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정랑 이세장 묘표(吏曹正郞李世長墓表) - 사위 김창흡(金昌翕)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인륜(人倫)을 부식(扶植)한 높은 절의(節義)를 세워 포천(抱川)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는데, 서원과의 거리가 1백 보쯤 되는 곳은 바로 그의 증손자(曾孫子)인 이세장(李世長) 자(字) 도원(道遠)의 묘소(墓所)이다. 고을의 노인들 중에 그 아래를 지나는 자들이 그곳을 가리키며 전형(典刑)이 있는 곳이라고 말을 한다.
이씨(李氏)는 선계(先系)가 경주(慶州)에서 나왔고,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에 현달(顯達)하였으며,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이연손(李延孫)이 호남백(湖南伯)으로서 단종(端宗)이 선위(禪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벼슬을 그만두고 진위(振威)의 동청동(冬靑洞)에 영영 숨어살다시피 하였는데 이 분이 문충공(文忠公)에게 4대조(祖)가 된다.
문충공의 둘째 아들이 이정남(李井男)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이 분이 이시술(李時術)을 낳았는데 이조 참판을 지냈다. 이들이 곧 공의 양세(兩世)이다. 공의 선비(先妣)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참판(參判)을 지낸 홍영(洪霙)의 딸인데, 숭정(崇禎)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 9월 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여 신채(神彩)가 서너 사람을 덮어줄 만큼 우람하였으며 성장해서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익희(金益熙)공의 가문(家門)에 장가들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가 공을 한번 보더니 남다른 인물이라고 여기고서 칭찬하여 말하기를, “백사(白沙, 이항복)의 초손(肖孫)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에 사마(司馬)의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의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풍재(風裁)가 준정(峻正)하여 부박(浮薄)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풍습을 대대적으로 혁신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뽑혀서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가주서(假注書)로서 임금 곁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주선(周旋)하는 일에 민첩하고 기주(記注)하는 방식이 간결하고 적절하였다.
현종[顯廟]이 눈병[眼患]을 앓은 까닭에 신하들과 야대(夜對)할 때 촛불을 마련하지 않았는데 여러 당후(堂后)들이 기사(記事)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엉뚱하고 어지러웠으나 공은 컴컴한 곳에서도 붓에 맡겨 마음으로 표준을 삼아 써내려 갔으되 저절로 선계(線界)와 행간(行間)이 고르게 들어맞았고 한 글자도 어긋나거나 틀린 곳이 없었으므로 같이 입시한 여러 사람들이 다들 기특한 재주라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묘년(癸卯年, 1663년 현종 4년)에는 추천을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고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에는 대교(待敎)가 되어 봉교(奉敎)에 승진하였다. 전후(前後)로 예문관에서 붓을 쥐고 일하는 자들은 으레 어서 빨리 신천(新薦)을 완수(完遂)하고자 정해진 시기보다 앞당겨 천전(遷轉)되는 일에 구차스럽게 굴었으나 공은 “이것은 향(香)을 불사르며 하늘에 고(告)한 뜻이 아니다.”고 말하였으며, 한원(翰苑)에 3년 동안이나 재직하면서 반드시 적임자를 찾아내는 것으로 계한(界限)을 삼았다.
그러자 조급하게 경쟁하려는 자들은 간혹 공을 기롱(譏弄)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소신이 흔들리지 않았다.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전임(轉任)되었고, 왕명(王命)을 받들어 영남 어사(嶺南御史)로 나갔는데 이때 어사로서 돌아다니는 길이 모두 바닷가에 있어서 악성 질병이 유행하는 지역이거나 간혹 매우 먼 곳에 위치한 섬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가기를 꺼리는 곳들이었으나 공은 반드시 재차 삼차 출입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하여 물어보는 것은 주도면밀하게 해냈지만 이미 몸에 병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는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고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정랑(正郞)에 승진하였다.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역임한 뒤에 다시 이조(吏曹)에 들어가서 사서(司書)를 겸임하였고,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는 체직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도로 이조(吏曹)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 대신(大臣)이 공을 강직(剛直) 공명(公明)하여 큰 일을 해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추천하여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병이 위독해져 5월 29일에 졸(卒)하니 향년은 41세였다. 처음에는 포천(抱川)의 계류리(溪流里)에 장사지냈다가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년) 4월에 이르러 이장(移葬)하였다.
