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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에 패수(浿水)는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국경이라 했는데 그것이 어느 강을 가리키는지 여러 학설이 난무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 BC 221)에 진(秦), 조(趙), 연(燕)은 북방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건설했다. 이를 진장성(秦長城), 조장성(趙長城), 연장성(燕長城)이라 한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장군 몽염을 시켜 수십 개의 성과 요새를 신축하고 기존의 삼국 장성을 수선하여 연결하니 그 길이가 만여 리에 달하여 후세에 이를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사기 진시황본기]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爲塞 竝陰山至遼東
땅은 동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 임조와 강중에 이르고, 남으로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 황하를 차지하고 요새를 만들었는데 음산(陰山)산맥을 따라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사기 몽염열전]
秦已竝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衆 北逐戎狄 収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険塞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을 시켜 30만 무리를 이끌고 융적(戎狄)을 북으로 내쫓고 하남(河南)을 거두었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을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장성을 쌓아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고 길이가 만여리에 달했다.
[사기 흉노열전]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撃胡 収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縣城 ... 因邊山険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진(秦)나라가 六國을 멸하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胡를 공격해서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요새로 삼고 44현의 성을 쌓았다. ... 험한 산과 계곡을 참호로 삼고 미비한 곳을 수선해 임조(臨洮)에서 요동까지 만여리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7년 12월에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4년간 싸웠다. 중원의 혼란기에 사방의 이민족들은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한무제(漢武帝)를 이은 소제(昭帝) 6년(BC 81년) 염철주(鹽鐵酒)의 국가전매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대토론회의 내용을 30년 후 환관(桓寬)이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염철론(鹽鐵論) 권 38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竝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이(四夷)가 모두 강하여 함께 쳐들어왔는데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燕)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염철론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이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모두 수복하고 연나라 본토의 동부 지역까지 점령했다고 한다. 주류학계는 진개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태자하이고 침공 후의 국경인 만번한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패수는 태자하를 넘어야 하니 적어도 요하라야 하고 요하를 넘어갈 수도 있다. 패수와 만번한 공히 청천강이라는 주류설은 말이 안된다.
BC 202년 1월 항우가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하고 유방의 한나라가 중원을 제패했다. BC 202년 8월 노관이 연왕(燕王)에 책봉되었고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史記 朝鮮列傳]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燕에 속하게 했다.
[三國志魏志東夷傳]
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漢나라가 노관을 燕王에 봉했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 及故燕斉亡命者 王之都王険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 곳(요동외요)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연(燕)에 속하게 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三國志魏志東夷傳]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삼국지위지동이전]
漢이 노관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조선을 침공했을 때 한나라 육군은 연경에서 출발하여 동진했는데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한나라 육군은 여러 달 동안 패수를 건너지 못하였다. 문맥상 패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한무제는 조선 땅에 사군을 설치했다.
사기보다 이백년 뒤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지리지는 사군이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이라고 했다.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浿水縣 : 浿水西至增地入海,
패수현에서 패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含資縣 :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현에서 대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帶方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呑列縣 :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列亦作洌
탄렬현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점제현(黏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820리다. 列은 洌로 쓰기도 한다.
漢代에 상흠(桑欽)이 하천지리서 수경(水經)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위(北魏 386~534)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 , 466년 ~ 527년)이 방대한 주석을 달아 515년에 수경주(水經注)를 완성했다. 패수에 관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 수경(水經)
浿水出樂浪鏤方縣 , 東南過臨浿縣 ,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낙랑군에는 임패현(臨浿縣)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런 해석은 불가하다. 낙랑군에 패현(浿縣)도 없고 다만 패수현(浿水縣)이 있다. 수경(水經)은 패수(浿水)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없다.
◇ 수경주(水經注)
許慎云 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酈道元 注) : 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以朝鮮為遠,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허신(許慎)이 말했다. 패수는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현에서 발원한다는 설도 있다.
13주지에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다. 아마도 패수는 패수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누방현을 경유할 것이다.
역도원(酈道元)의 주석 :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에 이르렀다. 조선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전국 시대에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해서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 한무제가 원봉 2년(BC 109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 우거를 토벌했다. 우거를 패수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조선을 멸했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위만이) 패수를 건너지 않아야 이치에 맞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을 방문했더니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서 서북으로 흐른다고 했다.
