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대구지하철 참사에 애도의 뜻을 전하며 오늘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2동에 위치한 송나미대표의 이화공인중개사사무소를 다녀온 내용을 적고자 합니다. 4탄을 기다려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글 시작하겠습니다.
2003년 2월 9일 일요일 새벽 00시 50분경 핸드폰에서 '띠띠'하는 소리가 났다. 내 핸드폰은 문자가 들어오면 '띠띠'한다. 다른 때 같았으면 또 술 마시러 나오라는 친구들의 성화스런 문자려니 할 텐데 그날은 내가 친구의 모친상 조문 때문에 전주에 내려가서 밤샘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문자를 열어보았다.
"일욜 3시 개업식 합니다. 글 연재의 좋은 소재가 될 듯 연락요 멜확인" 참 기분이 묘했다. 낮 시간도 아닌 이 새벽시간에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엄청난 감명(?)을 받고서 내일 아니지 날짜가 지났으니깐 오늘 있을 개업식에 이런 문자를 날려 초대해주다니, 내가 뭐 아주 유명인사라도 된 것처럼 들뜨고 행복했다. 그리고 문자내용을 봐서 나에게 초대메일을 보냈을 터인데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누굴까? 무슨 이유에서 이런 새벽시간에 날 초대하고자 한걸까? 그렇다고 밤샘하면서 PC방에 가서 확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음날 밤샘을 마치고 오후 1시경에 있을 고향친구의 결혼식에 또 참석하여야만 했기에 전주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밤샘을 해서 피곤은 했지만 메일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10시경 PC방에 가서 메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날 메일은 모두 8통이 와있었다. 3통은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 혹시 흑심이 궁금하지 않나요?"하는 식의 스팸메일이었고, 나머지 5통 중에 2통은 내가 부탁한 자료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3통은 내가 모르는 분들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회원님들께서 보내주신 것이었다. 순서대로 읽어보았는데 2통은 내가 올린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내용과 게시판 등에 올린 답변에 대한 의견을 보내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읽은 글이 그 문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메일내용은 그날 3시에 이화공인중개사 개업식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 날 풍물패며 갖가지 이벤트도 있을 예정이고 아울러 7시부터는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인천부천지부 정모가 있으니 참석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근데 그 문자를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이 있었다. 보낸 이의 이름이 "송나미"였던 것이다. 아니 그럼 여자가 그 꼭두새벽에 총각인 나에게 보냈단 말인가? 참내 기가 막혔다. 난 솔직히 지금까지 새벽에 엄청난 전화를 받아봤다. 술 먹고 독립운동 하다가 경찰서 끌려가서 봉변을 당하고 있는 친구, 실현당해서 술 엄청 먹고 속쓰리다고 꽥꽥하면서 전화한 친구, 서울역인데 차비가 없으니 빨리 와달라는 친구....... 참 별의별 전화를 새벽에 받아보았었다. 그러나 이 전화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근데 나에게도 신이 드디어 여자를 보내 주실려나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다 카페에는 정회원에 대한정보가 있지....... 맞다 그걸 보자. 이를 통해 확인한 순간 역시나 신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나이는 연상에 기혼. 물론 난 연상 연하는 따지지는 않지만 기혼미혼은 당연히 따진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여자 복이 있기에 그 깐 글 보고 나에게....... 아이고 한심한 김상기 같으니라고." 그러면서도 나의 순수한 마음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아직도 이런 기대를 갖는 소년과 같은 마음이 남아 있다니.......