공의 부인(夫人) 숙인(淑人) 김씨(金氏)는 공보다 1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26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에게 시집와서 1남 2녀를 낳아 길렀다. 아들 이성좌(李聖佐)는 부사(府使)인데 처음에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녀를 낳아서 서명원(徐命遠)ㆍ안석헌(安錫憲)ㆍ구경훈(具景勳)ㆍ심박(沈鏷)에게 각각 출가시켰고, 사인(士人) 조원(趙瑗)의 딸을 재취(再娶)로 맞아 1녀를 낳아서 윤경철(尹敬哲)에게 출가시켰다.
또 사인 정중진(鄭重鎭)의 딸을 세 번째 아내로 맞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다. 공의 장녀는 진사(進士) 김창흡(金昌翕)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양겸(金亮謙)ㆍ김치겸(金致謙)ㆍ김후겸(金厚謙)이고 두 딸은 윤세량(尹世亮)과 이덕재(李德載)에게 각각 시집갔다. 공의 작은 딸은 학생(學生)인 임유하(任由夏)에게 출가하여 아들 임익주(任翼周)를 낳았고 딸은 김수집(金壽鏶)에게 시집보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명랑하고 시원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식견이 통철(洞徹)하여 어떤 일을 만나면 한칼에 자르듯이 단박에 결단하였고 그 일에 얽매이어 질질 끌려 다니거나 나약하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뜻이 없었다. 집안에서의 행실에 대하여 말하자면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공의 모친인 홍 부인(洪夫人)이 일찍이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공은 모친을 부축하면서 병간호를 하였는데 허리띠도 풀지 않은 채 정성으로 병구완을 한 기간이 여러 해나 되었으며 모친의 상(喪)을 당해서는 몹시 애통하여 같이 따라 죽으려고까지 하였고 초토(草土, 상제가 시묘(侍墓)하면서 거상(居喪)하는 초막(草幕)을 말함) 밖에 눈물 자국이 침석(枕席)에까지 남아 있을 정도였으며 간혹 피를 토해내기도 하였는데, 오히려 집안에서는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고 유교(遺敎)로서 의대(衣帶)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힘을 다해 애써 받들어 따르면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참판공(參判公, 이시술을 말함)이 용만 부윤(龍灣府尹)으로 재직할 때에 읍인(邑人)이 국경(國境)을 넘어간 사건에 연좌되어 의금부(義禁府)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호국(胡國, 청나라)의 차인(差人)이 몹시 공갈을 치면서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면서 음식까지도 전폐(全廢)한 채 해결하느라고 애썼는데 사람들과 그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중에 눈물과 콧물을 범벅이 되도록 흘렸다. 급기야 장차 재화(財貨)를 써서 앙화(殃禍)를 누그러뜨려 보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는 공의 친구들이 공의 효성에 감동하여 앞다투어 금은(金銀)과 비단을 보태어 주었으며, 호역(胡譯)인 이일선(李一先)도 공을 위하여 감탄하였다.
이윽고 일이 해결되고 나자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가 공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한 것 중에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공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구차하지 않았고 특히 거취에 매우 신중하였다.
