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 유업 스리랑카서 결실
법장스님 유업 스리랑카서 결실
<경향신문 2006/3/11/토/문화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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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khan.co.kr%2Fnews%2F2006%2F03%2F10%2F6c1119a.jpg) |
조계종 대표단과 스리랑카 현지 인사들이 지난 5일 파살라에서 열린 조계종 복지타운 착공식에서 첫삽을 뜨고 있다. |
시신을 비롯, 보험금과 조의금 등 이승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대중에게 나눠주고 지난해 9월 입적한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마지막 회향(回向)이 이역만리 가난한 섬나라에서 이뤄졌다.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스리랑카 어린이들의 자활과 교육을 위한 조계종 복지타운의 건립이 시작된 것이다. 이 복지타운은 법장스님이 지난해 3월 직접 전국의 사찰과 불자들에게 호소해 거리탁발로 모아진 20여억원의 성금으로 만들어진다.
조계종은 지난 5일 스리랑카 남부 캄파지방의 파살라에서 복지타운 착공식을 가졌다. 착공식에는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 중앙종회 의장 법등스님, 한·스리랑카문화사회복지재단 집행위원장인 혜자스님, 서울 봉은사 주지 원혜스님 등 조계종 스님들과 신자 100여명, 스리랑카 불교계 및 정부 대표와 현지주민 300여명이 참석했다. 2만5천평 부지의 복지타운에는 그룹홈 형태의 고아원과 유치원은 물론 한국 전통사찰과 수행센터, 특히 한국에 올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교육시설까지 들어선다.
복지타운은 내년 3월 완공될 예정이다. 조계종은 복지타운 완공 이후에도 1년에 1억5천여만원씩 들어갈 운영비 마련을 위해 한국내 후원 사찰들을 정하고 한국 불자들과 스리랑카 어린이들간 자매결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착공식에서는 전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유업이 이뤄졌다는 감사와 회고의 말들이 넘쳐났다. 국민의 70%가 독실한 불교신자인 스리랑카에 대한 법장스님의 애정은 각별했다. 법장스님은 2004년 홍수와 산사태로 초토화된 스리랑카의 한 마을을 복원, 조계종 마을로 조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바 있다. 이번 복지타운도 쓰나미 발발 이후 법장스님이 1회적 지원이 아닌 영구적 자활의 토대를 마련해주자며 제안한 것이다.
현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치사를 통해 “입적한 법장스님의 발원이 꽃을 피우게 돼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지 불교계를 대표해 참석한 아스기리야 종단의 라사나마파 종정스님은 “몇년 전 한국에 가서 법장스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갑작스럽게 입적해 안타깝다”며 “법장스님과 한국 불자들의 보살행에 스리랑카 불자들 모두 감사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지 실무작업을 맡고 있는 지철스님은 “법장스님이 입적하기 바로 5일 전 부지 매입을 위한 계약이 이뤄졌다”며 “스님이 조금만 일찍 가셨어도 자칫 사업이 무산되거나 크게 늦춰질 뻔했다”고 말했다.
조계종 대표단은 착공식 다음날에는 스리랑카 마힌다 라자파크세 대통령을 예방, 복지타운 건립과 운영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라자파크세 대통령은 “대표단의 방문은 부처님이 오신 것처럼 기쁜 일”이라며 “복지타운 건립이 양국의 불교계뿐 아니라 정부 간 관계도 더 긴밀하게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법장스님 영결식이 있던 지난해 9월15일 식장 하늘에는 영롱한 햇무리가 뜬 바 있다 . 이번에 대표단이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에도 스리랑카 하늘에 선명한 달무리가 떠 스님과 신자들은 극락에 있는 법장스님이 착공식을 축하하는 것이라며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파살라(스리랑카)|김준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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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수립 등 도선사·스리랑카 ‘30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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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조계종 복지타운의 향후 운영을 책임질 한·스리랑카문화사회복지재단 집행위원장 혜자스님(도선사 주지)은 감회가 남다르다. 도선사와 스리랑카의 30년 넘는 특별한 인연이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도선사와 스리랑카 간 인연의 시발점에는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과 2대 종정을 지낸 한국 근대불교의 큰별 청담스님(1902∼71)이 있다. 61년 도선사 주지를 지냈고 입적 때까지 도선사에서 주석했던 청담스님은 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대회에서 스리랑카 불교계 아스기리야 종단의 종정스님을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는 우리나라와 스리랑카가 미수교 상태인 데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스리랑카는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였다. 이후 청담스님은 스리랑카를 직접 방문하는 등 양국 국교수립의 막후 역할을 맡았고 이는 72년 통상대표부 설치, 77년 국교수립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청담스님이 엮어놓은 인연으로 아스기리야의 종정은 73년 도선사를 방문했고 75년에는 양측 간에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혜자스님은 “70년대에는 ‘박스컵’ 축구대회에 참가한 스리랑카 선수단을 도선사에 초청, 공양을 대접했고 도선사 신자들이 경기에 응원을 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양측의 인연은 80년대 이후 끊어졌고 혜자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이를 복원, 2004년에 아스기리야 종단의 현 종정인 라사나마파 스님이 도선사를 방문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라사나마파 종정스님은 “73년에도 종정 비서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며 “이번에는 조계종 대표단이 복지타운 건립을 위해 찾아오니 옛 인연이 새롭다”고 말했다.
