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부도(상)
1. 마지막 빙하기 때 인류 문명이 동아시아 대륙 [황해대평원]에 있었다
▸ 빙하기 이전과 해수면 상승 이후의 동북아 대륙 모습.
* 인도네시아 해역과 남지나해까지 이어져 잇는 '순다랜드'로 이름지어 지고 있는 사라진 대륙과 황해평원이 연결되어 있였다.
이 순다랜드~황하대평원 연안을 따라 남방인이 한반도로 이동한것으로 보고 있다.
2만년 전에는 지구기온이 낮아서 지금의 황해가 육지였다는 얘기다.
물론 드넓은 황해대평원에는 수많은 코끼리(매머드)들이 살았다.
15cm 크기의 새발자국 (몸통이 닭보다 수십배는 큰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새도 당시 한국땅에 살고
있었음이 밝혀젔다.)
당시 문명의 중심지는 평야지대인 황해대평원 (중국, 일본쪽보다는 한국땅에서 2만년전 생태가 무성했다
1만5천년전 벼농사 지은 쌀 등 최고(最古)의 발전된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석기와 함께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2. 동북문명(홍산문화)과 동이족
위 도면은 2009년까지 국사교과서에 실려있던것으로 그후 삭제ㄷ되였다. 복원요함
3. 홍산 요하문명권의 시대구분 위치표
국명 | 시기 | 시대 구분 | 문화 구분 | 시기 | 위치 |
환국 | BCE 7197 ~ BCE 3897 | 신석기시대 | 신락문화 | BCE 8000 ~ BCE 7000 | 요녕성 심양시 북쪽 |
소하서문화 | BCE 7000 ~ BCE 65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
흥륭와문화 | BCE 6000~ BCE 50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
사해문화 | BCE 5800 ~ | 요녕성 부신시 |
조보구문화 | BCE 5000 ~ BCE 45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
배달국 | BCE 3897 ~ BCE 2333 | 신석기, 청동기 병용시대 | 홍산문화 | BCE 4500 ~ BCE 3000 | 내몽고 적봉시 일대 |
소하연문화 | BCE 3000 ~ BCE 20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
단군조선 | BCE 2333 ~ BCE 238 | 청동기시대 | 하가점하층문화 | BCE 2000 ~ BCE 1400 | 내몽고 적봉시 일대 |
하가점상층문화 | BCE 1000 ~ BCE 400 | 내몽고 적봉시 일대 |
4. 홍산문화 Y 벨트
5. 단조선의 삼한관경제
https://postfiles.pstatic.net/MjAyMTAzMThfOSAg/MDAxNjE2MDIzMDE3MTE2.a5kGvsNrsyIQRfju0TYXk8HH3wTVTLXPuj4Wvt1A1d0g.gM08_REX2kX7vgMiZMnBhhwefjNZVbGc1E6Yx2Ro-nwg.JPEG.rkdehdgml010/1616023017135.jpg?type=w580
[산해경]에는 황해의 안쪽(동중국대륙)과, 발해의 모퉁이(하북 요서)에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기르는
조선이다. 그 사람들은 강과 바닷가에서 살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라 했다. 중원의 동쪽대륙과 발해연안 만주에 걸처 조선이 있었다
사람이 되고싶은 영물 곰의 전설을 묘사한 고구려 각저총 벽화
[사진 김운회 교수] 만주 집안 현 고구려 시대(5세기)의 '각저총'(씨름도) 벽화.
나무밑에 사람이 되고싶은 앉아있는 곰과 서있는 범이 있다. 삼국유사 이전의 단군신화를 그린 벽화로서
단군신화는 고대로부터 전수되여오는 우리민족의 천손사상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임이 밣겨젔다.
일제(조선사)는 단군의 곰신화는 삼국유사에서 몽골방어 염원을 위한 일연의 가짜 창작이라고 부정하였다.
상고대 빙하기 동굴생활로 살아남은 우리 조상은 동면에서 나오는 곰의 생태(동면후 달래와 쑥을 먹어 제독을
하는 영물이라 이해)를 보고 곰을 신적 매개로 본딴것이고, 당골(무당의 원조) 단군이 제사장겸 통치한 것이다.