결혼식 때문에 개업식은 물론 정모에도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문자에 찍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주 씩씩한 아가씨 같은 목소리였다. 개업식과 정모에 초대해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렸고, 그날 개인사정으로 참석은 어려울 듯하고 그 주중으로 한번 찾아뵙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그러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틀 후 나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면도를 하다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평소 전기면도기를 사용하던 내가 그날따라 1회용 면도기를 이용해서 면도를 하다가 완전히 턱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키에 배까지 나온 판국에 얼굴에 흉까지 질까봐 참 걱정이 태산이었다. 백수라서 누구를 만나고 할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주중으로 방문하기로 약속한 2군데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방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악몽의 화요일의 흔적이 조금은 가신 거울속의 내 얼굴을 보고 이제는 그래도 흉측스럽기까지는 않은 것 같아 용기를 내어서 오늘(2월 20일) 방문하기로 어제 전화를 드렸다. 찾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1호선 전철 송내역에서 남광장출입구로 나와 11번 버스를 타고서 15분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빨간 지붕 핏자헛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단다"
참 난감했다. 전철만 타고 가면 좋을 텐데 버스를 타라니....... 그것도 15분이나 타야하고 그리고 또 빨간 지붕 핏자헛이라니... 인천에 핏자헛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참 난감했다. "괜히 간다고 했나?"
순간 날 채찍질했다. "야 상기 이놈아 네가 그러니깐 그렇게 살이 찌지. 게으른 놈 같으니라고. 그래 상기 너 부동산 일하려면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하니깐 한번 가보는 거야. 더 이상 전화해서 물어보지 말고 그냥 그 설명에 의존해서 한번 찾아가 보는 거야"
어제와 다르게 날씨가 참 화창했다. 송내역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45분경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11번 버스를 탔는데 "빨간 지붕 핏자헛"이 혹시나 지나쳐버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오른쪽만 주시했다. 평소 어른들에게 자리양보도 잘했던 내가 이것 때문에 자리 양보도 안했다.(혹시 젊은 애들이 노약자에게 자리양보하지 않으면 빨간 지붕 핏자헛 찾느라고 그런 줄 아시고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한 10분정도 가는데 처음에는 들이 나오고 군부대가 나오고 농장도 나왔다. "뭐 이런 시골에다가 사무실을 차렸담." 그런데 그런 푸념이 나오던 순간 저쪽에서 도시가 나왔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보다 더 큰 듯 했다. 참 조금만 참으면 진면목이 나오련만, 그 사이를 못 참아서 불평하기는....... 그리고 약 5분정도를 시내로 차가 들어가서 4차선도로에서 8차선(12차선인가?)의 대로변으로 들어가서 우회전 하는 순간 "빨간 지붕 핏자헛"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이화공인중개사가 보였다. "와 드디어 찾았다" 순간 눈물이 나왔다. 너무 기뻐서가 아니라 눈에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던 탓에 녹내장이 있는 내 눈이 못 견디고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다. 내려서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보니깐 "만수2동 파출소 앞"이다.
송나미 중개사님 다음부터는 "빨간 지붕 핏자헛 앞"에서 내리라고 하지 마시고 "만수2동 파출소 앞"에서 내리라고 말씀해주세요. 솔직히 버스기사님에게 "빨간 지붕 핏자헛"가냐고 물어 보려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눈물까지 나오고....... "만수2동 파출소 앞" 하면 그래도 쑥스러움은 덜할 것 같아서요. 아셨죠? 괜히 제가 길치래서 그런 다구요? 맞습니다. 맞고요....... 제가 엄청난 길치랍니다. 그래서 부동산관련업에 종사하는 데 있어 엄청난 아킬레스건이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대도 되지만 솔직히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재건축컨설팅을 하다보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지만 "갑"이 아닌 "을"의 입장으로 사람을 대하다보니 무시당하기가 일쑤이고 그러다보니 자연 사람만나는 게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일이 사람에서 시작하고 사람에서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누구라도 만나서 대화하고 함께 생각하고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보면 공인중개사란 직업도 사람을 많이 만나고 설득하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책상4개가 "ㄱ"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책상 두개씩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보니 내가 들어가서 4명의 직원이 나를 쳐다보는 어색함을 연출하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직원 두 분만 앉아계서서 그 어색함은 별로 없었지만 만약 4분이 모두 앉아계시고 내가 고객이 되어 사무실을 들어갔을 때 동시에 4분이 나를 처다 본다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난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텔 프론트나 건물 안내데스크는 대게가 정면에서 조금 벗어나서 배치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정면에 배치할 경우 안내를 받고자 하는 고객이 안내데스크까지 걸어가는데 안내원이 자기를 감시(?)하고,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어색한 생각이 들고 따라서 걸음걸이도 이상해지고 불안함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이러한 점을 아셨는지 송나미 대표님은 "ㄱ"자 책상 바로 앞에 탁자를 하나 놓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단다. 참 좋은 생각이다. 고객이 들어와서 직원들과 바로 접하지 않고 나를 지켜줄 탁자가 앞에 있다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 송나미 공인중개사님 좀 찾아왔습니다." 남자 분 두 분 중 나를 처다 봐 주시는 한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책상 뒤의 파티션 안쪽에서 여자 분의 조금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김상기씨?"