혜자스님은 “한국전쟁 때는 스리랑카가 부자나라여서 우리나라에 안남미를 원조해줬다”며 “복지타운 건립은 이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혜자스님은 “스리랑카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한국의 불자들과 함께 복지타운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준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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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33)민간신앙과 차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33)민간신앙과 차
<서울신문 2006/3/13/월/기획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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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불을 끝내고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흰장갑과 밀짚모자를 눌러쓴다. 싱그러운 햇차를 준비하기 위해 겨울을 이겨낸 차밭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삽과 괭이를 들고 차밭을 정리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젊은 노동력이 떠나버린 시골에서 사람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다행히도 일지암 차밭은 그리 크지 않아 혼자의 운력으로 가능하다.
차밭에는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이곳저곳 씨앗을 뿌려놓고 북상을 준비하고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냉이 등 봄나물들은 고단한 운력의 또다른 수확물 중 하나다. 아지랑이 바람결에 매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앙상하니 가시만 돋은 매화나무 가지 끝에 토실토실 맺혀 있던 새빨간 꽃망울들이 순서도 없이 중간중간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천리향인가 바람을 타고 햇살을 이고 산하대지에 골고루 그 향기를 뿌리며 봄이 지나가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온우주가 자궁이란 말이 실감난다. 차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차는 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차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차의 형식은 있고 그 정신적 내용은 빠진 빈 알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을 비롯한 옛 차인들이 차를 도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일상에서 완전한 삶의 행위로 간단없이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씩 차인들의 찻자리에 초대받으면 금방 알수 있다. 여기저기 제자리에 있지 않은 차도구들, 정결하게 준비되지 않은 청수들…. 그 찻자리는 청향보다 수다스러움과 번잡함이 넘쳐난다. 마음속에서 작은 실망들이 저절로 우러난다.
우선 찻자리는 상큼하고 청량해야 한다. 찻상과 차도구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먼저 찻자리까지 정리해야 한다. 그러면 일단 그 찻자리는 청량함과 신선함이 넘쳐난다. 그런 다음 물을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고 난 뒤의 뒤처리까지가 마치 물흐르듯 빈틈 없고 완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차의 도인 것이다. 그같은 차의 살림살이는 바로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옛 차인들은 바로 차의 일상을 살림살이와 함께 여여하게 가꾼 것이다.
우리의 차는 매우 그 역사가 깊다. 그리고 그 차의 역사 역시 일반 민중들의 삶속에 깊이 투영되어 함께 해왔다는 점이 간과되어 왔다. 차는 역사속에서 민중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차가 일반 민중들의 음료로서 애용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찻집같은 곳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찻집의 이름은 ‘다점’이었다.‘다점’에는 누구나 다 드나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차는 일반민중들이 애용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민요사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문수동에 문수동자/화개동천 차객들아/쌍계사의 대중들아/이 차 한잔 들으소서”라는 민요를 보면 화개동천에는 많은 차인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의 화개동천은 전통적인 차 주산지로서, 차가 일상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다른 민요를 살펴보자.“여보소 작설한잔 하는 재미 들어보소. 우리 사람은 서로 인연 따른 재미로 사네.”라든가,“작설 한잔 마시면서 내 간장을 달래보세.”“엄살많은 시애비는 작설 올려 효도하고”“동지섣달 긴긴 밤에 작설 없어 못살겠네.”라는 등의 민요에서 살펴지듯 작설차는 일상의 적요로운 삶을 달래는 친근한 민중음료였다.
또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그 민요속에 차가 가지는 정신적인 측면이 깊이 박혀 있다는 점이다. 잠 안오는 긴긴 동지섣달에 차를 마시는 것이며, 구박하는 시애비의 마음을 달래는 것 등 차에는 사람의 고단한 마음을 달래는 정신적인 측면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민요도 있다.“에헤야 대헤야 우리 인생 작설로 풀어보세”를 볼 때 차는 지친 우리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는 역할을 했다.
차는 우선 약용으로 쓰였다. 차를 생산하거나 차가 재배되는 곳의 민중들은 차를 찧어 발효시켜 메주처럼 처마밑에 차를 매달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엽전이나 수레바퀴모양의 이른바 ‘떡차’로 불리는 처마 밑 차는 두통약 뱃병약 소화제 해독제 등 만병통치약으로 널리 쓰였다. 구급상비약이었던 ‘떡차’는 차를 마시건 마시지 않는 사람이건 긴 실줄같은 끈을 사용해 처마밑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반민중들이 애용했던 차는 대부분 발효차인 ‘떡차’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반민중들은 당시 차를 따로 보관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구들도 태부족하거나 아예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반민중들은 차를 쉽게 마실 수 있기 위해서 평소 부뚜막에서 물을 끓이듯 마실 수 있는 차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차를 마시고 싶을 때 처마밑에 걸어둔 차를 한조각 빼어다가 구리솥이나 돌솥 가마솥같은 곳에 넣어 끓여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되는 차 민요를 통해 일반 선비들에게는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님은 님은 품에 자고/새는 새는 나무에 자고/우리님은 어디 잘고/새 혀 닮은 작설 잎은/선비품에 잠을 자네.”라며 차가 공부를 하는 선비의 곁을 지키는 도우미 같다는 것을 담아내고 있다. 이와 관련된 또다른 민요도 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차약을 먹고 장원급제를 간절히 비는 민요가 그것이다.
