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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수필
평화와 생태의 문학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생태학(ecology)은 내용적으로 경제학(economics)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양자는 학문의 세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과학의 흐름을 타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생태학의 대상인 ‘자연의 경제’와 경제학의 대상인 ‘인간의 경제’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이란 끈끈한 핏줄로 연결된 일종의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와 물질을 제공하며, 인간 경제활동에서 발생한 에너지와 물질 폐기물을 처리해 준다. 또한 생태계는 인간 경제활동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에 되먹임 작용을 한다. 남북의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는 평화와 생태 환경의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다. 우리 문학인이 생태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평자는 ‘평화’와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계간 <지구문학>이 평화를 염원하는 생태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 및 오염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뒤늦게나마 생태학과 경제학 간의 대화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하다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차제에 지구문학 가을호에서 분단의 상처이자 한반도 평화와 화해의 미래이며 생태 환경의 마지막 보루인 비무장지대를 제재로 한 테마수필을 기획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계간평의 관점은 “생태와 평화”다.
II.
한국에서 생태문학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작품의 경우에는 환경오염의 심각성이나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0년대부터 문제가 형상화되고 있지만, 이론적 관심과 함께 본격적이고 의식적으로 전개된 것은 1990년대 생태담론이 활발히 생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한국에서 생태시의 형성은 서구에 비해 약 30년 정도 뒤늦게 이루어졌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등 소수의 작품만이 생태의식과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봐 있다. 1970년대 들어서도 신경림, 이하석, 등 소수의 시인들만이 환경오염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수용 하였을 뿐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 의식을 기대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이후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이 안고 있었던 정치. 경제의 특수한 조건에 기인한다. 그러나 아직 생태문학이라는 개념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하고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시에서 뿐 아니라 소설이나 희곡, 에세이 등에서 생태문제를 중심 테마로 삼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환경문학 >또는 <생태문학 >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생태문학의 기본적 특징이 무엇이고 그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합의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평자는 <환경문학>과 <생태문학>이 섞여 쓰여지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는 양자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환경’은 인간이 우위에 있다는 ‘자연’의 관점에서 개념을 구축하고, ‘생태’라는 용어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자연’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환경문학>과 <생태문학>의 변별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하길남의 <우리는 하나다>는 남과 북이 군사분계선이란 것을 경계로 갈라져 있는 한반도의 특수 상황을 인식하면서, 통일 또는 남북 화해의 전제로 곧잘 활용되고 있는 ‘우리는 하나다’란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수필이다. 작가는 남과 북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단부에서 ‘혼자’나 ‘개체‘라는 개념이 없는 아이들의 인식 체계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철조망을 치고 군사분계선이니 휴전선이니 38선이니 하고 개념을 부쳤을 따름이지 땅이 분할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는 ’DMZ를 둥지삼아 남북을 마음대로 오고가는 저어새들의 함성처럼, 마음은 언제나 핏줄 따라 오고 가는 것‘이란 관점으로 이 수필 속에서 남과 북은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수필이 주제나 제재 중심의 문학이고 보니, 전체적으로 주제는 일관성을 보여야 하고, 종속 제재나 종속 주제는 전체 글의 주제를 구현해야 하다. 