은 운암이라는 스승한테서 이처럼 완전히 다른 감관의 세계를 얻음으로서 견성을 이룬 것이다.
끝으로 拂子를 활용한 선문답의 예를 하나만 보자.
묻는다:너는 사람들에게 어떤 법을 가르쳐 주었느냐.
답한다:(불자를 세워보였다.)
묻는다:그것뿐이냐, 아니면 다른 게 또 있느냐.
답한다:(이번에는 불자를 내던지고 나가 버렸다.)
마조도일대사가 묻고 백장회해선사가 답한 선문답이다. 백장이 불자를 세운것은 진리당체를 말한다. 마조는 여기서 언어 문자로 보다 더 나간 구극의 경지를 추궁한다. 백장이 불자를 내던진 행위는 어떠한 형상(불법이라는 名相)에도 매이지 않는 경계, 즉 조사선의 究極인 절대자유를 드러내 보인 행동언어다. 이쯤돼야 불자나 주장자, 석장을 휘두를수 있고 가지고 놀수 있는 것이다.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