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3
우루무치 가로화단
5천년 고도(古都)라는데…
두 시간만에 도착한 서안함양국제공항(西安咸陽國際機場). 공항 로비에 롤스로이스 선전이 큼지막하다. ‘勞斯萊斯’―. 순전한 음역인데, ‘라오쓰라이쓰’로 읽어야 한다. 클린턴은 커린뚠(克林頓), 푸틴은 푸징(普京), 닉슨은 니커쏭(尼克松)…, 멀어도 한참 멀지 않나. 나는 훈민정음이 인류 최고의 표음문자임을 경험칙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한글 자판이 IT시대의 총아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지구촌 유일의 민족이란 점도 심상찮은 징조이고.
위수(渭水)를 건너서 서안으로 간다.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역사의 강 위수, 황하의 제1지류로 중화문명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이름값만큼 도도한 흐름을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다. 감흥을 짜내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수초가 우거진 사이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빈약하기만 하다.
역시 조선족 3세인 가이드 S는 중국 5천년 역사를 알려면 서안을 알아야 한다고 운을 뗀다. 13개 왕조의 수도, 확인된 황릉만 72개, 진시황이 50년간 황제노릇(사실 진은 3대 15년에 망했다)을 한 곳이라는 둥 보태가면서 열을 올린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 거창한 서안도 역시 경유지일 따름이니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반나절 남짓 동안에 서안관광의 삼박자인 병마용, 화청지, 대안탑을 후딱 돌았다. 나로서는 두 번째요,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느낌만 생생하게 남았다.
그러나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의 위용은 눈에 밟힌다고 할까. 풍격 있는 건축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자랑하는 “중국역사상 최강의 주(周)․진(秦)․한(漢)․당(唐)이 창조한 휘황찬란한 고대문명”이란 내장 소프트 말이다. 프랑스의 시라크 총리(당시 파리 시장)가 1991년 방문시 ‘세계최고의 박물관’이란 찬사를 바친 기록이 눈길을 끌었다.
오늘날 고도(古都) 서안에는 ‘중화민족의 요람, 중화문명의 발상지, 중화문화의 대표’라는 공식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나 고도중의 고도라는 서안은 원래 전통민족 전통문명인 화하(華夏)민족 화하문명의 요람이요 발상지일 뿐이다.
만주족 청(淸)의 강역을 물려받은 현대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로 새롭게 태어나려고 한다. 아니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티베트와 신강위구르, 그 인종과 그 역사를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화하민족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자긍심은 어찌될 것인가. 실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민족인 금(金)나라에 대적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를 민족의 영웅이나 구국의 명장이라 부르기가 민망하고 항주(杭州)의 악비 사당에 참배하는 의식도 좀은 김빠지는 일이 되지 않을까.
덕발장의 길 잃은 나그네
멋모르고 들어간 저녁 식당의 간판이 덕발장(德發莊).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서안에 피신 왔을 때 그 입맛에 맞추기 위해 조리사들이 매일 다른 종류의 만두를 만들어 올렸는데, 108가지나 되었단다. 물론 목숨을 걸고서 만들어야 했고. 100여년 후에 이르러 그 중 열두 가지가 이국 손님들에게까지 제공된다는 기막힌 사연이다. 거의가 반도 못 먹었다. 손님이 먹든 말든 열두 가지 코스를 완수하느라 상이 터져라 올려놓는 아가씨들. 모두들 서안 최고의 맛집에 와보았다는 사실에 의미를 찾는 것 같았다.
밤경치가 제법 괜찮아 한 구름다리에서 사진 찍는 시간이 주어졌다. 룸메이트와 두어 판 디카를 누를 때까지는 좋았다. 아뿔싸,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우리 둘만 남았다. 큰일이다. 도심인구만 5백만이 넘는 대도시, 그것도 가장 번화하다는 시장통 한가운데가 아닌가. 칙칙한 어둠도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번호 입력이 되지 않아 로밍된 휴대폰도 무용지물이다. 야시장에 들린다고 했던가, 우리가 일행 전체의 발을 묶는 것은 아닐까, 곧 난주로 가는 밤열차를 타야 하는데…, 머릿속에 땀이 차는 것 같다.
허둥대기를 2,30분, 시간이 약이 된다. 식당으로 돌아가서 외마디 중국어를 지껄이자, 미모의 안내원이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것이 고도의 간판식당답다. ‘43명의 단체 손님’이란 말이 실마리가 되어 가이드를 호출하기에 이른다. 중국어를 배운 이래 최고의 실용회화를 구사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할까. 아슬아슬하게 도킹에 성공하자 우리가 되레 화를 내본다. 그럴 수 있느냐,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 뻑뻑한 분위기가 어둠속에서도 거미줄처럼 엮인다.
황토고원을 달리는 야간열차
사고가 약이 되었는가. 모두들 바짝 긴장한다. 중국의 기차역은 어디나 인파로 넘친다지만, 서안역은 특히 넓다. 밤이고 시간도 촉박하다. ‘대열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다.’ 이럴 때 이심전심이란 말을 쓰는 모양이다.