작가는 우리가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군대 생활 속의 일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작가는 분단이 가져오는 비극의 현실과 평화의 염원을 마지막 결구 문단에 표현하고 있다. “미사일이 날아오고, 저어새가 오고 가는 세상에서, 새삼 그 당시 생사고락을 같이 한 분대원들이 그리워진다.”는 문장에서는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그리고 “그때 문득 그 비명횡사한 병사들의 피 묻은 모가지가, 천길 백마강 물결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는 문장에서는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다. 수필이 주제 중심의 문학임을 잘 보여주는 수필이다. 작가의 수필집 <흔적>이 2006년도 우수도서로 선정된 만큼, 하길남의 수필적 역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편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역량이 힘껏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수아의 <비무장지대의 날개짓>이란 수필 역시 분단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저어새의 날갯짓에 평화의 염원을 담고, 남북의 통일을 기원하는 작품으로, 특징이라면 시가 있는 에세이다. 여기서 수필 속에 시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좋은가 안 좋은가를 수필가의 입장에서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 글이 ‘평화의 염원’이라는 테마로 기획된 수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관념화된 ‘평화’의 염원을 실감과 유리된 정서로 구체화하는가다. 이 작품의 발단을 장식하는 문구는 ‘하늘꽃을 물들인 DMZ의 구름’이다. 발단에 주제의식의 배경이 되는 경계가 없는 하늘과 자유롭게 오고가는 구름을 설정한 것은 주제를 암시해 두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적절한 선택이다. 오늘도 쉼없이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는 상황 묘사는 분단으로 서로 오갈 수 없는 슬픈 한반도 현실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기에 주제의 상상화에 기여한다. 전개부에서는 20세기 마지막 날 임진각에서 “DMZ 200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했던 21세기를 맞는 행사를 내용으로 설정하였다. 작가가 시를 쓰는 시인이라서 때문이 아니라 당시 행사에서 시 낭송 행위를 했기에 이 작품에 시가 놓여질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시인인 까닭으로 분단의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그날 행사에서 시를 낭송하였다. 시인이 아니었다면 전문의 시가 작품 속에 인용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시는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의 마음인 주제를 간접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발단에 놓인 ‘저어새의 비상’ 그리고 결말부에 놓인 ‘저어새’의 힘찬 날갯짓이 수미상관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도 돋보인다. 시인이지만 수필의 조형성에도 신경을 써서 서두와 결미를 상관화해서 구성한 전략이 좋았다. |
김예태의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소야>는 태풍으로 쏟아진 비 때문에 북한에서 떠내려 온 ‘소’를 제재로 한 수필이다. 이 수필의 특징은 서간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간체는 사건이 발생되는 즉시 보고됨으로 수신자나 독자에게 현장감을 제공하면서 그 현장감으로 인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수필 양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사건에 대한 직접성과 밀접성, 자기 확증으로 인해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행동의 고백이나 정신적 경험의 강조에 유익한 것이다. ‘지뢰를 밟아 온통 상처로 뒤덮인 물키고 지친 너를 남한의 수의사들이 고쳐주고 ‘평화의 소’라고 이름지었다‘는 내용이 발단을 장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수필을 쓴 작가가 발단에서 전개로 화제를 바꾸기 위해 평화의 소와 상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목이다. 일종의 동화 기법이다. 상상의 기법을 이용해서 ‘소’에서 ‘노랑부리 저어새’로 화제를 전환하는 작가의 구성적 전략이 수필의 조형성을 빛내고 있다. 전개부 첫 문장, “노랑부리저어새는 잘 지내고 있어”하는 대목은 발단에서 전개로의 이동에 있어서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는 역할을 한다. 아픈 기억은 인간에게나 다른 동물에게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분은 독자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설의 전제되는 부분에다가 행위의 인과성을 주기 위해 문단 전후에 문답형의 상상 모형을 도입하는데, 이 점이 작가의 역량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결말의 마지막 문장, “뭐라고? 상류에서 난개발을 하지 말라고?”는 상상적으로 처리된 주제의 함축된 의미화로써 매우 인상적인 결말 처리다.