상국(相國) 홍명하(洪命夏)가 부친의 친구로서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게 되면 공을 자기 집에 오게 하여 계획을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그 집에 찾아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우암(尤庵)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을 말함』이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커다란 인망을 짊어지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다들 그에게 붙좇고 우러렀는데 우암이 공에 대해서도 매우 추허(推許)하였으나 공은 일찍이 한번도 그 집에 찾아간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체로 백사공(白沙公)이 석담(石潭, 이이(李珥))을 방문하지 않은 뜻을 준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이 사필(史筆)을 잡게 되었을 때에는 우암에게 서신을 보내어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 우암이 임금과 독대(獨對)하였을 때 나눈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가져다가 금궤(金匱)에 실어두었는데, 이것은 대의(大義)에 관계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은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하였으나 그 지향(志向)과 절조(節操)는 정량(靖亮)하여 일찌감치 충의(忠義)로써 자신을 연마하였으며 그 선열(先烈)을 이어보려고 하였으나 수명(壽命)을 몸에 걸맞게 누리지 못하여 쓰임새를 머금은 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나 김창흡이 일찍이 공의 집안에 장가들었으나 곁에서 모신 날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공의 준수한 빈발(鬢髮)과 오뚝한 콧마루와 마치 거울을 매달아 놓은 듯한 안광(眼光)이 늠름하여 바라보면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의 맏아들인 이성좌(李聖佐)와 더불어 김 숙인(金淑人, 이세장의 부인을 말함)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김 숙인의 말이 “공의 순수한 성의와 아름다운 행실이 옛날의 유명한 효자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이를 우애와 화목으로 이루어나가 은의(恩義)를 넓게 파급시켰다.”고 말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자랑하거나 꾸미는 바가 없었고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 숙인은 정숙(貞淑)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서 처음에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나게 되자 마치 담장이 무너진 듯하게 낮에도 슬피 곡읍(哭泣)을 하였는데 거상(居喪)하는 삼년 동안에 한결같이 슬픈 목소리로 울었으며 죽만 먹으며 거상한 날이 예제(禮制)보다 더 많았다.
울먹이며 고아(孤兒)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반드시 남편의 유훈(遺訓)으로 가르쳤고 이성좌의 나이가 이미 15세가 되자 부인은 이성좌를 데리고 공의 묘소에 가서 곡(哭)을 하였는데 마치 이제 아들을 길러서 모두 성장시킨 것을 남편에게 고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또 이성좌를 데리고 문중의 어른들을 두루 찾아뵙고 배알(拜謁)하도록 하면서 슬픔과 공경을 베풀도록 하였다.
또 집안에 제삿날이 찾아오면 제수를 정갈하게 장만하도록 거듭 타이르고 여러 신위(神位) 앞에 어숙(魚菽)을 진설하면서 각 신위가 생전에 즐겨 들던 음식들을 골라서 바쳤으며 제기(祭器)에 올려서 바치는 음식들은 모두 부인이 평소에 손수 저축하였다가 장만한 것들이었다.
대체로 숙인은 남편에게 현숙하게 내조하고 부친을 일찍 여읜 아들을 가르친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게 실천하고 게으름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52년이 지난 뒤에 이성좌가 장차 묘소에 묘표(墓表)를 세우려고 하면서 공의 행실과 치적(治績)을 서술하였는데 모두 김 숙인이 일찍이 자상하고 곡진하게 말해준 것들이었다.