“둥개 둥개 두둥개야/금자동아 은자동아/천리 금천 내새끼야/영축산록 차약일새/좀티 없이 자라나서/한양가서 장원급제/이 낭자의 소원일세/비나이다 비나이다/부처님전에 비나이다.” 차가 공부를 잘해 장원급제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를 지니고 차를 마시며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장원할 수 있다는 간절한 염원을 차에 담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차는 또 일반민중들에게 기복을 염원하는 매개처였다. 차는 그런 점에서 민중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물이었다. 신령스럽고 고귀한 차를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믿고 그 차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당산이나 용신제에도 차는 쓰였다. 옛사람들은 바다 연못 등 물속에 깃들어 있는 용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속에서 죽어간 고혼들을 위해 수륙재를 지낼 때나 또는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용왕에게 수륙재를 지냈다. 그와 관련해 불교의 (범음집)에는 감로다를 올리며 소원을 비는 다게가 있다.
“이제 감로다를 가지고/용왕님들께 올리나니/간절한 마음 살피시어/부디 받아주소서” 이와 관련해 (범음집)에는 “용궁에 가득차 있는 설산의 향유(차)가 있어, 용신이 그 차를 좋아한다.”고 적혀 있다. 용왕에게 올린 차는 바다나 못에 뿌렸다.
차는 또 농사의 풍작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가신’(家神)에게 비는 고사에도 쓰였다. 제주도에서는 정월이나 2월 중에 고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밥 떡 쌀 식혜 다완 무명을 올렸다. 여기서 다완은 차를 담는 그릇이고 그릇에 담긴 것은 차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무녀의 고사 축원문에는 ‘찻잎을 찐 시루를 큰 다완에 담아 젯상에 올렸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무속인들은 대부분 고사를 지낼 때 차를 큰 사발에 담아올린다는 축원문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사는 집안에 행운이 오고 액운을 아달라고 비는 것으로, 차는 척사의 중요한 제물로 이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던 솜의 원료인 잠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다례를 했다. 세종때 (사시찬요)에는 “잠신제사는 음력 1월15일에 지내는데 누에 칠 여인이 제주가 되어 향과 음식과 떡을 갖추며 술을 쓰지 않고 차를 사용한다.”고 적혀 있다.
삼신 산신 토속신에게도 헌다를 했다. 여기에서 삼신은 환인이나 단군 또는 산신 마을을 지키는 토속신이기도 하다. 민중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이들에게 차를 달여 올리고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소원을 빌었다.
“이슬감로로 다린 햇차를/삼신단위에 올려놓고서/금산 산신님 남해용왕님/나라세우신 태조님이요/두손 모아서 빌어 옵니다/이내 한소원 들어주소서” 일반민중들은 단군뿐만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들이 차를 매우 좋아한다고 믿고 제물로 올렸던 것이다. 이같은 것을 볼 때 차는 민중들의 삶과 신앙속에 오랫동안 하나의 삶으로 존재해왔다고 보여진다.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용으로, 긴긴밤 마음의 시름을 달래는 친구로, 또한 나쁜 액운을 막아주는 척사로, 그리고 긴급한 구급상비약으로 쓰여진 것이다. 차는 그런 점에서 우리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전통음료로서 새롭게 각인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지암 암주
■ 민중들의 음료 ‘차’ 구전민요에도 담겨
차가 일반민중들의 속에 삶의 한 형태로 자리잡고 내려온 고유한 음료였다는 것은 채록된 구전민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지배계층은 각종 역사서나 개인의 시문집을 통해 차생활을 즐겼다는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으나 그같은 기록을 가질 수 없었던 일반민중들은 삶의 노래인 민요로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몇가지 차 민요를 소개해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uddhism.or.kr%2Fpds%2Fboard%2Fimages%2F20060313%2F200603131142244874.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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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야생차밭. 구전되는 민요에 따르면 지리산 자락은 전통적으로 차의 주산지였다.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 | “백운계곡 봄 안개에/물소리가 높아지네/고로쇠는 물오르고/보조스님 좋아했던/선동골에 작설나무/백설덮인 양지쪽에/나풀 나풀 돋은 새싹/한잎 두잎 따서 모아/두강 작설 그 맛내려/조심 조심 손질하여/봉지 단지 담아두고/삼짓날에 제비올때/순천장에 옥항아리/깍지말고 사왔어서/옥용골에 이슬받고/도선국사 파둔 샘물/개 안짖고 닭 안울때/옥항아리 물을길어/옥탕관에 물을 끓여/백운차를 달이어서/천년예언 도선국사/이 차 한잔 올리옵세/백운산에 산신님네/백운사의 보조스님/고로쇠물 풍풍솟게/두손 모아 비옵니다.”
이 민요에서는 첫물차를 정성스럽게 딴 후 약으로 쓰이는 고뢰쇠물을 많이 얻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고 있다. 차를 따고 물을 뜬 후 정성스럽게 달여 올리는 간절한 염원이 보인다. 다음은 김수로왕과 왕후 허황옥에게 햇차를 올리는 민요다.
“다전리에 봄이오면/삼월이라 삼짖날에/다전리에 햇차 따서/만장산샘에 물을 길어/어방산에 솔갈비로/밥물솟에 끓인 물에/제사장님 다한 정성/김해그릇 큰 사발로/천겁만겁 우려내어/장군차로 올릴까요/바이 바이 차림니더/나라 세운 수로왕님/십왕자의 허왕후님/가락국가 세운 은혜/이 차 한잔 올립니더/합장하고 비옵니다/김해사람 복받으소/잘못한 일 점제하소.”
