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관란사(觀瀾寺) 정원 |
관란사는 김부식이 창건한 절로서,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중수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었는데, 왕이 “들은즉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복을 축원한다 하니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내가 한 번 나가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에 초목도 없는 붉은 산에다가 근처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등을 비롯한 기이한 화초를 이식하고, 또 단(壇)을 축조하여 왕이 휴식할 집을 신축하였는데, 단청으로 장식하였으며, 섬돌은 모두 기괴한 돌로 만들었다. 어느날 왕이 절에 나갔는데, 김돈중 등이 절 서쪽 축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바, 장막과 그릇들이 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음식도 진기하 ㄴ것으로 차렸다고 한다 [고려사]. |
3-5. 진강공(晉康公)의 모정(茅亭) |
진강공 최충헌(崔忠獻, 1150~1219)은 남산리에 있는 제택의 북쪽 동산 작은 봉우리에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띠풀로 지붕을 덮어서 모정이라 명명하였다. 또 이인로, 이규보, 김군원, 이공로, 김양경, 이윤보를 초청하여 모정기를 짓게 하니 모두 당대에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이규보의 작품이 가장 좋다고하고 정자에 현판으로 새겨 걸었다<晉康公茅亭記> |
3-6. 유가당(有嘉堂) |
두성(斗城)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만석동(萬石洞)은 경치가 아름답고 조은 기운을 모은 지형인데, 사대부들이 이곳에 와서 많이 살았다. 본병 추부 상국(本兵樞府相國) 박공(朴公)도 와서 집을 다시 짓고, 이름을 지어 달라 하여 유가당이라 지어 줬다. 집은 모두 3간으로 2간은 청사로 꾸미고, 1간은 법당으로 꾸몄다. 집 주위에는 모두 국화를 심었는데, 꽃은 18가지로 곱고도 특이하게 피었다. 또 40여그로의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서 있어 마치 강남에 온 듯하다. 그 밖에도 기이한 화초는 이것뿐만 아니라 늦은 봄이 되어서야 볼 수 있는 것이라 다 서술할 수는 없다. <朴公府 有嘉堂記> |
3-7. 사가재(四可齋) |
이규보의 선친이 성곽 서쪽 밖에 가지고 있던 별장으로, 이규보가 물려 받았다. 계곡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워 별천지 같았다. 씨뿌려 식량을 거들만 텃밭과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할 만한 뽕나무, 먹을 물이 충분한 샘, 땔감을 자급할 수 있는 나무들, 이들 모두 이규보의 뜻에 흡족하여 사가(四可)라 이름을 지었다. 일찍이 이 집에서 3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교초당시(西郊草堂詩)>로서 “상쾌하다 농가의 즐거움이여 이제부터는 전원으로 돌아가리”이다. 소박한 선비의 별서이다. <四可堂記> |
3-8. 통재(通齋) 동산 |
통인 양응재(通人 楊應才)가 섬 북쪽에 살면서 꽃나무를 잘 길러 정원의 경치가 아름다워 이름난 곳이다. 동산의 넓이는 사방이 40보 남짓인데, 진기한 나무며, 유명한 과일나무들이 질서 있게 심겨 있다. 또 따로 화단을 만들고 수십 종의 꽃을 심었는데,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막 피는 것도 있고 이미 꽃이 진 것도 있어, 숲에 비치고 땅에 수 놓여 서로 뒤섞였다. 눈길을 끄는 꽃 때문에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곳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바둑판과 같은 편편한 석대(石臺)가 있는데, 자리를 깔지 않아도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정결하다. 나무에 감긴 포도 덩굴은 아래로 늘어져 마치 구슬을 꿴 갓끈과 같아 볼 만하다. 그 아래에는 물맛이 매우 달고 맛있는 돌우물이 작은 옹달샘을 이루고 있으며, 어린 갈대가 뾰족뾰족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주인의 청에 따라 ‘통재’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는데 어찌 양응재에게만 자연의 경치와 꽃과 버들이 사사로이 주겠는가? 다만 심장(心匠)의 묘에 말미암을 뿐이다. 그렇다면 화려한 꽃과 향기로운 풀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양으재의 손끝에서 얻은 것이요, 푸른 우물과 맑은 샘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양응재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通才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