그 말을 반복하니 슬픈 심정이 처절하고 완연(宛然)하게 상천(瀧阡)의 정리(情理)가 있었다. 나 김창흡이 그 글을 읽노라니 눈물이 떨어져서 차마 손을 대지 못하겠으므로 약간 줄이고 다듬어서 돌려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빗돌 뒷면에 내걸도록 하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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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外舅吏曹正郞李公墓表 - 金昌翕
*외구(外舅) : 편지에서 장인을 말함
白沙李文忠公諱恒福。以扶倫巍節。俎豆于抱川之花山。距黌宇百步。爲曾孫諱世長字道遠之墓。鄕老之過其下者。指以爲典刑所在云。李氏系出慶州。顯于羅麗。入我朝。有諱延孫以湖南伯。聞端宗禪位。永遯于振威冬靑洞。於文忠爲四世。文忠仲子諱井男。贈吏曹參判。生諱時術。吏曹參判。卽公之兩世。而妣豐山洪氏。參判諱霙之女。以崇禎戊辰九月五日生公。幼英特秀瑩 。神彩蔭數人。及長。委禽于吏曹判書金公益煕之門。愼獨齋一見器異。稱以白沙肖孫。壬辰。中司馬兩試。掌太學議。風裁峻正。大革浮囂之習。壬寅。擢增廣文科。選入槐院。以假注書入侍。敏於周旋。記注簡該。顯廟以眼患。夜對不設燭。諸堂后記事。擧皆胡亂。而公暗中信筆。以心爲準。自中于界行。無一字差錯。入侍諸人。莫不稱奇。癸卯。薦拜藝文館檢閱。乙巳。爲待敎陞奉敎。前後載筆者。例速完新薦。苟於驟遷。而公謂非焚香告天之意。居翰苑三載。必以得人爲限。躁競者或譏之而不少撓。例陞成均館典籍。遷司諫院正言,禮曹佐郞。承命爲嶺南御史。所歷皆濱海瘴癘。或洲島絶遠。衆所憚往者。必出入再三。以是咨詢得周。而病則祟矣。丁未。拜侍講院司書,司憲府持平,知製敎。選入玉堂。拜副修撰。移吏曹佐郞。陞正郞。歷校理 ,獻納。復入吏曹兼司書。戊申。遞拜兵曹佐郞。還吏曹。時大臣薦公剛明有才猷。將大用。未幾疾革。以五月二十九日卒。享年四十一。始葬于抱川溪流里。至乙亥四月。遷窆。配金淑人。生公後一年。卒公後二十六年而歸室。育一男二女。男聖佐府使 。初娶領議政金壽興女。生四女。徐命遠,安錫憲,具景勳,沈鏷。再娶士人趙瑗女。生一女尹敬哲。三娶士人鄭重鎭女。生二男幼。長女進士金昌翕生三子。養謙,致謙,厚謙。二女尹世亮,李德載。次女學生任由夏生子翼周。女金壽鏶。公天資明爽。標峻而識徹。遇事。一刀截斷。無纏繞巽懦意。至其內行醇如也。洪夫人甞嬰奇疾。扶守不解帶者累年。及其遭艱。痛不欲生。草土外。涕留枕席。或至嘔血。猶不以慽容見於趨庭。而遺敎在衣帶者。黽勉遵奉以終身焉。參判公爲灣尹。坐邑人犯越就理。胡差大喝。必欲甘心。公奔走廢飮食。與人語。泣涕交橫。及將行貨以紓禍。親舊感其誠。競以金繒爲助。胡譯李一先亦爲之感歎。事旣釋。鄭相國太和抵公書。有天應感孝誠之語。公自待不苟。尤審於去就。洪相國命夏以父執居一洞。國有大事。欲其來贊訏謨。而猶罕造焉。尤菴宋公負望山斗。世所趨仰。於公亦甚推許。而公未甞一及其門。蓋遵白沙公不訪石潭之意。及其秉史筆也。貽書于尤庵。取己亥獨對說話。載諸金匱。以其大義所存也。公立朝日淺。展布靡見。乃其志節靖亮。早以忠義自礪。庶紹其先烈。而命不侔身。含用而沒。嗚呼惜哉。昌翕早贅公門。陪侍無日。獨記其秀鬢峩準。眼若懸鏡。凜然有可畏之表。及與胤子聖佐。受敎於金淑人。言公純誠懿行。不愧古孝子。推爲友睦。恩意又淪浹。信乎無所矜飾。眞發於中者也。金淑人貞淑有至行。始失所天。晝哭若壞墻。三年只一聲。啜粥日數溢。泣笞孤兒。必以遺訓詔之。及聖佐年旣十五。携往哭墓。若告成長育者然。又與之遍拜族位。施以哀敬。每當家祭。申戒以蠲潔。魚菽於諸位。思嗜擇味而進之。至其登 豆之飾。皆平日手績所致。蓋淑人媲賢訓孤。其終始不懈如此。公卒五十有二年。聖佐將竪表于墓。述公行治。皆金淑人所甞諄諄。而其反復凄切。宛然瀧阡情理。昌翕讀之涕隕。不忍加手。稍爲刪約而歸之。使揭諸石背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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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淵集卷之三十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