다전리에 햇차를 딴 후 만장산의 샘물을 길러 고마움을 축원하는 씨족들의 마음이 간절하다. 이 제문은 김해김씨 씨족의 제사때 불리는 제문겸 민요다. 이 민요는 김해가 차를 생산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다완을 생산하는 중요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이밖에도 자식의 점지를 기원하는 내용, 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고단한 삶을 노래한 내용들 등 차에 관련된 민요가 내려오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차는 일반민중들의 삶속에 상서러운 제물로 소원과 발복을 비는 축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 차는 또한 민중들의 삶을 수탈하기도 한 이중적인 모순을 지녔다. 국가의 어용 차를 생산하던 민중들은 극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같은 어려움을 김종직은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같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직접 차밭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긴긴 역사속에서 우리민중들의 삶과 같이 해왔던 차는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삶속에 다가오고 있다. 차 인구 700만시대가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의 삶과 걸맞은 새로운 차의 문화양식이 정립되어야 한다. |
4개 종교 여성수도자들의 18일간의 여정
4개 종교 여성수도자들의 18일간의 여정
<조선일보 2006/3/13/월/TV프로그램B11면>
KBS 1TV ‘수요기획’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uddhism.or.kr%2Fpds%2Fboard%2Fimages%2F20060313%2F200603131142245071.jpg)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과 성공회의 수녀, 원불교의 교무로 이뤄진 ‘삼소회’ 회원 16명이 지난 달 6일~24일 인도, 이스라엘, 영국, 이탈리아의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서로 다른 종교에서 모인 여성 수도자들은 18일 간의 성지 순례를 통해 어떤 체험을 하고 돌아 왔을까.
KBS1 ‘수요기획’(15일 밤12시) ‘공행(共行) - 18일 간의 아주 특별한 여행’을 통해 소개된다. 해외 순례에 앞서 원불교의 영산성지에 들러 삼소회 기원문을 채택한 삼소회. 출발 전 이들은 ‘독선과 아집과 편견을 넘어 종교의 가르침이 평화임을 가슴에 새기며 실천한다’고 기도했다. 출발 전부터 이들의 여정은 여성 수도자들이 종교간의 화합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첫 여정지는 인도. 회원들은 바라나시에 머물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 깊은 대화를 나눈다. 달라이 라마는 한국의 이름 모를 여성 수도자들에게 “여성의 영적 양육능력과 자비심이 훨씬 높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라나시는 붓다가 고행을 끝낸 뒤 처음으로 설법을 한 ‘녹야원’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의 잔디밭에서 한국의 수녀와 교무 비구니들이 함께 둘러 앉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이곳을 찾은 외국의 많은 순례자들에게도 뜻 깊은 풍경이었다.
다음 순례지는 영국. 성공회 성지인 런던 켄터베리 대성당에서 삼소회 회원들은 작년 7월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과 십자가의 길 등을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간 일행은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하는 기회를 가졌다. 마침 이곳에서 한국의 두번째 추기경이 발표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연출을 맡은 이홍기 PD는 현각 스님의 ‘만행’ ‘동행’ 등을 제작한 연출자. 로드 다큐를 주로 찍어 왔다. 이 PD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서 종교간의 공통 분모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며 “여성 수도자들의 절제된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청자들로서는 1시간에 전 세계 4개국의 주요 성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풍산] 스님도 우리 고객…사찰에 銅으로 만든 기와 납품
[풍산] 스님도 우리 고객…사찰에 銅으로 만든 기와 납품
<매일경제 2006/3/13/월/기업분석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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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으로서는 스님도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이다.
풍산의 여러 제품 가운데 '동기와' 가 있기 때문이다.
동기와란 말 그대로 동(銅)으로 만든 기와다.
사찰 지붕을 돌기와가 아닌 동기와로 대체하겠다는 게 풍산의 '야심'인 것 같다.
동지붕재 영업팀 직원들은 '등산'에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전국 각지 산속을 누비 며 사찰을 찾아야 하기 때문. 산길을 운행해야 하므로 영업팀 자동차는 일반 자가용이 아닌 지프차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월정사 등 국내 수백여 개 사찰에 풍산 동기와가 들어가 있다.
국내 사찰 수요뿐 아니라 수출도 제법 있다.
2002년 한국에서 수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미국인 스님(무량스님)이 미국에서 사찰(태고사)을 지었다.
동지붕 영업팀은 사전에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까지 달려가 무량스님을 설 득한 끝에 태고사 지붕을 수주하기도 했다.
풍산 동지붕재가 사찰에만 들어가는 건 아니다.
대형 박물관이나 기념비적인 건축물에도 동지붕재가 들어갈 수 있다.
실제 풍산은 70년대부터 국내 유명 건물 지붕을 동으로 장식해 왔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지붕(돔)과 독립기념관 지붕 등이 대표적인 예다.
동지붕재는 처음엔 적동 색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산소와 반응하면 색깔이 고풍스러운 초록색으로 바뀌게 된다.
동지붕재는 또 벽돌 등과 비교해 무게가 가벼운 것이 장점이다.
이는 건물의 하중 부담을 경감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수명이 영구적이란 특성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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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곳 별난일] 스님이 봉화산에 ‘UFO 안착지’설치
[별난곳 별난일] 스님이 봉화산에 ‘UFO 안착지’설치
<경향신문 2006/3/11/토/사회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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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비행물체(UFO)만큼 관심이 집중된 사안도 흔치 않다. 과학계에서는 존재를 인정치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어서다. 그런데 UFO의 존재를 믿을 뿐더러 착륙유도 시설까지 만든 스님이 있어 화제다.
이 시설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1리 봉황산(818m)의 해발 700m 지점에 있다.
안착지는 원형(圓形)이며 지름이 9m나 된다. 가로 20m, 세로 16m 크기의 사각형 터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든 것이다. 높이는 10㎝다. 주변에는 외계인과의 교신을 위해 교신탑을 세우고 서치라이트 시설도 갖췄다. 외계인들이 발견하기 쉽게 한 것이다.
