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十二 章 철부지 소녀
설희는 다소곳이 말했다.
『그건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전옥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대가 설사 나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오. 한 여자아이가 그같이 경박한 행동을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그대는 그렇게도 모르시오?』
설희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웃던 울던 상관하지 않아요. 감히 누가 나를 보고 웃겠어요? 그러면 내가 그를 죽여버리지요.』
전옥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그 버릇이 나오는구려.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겠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설희는 꽃봉우리가 활짝 열리는 것처럼 웃었다.
『나는 당신에게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내가 당신의 얼굴이 좋아서 만져보는 것을 못하게 하면 사람을 막 죽일지도 몰라요.』
전옥린은 타일렀다.
『설희, 그대는 줄곧 대설산(大雪山)의 빙곡(氷谷)에서 살아 왔소.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대 마음내키는 대로 어떤 일이든 할 수가 있었소. 하지만 자금 그대는 바깥세상에 나왔으니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나쁜 여자아이라고 할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설희는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우리사부님은 언제나 나를 착한 여자아이라고 칭찬하셨다구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대는 착한 여자아이요. 그러니까 그대는 함부로 남자의 얼굴을 만지면 안된다는 것이오.』
설희는 손짓했다.
『그렇다면 나는 빙곡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도 나를 따라 함께 빙곡으로 가요. 우리들이 그곳에서 살면 남들이 웃던 말던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전옥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내 이미 그대에게 말한 바 있지만 나는 할 일이 많다는 말이오.』
설희는 뽀루퉁해졌다.
『당신은 참 가리는 것도 많고 또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방금 전에는 나보고 사람을 깨워내라고 하더니……』
전옥린은 그녀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철표가 생각나서 급히 물었다.
『설희, 철표는 어떻게 되었소?』
설희는 시치미를 뚝 떼는 얼굴이 되어서 물었다.
『누가 철표예요?』
전옥린은 그야말로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곧장 다가가서 철표의 상처를 살폈다.
철표는 여전히 지붕 위에 누워 있었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위 기왓장 위로는 한 겹의 엷은 서리가 하얗게 깔려있었다. 그는 웅크리고 손을 뻗쳐서 철표의 가슴팍을 더듬어보았다. 철표의 심장은 이미 멈추어져 있었는데, 어느 결에 다시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는 기뻐서 나직이 불렀다.
『철표! 철표……』
철표는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는데 전옥린이 다시 그를 부르려고 했을 때 설희가 옆에서 말했다.
『오빠, 당신이 그의 머리를 살짝 한번 치면 깨어날 거예요.』
전옥린은 어리둥절해졌다.
『머리를 치다니? 백회혈(百會穴)을 말하는 것이오?』
설희는 웃지 않았다.
『어느 부위가 백회혈인지 나는 몰라요. 다만 바로 정수리 위를 한번 쳐 보세요. 그러면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릴 거예요.』
전옥린은 말했다.
『그의 내장은 이미 파열이 되었소. 만약에 다시 그의 백회혈이 충격을 받도록 한다면 즉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꼴이 되지 않겠소?』
설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호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당신은 정말 우둔하고 언제나 쓸모없는 말이 많아요. 이런 식이라면 나는 정말 당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걱정스러워요.』
전옥린은 씽긋 웃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겠구려. 그렇게만 되면 내가 약속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될테니까 말이오.』
설희는 아름다운 코를 쫑긋했다.
『그렇게 수월하게요? 당신은 나한테서 오년 동안 떠나지 않기로 약속을 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오년을 채워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뻗쳐서 철표의 머리위 백회혈을 손가락으로 한번 탁 쳤다.
전옥린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철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표는 전신을 한번 부들부들 떨더니 마치 한가닥의 새로운 힘을 주입받은 듯이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철표는 눈을 뜨자마자 하얀 옷을 펄럭이며 서있는, 선녀같이 고운 처녀를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대뜸 얼굴에 공포의 빛을 떠올리고 도망을 치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그가 그같이 움직이게 되자 사지백해(四肢百骸)가 산산조각으로 파열되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 아픔 때문에 한 차례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전옥린이 옆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대협, 나를 좀 구해주시오. 나는 죽어서는 안되오. 죽을 수가 없소!』
전옥린은 조용히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번 죽는데 당신은 어째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오? 혹 당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놓은 그 많은 은자가 아까워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오?』
철표는 더듬거리며 고백했다.