미스 같은 아줌마다. 송대표님은 이화공인중개사의 가족을 소개시켜주셨다. 30대 유부남인 김창년이사, 20대로 부동산업계에 일찍 진출한 신보현이사, 30대로서 머리숱이 남보다 조금 적은 총각 권진식 공인중개사....... 그리고 직원분이 한분 더 계시는데 그분은 출장중이어서 인사는 나누지 못했다. 특히 신보현이사, 김창년이사는 여기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인천부천지부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계신 분들이다.
여기 이화공인중개사사무소는 3분이 출자를 하셔서 동업을 하는 형태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엄청 뛰어난 선현들은 동업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들을 하곤 하셨는데 이에 대한 송대표의 말이 참 인상에 남는다.
"저는 저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의 운도 믿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젊은 중개사들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만나서 알게 되었고,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난 것도 몇 번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무실을 오픈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한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이 사무실을 오픈 했습니다. 남들은 제가 이런 결정을 한 것에 대해서 비웃을 수도 그리고 우려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좋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상대방도 좋은 사람입니다.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여기 이 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젊은이로서의 열정이 살아 있음이 좋아 함께하기로 한거지요. 물론 모든 점이 좋다고 할 수 만은 없고 누구나가 장점과 단점이 있고, 따라서 저는 이 동업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가면서 상생하는 WIN-WIN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고 여기 모여 있는 모든 분들의 생각이기도 하지요"
송대표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6살의 딸애도 있다. 나는 궁금했다. 그 딸애는 어떻게 키울 거며, 남편은 어떻게 송대표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있을지... 송대표는 결혼한 이후로 직장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7년차라는데 그럼 그동안 밥솥뚜껑 운전만을 천직으로 살아온 전업주부가 무슨 똥배짱이 있어 이런 사고를 쳤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송대표는 먼저 남편자랑부터 했다. 자기가 한성대학교 부동산대학원을 다닐 수 있게 자극을 주고 용기를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고....... 결혼 이후 한때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심하게 힘들던 시절 남편은 송대표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다시 사회로 나오게 자극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든 남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특히나 남편을 바다로 비유한 송대표의 말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자정능력을 갖춘 그런 바다 같은 사람이 바로 자기 남편이란다. 자신이 기쁠 때나, 노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 그리고 힘이 들 때 언제든지 기대고, 의지하고 돌아갈 수 있는 포용력과 수용력을 갖춘 그런 바다 같은 남자란다. 자랑이 여기서 끊이지 않는다.