안착지에서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명상터가 있다. 역시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10개가 조성돼 있고 이 가운데 7곳엔 천막이 쳐있다. 명상터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는 UFO 관측소가 있다.
이들 시설을 만든 사람은 비구니 전일 스님(65)이다. 전일 스님은 10일 “UFO는 안착지에 내리는 게 아니라 안착지 위 상공에 머무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UFO 광선을 통해 타고 내린다”고 설명했다. 전일 스님은 UFO 출현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캠코더와 녹음시설도 해놓았다.
스님이 이들 시설을 만든 건 2000년. 1995년 UFO 안착지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한국UFO연구협회의 도움을 받았다.
앞서 스님은 60년대 이후 이 일대 1만여평을 개간, 수행하다 ‘이상한 불덩어리’를 목격했으며, 이후 UFO에 ‘미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UFO에 빨려들어가 외계인들과 우주 세상을 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UFO연구협회조차 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협회측도 UFO의 존재는 믿는다.
회원들과 천체 관측 동호회, 항공 관련 대학생과 교수 등 연간 400명가량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텐트에 머물며 별을 관측하거나 UFO와 관련해 밤샘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협회 허영식 회장(57)은 “UFO가 착륙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스님의 안착지 조성을 도왔다”며 “UFO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우주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한껏 펼 수 있는 곳으로 많이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봉화|최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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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화제의 책]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세계일보 2006/3/11/토/북월드16면><경향신문 2006/3/11/토/책마을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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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그곳에 그것이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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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눈 덮인 겨울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안다. 번잡함을 벗어난 적막한 산을 찾으면 정결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눈뿐인 그곳에서는 ‘창조’를 경험할 수 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상상만으로 여름의 푸름도 만들어 볼 수 있고, 형형색색 단풍 빛깔도 그려낼 수 있다.
형체가 가뭇없이 사라진 옛 절터에서의 느낌도 이런 것일까.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지누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는 폐사지(廢寺址) 25곳의 역사와 저자의 사유가 담겨 있다. 불교나 미술에 관한 지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심상을 담아낸 에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이지누의 절터 톺아보기’ 시리즈 중 첫째로, 강원도·경상도 편이다. 앞으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편과 경주편도 출간된다.
강원 양양의 진전사 터와 선림원 터에서 시작된 저자의 구도 행각은 한반도의 동쪽 허리를 따라 예천의 개심사 터 등 경북 지역의 폐사지를 거쳐 경남 산청의 단속사 터와 지곡사 터 등으로 이어진다. 잃어버린 절터에서 저자는 죽비 소리를 듣고 부도와 탑에서 천년의 세월을 복원해 낸다. 사시사철 절터를 찾을 때마다 그는 고독의 그림자와 함께 거닐며 ‘지금 바로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불교와 도교, 부처와 노자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책 읽는 내내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강원 원주 거돈사 터
함께 실린 사진 218점은 정겹고 글은 아름답다. 표현만 아름답다고 미문으로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은 마음 수양으로 나이가 든 잔잔함이 들어 있어야 아름답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그것이 보이지 않던가”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현장을 찾아 사진기와 마음에 그 느낌을 담지 않았다면 공감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남 합천 대동사 터
저자의 폐사지 순례에는 여정이 있고, 사색과 철학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책은 아름다운 여행기이면서 또한 깊이 있는 철학 에세이다. “순례객의 발길이 끊어진 빈 절터의 당간 지주가 지닌 이미지는 기다림이다. 그는 사람들이 떠나 버린 동구 밖 느티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제 몸 속에 사무치도록 배어 있을 과거를 추억하며 묵묵할 뿐이다.”
그리하여 절터를 좋아하는 불교도의 심정으로 책을 대하지 않아도 좋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여행기로, 꿈꾸는 자라면 철학적 사유로, 전통문화를 살펴보려는 이는 답사기로 바라보면 된다.
◇강원 강릉 굴산사 터(왼쪽), 경남 함양 장수사 터
이보연 기자 byable@segye.com
한암 스님 참모습을 보자
한암 스님 참모습을 보자
<중앙일보 2006/3/11/토/문화18면>
선·교 어느 쪽도 소홀히 않던 조계종 초대 종정
청담·월하·서옹 등 큰스님 가르쳐
세미나, 책 발간 등 재조명 활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노릇은 한암 스님만큼만 하거라.”
지난해 말 91세로 입적했던 조계종 전계대화상(승려에게 계를 내리는 최고 책임자) 범룡 스님은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일제 말 한암(1876∼1951)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러 떠나던 그에게 옛 은사가 당부했던 말이다. 범룡 스님은 말년에 스승 한암을 자주 회고했다.
"한암 스님은 서릿발처럼 엄하면서도 자비롭고 진실하셨다. 절대 자기 자랑이 없었고, 남을 흉보는 일도 없었다. 대개 스님들은 한두 가지를 잘하는데, 한암 스님은 고루 잘하셨다. 우선 계행이 철저하고, 선지에 밝고, 한문 실력이 있고, 글씨도 잘 쓰셨다."
한암 스님을 모셨던 대구 파계사의 도원 스님은 스승의 근검 정신을 강조했다."누구인가 독감이 들면 한암 스님은 당신 방에 있던 꿀 한 공기를 내려보냈어요. 당신은 한 번도 안 잡수셨습니다. 꿀이란 것은 수백 마리의 벌이 만든 것인데 그 공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당신을 위해 약을 드시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스님의 밥은 항상 7부만 담았습니다. 간혹 8부를 담은 적이 있어요. 그러면 스님께서 '야! 이놈아 늙은이가 먹고 똥싸라고 이렇게 많이 담느냐'며 야단을 치셨어요."