『전대협, 나는…… 나는 솔직히 말하리라. 나…… 나에게는 여섯 명의 마누라가 있소. 그녀…… 그녀들은 각각 아이들은 낳고 또 낳아서 내게는 도합 삼십 여명의 아이들이 있소이다. 그들은…… 그들은 모두 어리고 철부지라는 말이오.』
전옥린은 세상의 탐욕과 비리가 모두 여자와 새끼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황연히 깨닫게 되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팔아넘기고 죽어라 하고 돈을 모은 것은 바로 당신의 여러 집 살림과 그 많은 아이들 때문이었구려?』
철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여자를 특별히 밝히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소. 여자들은 젊고 아이들은 아직도 어려서…… 그것들 모두가 나를 의지하고 있소. 나…… 나는 그래서 죽을 수가 없소. 전대협 당신이 나 좀 구해 주시구려.』
전옥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내장이 이미 파열되어 대나신선이 와도 이제 당신을 구할 방법이 없게 되었소.』
철표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고 입술을 꿈틀거리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전옥린은 혹시나 그의 울음소리가 아래에 있는 민가의 잠이 든 사람들을 때우게 될까봐 재빨리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철표, 당신 스스로 저지른 일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개방의 방규에 의하면 당신은 역시 죽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철표는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나…… 나는 잘못한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릴 수 없겠소?』
전옥린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처리하거나 혹은 천지이로에게 맡겨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당신은 안심하고 말 하시오.』
철표는 길게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나의…… 품속에…… 일만 오천 냥의 은자에 해당하는 은표가 들어 있소. 그러니 당신이 나를 대신하여 이 은표를 산서성(山西城) 태원부(太原府) 석사자(石獅子) 골목 철공관(鐵公館)에 갖다 주시구려……』
그는 단숨에 이토록 많은 말을 하고는 한 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다시 말을 하지 못하고 기침만 해댔다.
전옥린은 혹시나 그가 금방이라도 죽게 될까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철표, 당신은 안심하시오. 나는 당신을 대신해서 돈을 전해드리리다. 그리고 나에게도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볼 일이 있소.』
철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전…… 전대협, 고…… 고맙소, 내가 당신에게 알려줄 것은 사경 무렵 그들이 당신의 아들 모백을 잡으러 간다는 것이오.』
전옥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누가 그 아이를 잡으러 간다는 것이오? 그들이 누구요?』
철표는 두 번 숨을 쉬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들은 성…… 성총순사와 천서오악들로서……』
전옥린은 재빨리 물었다.
『모백은 지금 어디에 있소?』
철표는 눈에 의아하다는 빛을 띄우고 물었다.
『당신…… 당신네들은…… 그걸 모르시오?』
전옥린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 저녁 무렵에야 성안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당신네들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밤중에 다시 나서서야 당신이 한 사람을 업고 노최기약행으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뒤를 따랐던 것이오.』
그는 철표가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었고 얼굴빛마저 잿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잘못돼 간다고 느끼면서 재빨리 물었다.
『철표, 그 아이는 어디에 머물고 있소?』
철표는 띄엄띄엄 말했다.
『임……가……화원『
전옥린은 속으로 한두 번 그 말을 읊어보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철표, 무정산은 어디에 있소? 당신은 알고 있소?』
『나…… 나는 가본 적이 없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무(武)……』
철표는 겨우 거기까지 말하더니 한모금의 숨을 잇지 못하고 두 눈동자를 위로 까뒤집었다.
전옥린은 속으로 초조하기 이를 데 없어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오른손으로 철표의 단전을 어루만지며 자기의 진기를 상대방의 체내에 주입해서 그의 심맥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다.
그의 손이 막 철표의 아랫배에 닿게 되었을 때 철표는 어느덧 왁!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장조각이 뒤섞인 선혈을 토해내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옥린은 철표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그의 전신의 온도가 뚝 떨어지면서 손이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고 근육마저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게 변했다. 그는 맥없이 철표의 손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 된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구나. 실낱같은 시간의 차이로 무정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구나.』
설희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반드시 무정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하나요?』
전옥린은 번뇌에 찬 얼굴을 쳐들었다.