"제 남편은 살아가면 갈수록 정말 새록새록 존경심이 생겨나는 남자랍니다. 제 성격이 칼이거든요.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고....... 무조건적으로 앞만 보고 가는 스타일이었는데 남편을 보면서 많이 고치고 있어요. 우리 신랑은 그 순간은 모르겠는데 지나고 나서 나중에 생각해보면 항상 원칙이 있어요. 어떤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는데 있어 원칙이 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유연하게 일을 처리한답니다. 저는 그걸 못했어요 그동안. 그냥 무조건 내 생각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우리 신랑은 목적을 이루는데 정당하고 원칙에서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남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일을 처리해가요. 처음에는 이게 정말 못마땅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깐 남편이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남편의 덕분에 저의 성격도 정말 많이 고쳤어요. 그리고 행복해지고 있고요. 이렇게 성격하나 고치고 마음이 느긋해지니깐 행복하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는 것 있죠? 정말 신랑하나는 잘 만났어요. 제가"
참 가관이다. 남자가 자기 마누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던데,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팔불출 순이? (뭐 마땅한 용어 있으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원래 여자들이 사회생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시골출신이고 유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여자들은 집에서 애나 잘 건사하고, 살림 잘하면 됐지 지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사회에 나와서 난리 부르스를 치고 다닌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왜냐고? 묻지마시라. 나도 이렇게 생각했던 한때가 이해가 가지 않으니깐.......
아마 그 해답은 내가 여자를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내 편의주의 적으로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누나들이 되게 많다. 그리고 여동생들도 되게 많다. 그래서 어려서는 집안에서 여자들이 모든 어려운 일을 다해줬다. 빨래, 식사, 머리감기 이 대부분을 누나들이 시중을 들어줬다. 머리감을 때도 누나들이 50원을 줘야 내 머리를 누나들에게 맡겨 감았을 정도다. 참 편한 유년시절이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고등학교부터 전주에서 시작된 자취생활은 참 힘들었다. 빨래, 식사를 내가 손수 해야 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할머니가 함께 계셨지만 나이 드신 분이 내 양말을 빨고 하는 게 영 꺼림직 하고 불효하는 것 같아서 점차 여자들이 하는 것에 손대기 시작했다.
난 지금도 밥하고, 찌개를 끓이고, 반찬 만들고 하는 것 정말 잘한다. 한번은 나를 정말 많이 도와주시는 건축사분(이분은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불러 달랜다. 내가 보기엔 영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과 전 회사 팀장님 가족이 함께 콘도에 놀러갔는데 평소 꼴 같지 않게 찌개며, 밑반찬을 내오는 내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감탄을 하셨다. 특히 그런 모습은 그런대로 놀러간 사람 중에 제일 막내니깐 당연한 거라 생각되는데 음식 맛이 정말 좋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난 음식하기 정말로 정말로(두 번 강조함) 하기 싫다.
내가 미혼여성들에게 충고하나 하자면 절대 자취생활 오래한 남자와는 사귀지 말라는 것이다. 원래 살림 해보지 않은 남자는 결혼하면 살림해보는 재미를 솔솔 알아가면서 여자를 돕지만, 자취생활 오래해서 살림살이의 어려움을 아는 남자는 절대 부인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심리가 나의 내면에 깔려서 여자들이 사회생활 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고 내가 하기 싫고 어려운 살림이나 잘하지 그것 외에도 또 그 어려운 사회생활까지 하려고....... 장가도 못간 놈이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건가?
요즘은 솔직히 여성들도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것이 좋다는 여자도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일 것이고,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여 지는데 이러한 감춰진 끼를 억제하면 그 스트레스가 엄청 쌓일 것이다. 그러면 그 엄청 쌓인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 것이고... 그럼 나는? 아이고 마누라 사회 생활하는 데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게 더 낳겠다. 이글을 읽고 있는 지성 있는 여성들이여! 부디 이러한 나의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해주시고 총각 좀 구제해주시구려. 헤헤
우리 한국사회는(내가 뭐 다른 나라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이 사회생활하기에는 정말 힘든 사회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남성중심 대가족 제도하의 농경사회에서 여자들이 펼칠 수 있는 사회생활이라는 게 고작 자식 잘 키워서 사회적인 인재로 만들던 시기에서 이제는 그 여성자신이 사회적인 인재가 되면 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 여성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은 존재한다. 나 자신도 그 고리타분한 사고로부터 조금은 갱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남성과 여성을 동일한 인격체로서, 동일한 능력체로서 감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이성적으로 노력할 뿐...