밝다 백산(신단수) 아사달(서울 평양) 배달 박씨 등이 우리의 고대 천손 정체성을 나타내는 우리만의 고유어이다.
[무시사당 화성석] 은나라 왕 후손 고총벽화(AD147)
6. 후기 단국조선
<하가점 상층문화 (夏家店 上层文化>는
bc 1000년에서 bc 600년경,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서 형성된 청동기 문화를 말한다.
상(商)이전 까지의 고조선은 동북아 대륙 유일한 신정국가로써 무력형성 이전으로 각 지역의 다수의 거수국을
3한으로 묶어 연합체제로 하였고, 중앙국인 천자(진한)국에 신정체제로 홍익인간 도덕정치를 하였다.
상의 멸망시기 부터 무력이 주도하는 왕조세력이 생기며 대륙의 열국이 일어나면서 고조선 3한 신정체제가
문어지기 시작하였다. 만주지역 진한과 한반도 마한, 요서의 번조선으로 이어쪘다.
<시안 피라밋 군락>
(위 사진은 독일학자 하우스돌프가 찰영하여 세계에 알린것인데 중공에 의해 추방됨)
시안 피라미드(시안 서남 100km에 100여 개) 진시황의 무덤보다도 천년 앞서는 홍산에서 이동한
단군 조선이 지배하던 지역으로 그 역사적인 사실을 은폐하였다. 이집트 것보다 높은것도 있다.
[발굴자 장문구(張汶邱 ) 증언]
1963년에 발굴시 입구에 3~5개의 석실이 있었으며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되였다고 한다. 중공의 지시로 중단되어 숨겨지고 있다. 2004년 현재까지 중공에 의해 없어진 피라
미드가 80여기에 달한다.
7. 한국의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강화 고인돌
강화 고인돌, 사적 제137호,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한국 선사시대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 산둥 반도와 랴오닝 지역에 가끔 보이며,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한국에는 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基)에 해당하는 고인돌이 한반도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강 옆의 들판이나 바닷가 부근에 있는 것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황해·전라지역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된다.
8. 조, 한 국경과 패수. 왕검(임금)성 위치
<조,한(朝,漢)국경 패수(浿水)와 왕검성위 위치도>
<사기/조선열전>한(漢)이 흥기하였으나 멀어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하여 패수浿水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 위만이 연에서 망명하여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에 귀속
하였는데, 蠻夷 및 옛 燕.濟의 망명자들을 모아 세를 키워 준왕을 밀어내고 조선왕이 되니 왕험성에 도읍
하였다. 이때의 왕검성과 패수는 갈석과 산해관의 요서지역이다.
9. 고구려 수도의 변천도..낙랑군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271BD41542A41A437
<고구려수도의 이동도.>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7253D3E542A3BCC07
<고 요하때 요동을 현 요하의 요동으로 오인하고 낭랑 기타지역의 위치를 오인함.>
위표의 고요하가 압록수인것이다. 이 고요하가 지금의 호타하인것이다.
https://search3.kakaocdn.net/argon/0x200_85_hr/Brk07NIaBdW
<상고대 요동과 요나라 요동>중원의 동쪽국경을 요라했고, 현 요하 동쪽과 다름)
<낙랑군과 낙랑군은 다르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여러 견해>
이병도: 한반도 평양
신채호: 요동 개주
정인보.리지린.윤내현: 요서
심백강: 하북성 노룡.북경지역 , 역수를 요하로 인정하여 고대요동위치 인정
상생연구소.국학원.이덕일: 하북성 창려
동북아역사재단: 한반도 평양
<낙랑국(樂浪國)은, 고조선에서 이어진 천년왕국./이을형>
[한서(漢書]권28에 낙랑조선국(樂浪朝鮮國)이 bc1237년부터 bc32년까지 한반도 평양에 이르는
영역에서 1,269년간 유지되었다. 최숭(崔崇)~최리(崔理)(bc195년~bc32년)왕으로 이었다.
지금 평양에서 출토되는 유적 유물은 위와같은 연유로 단군조선~낭락국에 이르는 것이다.
(낙랑조선국과 한4군 낙랑군의 구별을 혼동하는데, 즉, 한서(漢書)권(卷)28에 있는 낙랑국을 기록하고
있으나 [후한서]에서는 이 낙랑국과 한사군 낙랑군이 있는 것을 모두 덮어버렸다. 즉, 왜곡한 것이다.)
