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빠사나 수행의 조건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위빠사나는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은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하는데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는 행위다. 따라서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만 거의가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행동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이 어떤 것을 하거나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다고 한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란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다.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 탐진치는 관용, 자애 지혜로 바뀐다.
사띠는 알아차림이라는 뜻 외에도 기억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는 기억에 의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라는 숨은 의미가 들어있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지속시켜야 한다. 장작을 비벼서 불을 지피듯이 연속적인 알아차림이 있어야 집중이 되고 집중이 되어야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엄중한 의미에서 위빠사나는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둘째, 대상을 분리해서 본다
위빠사나는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합성어로서, ‘위’는 ’다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이며 ‘빠사나’는 ‘통찰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통찰수행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대상을 분리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대상을 분리해서 지속적으로 통찰을 하면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된다.
대상을 분리해서 본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냥 “그랬네!” 하고 알아차리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좋다, 나쁘다 혹은 밉다, 곱다,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나타난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대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 대상을 없애려 하거나 좋아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지혜이고 어리석음[無明]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모든 것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다. 개입하여 싫어하고 좋아할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기본자세다.
예를 들면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화가 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탐욕이 일어났을 때에도 탐욕이 일어난 것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탐욕이 일어난 것을 분리해서 본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분리한다. 이럴 때만이 비로소 대상의 성품을 알 수가 있으며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혜가 나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미얀마 스승들은,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아프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와 범부(凡夫)의 차이임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위빠사나 지혜의 첫 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한다.
셋째, 자신의 몸과 마음[五蘊]을 대상으로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부처님께서도 밖에 있는 대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얻으셨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 무아를 아는 것인데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내가 본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마음은 소홀히 한 채로 밖으로 나가서 해답을 얻으려고만 하였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있어서 생긴 괴로움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원인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고, 그 답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데 다른데서 찾으려고 한다.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문제 해결의 우선순위가 자신이며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타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한다.
위빠사나의 근거가 되는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4가지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4념처 수행이라고도 한다. 이는 곧 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인 법[法]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신념처(身念處) 수행에서는 16가지 알아차릴 대상이 제시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수행처에서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호흡을 비롯하여 행주좌와 (行住座臥) 4 가지와 지수화풍 4대(四大)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고, 사마타에 속하지만 위빠사나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몸에 대한 혐오감’ ‘시체에 대한 주시’ 등이 있다.
수념처(受念處)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모두 느낌이다. 손끝의 부드러움이나 가슴의 두근거림도 느낌이고 행복과 불행도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왔을 때 우리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덤덤하게 반응한다. 이를 부처님은 3 단계로 말씀하셨다. 6근(六根, 혹은 六問)을 통해 인식할 때 받아들이는 맨 느낌(눈, 귀, 코, 혀의 경우)이 있고, 이에 대하여 육체적으로 반응한 육체적 느낌이 있으며 마음으로 넘어가버린 정신적 느낌이 있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덤덤한 느낌이 왔을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다음 단계인 갈애, 욕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수행은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서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제시한다. 즉 탐진치를 비롯하여, 위축된 마음, 들뜬 마음, 산란한 마음, 탐진치 없는(관용, 자애, 지혜) 마음,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의 마음과 해탈의 마음조차도 단지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고 있다.
법념처(法念處)의 알아차릴 대상으로는, 5가지 장애[五蓋], 5가지 집착의 무더기인 5취온(五取蘊), 6가지 감각기관[六根]과 6가지 감각대상[六境], 7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4성제[四聖締] 등이 있다.
법이란 말은 크게 2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대상이다. 이때의 대상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해서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을 말한다. 법을 또 다른 말로는 진리라고 한다. 수행을 시작할 때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무상, 고, 무아와 4성제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출세간 법, 또는 궁극적 진리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진리의 법으로 바뀐다.
법념처에서 말하는 법은,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이다. 삼라만상이 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단지 알아차릴 대상뿐이라는 의미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도, 수행의 단계가 높아져서 나오는 법의 희열도 모두 알아차릴 대상일 뿐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렇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의 과정으로 알고 지켜보면 대상으로서의 법(dhamma)이 진리로서의 법(Dhamma)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상 4념처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주시하여 알아차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들 대상을 통하여, 각자의 근기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生滅] 현상을 지켜보라고 하셨다.