『아! 설희, 그대는 모를 것이오. 그것은 무림 전체의 안위와 연관되는 일이라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희, 그대도 들었을 것이오. 그는 죽기 전에 누군가가 모백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했소.』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모백이 또 누구지요?』
전옥린은 대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모백이 나의 외동아들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소?』
설희는 킥킥 웃었다.
『나는 그저 당신 이름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당신 아들을 나는 본 적도 없는걸요.』
전옥린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고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설희, 그대는 역시 먼저 빙곡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요? 나는 줄곧 당신의 뒤를 따를 거예요. 그래서 오년이라는 기간을 채우기를 기다려서 우리는……』
전옥린은 그 말을 가로 막았다.
『설희, 나에게는 많은 할 일이 있소. 그대도 방금 들었겠지만 나쁜 사람들이 내 아들을 해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달려가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단 말이오.』
설희는 서슴치 않고 나섰다.
『내가 당신과 함께 그 아이를 구하러 가면 될 것이 아니겠어요?』
전옥린은 난처했다.
『내게는 그 일만 있는 것이 아니오. 또 다른 중요한 일들이 있소. 그래서 나는……』
설희는 그가 자꾸 자기보고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
『당신은 정말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거예요?』
전옥린은 애써 변명했다.
『설희, 나는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니오. 다만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여러가지로 불편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이미 그대와 함께 있기로 응낙을 했으니 그대가 먼저 빙곡으로 돌아가 기다려도 내가 일을 끝내고 그대를 찾아가면 되지 않겠소.』
설희는 입을 삐죽했다.
『당신은 나를 떼놓으려 하는군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거지요?』
전옥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것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이 없소. 그리고……』
설희는 그 말을 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 말할 필요가 없어요.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당신 뒤를 따르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사부님은 돌아가시고 이제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았어요. 나는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어디든 따라다닐 거예요.』
전옥린은 무척 골치가 아팠다. 그는 설희와 이틀을 함께 지냈지만 그녀가 한번도 이 풍진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도 이 세상의 관습이나 예절을 모르고 종종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그러한 그녀를 그가 버리게 된다면 한편으로 자기의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일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림에 하나의 커다란 재앙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많은 일을 해야 할 몸인데 사사건건 설희의 제약을 받으면서 어찌 사람을 피하고 만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마음속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입장이 난처해지자 그는 애시당초 설희가 자기를 구하지 않았거나, 자기가 차라리 무정산으로 잡혀가는 일이 있더라도 설희가 내세운 말도 안되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해마지 않았다.
설희는 그가 묵묵히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오빠, 말 좀 해보세요.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요?』
전옥린은 금방 왁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씁쓸히 웃었다.
『설희, 그대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요. 그대가 기어이 나와 함께 있겠다면 내 말만 듣도록 해요. 나는 결코 당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오.』
설희는 다시 활짝핀 꽃처럼 웃었다.
『정말이에요? 오빠, 당신은 결국 나를 좋아하시는군요. 아이 좋아라.』
그녀는 전옥린을 꼭 끌어안고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여 또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전옥린은 정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십여년 전에 이미 결혼을 했던 몸이며 아들만 하더라도 거의 열 살이 다된 형편이었다.
그의 처가 죽은 이후 오랫동안 그는 줄곧 마음을 맑게 하고 욕정을 누르면서 온 정신을 무공연마에 두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독신생활을 근 십년이나 아무 탈 없이 보낸 후에 이제와서 차례로 여자의 깊은 덫에 빠져 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하옥지가 그로 하여금 꼼짝없이 결혼을 약속하도록 만들더니 이제 다시 설희가 그에게 달라붙어서 함께 오년 동안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하니 나이가 들어서 내게 도화운(桃花運)이 도래했단 말인가?』
그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설희의 손을 떼어내었다.
『설희, 우리 이제 갑시다.』
설희는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데요?』
전옥린은 대답했다.
『우리는 임가화원으로 가야하오. 나는 철표가 부탁한 일을 천지이로에게 말씀을 드려야 하오. 그리고……』
설희는 물었다.
