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2015년.
프롤로그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 존재를 기억하십니까? - 구약성서 <시편> 8편 4절.
<청세기>에 의하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고 이후 아담과 이브는 ‘셋’이라는 아들을 얻고, 이 ‘셋’이 나은 아들이 ‘에노스’다.
에노쉬는 고유명사일 뿐만 아니라 보통명사로도 사용된다. ‘사람’이란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희브리어는 ‘아담(adam)’이며, 그 다음으로 사용 빈도수가 높은 단어가 ‘에노쉬’다. ‘아담’은 희브리어로 ‘붉다’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로 원래는 ‘홍토(紅土)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그리고 왜 이 시점에 태어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던져진 존재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죽음을 인식하고 매순간 준비하는 인간만이 자신의 현재를 즐길 수 있는 멋진 존재가 된다. 에노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운명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 존재를 기억하십니까’를 다시 해석하면, ‘도대체 찰나를 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신께서 그를 기억하십니까?’이다. ‘기억하다’의 히브리어는 ‘자카르’이다. 자카르는 생각하는 주체를 자극하고 움직여서 감정, 생각, 혹은 행동을 유발시키는 적극적이면서 유동적인 개념이다. 또 생각하는 주체에게 그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시인은 삼라만상 중에 유독 인간만이 그런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고 위안한다.
만약 우주를 창조하신 신이 있다거나 우주의 질서를 조절하는 의인화된 어떤 원칙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기억할 만큼 내가 괜찮은 존재인가? 혹은 나는 만물의 척도가 될 만큼 살고 있는가? (16~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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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특히 도가(道家)에서는 신이 아니라 자연이 우주의 질서를 조절한다고 인식했다. 신이 나를 기억하여 조절한다고 인식하기보다는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꿈꾸었다. <노자>는 ‘人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했고, ‘上善若水’다고 했다. 자연을 닮은 것이 물이니 물을 본받아 사는 법을 익히자는 듯이다.
신의 존재를 믿고 인식하면서 죽음을 기억하는[메멘토 모리] 인간의 모습 또한 매우 바람직하다. 나는 신이 기억하거나 이웃이 기억할 만큼 괜찮은 존재인가. 날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