넷째,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위빠사나에서는 오직 실재하는 것만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된다. 그래야 대상의 성품을 보고 무상, 고 무아를 깨닫게 된다. 이것을 빠리어로는 빠라마타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라고는 몸과 마음(五蘊) 밖에 없다. 6경(六境)이 6문(六門, 六根)에 와서 부딪칠 때 6식(六識)하는 과정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다 아셨다는 일체지(一切智)는 바로 18계(十八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모두 관념적인 것, 빤냐띠라고 하는데 명칭, 모양, 형식, 관념, 개념 등이 이에 속한다. 사마타 수행은 이러한 빤냐띠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나 창조주의 개념은 관념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원인과 결과, 조건뿐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신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오온을 가지고 태어나 똑 같은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으셨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실재하는 오온을 분리해서 알아차림으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청정하다는 말은 6문에 6경이 부딪쳐서(觸) 6식을 할 때 탐진치 없이 그리고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탐진치가 눈을 가려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것을 배제하고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之見)이라 하고 이것을 청정한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이는 오직 실재하는 현상을 지켜볼 때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이 아플 때에도 ‘통증’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통증은 명칭이고 관념이다. 그러나 통증의 실재하는 성품은 쿡쿡 쑤시고 당기며 화끈한 느낌이다. 이는 결국 ‘단단함, 부드러움’ 혹은 ‘따스함, 차가움’과 같이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의 불균형일 뿐이다. 이렇게 통증도 4대로 보면 그냥 견딜만한 것이지만 관념으로 받아들이면 금새 “아이고 죽겠다”고 하며 육체적, 정신적인 통증으로 넘어가 버리고, 나아가서는 이러다가 감기나 걸리면 어떡하나, 심지어는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부처님은 이것을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화살을 맞은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화살을 수십 번 맞고도 맞은 줄도 모르고 산다.
실제 수행에서, 처음에는 관념을 알아차리다가 차츰 관념은 사라지고 실재하는 것이 드러난다.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명칭이나 모양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나중에는 들이쉴 때의 당기고 팽창하는 느낌과 내쉴 때의 수축하는 느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느낌으로 알아차리게 될 때에 대상의 실재하는 현상, 성품을 알게 된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은 관념이다. 이미 용어 자체에 부정적인 개념, 고정관념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것을 가슴의 ‘단단함’ 혹은 ‘차가움’이라는 느낌으로 보면 관념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섯째, 현재를 알아차린다.
위빠사나는 과거나 미래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대념처경에서 부처님은, “과거는 후회와 회한뿐이고 미래는 두려움뿐이다. 오직 현재에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현재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비로소 현상을 바로 알게 된다. 위빠사나는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현재를 깨어서 보는 수행이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깊게 들어가지 않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린다. 변화하는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에 깊게 들어갈 여유가 없다. 현재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집중과 고요함이 오면 이것을 찰나삼매라고 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 마음을 겨냥하여 찰나찰나를 알아차리는 수행자만이 현재를 찾을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삶을 살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찰나생, 찰나멸하는 것이고 이련 현상을 바로 아는 것이 수행이다. 이것을 영화의 필름이나 개미의 행렬에 비유한다. 화면의 장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컷, 두 컷의 필름들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개미의 행렬도, 멀리서 볼 때에는 한 줄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 다른 개미다. 전기의 흐름도 마찬가지로 생멸하는 입자의 연속일 뿐이다. 부처님은 마음도 이와 같이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찰의 지혜로 발견하신 것이다. 그래서 무아다. 마음은 있지만 지속되는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이런 현상들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한다는 것[無常], 그래서 불만족스럽다는 것[苦], 그리고 이것을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無我]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스승들은 대상을 볼 때 물위 떠있는 공처럼, 굴러가는 바퀴가 지면에 닿는 순간과 같이 대상을 밀착해서 지켜보되,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사마타의 집중은 대상과 하나과 되는 것이므로 깊게 들어가는 근본삼매와 근접삼매가 있다. 그래서 선정(禪定)을 얻는다.