『당신은 저 사람을 데리고 가려는 거예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오. 그는 개방의 사람이니 나는 반드시 개방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일을 설명 해줄 필요가 있다오.』
설희가 나섰다.
『그러면 내가 그를 데리고 가지요.』
그녀는 허리를 구부리더니 가볍게 철표를 들어올렸다.
『오빠, 우리는 임가화원으로 가도록 해요.』
전옥린은 그제서야 자기가 임가화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미 깊은 밤이었고 길에는 한 사람의 행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임가화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이 그는 총순사가 있는 노최기약행 근처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한기도 갈수록 심해졌다.
전옥린은 지붕위에 앉아 있었는데 자기의 몸도 약간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한번 움직였다. 그리고 먼 곳으로 던졌던 시선을 거두어들이게 되었을 때에야 조금전까지만 해도 자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설희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서 부근 일대를 찾아보려고 했을 때 멀리서 몇 번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전옥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쳐들고 이장 밖의 노최기약행을 한번 바라보며 생각했다.
'철표는 그들이 사경쯤에 임가화원을 기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삼경이니 그들 역시 출발할 무렵이 되지 않았겠는가? 나는 역시 이곳에서 기다려야겠구나.'
그는 사방을 한번 잘 살펴보았지만 설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옆으로 한 채의 비교적 높은 집이 서 있었는데 그는 철표의 시체를 처마 옆의 그늘진 곳에 놓아두었으며 그 자신도 어두운 음영 속에 숨어 있었다.
이같이 처량하고 추운 밤에 지붕 위에서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전옥린으로서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형편인데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그는 금응보에서 나올 때 적지 않은 은자를 지니고 있었으나 팔괘산으로 가면서 모든 은자를 객잔에 남겨두고 몸에는 그저 몇 조각의 부스러기 은(銀)만 지녔던 것이었다.
그 몇 조각의 부스러기 은(銀)은 줄곧 몸에 있었는데 그가 사로잡혀서 무정산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한 푼도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설희에 의해 다삼공과 원현기로부터 구출을 받게 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틀 동안 그와 설희의 숙식비용을 모두 치뤄야 했다. 설희는 어릴 적부터 대설산 빙곡 안에서만 살아왔고 한번도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몸에 한 푼의 은자도 지니지 않았던 것이다.
매번 셈을 치를 때마다 그는 처음 설희가 그를 따라 반점에 들게 되었을 때에 일으켰던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그는 설희가 대설산에서 나온 이후 매번 배가 고프면 반점으로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나서 그냥 나오곤 했는데도 그 누구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설희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답고 탈속한 모습인데다 눈의 나라에서 온 공주처럼 머리카락까지 하얗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선녀나 요괴로 오해했기 때문에 뻥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유유히 그 집을 나오곤 했던 것 같았다.
전옥린은 그녀와 함께 행동하면서 셈이란 셈을 모조리 치루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세상의 예절과 풍습 등을 가르쳐서 그녀가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했다.
설희는 어릴 적부터 빙곡에서 살아왔고 만년이나 묵은 얼음의 정기를 받아 그녀의 현빙공은 이미 불가사의할 정도의 경지에까지 연성되었던 것이다.
전옥린은 그를 압송하던 마차에서 그녀가 섬세하고 아른아른한 손을 들어 한번 장풍을 발하자 유곡신마 다삼공과 원현기 두 사람이 혼비백산해서 뒤로 일장쯤 물러섰으며 그 수레를 끌던 건장한 말이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얼어 죽는 것을 친히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몸에 지닌 현빙공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일반인들의 인정이나 풍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 멋대로 설치고 다니게 된다면 아마도 천하에서 그녀를 제압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전옥린은 그들 손에서 풀려난 이후 줄곧 그녀와 함께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자기가 약속한 바를 저버리기 싫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상태 하에서 인명을 해치는 일을 자행할까봐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조금전에 철표가 그녀의 일지아래 전신이 뻣뻣해지고 내장이 파열된 것을 보고 더욱더 설희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잘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하옥지를 떠올리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은 다시 망연해지면서 어떻게 그들을 안배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최근 십여 년 동안 하옥지가 줄곧 깊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 팔팔한 성미를 죽이고 금응보에 남아서 전모백을 돌봐온 것도 전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저께만 하더라도 그는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부득이 그녀에게 처로 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설희에게 오년 동안 함께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는 설희가 그같이 이상한 요구를 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약속을 했고 그렇다면 하옥지나 전모백 앞에 나타나지도 얼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는 오년 동안 설희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오년이라는 기간이 꽉 차게 되었을 때에 그녀가 순순히 그를 놓아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옥린은 많은 것들을 생각했지만 그 일들은 어느 것이나 얽히고 설켜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때서야 그는 그 당시 마차 안에서 설희가 내건 조건을 응낙한 것이 그가 무정산으로 압송되는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골치가 아파서 깊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만약에 내가 때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을 정도로 양심에 털이 난 사람이라면 이같이 골치가 아프지는 않으련만……』
하지만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듯이 그는 한평생 약속을 지켜왔으며 그로서는 식언을 하는 일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이때,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야경꾼의 징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곧이어 길게 부르짖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해져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망설였다.