낙랑조선국은 고조선 이홀단제의 제(弟) 고불가를 BC 1237년 낙랑 홀왕에 봉(封)하고, 해모스 때
낙랑조선왕 최숭으로 하고 있다. [삼국사(三國史本紀](14-6)에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
(bc32년)에 낙랑국(樂浪國) 최리왕(崔理王)이 옥저를 순행(巡行)한 기록이 있다.(이무렵 고구려에
편입 됨) [삼국사본기]14에 있는 낙랑조선국이 있었음을 한서(漢書卷28)에 명기(明記)되고 있다.
낙랑조선국에는 민범금(民犯禁) 8조(條)가 있었고, 한무제 침공후 요서위씨조선(번한)의 뒤를 이은
(소위 한4군) 낙랑군(樂浪郡)보다 1,200여 년 이전부터 그 뿌리가 있었다.
[삼국사기]에서 낙랑조선왕과 낙랑군태수(樂浪郡太守)의 기록과 [후한서]에서 낙랑군태수의 변천이
쓰여 있다. [남제서(南齊書)]위만조선과 낙랑군도 요서지역 즉, 창해(滄海)서쪽, 북평(北平)과 태원
(太原)가까이에 있었다.
요서 후기 번조선(기씨, 위씨)자리의 낙랑은 한(漢)에 조공외교로 독립적 국가로 유지하며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연(燕)과의 인접 지역 갈등을 겪으며 민족 혼합 이동이 잦아 우리민족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낙랑은 ad313년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약화된 일부는 연(燕)의 군현으로 남아 있다가 북위~수(隋)나라
초기(ad 520년)까지 그 명맥이 존속한다. 고동안 낙랑으 후한때 조위때 동천하여 위치가 변하였다.
그 기록들이 낙랑에 대한 여러 이견을 노출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 낙랑은 고조선ㅡ번한-상(商)의 이미 발달한 문화를 체득하고 있엇고, 중원과 만주 한반도 사이의 교류
거점역할을 하며 장기간 유지되여 우리의 기저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기 권 114 東越傳]
"월사람들은 서로 싸우기가 오래되어 반란을 일삼으니 진나라 이래 속하기를 포기하고.."
한무제가 동월의 침공 실패후에 측근에게 물으니 태위 전분이 대답한 말이다.
오월은 동이족인 번조선(백익의 후손)과 상의 유민들이다. 이로 미루어 한사군 역시 복속시키기
어려움웠음을 이해하면 변방지역 안전을 위한 조공외교방식이 옳은 해석이다. 한사군을 중국의 군현이라고
붙박이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덕흥리 소재 유주자사묘ㅣ고구려 광개토태왕 점령지]
https://postfiles.pstatic.net/MjAxNzA4MThfOTMg/MDAxNTAzMDIwNjI1MTM2.5XVNmnKKoarJ7NmCZMSlVcwCdHb04Lw_FJaUAor2ILAg.DyWMXi6QRPy5rQ7XukrAuGg4N_9H08WUPZA9ettP0Cgg.JPEG.kalsanja/%EA%BE%B8%EB%AF%B8%EA%B8%B0_2.jpg?type=w2
▲ 덕흥리고분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앞에서 하례를 드리고 있는 13명의 태수
주: 광개토태왕점령지인 유주자사묘는 장수왕대 북연과 함께 평남지역으로 이주시킬때 함게 옮김것임
13개의 관할군은 범양 연군 대군 북평 상곡 광령 요서 어양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도군이다.
........................................................................................................................................................................
10. 고대 압록강은 북한압록강도아니고 요하도 아니며 하북의 호타하를 말한다.
위의 여러 고증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은 북한 압록강도 아니고 요령성 요하도 아니다"고 말하며
원래 "압록강은 하북성 호타하(천진 발해만으로 흐름)가 고조선시대부터의 압록강"이라는 주장이다.
https://youtu.be/lZnuTn1PtxI [우리 고대국가 위치를 찾다]전우성 저
https://youtu.be/y6lywXldKDQ
[출처] 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부도(상)|작성자 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