한암 스님의 수행 정신을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스님의 선사상과 수행법을 익히는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스님의 수행 일화를 묶은 책이 발간된다. 스님이 불교계에 미친 영향을 짚어보는 학술 세미나도 열린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스님의 참모습을 되살려보자는 취지다.
한암 스님은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국불교의 거목이다.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1925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27년 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6.25 때 상원사를 전화에서 지켜낸 일화가 유명하다.
스님은 선(禪)과 교(敎)에 두루 능통했다. 선방에서도 경전을 읽혀 일부 수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경전이 뒷받침되지 않은 참선은 자칫 잘못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상원사에 승려수련소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했다. 고암.청담.월하.서옹 스님 등 20세기 한국불교의 큰스님들도 한때 그 밑에서 공부했다.
스님은 특히 엄격한 계율을 강조했다.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한국불교의 '최고직'(교정.종정)을 네 차례나 거치면서도 수행자로서의 자기점검을 철저히 했다. 불자들은 스님에게 삼배(三拜)를 하는 게 관례인데 스승은 이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중노릇은 박복해서 처자권속을 거느릴 수 없는 위인들이 하는 것 인데, 절을 세 번 받으면 복 있는 사람이 되기에 중노릇을 할 수 없다"는 이유다.
한암 정신은 '승가오칙'으로 요약된다. 선.간경(看經).염불.의식.가람수호. 부천대 김광식 교수는 "한암 스님은 계(계율).정(선정).혜(지혜) 3학에 고루 능했다"며 "한암 스님은 승려 이전에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모델이 된다"고 말했다.
◆행사 메모=한암 대종사 수행학림(13일~4월 24일 매주 금~일요일 강원도 월정사.상원사. 일반인 대상 승가오칙 강의.실습), 한암 스님 수행일화집'한암의 수행과 정신'(민족사) 봉정식, 한국 불교와 한암 대종사 학술세미나(4월 24일 월정사). 033-332-6665.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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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에] 강남 귤,강북 탱자
[토요일 아침에] 강남 귤,강북 탱자
<서울신문 2006/3/11/토/오피니언22면>
원철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국장 |
그 암자에는 탱자나무가 길게 빙 둘러져 있다. 이런 생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이제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산중은 겨울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라 잎 없이 뾰족뾰족한 가시들이 더욱 도드라져 담장이라는 본래 기능에 더없이 충실하다. 길바닥에는 지난해 떨어진 탱자 열매들이 메마른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예전에는 한약재라고 하면서 일부러 익기를 기다렸다가 더러 따가고 하더니 이즈음은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물론 떨어진 뒤도 마찬가지다. 열매가 제 값을 못해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춘삼월이 왔음을 아는지 여기저기 가지 끝에도 파아랗게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서귀포에 위치한 그 절은 정원수가 모두 귤나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으로 경계를 친 요사채의 큰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을 돌려 이른 봄임에도 불구하고 황금빛의 큼지막한 귤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 쳐다보았다.
그 곳에 머물고 있는 도반과 함께 오랜만에 찻상을 마주하니 십만팔천리 떨어진 강남으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하귤(夏橘)’이라고 대답했다.
육지에서 온 사람마다 모두 의아해 하며 물어보는 모양이다. 겨우내 꽃처럼 나무에 매달려 동절기를 견디는 만생종이라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며칠 전 두루마리 상태로 남아 있는, 고려에서 처음 만든 경전들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남선사(南禪寺)로 향하는 연구원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일보다도 ‘호시절이라 교토 곳곳에 만개한 매화꽃을 볼 수 있겠다.’라고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즈음의 강남 풍경을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생각하니 새가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로우리라.’라고 했던가.
봄을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제주도건 일본이건 중국이건 남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봄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귤나무를 생각하니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론 원어의 남북은 중국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지역을 나눈 것이다.‘강남의 귤, 강북의 탱자’라고 했으니 같은 나무를 심어도 강 남쪽에는 귤이 열리는데,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므로 그 맛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강남과 강북의 지리적·자연적 환경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하지만 귤과 탱자는 같은 운향과(雲香科)에 속한다. 그처럼 양자강은 남북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강을 중심으로 서로를 함께 마주보도록 해주어 또 다른 하나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강남북의 기준을 양자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꾸어 놓으면 또 다른 언어가 된다. 강남의 뚝섬 봉은사는 강북의 잘 나가던(?) 상궁들이 나룻배를 타고서 갈대밭을 헤치며 기도하러 오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화려한 고층빌딩의 숲에 둘러싸인 채 도심 속의 섬이 되어 버렸다. 이는 몇십년만에 강남과 강북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 까닭이다.