그 비명소리가 난 방향으로 가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잠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은방울소리와 같은 웃음소리가 밤하늘 저쪽으로부터 울려왔다.
또르르 귓전을 간지럽게 하는 그 웃음소리가 아직 허공에 맴돌고 있는데 희디 흰 사람의 그림자가 전광석화와 같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설희, 당신은 지금 어디 갔다 오는 것이오?』
설희는 계속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 저는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어요.』
전옥린은 물었다.
『그대는 또 누구를 해친 것이 아니오?』
설희는 커다란 눈망울을 한번 깜박거렸다.
『내가 왜 그를 죽여야 하나요? 나는 그저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고 있는 징을 한번 두드려보았을 뿐이에요.』
그녀는 생각할수록 우습다는 듯 다시 은방울소리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호호호! 아이 우스워라. 그 늙은이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나를 보자마자 그만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 해졌고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내던지고 소리를 질렀어요. 뭐라고 하더라…… 뭐라고 했는데…… 맞아요. '아이쿠! 어머니! 귀신이다!'라고 했어요.』
그녀는 배꼽을 잡으며 웃더니 다시 쫑알거렸다.
『호호호! 오빠, 그는 나보고 어머니라고 불렀어요. 그러니 오빠는 우습지 않아요?』
전옥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희,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지 말아요.』
설희는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오빠, 내가 정말 귀신같아요?』
전옥린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설희가 눈빛을 반짝하더니 갑자기 지붕위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웅크리고 먼 쪽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노최기약행의 지붕 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지붕 위에 서서 이리저리 돌아보더니 거리로 내려섰으며 곧장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설희는 바로 전옥린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그녀의 몸에서는 비릿한 처녀의 몸 내음이 풍겨오고 있어서 전옥린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옆으로 좀 움직여서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설희는 더욱더 바짝 몸을 붙여왔다.
그녀의 탱탱하게 탄력있는 몸뚱아리는 얼음장같은 무공과는 딴판으로 달아오른 불덩어리 같아서 전옥린은 거의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쳐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설희, 주의해요. 그들이 곧 몰려나올 것 같으니까 말이오.』
설희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방금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인가요? 내가 보기에 그는 둔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한번쯤 자기의 실력을 과시해 보았으면 하는 어린아이같은 표정이 역력했다.
『설희, 함부로 굴지 말아요. 내가 주의하라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 말이오.』
설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었다.
『바로 우리들이 아까 보았던 총순사인가 하는 사람 말인가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일신 무공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라오. 우리는 그를 상대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하오.』
설희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보통이 넘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걱정할 것 까지는 없어요. 우리 사부님께서 내가 강호에 나서게 된다면 그 누구도 적수가 되기 힘들거라고 말했는걸요.』
그녀는 방긋 웃고 다시 몸을 바짝 붙여오며 배릿한 입김을 내뿜었다.
『오빠 그가 당신의 근심거리라면 내가 그를 상대하도록 맡겨주시지 않을래요?』
전옥린은 조금씩 몸을 피하면서 말했다.
『설희, 내 이미 그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소? 함부로 나서면 안된다고 말이오.』
그는 문득 다시 물었다.