보이지 않는 여성에 대한 장벽이 가장 심한 부동산업계에 송대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경험도 전무한 아줌마가 도전했단 것인가?
송대표는 지금 6살 딸과 주말 모녀가 되었단다. 시부모님께서 딸아이를 기르고 계신단다. 혹자는 아이 양육이 중요하지 그 깐 사회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나 그런 것은 차치하고 글을 계속하고자 한다.
"저는 이 업에 뛰어들 때 사생결단의 의지로 뛰어들었습니다. 남들은 사회생활도 잘하고도 가정적으로 아이를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역시 훌륭히 해내고, 부모님들 잘 봉양한다고 하던데 저는 솔직히 그런 슈퍼우먼이 못된답니다. 머리도 나쁠뿐더러 체력도 안 될 것 같고요.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답니다. 그래서 아이는 시부모님께 부탁했고, 남편과 시부모님은 뒷바라지나 공양의 대상이 아니고 저의 후원자가 되어버렸죠. 남편과 시부모님은 그런대로 이해를 해주시고 자신들이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주신다지만 6살 딸아이가 문제였어요.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기우에 지나지 않더군요. 엄마가 처한 입장과 엄마의 계획을 딸아이가 이해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할머니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러운지....... 엄마가 이담에 성공한 모습을 보이면 그땐 정말 이 엄마를 더욱더 잘 이해를 해주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지금 희생하는 가족들에게 보답을 하는 길이 내가 이왕 시작한 이 일을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아니 목숨 걸고 하고 있지요."
어떠한 일을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대충하기를 좋아한다. 이만큼하면 뭐 되겠지, 이정도 했는데 안 될 리가 없지 등등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기보다는 남 보이기에, 아님 나름대로 자신의 주관을 객관화시켜서 자기만족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송나미대표에게는 자신이 말한 사생결단의 의지가 보였다. 그렇지만 그 사생결단의 의지에는 자신감과 더불어 여유와 느긋함도 함께 갖추고 있어 보기 좋았다.
공인중개사 송나미는 이 중개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너무도 통속적으로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현실을 즉시하고 있었다. 송대표는 이 중개업은 서비스업임을 재삼 강조했다. 그 동안은 이 부동산 중개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문외한이었다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일반인이 중개인보다 권리분석도 더 잘하고, 돈도 더 잘 끌어오고, 계약내용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한지를 알고서 움직인다. 본인도 전에 부동산관련해서 중개서비스를 받고 수수료를 줄때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단다. 뭐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닌데 법정보다 수수료를 더 요구하는 바람에 참 기분이 그랬단다. 정말 고객이 필요한 것을 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서비스정신은 없고 자신이 뭐 대단한 일을 해준 것처럼 법정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요구하는데 놀랬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이 사회학에 도입되면서 약육강식의 세계가 정당화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경쟁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고. 경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적자생존일 것이다.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좀 작고, 좀 못나고, 힘이 없다고 해서 잡아먹혀야만 하는 정글의 법칙이 옳은 것일까? 그러나 이 질문이 맞던지 틀리던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는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진다. 이것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면 끝내는 프로로서 남지 못하게 되고 도태 되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현실을 즉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소 송대표는 "역지사지"를 중요시한단다. 김건모의 노래에 나오는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되씹곤 한단다. 자신이 중개서비스를 받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현재 중개수수료에 맞는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때 영 자신이 없단다. 물론 이제 막 개업한 신출내기 공인중개사가 이런 얘기를 하면 뭐라 그럴 사람이 있겠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고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수수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동안 중개업은 제도권의 보호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이제 그 제도는 더 이상 우리 중개사들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중개업에 대한 이해가 증가할수록 제도는 우리를 보호할 명분을 잃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아니겠어요?"