옛 지리지(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 한(漢)나라가 일어서고 조선이 멀어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고금의 역사를 고찰하면 사실에 착오가 있는데 무릇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기록한) 수경(水經)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 역도원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 왕험성이라고 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이었다.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의 북쪽에 있는 성(城)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으나 앞뒤 맥락을 보면 왕험성을 가리킨다.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패수는 왕험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간다고 했다. 패수가 조선현을 지나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서쪽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역도원은 패수가 동쪽으로 흐르면 위만이 패수를 건너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므로 수경(水經)의 기록은 틀렸다고 하면서 패수는 평양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서쪽 연나라에서 출발하여 동쪽 조선으로 간 위만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건너갈 필요가 없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건너야 했다는 것이니 이 무슨 궤변인가?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라도 있지만 한(漢)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가 왕험성 남쪽을 지나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기를 보면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니 패수가 지나가는 평양성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역도원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 부르니까 대동강을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로 생각하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역도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唐 618~907) 왕조에서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과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평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周書 異域列傳]
◇高麗者 治平壤城 其城東西六里 南臨浿水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그 성은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隋書 東夷列傳]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수서동이열전]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括地志]
髙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 낙랑군 왕험성으로 옛 조선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 : 당나라(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4년(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했다.
史記 : 秦始皇 二十六年 地東至海曁朝鮮
진시황 26년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
史記正義 : 海謂渤海 暨及也 東北朝鮮國
해(海)는 발해(渤海)라고 부른다. 기(暨)는 급(及)이다. 발해(渤海)의 동북쪽은 조선국이다.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 936~946) 왕조에서 945년에 구당서(舊唐書)를 편찬했다.
[舊唐書]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한(漢) 낙랑군의 옛 땅이다.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
이후 편찬된 중국 정사(正史)는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제37권 고구려지리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대(漢代)의 낙랑군으로 남쪽이 패수에 닿아 있다 했고, 또 수양제의 동방정벌조서에 거함(巨艦)들이 구름같이 날아 패강(浿江)을 가로질러 평양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패수는 대동강이고 평양성은 고려의 서경(西京)으로 보인다.
평양을 낙랑군의 옛 땅이라고 한 것은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 것이다. 한(漢)과 고조선의 경계는 패수인데 평양은 대동강의 북쪽 기슭에 있으니 대동강이 패수이면 왕험성은 한(漢)나라에 속하게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사기(史記)를 보면 왕험성은 패수(浿水)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까닭에 조선왕조에서는 고조선의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로 보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 평양부(平壤府)
평양은 왕험성으로 단군(檀君)조선, 기자(箕子)조선, 위만(衛滿)조선의 도읍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대동강은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다.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한서지리지의 주석으로는 浿水, 帶水, 列水가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대동강 북안에 위치한 평양을 왕험성으로 정하고 보니 대동강은 패수가 될 수 없었다. 사기에 浿水가 漢 나라와 조선의 경계라 했으니 패수는 사마천 생시의 요동과 왕험성 사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요동과 평양 사이에는 압록강과 청천강있고 사학계도 압록강설과 청천강설로 갈라졌다. 양쪽 다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을 같은 지역으로 본 것이다.
청천강이 과연 사기에 기록된 패수일까? 사기에 의하면 漢무제가 조선을 침공할 때 요동에서 출발한 한나라 육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열구에서 수군과 합류한 뒤 왕험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초전에 패수 서쪽에서 조선군에게 참패하고 수 개월 동안 진격이 저지되었다.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패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의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와 서쪽으로 흐르는 패수가 동일한 강일 수는 없다. 따라서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은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는 청천강이 패수라는 허구에 기반하여 천년의 역사를 날조했다.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이고 녹색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다. 동부 구간이 장가구에서 요동을 지나 청천강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두 개의 연장성(燕長城)
위의 지형도에서 연장성 A는 현존하는 장성이고 연장성 B는 지도 위의 그림일 뿐 실체가 없다. 사기는 만리장성이 음산산맥(陰山山脈)의 험준한 산과 골짜기를 따라 요동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문맥상 요동에서도 장성이 산악지대에 건설되었다는 뜻이다. 西에서 東으로 달리는 음산산맥은 장가구를 거쳐서 북경 북쪽을 지나 발해 연안 산해관까지 이어진다. 현대의 지리학에서는 조백하(潮白河)의 발원지를 경계로 서쪽을 음산산맥, 동쪽을 연산산맥(燕山山脈)으로 구분하지만 고대에는 전체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고 음산이라 칭했다.
연장성 A의 지형
연장성 A가 자리하고 있는 연산산맥은 대부분 해발고도 1,500 m를 넘고 흥륭현(興隆縣) 북쪽에 있는 주봉 무령산(霧靈山)의 해발고도는 2,116 m이다. 아래의 위성사진에서 짙은 녹색은 수목이 울창한 산악지대이다. 음산산맥에 녹색이 없는 이유는 수목이 자라지 않는 건조지대이기 때문이다.