『설희, 당신의 사부는 대체 누구요?』
설희는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부는 그냥 사부지 누구겠어요? 나는 당신에게 여러번 말했지 않아요?』
전옥린은 전에도 그녀에게 그걸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무림에 어떤 기인이 대설산빙곡에 은거해서 평생을 보내면서 한 여자아이만을 키워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희의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무공을 보고 그녀의 성취가 줄곧 인적이 없는 만년 빙곡에 살면서 특수한 환경의 도움으로 단련된 것이고, 달리 원인이 있다면 그녀에게 지극히 훌륭한 사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설희의 사부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에 몇 차례 물어보았으나 설희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했다.
설희는 꿈꾸는 듯이 시선을 먼 곳에 두고 혼잣말처럼 쫑알거렸다.
『사부님은 참 좋은 사람이지요. 만약에 그분께서 죽지 않고 당신을 보았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거예요.』
전옥린은 물었다.
『그것은 또 어째서요?』
설희는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으응, 왜냐하면 당신이 의젓하고 잘 생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사부도 반드시 당신을 좋아하시게 되어있어요.』
전옥린은 빙긋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사부께서 반드시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할 수 있소?』
설희는 고개를 까닥까닥했다.
『그분이 미리 말씀하신 적이 있는걸요. 그분은 내가 다 큰 후에는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서 그 사람과 함께 살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에……』
그녀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더니 무슨 하고자 하던 말이 머리에 떠오른 듯 손뼉을 따닥 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그 분은요. 그래서 내가 조그만 어린애를 낳아서 엄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전옥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사부는 그냥 평범한 세상의 이치를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이 또 불씨가 되어서 오늘날 나를 이렇게 곤혹스럽게 하는구나.'
설희가 물었다.
『오빠, 우리 사부님 말씀이 하나하나 들어맞지요?』
전옥린은 정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기가 막혀서 억지로 고개만 끄덕였다.
설희는 좋아서 웃었다.
『호호호. 나는 정말 운이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는데다 이제 곧 아기를 가지게 되겠지요. 당신 생각해 보세요. 내가 곧 엄마가 된단 말이에요.』
전옥린은 눈을 부릅떴으나, 이내 가볍게 꾸짖었다.
『설희, 터무니없는 소리를 자꾸 지껄여서 나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요.』
설희는 어리둥절해졌다.
『당신은 우리 사부님 말씀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과 함께 있으니 곧바로 아기를 낳게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전옥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오빠. 당신은 내가 우리들의 귀여운 아기를 낳는 것이 싫으세요?』
전옥린은 세상에 이와같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처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그가 만약 그녀가 전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아마도 그녀가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난처해진 그는 겸연쩍게 말했다.
『설희, 아기를 낳는 일은 그렇게 수월한 것이 아니오. 반드시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해야만 하고……』
설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을 가로채서 불쑥 물었다.
『오빠, 그럼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전옥린은 씁쓸하게 웃었을 뿐 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이때 누군가 그에게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설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정산 산주의 무공이 천하에 적이 없고 그 음모가 비록 엄청나게 치밀하다고 하더라도 잘 생각해보면 대응할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전옥린은 또 무공으로라도 그와 한번 싸워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설희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 물정에 깜깜한 여자아이인 것이다. 그녀의 무공은 물론 기이하도록 고강하지만 그 무공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내놓는 야릇한 문제들에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죽일 수 없을 바에야 약속을 저버릴 방법도 없기 때문에 오직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에는 그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을 자유조차도 없었다.
설희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몸을 가까이 붙여오며 얼굴을 맞닿을 듯이 가져다 대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말 좀 해봐요. 나를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아요?』
전옥린은 정말 이때에 자기가 귀머거리가 되어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는 우물쭈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는 말이오……』
설희의 얼굴은 바로 코가 닿을 듯이 그의 얼굴 앞에 있었으며 그녀의 숨결은 한가닥 풀꽃향기같은 배릿한 냄새를 지니고 있어서 전옥린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설희는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것을 보고 또르르 웃었다.
『호호 오빠, 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 역시 당신이 좋은걸요.』
그녀는 옥과 같은 손을 뻗쳐서 전옥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온몸을 그의 품속으로 던져왔다.