홍하정의 <공존> 역시 환경과 관련된 글이다. 역시 이 작품의 테마는 저어새다. 그러나 작가는 동물 보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바다’라는 강아지를 종속 제재로 끌어들였다. 평화나 생태라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주요 제재는 ‘저어새’이나 이 수필에서는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세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이 작가에게 저어새에 대한 정보가 적어서, 저어새를 주 제재로 해서 글을 끌어가는 데 작가 스스로 한계를 인정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어새에 관한 수필을 쓰려고 하다가 제재의 범위를 확대해서 동물 보호와 이해라는 차원으로 주제를 확대시켜 전개한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수필 장르의 창작에 있어서 일차적 과제가 단일한 제재의 확보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주요 제재인 저어새에 대한 언급이 적고, 덜 중요한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아져버리니까 글의 방향이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는지 독자들은 헷갈리게 된다. “우리가 너희를 위협하지 않듯이 우리를 침범하지 말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자신의 코드 밖에 읽을 줄 모르는 인간들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가졌으니 고기는 필요 없다고 하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지”라는 문구를 이 글의 주제가 담긴 것으로 이해할 때, ‘강아지’의 도입이 과연 주제를 효과적으로 간접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가 있다. 결말부에서 작가는 이 글의 주제 관련성이 적은 ‘강아지’와 놀다가 주제나 제재의 문학인 수필의 특성을 생각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 “창 밖에 새 한 마리 휙휙 휘파람을 분다”라는 문장이 뒤따라 올 수가 없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은 ‘공존’이라는 관념화된 주제를 제목으로 설정한 것이다. 미적 쾌락이라는 문학성의 가치가 구체성의 기반 위해서 달성되는 것이기에, 수필의 제목은 구체어로 기술되는 게 바람직하기에 하는 말이다.
윤범식의 <DMZ는 영원한 나의 둥지>라는 수필도 테마특집 ‘DMZ를 둥지삼아-저어새 100여 쌍 날갯짓’에 부속된 글이다. 이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식물이 자라는 비무장지대의 ‘태고 신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삼국시대 역사, 근대 전후의 혼란상, 6.25 전쟁 이야기를 종속제재로 삼고 있다. 평화와 생태 보호라는 주제를 제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작품 속에 메뚜기, 민물고기, 뱀과 개구리, 거머리, 지렁이, 벌레, 산양, 얼룩동사리, 두루미, 저어새 등의 동물들의 이름이나 갯방울, 왜솜다리 같은 희귀식물들의 이름을 명명하고 있어, 주제를 구체화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다. 문제는 주제가 놓이는 결말부다. 주제를 담고 있는 문장의 종결어미가 당위적인 명제로 제시되고 있는 부분이다. 수필은 주제를 간접화하는 데서 수필의 맛이 우러나오는 글이다. 이는 주제가 담긴 문장이나 단락의 종결어미가 ‘해야 한다’거나, ‘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문학이 목적하는 교훈이란 작가의 강요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서적 감동에서 나온다. 설득을 강요하면 문학의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문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결말의 마지막에 놓인 전제와 결론 구조의 논리적 문장 또한 수필의 맛을 떨어뜨린다. ‘~ 하지 않겠다’, ‘~ 때문이다’ 등의 종결 어미는 수필의 부위기는 물론 문학성도 약화시킨다. 수필은 대우성의 문학임으로, 여운적인 결말 처리가 수필의 특성에 어울린다. 생태 보전이라는 주제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그 근거 논리는 적절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DMZ를 지키는 것이 통일의 가치보다 더 클지도 모를 일이다”는 작가의 견해에 얼마나 많은 양식 있는 독자들이 공감해줄까 의문이다.
III.
197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생태의식이 일반대중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문학에서도 자연히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생태문학은 생태 시, 생태소설, 생태비평, 생태미학, 생태 페미니즘 등과 같은 다양한 개념으로 분화되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70년대 이후 대량으로 등장한 환경문제를 다룬 시들은 대부분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1930년대 이후 독일의 자연 시는 대부분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연 속으로 침잠하여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전통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던 반면 새롭게 등장한 자연 시는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시는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지구문학이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테마를 ‘생태와 평화’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제 수필가들이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비무장지대의 ‘저어새’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이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구문학의 생태 테마 설정을 계기로 해서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주제가 정해지다 보니, 수필의 내용이 체험보다는 정보적인 이야기에 의존하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 점이다. 수필은 이야기나 정보의 나열로 작품화를 이룰 수 없다. 주제에 맞게 제재를 하나로 통일하고,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해서 인식의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좋은 수필이 탄생하는 것이다. 문학이 문학다워야 한다는 것은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정체성을 작가가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어쨌든 생태와 평화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우리 수필가들이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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