燕장성 B는 대부분 광활한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의 요동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평원이다. 사기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지형과 판이하다.
구요동과 신요동 - 이광헌 설
A : BC 108년 이전의 요동
B : BC 108년 이후의 요동
위의 지도에서 A가 고조선 시대의 요동이고 B가 고조선 멸망 후의 요동이다. 오늘날 요하의 동쪽 지역을 요동, 요하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고 부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하의 중심지인 낙양(洛陽)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즉 Far East를 요동이라 칭했다. 요동(遼東)은 원동(遠東)과 같은 뜻이다. 중국에서 원래 A를 요동이라 부르다가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후 요하 유역 B를 요동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를 몰아내고 B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주류학계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혔다. 따라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과 장성의 위치는 요동 A이고 만리장성의 종착지도 요동 A이다. 진시황의 영토는 아래와 같다.
진시황 사후 봉기한 진승의 부하 한광(韓廣)이 BC 209년에 연경을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에 올랐다. BC 207년 12월에 진(秦)나라를 멸한 항우는 다음해 2월 18개 제후국을 분봉하면서 연(燕)을 분할하여 요동국을 신설하고 무종(无終)을 도읍으로 정했다. 연의 도읍 계(薊)를 통상 연경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연경과 무종(无終) 사이를 흐르는 조백하(潮白河)가 연과 요동국의 경계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사기 항우본기]
燕將臧荼被封為燕王,而韓廣則被徙封為遼東王,以无終為都。韓廣對此不服,不肯遷往遼東,同年被臧荼擊敗及殺害,燕及遼東兩地皆為臧荼所有。
(항우는 자신을 수행하여 관중까지 종군했던 연나라 장수) 장도(臧荼)를 연왕에 봉하고서 한광을 요동왕에 봉하고 무종(无終)을 도읍으로 삼아 옮기라고 명했다. 한광은 이에 불복하고 요동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하다가 그 해에 장도의 공격으로 패하여 살해되었고 연과 요동 양쪽 땅은 모두 장도가 차지했다.
만리장성의 조백하 동쪽 구간은 요동국 북쪽을 가로지르는 연산산맥에 건설되어 사기에 묘사된 지형과 일치한다. 여기가 만리장성의 종착지라고 사기에 기록된 요동이다. 만리장성은 秦, 趙, 燕 삼국의 장성을 기반으로 해서 건설되었으므로 燕長城은 장가구에서 진황도까지 현존하는 만리장성과 동일한 경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연장성(燕長城)의 종착지 양평은 지금의 진황도다.
진개가 조선을 침공할 당시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구간이었다. 연나라는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 이천리를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만번한은 어디인가? 삼국지 왜인전을 보면 천 리는 대략 80 km에 해당한다. 연나라의 동쪽 관문은 진황도(秦皇島) 앞에 있는 산해관이다.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160 km 전진하면 대릉하(大凌河) 못미친 곳에 소릉하(小凌河)가 동남쪽으로 흘러 금주시(錦州市)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필자는 이곳을 만번한으로 본다.
BC 295년 燕의 조선침공 직전 형세 - 이광헌 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사기 조선열전]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패수는 산해관과 만번한 사이에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소릉하의 하류가 만번한이다. 산해관과 소릉하 사이에는 북에서 남으로 또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 10개도 넘는다. 산해관에서 멀어지는 순서로 나열하면 Jiujiang, Shihe(石河), Qiangliuhe, Gouhe, Maoyanhe, Changtan, Dongsha, Xingcheng, 육고하(六股河), Yantal, Lian 등 11개 다음에 소릉하(小凌河)가 있다.
그 중에 백랑산(白狼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육고하(六股河)가 가장 커서 漢과 조선이 국경으로 삼을만 하다. 위만 일행이 토벌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국경인 패수를 건너간 것으로 보아 패수는 산해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육고하(六股河)를 패수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BC 195년 위만 망명시 형세 - 이광헌 설
단재 신채호는 패수로 태자하를, 왕험성으로 해성(海城)을 지목했고, 비교적 근자에 이덕일이 란하와 창려현을 지목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필자는 세 가지 학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하고 육고하(六股河)와 북진(北鎭)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패수와 왕험성의 위치 비정
이마니시 류(今西龍) : 청천강, 평양
신채호 : 태자하, 해성
이덕일 : 란하, 창려
이광헌 : 육고하,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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