“중국여행 댕길 때 가이드 깃발만 봤다 카더이, 우리가 그 짝이네.” 수군대는데도 긴장감이 전해온다. 인공관절을 넣었다는 L아주머니(70이 넘은 할머니지만 화낼 것 같아서)도 평지라서 그런지 참으로 민첩하다.
여하튼 밤 10시 20분, 시간에 맞춰 열차에 오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특쾌(特快)’라는 특급열차의 4인 1실 침대칸이다. 앞으로 꼬박 여덟 시간, 서안에서 난주까지 676㎞를 달린다. 60년대 후반 서울을 오르내릴 때 완행열차 아홉 시간을 탄 이래 가장 긴 시간이다. 그것도 밤 열차에 우리나라에서도 타보지 못한 침대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잔잔한 감흥이 인다. 황토고원 8시간! 황하 중류를 뒤덮어 황하를 황하이게 하고 중국을 중국이게 하는 그 황토고원이다. 물도 산도 누렇다고 한다. 황토의 두께가 50~80m, 면적은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40만㎢.
그러나 밤이다. 희미한 위수의 강줄기가 잠깐 어른거릴 때도 있고, 가끔 중간 역사(驛舍)의 희미한 불빛이 졸고 있을 뿐, 대지는 그냥 검정이다. 푹신한 2층 침대 ‘상푸(上鋪)’가 나의 안식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자서는 안 되었다. 우선, 한잔 술로 여로를 즐기는 곳엔 빠질 수 없다. 복도를 지나치는 중국인들의 행색을 살피다가 내키면 한두 마디 던져보기도 하고. 멍하니 어두운 차창 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아마도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숱한 그림을 그려본 시간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몇 번 눈을 맞춘 늘씬한 여자 복무원에게 이별사를 선물하고 싶었다. “가정행복을 기원해요!(祝你家庭幸福)” 두 번 다시 없을 인연을 마무리하는 경쾌한 대답이 방울소리 같다. “시에셰(謝謝)!”
첫댓글 끈기 부족,
3편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준비운동하다가 다리 부러진 셈이네요.ㅎ
당시 한 벗의 마지막 댓글,
"밤기차가 여태 달리고 있는가..."
13년이 지난 시점에서 짧은 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똥은 닦아야 할 것 같아서.
문자 그대로 龍頭蛇尾가 되겠지만,
4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ㅎㅎㅎ 밤기차가 여태 달리고 있냐시니
그 친구분에 그 친구분이시네요^^
93년 어느 날 저는 4인실 침대칸 열차에
탔는데, 제 또래 40세 정도의 상해 남자,
30세 정도의 상해여자, 아프리카에서 상해로 유학온 20대 초반의 흑인 남성, 그리고 당시 만 37세된 제가 탔었습니다.
좌우로 2층으로된 침대칸에서,
상해여성이 아프리카 흑인 남성에게
중국어로 이것저것 질문했는데,
중국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미국 에어컨 제조업체 Carrier의 기술자인 중국 남성이 중국어로 국적을 물어봐서
한국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93년경 수교직후라 중국 사람들이 한국 국호를 '남조선'과 혼용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단호하게 남조선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정정했고, 그 상해 남자가 똑 같은 말이라고 주장해서, 제가 단호하게 몇마디 했습니다.
"조선은 한국의 옛날 국호이다. 한국을 옛날 이름 '조선'으로 부를 수는 없다. 중국을 '청나라'라고 부르면 좋겠냐? 북한이 스스로를 '조선 인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북한인구는 한국의 절반도 안된다. 아우의 나라 국호로 형의 나라에게 '남조선'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
초창기 중국여행 때는 모종의 긴장감이 상당했을 듯합니다.
제가 다닐 때는 '한궈'란 말이 익숙했지만요.
열차란 재밌고 의미있는 공간이죠?
特快 한번 타본게 저로선 참 좋았어요.
유로 레일 타보는 건 꿈속의 버킷리스트가 될 것 같지만요.^^
그러믄요.
어따대고 억지 주장을.
참 잘 하셨지 뭐에요.
두 분 여행기에 저도 슬쩍슬쩍 묻어갑니다~
여행기 에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어도
참 깔끔하게 읽힙니다.
불현듯
미 동부 패키지 때
워싱턴 한국전쟁 조각상 앞에서
일행들 놓쳐 식겁!한 기억이 떠 오릅니다
식겁한 일이 많을수록 기억에 남고 또 가고싶은 것이 여행이 아니겠습니까.
삶도 어차피 여행이라면 장애와 고난이 필수란 생각도 해봐야 할까요?
깔끔하지 못했던 저의 삶이 요즘 와서 푸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숱한 그림을 그려본>이라는 내용에서 对对 해봅니다.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생생 여행기록에 감탄하며 함께 동행한듯한
기분이 듭니다. 보여지는 시선에서 느끼시는 표현도 섬세하시고...최고십니다.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春天下雨。
现在我打算去江原道,宁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