송나미 공인중개사는 중개업을 그냥 중개업자체로만 보지 않고 부동산 전체의 틀 속에서 중개업을 생각하는 듯 했다. 법과 제도, 금융, 기술, 그리고 중개 모든 총합 속에서 부분을 생각하려는 당찬 여성이었다. 시골에서 겨울에 무를 땅속에 저장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팔 때 처음 땅을 넓게 파야지만 땅을 깊이 팔수가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나는 경험했었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볼 때 송나미 대표는 그냥 복덕방 공인중개사가 아닌 디벨로퍼로서의 자질도 엿보였으며, 부동산과 관련된 일반적인 사항을 공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공인중개사는 전문가로서의 자질도 필요하지만 제너럴리스트가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고객들은 전문서비스도 요구하지만 그보다는 자신들이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 개략적이나마 설명해줄 수 있는 공인중개사를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감이다.
콘크리트는 시멘트, 모레, 자갈, 물이 섞여서 건설자재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시멘트는 없어서는 안 될 정말 귀중한 요체이다. 시멘트가 빠진 콘크리트는 있을 수 없다. 시멘트는 양이 제일 적게 배합되지만 그래도 이 요소들이 함께 강도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물론 이것을 화학식으로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공돌이가 너무 티낸다고 할 것 같아서 그것은 생략하기로 한다.(솔직히 대학졸업과 동시에 잊어버렸다.)
송대표와 이야기 하면서 순간순간 생각했던 게 바로 이 시멘트였다. 남들은 뭐 소금이고 뭐고 비유도 잘도 해대는데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하지 못한다. 무식한 공돌이 식으로 콘크리트속의 시멘트가 생각났을 뿐이다. 송대표는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이야기 도중에 종종 보이곤 했다. 동업자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화공인중개사의 구성원 모두가 한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순항하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이 때는 뭐라도 한 가지가 특이한 사람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든가, 제일 힘이 센 사람, 그리고 쉽게 생각해보자면 나이가 많은 사람, 성별이 다른 사람 등등....... 이화공인인중개사사무소는 모두 5분이 계시는데 이중 송대표만이 여자이다. 성차별은 결코 아니고 일반적으로 성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애정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그렇다. 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직원 한 명이 사무실 분위기를 좌지우지 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팀원을 단합시키고, 결속력 속에서 목적하는 바를 최대로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역할을 송대표는 잘 이루어 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생결단의 의지와 남편에게서 배웠다는 포용력으로 말이다.
이화공인중개사의 구성원에 대해서 잠시나마 소개를 하고자 한다. 김창년이사. 이 분은 상가담당이란다. 고객을 대하는 것이 정말 침착하다. 상담을 하는 도중에 중개에 필요한 사항을 조목조목 이끌어낸다. 업무적으로 하면 딱딱할 텐데 그런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노력형이다. 인근에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추진도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료를 스크랩해놓고 고객이 궁금해할만한 사항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었다.
신보현이사. 이 분은 아버지께서 공인중개사 업무를 하고 있는 부동산 2세에 해당한다. 젊은 나이에 이 업계에 뛰어들어 열심히 무기를 다듬고 있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다는 주위사람의 칭찬에 "원래 멋진 사람이 멋진 옷 입는 거에요"한다. 키도 훤칠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타입이어서 멋진 공인중개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인천부천 젊은공인중개사모임 카페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2월 9일 정모에 대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진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는 친절도 베풀어 주었다. 젊은 사람답게 컴퓨터도 능숙해보였는데 카페의 디자인과 홈의 마크 디자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권진석 공인중개사. 이 분은 성격 좋은 동네 형 같은 분위기다. 송대표와는 동갑네기라는데 아직 미혼이다. 그래서 내가 송대표가 결혼을 했으니깐 더 어른이라고 했더니 송대표가 생일도 더 빠르니깐 어른이 맞다고 맞장구(?) 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간식을 사와서 먹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먹을 때 복스러우면 재복이 있다는데 아마도 권진석 공인중개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뜬구름잡기식의 경영학보다는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영학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나도 지금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와 닿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른 한분이 계셨는데 만나보지는 못하였다.