『오빠, 나는 오래전에 몸에 매화꽃 무늬가 있는 어린 사슴새끼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 아기사슴은 몸에 아름다운 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부드러운 털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슴엄마를 닮았지 뭐예요? 하지만 내가 낳은 아기는 당신을 닮기를 바래요. 짙은 눈썹에 높다랗게 솟은 코 그리고……』
전옥린은 그녀를 가슴에 얼싸안은 형국이 되어서 달콤한 잠꼬대같은 소리를 듣게 되자 정말 이게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별안간 그는 한 명의 검정옷을 입은 사내가 바로 그들 옆의 지붕 위에 서서 온 얼굴 가득히 놀라운 빛을 띠고 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흑의의 장정은 바로 조금전에 노최기약행을 나와서, 비명소리가 난 곳을 살펴보러 갔던 그 사람이었다.
그가 전옥린과 설희, 두 사람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면 그들 두 사람이 꿈과 같은 환상 속에 빠져들어서 근본적으로 자기네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흑의의 장정 역시 평생동안 야밤에 지붕 위에 올라서 애틋한 정을 주고받고 있는 남녀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일시에 자기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전옥린의 기색이 이상하자 그의 품속에 안겼던 설희 역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오빠, 왜 그래요?』
그녀는 질문을 끝내기 전에 어느덧 자기의 등 뒤에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 흑의의 장정은 한평생에 이와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은발의 노파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신비롭기 이를 데 없는 미모의 소녀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떴으며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 귀신이다.'
그는 전신을 흠칫 떨며 놀라 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는 코끝에 한가닥의 담담하고도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번쩍 하면서 하얀 그림자가 눈앞을 얼핏 스쳤고 곧이어 한가닥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고 그의 전신은 즉시 뻣뻣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거의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도 영기발랄하고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손을 뻗쳐서 그 은발여자의 손을 잡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옥린은 설희의 손을 잡는 순간 대뜸 한가닥의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만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나지막이 호통을 내질렀다.
『설희, 그만……』
설희는 재빠르게 현빙공을 거둬들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오빠, 당신은 어째서 또 위험하게시리 나를 막는 거예요?』
전옥린은 진기를 끌어올려서 재빨리 전신을 한바퀴 순환하도록 한 이후에야 겨우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설희, 내가 그대에게 말한 바 있지 않소? 그대가 함부로 손을 쓰면 안된다고 말이오. 그런데 그대는 또 어째서 사람을 해치려 하는 것이오?』
설희는 입술을 삐죽했다.
『오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이곳에서 우리를 훔쳐보았지 않아요?』
그녀는 무엇이 예의인 줄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무엇이 부끄러운지를 알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얼굴에 한가닥의 수줍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전옥린은 그녀의 그같은 모습을 보자 자기 자신이 오히려 겸연쩍어졌다.
『되었소, 내가 그에게 뭘 좀 물어보도록 해주시오.』
설희는 좀 흥분한 것 같았다.
『오빠, 내가 그를 죽여야겠어요. 이번에는 나를 막지 마세요.』
전옥린은 그녀의 얼굴 가득히 떠오른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계집아이도 부끄러운 줄을 아는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입을 열었다.
『설희, 당신은 내가 그에게 먼저 필요한 것을 물어본 이후에 그를 처리할 문제를 결정하시오. 이제 되었소?』
설희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설희는 이 세상에서 당신 말만 잘 들을 거예요.』
전옥린은 이미 정신을 잃고 뻣뻣하게 까무러친 흑의 장정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으로 그의 명문혈에 대고는 한가닥의 뜨거운 진력을 끌어올려서 그의 체내로 불어넣었다.
그 흑의 장정은 나직이 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뚱이가 허공에 붕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소리치려 했다.
그가 막 소리를 내지르려는 순간 전옥린이 그의 아혈을 짚어버리고 무거운 어조로 다짐했다.
『내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만약 당신이 대답을 하지 않거나 소리를 지른다면 당신 자신에게 좋지 않는 일이 생길 거요. 잘 알아들었소?』
그 흑의 장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옥린은 몸을 숨기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혈도를 풀었다.
그 흑의 장정은 눈망울을 한번 굴려서 먼저 철표의 시체를 볼 수 있었고 곧이어 설희가 조용하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