이제 지하철 종각역 벽에는 ‘강남같은 강북’ 혹은 ‘강북에서도 이제 강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가 심심찮게 나붙는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적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든지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변한 ‘말씀’으로 읽히는 한가한 토요일 아침, 송나라 야보도천 선사의 시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강북에는 탱자되고 강남에선 귤이지만(江北成枳 江南橘)/
봄이 오면 모두 함께 같은 꽃을 피우는구나(春來都放一般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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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대사전 12권 내달 완간
한국가톨릭대사전 12권 내달 완간
<경향신문 2006/3/11/토/문화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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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한국가톨릭대사전’이 다음달 중순 완간된다. 총12권 9,960쪽 분량의 이 사전 편찬은 13년 동안 1백20억원이 투입되고 집필 인원만 2,500여명이 참여한 한국 가톨릭계의 대사업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93년부터 편찬을 시작한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우선 가톨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한국 및 세계 교회사, 성경, 신학, 교회법, 전례, 성당 등은 물론 성인과 주요 사제, 신학자 등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에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민족종교 등 다른 종교나 교파, 또 종교와 관련된 철학, 사회과학, 한국학적 어휘들도 모두 포함돼 있다. 각 항목을 설명해주는 1만여점의 사진자료와 도표도 수록돼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khan.co.kr%2Fnews%2F2006%2F03%2F10%2F6c1119c.jpg) |
최석우 몬시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가운데)이 변우찬 신부(교회사연구소 부소장)와 함께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가톨릭대사전’을 봉정하고 있다. |
특히 이 사전은 한 항목에 대해 종교적·학문적으로 입장이 다른 관점의 설명이 각기 다른 필자에 의해 따로 기술돼 있다. 예를 들어 ‘불교’ 항목에는 불교학자가 쓴 내용과 가톨릭 관점에서 본 내용이 함께 실려 있다. ‘가난’이라는 항목의 경우에도 ‘수도생활의 가난’ ‘성서에서의 가난’ ‘해방신학에서의 가난’ ‘동양철학에서의 가난’ 등으로 분류돼 있다.
각 항목에는 집필한 필자들 이름이 모두 표기돼 있고 참고문헌까지 소개돼 있다. 필진에는 각 분야에서 권위있는 국내외 학자들은 물론 신부와 목사, 스님 등도 포함돼 있다. 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는 “기존의 사전들이 번역 등을 통해 다른 사전을 베낀 것이 대부분이라면 한국가톨릭대사전의 내용은 각 필자의 순수한 창작물”이라며 “세계 사전 편찬사에 유례가 없는 독창적 사전”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지난 13년 동안 이 사전을 편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머어마하게 소요되는 자금 문제였다. 2,500여명에 달하는 필자들에게 모두 원고료를 지급해야 했고 여기에 감수료, 인쇄비 등 순수비용만 권당 5억여원씩 들어갔다. 연구소는 한권, 한권씩 사전이 완성될 때마다 이를 판매해 얻은 자금으로 다음책을 준비하는 등 힘겨운 방식으로 총 12권 완간을 앞두게 된 것이다. 김성태 신부는 “거의 맨손으로 편찬사업을 시작했다”며 “하느님의 축복과 신자들의 사랑으로 기적 같은 완간을 이루게 됐다”고 말했다. 문의 (02)756-1691
〈김준기기자 jk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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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켜주는 ‘유무념 시계’ 개발
마음을 지켜주는 ‘유무념 시계’ 개발
<경향신문 2006/3/11/토/문화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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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밝고 훈훈한 마음을 잘 지키면 한없는 은혜가 나타나지만 마음을 잃어버리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생긴다. 원불교가 마음 지키기를 도와주는 ‘유무념(有無念) 시계’를 개발, 보급에 나섰다. 유무념 시계는 일반 손목시계에 2개의 LCD가 장착돼 각각 유념과 무념을 표시하도록 돼 있다. 이용자들은 일정 시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유념의 상태였는지, 아니면 무념의 상태였는지를 이 시계에 입력, 나중에 나온 결과를 종합해 마음을 다독거리는 계기로 삼게 된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온화하게 대한다’는 목표를 세운 뒤 이를 제대로 지키면 시계의 유념 버튼을 누르고, 반대면 무념 버튼을 누른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평소에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사용한 마음공부 방법을 현대화한 것이다. 원불교는 휴대폰 액세서리용 유무념 계수기도 함께 보급한다.
〈김준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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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신]한기총·KNCC 부활절 공동예배 외
[단신]한기총·KNCC 부활절 공동예배 외
<경향신문 2006/3/11/토/문화19면>
■ 한기총·KNCC 부활절 공동예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박종순)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회장 박경조)는 다음달 16일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공동주최한다. 올 부활절 연합예배의 주제는 ‘생명과 화해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정해졌다. 연합예배 설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맡고 실무대회장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다.
■ 증산도, 교도소등에 책 3,000권 기증
증산도 상생봉사단은 이달말까지 서울시내 경찰서 유치장과 전·의경대, 방범순찰대, 교도소 등에 총 3,000여권의 책을 기증키로 했다. 상생봉사단은 향후 해외동포와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베스트셀러, 역사서, 증산도 도전 등을 기증하고 도서·산간지역 어린이들에게는 동화책을 전달하는 활동도 계속할 계획이다
아내와 세운 선바위미술관서초기 교회사부터 120년 담아
아내와 세운 선바위미술관서초기 교회사부터 120년 담아
<세계일보 2006/3/13/월/사람들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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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생과 여학생 사이 병풍 친 교실 풍경…
기독교 전파 당시 풍속 생생히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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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많은 순교자와 기독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습니다.”
풍속화가 이서지(72) 화백은 지난 10일부터 다음달 말까지 과천 선바위미술관에서 ‘새벽길―풍속화로 보는 한국기독교사전’을 열면서 신앙인으로서의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 전시회에서는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된 17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초기 교회사를 담은 130여점의 그림이 선을 보이고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꼭 한번은 종교적 의미가 담긴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그는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도 우리의 풍속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각종 교회사 자료는 물론 이화학당, 세브란스병원 등의 자료도 참고해 초기 기독교사를 그려낸 그는 그림들 속에 교회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들도 함께 담아냈다. 평양에서 열린 부흥회,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학당 학생들의 모습, 남녀유별사상 때문에 남자 선생님이 여학생들을 가르칠 때 병풍을 쳤던 장면 등이 그것.