여섯째, 바라는 마음이 없이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 임해서는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목표는 있으나 함에 있어서는 바라는 마음이 없이 한다. 그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없애려 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그냥 그랬네! 하고 받아들여 지켜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이 없는 공덕행(功德行)으로서 대상을 분리해서 볼 때에만 가능하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바로 이런 자세다. 우리가 원하는 자비심도 알아차린 결과 넘쳐흐르는 자비이어야지 그것을 목표로 해서는 진정한 자비가 될 수 없다.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관여할 수도 없다. 수행자가 할 것은 오직 알아차림이라는 원인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목적으로 해서는 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에 임해서도 탐심이 작용한다. 수행은 원래 잘 안 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조차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단지 수행이 안 될 때 반응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불교는 선과 악이 문제되지 않는다. 악한 자도 알아차리면 된다. 그 순간 지혜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그가 악한 자였다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알아차림이 있었는가의 여부, 아는 마음인가, 모르는 마음인가의 여부만이 문제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이 있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업의 공덕에 따라 색계천 혹은 무색계천에 태어날 수는 있어도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언제 4악도에 태어날지 모른다. 더 이상 태어날 원인을 만들지 않는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평소에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으로 살아간다. 무엇이든 그냥 있어서 한다. 그러기에 수행자는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더라도 그냥 있어서 하여야 한다.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한다면 상응하는 반작용이 일어난다.
여섯째, 일상의 알아차림을 한다.
위빠사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모든 상황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꼭 앉아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앉고, 서고 눕고 행동하는(行住坐臥)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서 한다. 그래서 스스로 노력만 한다면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수행으로 이어질 수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경행을 하거나 먹을 때에 알아차림을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예가 많다. 특히 자기 전에 알아차림을 하면서 자면, 죽을 때에 대비한 연습을 해두는 것이며, 숙면도 취하고 다음 날 상쾌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등 이익이 많다.
사마타 수행은 선정의 상태에서만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마타도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현재의 행동을 위빠사나로 전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불을 드릴 때 그 동작에 정확하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면 사마타 수행이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절하고 일어설 때에, 그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또한 몸을 움직일 때에도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움직이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할 때의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째,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본다
위빠사나 수행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지도를 하는 곳에서는, 좌선 중이거나 혹은 다른 일상의 알아차림을 하고 있는 중에도, 가끔씩‘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도록 한다. 이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행 중에는 물론 수행이 잘 안 될 때에도 마음을 새로 내어 알아차림을 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는 쉐우민 선원의 큰 스승으로부터 전수되어 온 것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묘원님의 수행지도방법이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의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이 의도에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경우, 마음이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일하는 마음’을 모르고 산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그냥 생각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여 집중력이 생긴 후에 마음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보는 것은 마음의 의도를 가지고 현재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나중 마음이 먼저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마음은 원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먼저 마음과 나중 마음을 구별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하지만 가끔씩 자신의 마음가짐을 점검하여 알아차림을 연속시킬 수 있다면 이는 현재를 연장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수행은 현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좌선이나 경행을 하는 중이거나 혹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알아차림에 임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알아차림을 지속시킬 수 있다면 집중의 힘이 생기고 그런 집중의 상태에서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대상의 성품을 보아야 지혜가 난다.
위빠사나 스승들은, 알아차림 하나면 계정혜 3학도 지키고 8정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한다. 알아차림은 비록 짧은 한 순간이지만 탐진치가 끊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관용, 자애, 지혜가 나는 순간이다. 따라서 그 순간은 계율이 지켜지는 것[戒]이고 이것이 지속될 때 고요함[定]이 온다. 고요함이 있으면 대상의 성품이 보이면서 지혜[慧]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 하나면 계정혜 3학을 지키는 것이고 아울러 8정도(八正道)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림으로써 대상의 성품을 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무상, 고 무아 3법인을 알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은 무상, 고, 무아인데 이것이 몸 안에 다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신, 수, 심, 법 4념처를 떠나서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실 수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상좌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서 가는 유일한 수행방법이면서 동시에 같이 가야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법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