이화공인중개사라는 한 지붕 아래 젊은이들이 모여서 꿈을 펼치려한다. 여기는 시험무대이다. 인천 부천의 젊은 공인중개사 분들이 두 눈 크게 뜨고 이들의 성공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MC 허수경이 이혼할 때 고민 중에 가장 컷 던 것 중에 하나가 대중들의 시선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결혼할 때 집안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이 남자 아니면 절대 안 된다 고집 부려 결혼을 하고 그리고 잘살고 있다고 책까지 썼는데 이제 와서 이혼한다고 하면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고민을 이화공인중개사 구성원들에게 있을 법도 하다. 이 시험무대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닐지언정 진정으로 밤잠 설쳐대면서 고민하고 잘되도록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사람과 확실히 잘지 낼 필요가 있다. 주위사람과 잘 지내야지 복이 들어온다. 여기는 개업한지 불과 2주일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손님도 꽤 드나들었다. 물론 가게의 위치도 좋다고 생각되지만 그보다는 주위로부터 인심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 탁자가 있으니 가져다 쓰라는 분에서부터, 쇼파를 주시는 분 등등. 이곳 이화공인중개사 분들이 주위 분들과 잘 지낸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리고 입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일하는 사람이 5명이나 되니 홍보도 5개의 입을 통해서 하게 되어 있다. 참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아시는 분이 사무실을 찾아오려고 그 문제의 "빨간 지붕 핏자헛"이 어디에 있냐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단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정말 정답 중에 정답이었단다. "아 핏자헛요. 이화공인중개사 바로 옆에 있어요"
이곳 이화공인중개사 사무실 가족들로서는 엄청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외국계 패스트푸드가게들이 위치를 제일로 치는데 그 위치가 이화공인중개사한테 밀려났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랴!
이제 2주도 채 되지 않은 이화공인중개사의 성공여부를 점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수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하는 젊은 중개사들의 열정과 땀과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특히 나를 이곳 이화공인중개사를 방문하게끔 초대를 해준 송나미 공인중개사에게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주문을 해본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공인중개사들이 엄청 많이 배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자녀들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남편 눈치 보면서 억척같이 학원을 다니면서 공인중개사사무소 오픈을 꿈꾸면서 공부했던 주부들이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다. 그런데 막상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면 사무소 오픈은 겁나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무소 오픈은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 자격증이나 대여해서 학원비라도 건져보자 하는 생각을 가진 늙은(?) 주부 공인중개사들이 엄청 많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당신 송나미는 하나의 시험이요, 기대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화공인중개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후기) 답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나미대표의 시원시원한 모습이 맘에 들었고, 특히나 젊은 공인중개사 모임의 활성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이 카페에 가입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김창년님, 권진석님, 신보현님의 젊은 공인중개사로서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하면서 나는 버스 안에서 소변 참느라고 고생했다.
사람들은 내가 뭐 대단한 곳만 방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가 방문하는 곳은 내 이웃이고, 나랑 같은 업종에서 종사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일 뿐이다. 앞으로도 많은 초대를 해주시기 바란다. 내가 방문한다고 모두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글을 올릴 때는 양해를 미리 구하고 올리고 있다. 내가 글을 올리는데 내용은 내 맘대로 내가 느낀 대로 올려도 되나요? 하고 말이다. 나에게 초대를 해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지역에서 개업한다는 카페에 글이 있으면 방문하고 싶어서 메일을 보내보면 답변이 없는 분들이 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는 답변을 하는 확실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