“천주교인들은 갖은 박해를 당해가며 신앙 전파를 위해 애썼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 등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기관들을 지어 간접적인 선교에 나섰다”며 “당시의 근대식 병원과 학교 등의 모습도 기독교사의 일부”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신문기자로 활동할 때부터 풍속화에 몰입, 197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0여 차례 풍속화 전시회를 열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화가로 변신한 그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사회까지의 생활모습과 풍습 등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애환을 감칠맛나게 표현해 국내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이름나게 됐다.
2004년에는 전통인형작가인 부인 김시온씨와 함께 과천에 선바위미술관을 설립했다. 선바위미술관은 이씨가 그림으로, 김씨가 인형으로 전통 마을과 풍속의 모습을 재현해 전시하는 국내 유일의 풍속미술관이다. “사라져 가는 풍속을 되살리고 기록·보존해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것이 목적”이라고 이 화백은 소개했다.
그는 풍속화에 대해 “우리의 문화와 모습을 포근하고 정겹게 담고 있는 작품으로 예술성뿐만 아니라 사실성, 기록성까지 띠고 있다”며 “이를 통해 기성세대는 과거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향수와 어머니의 정취를, 어린 세대는 과거 우리 조상이 살아왔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적 효과를 체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세진 기자 sjkwon@segye.com
[문화단신] 풍속화로 보는 한국 기독교사
[문화단신] 풍속화로 보는 한국 기독교사
<중앙일보 2006/3/11/토/문화18면>
풍속화로 보는 한국 기독교사
풍속화가 이서지씨가 한국 기독교의 초기 모습을 우리에게 친근한 풍속화로 보여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10일 시작해 다음달 30일까지 과천 선바위미술관에서 열리는 '새벽길, 풍속화로 보는 한국 기독교사'다.
초기 신자들이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명례방.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비밀 예배를 올리는 장면,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 어두운 밤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문 하수구를 통해 밀입국하는 모습 등 130여 점이 기독교의 역사를 보여준다.
17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한국 기독교의 유입, 성장 과정 등을 시대별.주제별로 꾸몄다. 조상들의 세시풍속, 노동, 먹을거리, 놀이문화, 일상생활 등도 정겹게 묘사됐다. 성경 장면이나 과거 신앙의 모습을 표현한 전통인형작가 김시온씨의 작품도 소개된다. 02-507-8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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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지정]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시론/김지정]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동아일보 2006/3/11/토/오피니언31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었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평생 화두로 가슴에 묻고 계신다는 정진석 추기경의 말씀(동아일보 8일자 A1·10면 참조)을 읽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그 골고다 언덕을 얼마 전 내가 걸으면서 가졌던 감회가 되살아난다.
“예루살렘의 돌멩이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파괴되리라”고 예견하셨던 예수의 그 절망과 비탄이 다시 저미어 왔다.
“내 슬픔 같은 슬픔이 또 있는지 살펴보아라. 위로부터 그분이 내 뼛속에 불을 보내시어 나를 응징하셨고 내 발이 걸리게 올가미를 쳐 놓으셨으며 나를 돌려세워 외롭게 하여 진종일 슬퍼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외친 수난의 비통함을 골고다 언덕을 걸으면서 나는 들었다. 십자가 사건 2000년 후 한국의 한 여성 수도자, 소태산 대종사(원불교의 창시자)의 심부름꾼인 내 마음속에도 “저도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있었다. 가까이서 묵묵히 걷고 있는 곽베아타 수녀의 그 침묵 속에도….
출가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서원이 살아 있다. 그 체험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 건져 줘, 살려 줘 애끓는 저 소리.” 그렇다. 우리 출가자들은 끊임없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다. 또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정 추기경의 화두가 이 시대 모든 수도자의 가슴에 있기를 염원한다.
불교의 비구니, 원불교의 교무, 천주교·성공회의 수녀 등으로 구성된 한국 여성 수도자 모임인 ‘삼소회’의 회원들은 5년 전부터 월 1회 명상기도를 통하여 ‘세계 종교성지 순례’의 꿈을 키워 왔다. 테러도 반(反)테러도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독선과 아집과 편견을 넘어, 종교의 울도 넘어 모든 성자의 본의가 하나임을 믿고, 모든 성자의 가르침이 오직 평화임을 가슴에 거듭거듭 새기며 순례를 했다.
순례 기간이던 지난달 22일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이 교황청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종교 화해’의 상징으로 삼소회가 소개됐으며 회원들은 일어나 합장하고 두 손을 흔들어 교황께 인사드렸다. 그런데 곧이어 그 자리에서 정 추기경의 서임 발표를 받들게 되다니! 이 기막힌 기연, 하늘의 선물을 받은 심경이었다.
정 추기경이 추기경으로서의 첫걸음으로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에 민족화해센터 및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6·25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족의 불행을 치유하고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시려 하는구나 하고 짐작했다. 감사할 일이다.
정 추기경은 “모세에겐 자기는 없었고 오직 백성만이 있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도 없었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정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성소이니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흔히 ‘산타클로스’라 불리는 성 니콜라오를 세례명으로 받았다는 정 추기경, 그가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화해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기를 기원한다. 또한 한 종교의 수장이라는 자리를 넘어 모든 종교가 민족의 염원을 한마음으로 한 기운으로 파수공행(把手共行)하는 큰길을 열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종교 사회인 이 나라에서 종교 화합의 꽃을 피우는 일을 하실 때 교황청에 물결치던 그날의 함성이 아름다운 꽃비가 되어 내리기를 빈다. 관용과 화해의 물결이 이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김지정 원불교 교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